사도행전 4 : 13 - 22절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굉장히 큰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 성전이 46년째 건축을 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도 완공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규모 면에 보면 굉장했다고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문도 하나 둘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문이 있었는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있던 문은 “미문”이라고 불리는 문이었습니다. ‘아름다울 미’를 써서 ‘아름다운 문’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Beautiful Gate라고 표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불러졌던 문인데 그 문에서 구걸을 하고 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걷고 뛸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었기 때문에 평생 한 번도 걸어보거나 뛰어 본 일이 없었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치료를 받고 나서 바로 걷고 뛰었다는 것은 사실 의학적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그 사람의 나이가 몇 살이라고 되어 있냐면 40세가 넘은 나이었다고 합니다. 22절 말씀에 보면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 세나 되었더라” 40세가 넘은 사람이 한 번도 걸어보지도 못했는데 한순간에 걷고 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이고 누가의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의사의 관점에서 그 나이까지 밝혀 두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얼마나 위대하신 일이고 큰일이었는지를 이런 표현들을 통해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예루살렘 안에서 일어났으니 온 예루살렘이 발칵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관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놓고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더 황당했던 것은 베드로나 요한은 어부였기 때문에 학문하고는 담을 쌓고 지냈던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설교를 하니까 남자만 오천 명이나 믿기로 결단을 하는 역사까지 일어났던 것입니다.
두 사람을 감옥에 가두자니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일어났던 모든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나두자니 자신들이 죽인 예수님이 칭송받고, 영광 받을 것이 너무도 분명하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수가 뭐냐면 17, 18절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이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협박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아주 당차게 말을 합니다. 19, 20절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어부 생활이나 하던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을 위협하고 있던 사람들을 압도하면서 그곳의 분위기를 장악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 줬던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내용은 간단한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너희 말을 듣겠느냐? 우리 앞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앞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우리에게 들려주신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선언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처럼 평범했던 베드로가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고, 가둘 수도 있고, 예수님을 죽였던 것처럼 죽일 수도 있었던 사람들 앞에서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지금 자신 앞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겠느냐?”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이 바로 앞에 계시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이런 엄청난 말들을 쏟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열등감을 벗어 버리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고 능히 이기는 인생이 될 수 있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앞에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살게 되면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고 큰 착각에 빠져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착각하면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폭탄이 아파트에 떨어져서 아파트가 무너졌습니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전하게 구조 되었습니다. 추가 인명피해를 살피던 구급대원은 할아버지 한 분이 행방불명 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구조반을 투입 해 무너진 아파트 더미를 살피는데 한 쪽 구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리가 나는 쪽을 파니 무너진 화장실에 할아버지가 갇혀있었습니다. 다행히 많이 다치지는 않았고 정신이 나간 듯 웃기만 했습니다. 구조대원은 할아버지가 놀라서 실성 한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구조대원 한 사람이 정신 나간 듯 웃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왜 그렇게 웃으세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글쎄 내가 변기통 줄을 잡아당기니까 집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잖아! 그러니 내가 웃을 수밖에!” 폭탄이 떨어진 줄 모르고 착각을 해서 그곳에서 웃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보고 있는 출애굽기를 통해서도 보면 우리는 우리가 잘 나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데 어쩔 때는 연약한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해 줄게. 나의 능력으로 내가 너희의 하나님임을 보여 줄게.” 이런 은혜를 얼마나 많이 허락해 주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리고 있는 은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의 능력과 실력 때문인 것처럼 착각을 하면서 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세상의 말, 사람의 말, 드라마의 말, 세상으로부터 오는 감언이설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문인이었던 윤선도의 글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옛날에 ‘쾌산’이라고 평안남도 영원군에 있던 산인데 그 산에 거주하던 농부가 밭을 갈다가 피곤해서 쟁기를 놓고 잠시 언덕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때 호랑이가 나타나 농부를 잡아먹으려 하였는데 이를 본 농부의 소가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힘껏 싸워서 마침내 호랑이를 쫓아 버렸습니다. 호랑이는 달아났고 밭은 짓밟혀 엉망이 되어 버렸는데 농부가 잠에서 깨어 일어나 보니 호랑이는 없어진 상황이고 밭은 엉망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을 알 수 없었던 농부는 소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소를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쾌산의 억울한 소라는 의미로 “쾌산원우”라는 사자성어가 여기서 생긴 것입니다.
우리 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말, 사람의 말을 더 듣고 따르게 되면 하나님은 원통할 수밖에 없고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이를 갈며 후회를 해도 아무 소용없는 억울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아야지 이런 중요한 진리를 자주 망각하면서 살기 때문에 착각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말에 더 귀를 기우리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성품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주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고 말씀해 주신 것! 그것을 증언하라고 주신 은혜이기 때문에 베드로처럼 있는 그대로를 증언하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 체험한 것,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것들을 그대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법원에 가면 증인이 증언을 하게 되는데 증인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보고 들은 것을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본 것과 들은 것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억울한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민법에 보면 자신을 위해 재판에 와서 사실 그대로를 말한 증인에게 감사의 뜻으로 과도한 사례를 하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증언도 재판상에 효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정도로 증인의 객관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전에 신문을 보니까 64년 전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조봉암이라는 사람이 간첩 누명을 쓰고 사형 언도까지 받게 되었는데 2011년에 있었던 재심에서 그 모든 것이 잘못된 판결이었고 무죄라는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그 당시 불법 수사와 증인의 증언만을 가지고 판단을 했는데 그 증언들이 거짓이었던 것입니다. 증인이라면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억울하게 52년 동안 사형 선고까지 받으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말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 우리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일들을 사실 그대로 말하면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때문에 하나님을 억울하게 만드는 것이 될 수 있고, 결국은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뭐 대단한 것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거짓으로, 상상해서 말하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그대로를 전하면 되는 것인데 문제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도록 세상이 우리를 강하게 위협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런 위협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냐면 지금 자신들 앞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위협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힌 마디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도전을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계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너희 말을 들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계시지 않는다면 딴 마음도 품고, 딴 생각도 품을 수 있겠지만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 계시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위협이 두렵지 않고 능히 이길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그렇고 예배를 드릴 때도 그렇고 호흡하며 살아가는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도 만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바로 내 앞에 계신다고 믿었을 때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이 믿음이 굳게 서지 않으면 세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앞에 계셨던 하나님께서 오늘은 우리 앞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그 믿음 가지고 2024년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가 그 길 끝에서 반드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