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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선집 43권 4편
신앙자의 자세 (훈독본) 9700
1971.04.25 (일),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말 씀
슬픈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
여러분은 생활하는 주변에서 기쁜 일을 보는 것보다도 너무나 많은 슬픈 사실들을 보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슬픈 환경을 박차고 나서지 않고는 우리가 소망하는 기쁨의 세계, 기쁨의 천국은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의 세계와 기쁨의 천국까지 가려고 할 때에 내 자체의 힘 가지고 갈 수 있겠느냐? 슬픈 자리도 벗어날 수 없는 내 자체의 힘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있어서 신앙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슬픔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 느낌에 비례하여 당하는 슬픔을 타개하고 제거시키고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힘의 모체가 필요합니다. 슬픔의 경지에 둘러 싸여 있는 우리 자신이 그 슬픔을 타파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자신임을 알게 될 때에,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중심자, 즉 어떤 실체를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신앙하는 사람은, 슬픈 자리에 동조하여 끌려갈 것이 아니라, 슬픈 자리가 되지 않게 방비하고 슬픈 요인을 제거시키고 밀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신앙자의 자세를 두고 볼 때에 내 개인적인 입장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세계적, 천주적 차원으로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방대한 천주적 노정을 거쳐가야 할 것이 오늘날의 인간이요, 인생에 있어서 필시 가야 할 행로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운명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홀로 계획하고 자신이 홀로 간다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는 그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신앙의 중심이 되는 그분의 뜻을 갖고, 즉 내 뜻을 버리고 그분의 뜻을 중심삼고, 내 목적을 버리고 그분의 목적을 중심삼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슬픔의 목적과 슬픈 자아의 입장을 버리고 기뻐할 수 있는 목적과 기뻐할 수 있는 자아로 어떻게 복귀해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이 슬픔권을 타파할 수 있는 소망이라든가 결심이라든가, 혹은 자각된 결의를 내가 어떻게 갖느냐 하는 문제, 내가 여기에서 살고는 있지만 여기에서 사는 내가 아니라, 이 사망의 세계를 초월해 가지고 피안의 어떤 선권내에 있다고 자처할 수 있는 자신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문제가, 현재의 슬픈 환경을 불식시키고 선권을 점령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자를 중심삼은 내가 되어야
제아무리 스스로 결심을 했더라도 그 결심을 홀로 이뤄 나갈 수 있느냐 할 때에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타락의 사망권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홀로는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이요, 홀로는 갈 수 없는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으로 말미암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자로 말미암아, 절대적인 신앙으로 말미암아, 절대적인 신앙노정을 통하여서만이 시작이 가능하다는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내 개인의 슬픔은 나만의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세계에 슬픔을 가중시키고 하늘세계, 혹은 하나님의 심정세계에 슬픔을 더욱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이 나로 말미암아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그런 경지에 서게 되거나, 혹은 신앙길에 있어서 탄식하고 후회하며 좌절하는 자리에 섰다 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그런 자리에 서신 것이요, 하늘 세계가 그런 자리에 선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선한 후손들이 가야 할 선의 터전은 물론이요, 지금까지 역사상에 왔다 갔던 선조들이 선을 중심삼고 싸워 이룬, 수고의 대가를 치러 이룬 역사적인 선의 터전이 있으면 그것 자체가 나로 말미암아 탄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선악을 결정지어야 할 개인
내가 하는 한마디의 말이 선을 결정하느냐, 악을 결정하느냐, 혹은 하나의 행동이 선을 결정하느냐, 악을 결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벌어집니다. 그것은 방대한 우주, 방대한 세계, 방대한 역사와 더불어 관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신앙자의 입장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우리가 신앙자로서 가는 길에 있어서는 한마디의 말도 함부로 할 수 없고, 하나의 행동도 함부로 할 수 없으며 한 가지의 생각도 함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한 자체는 지극히 작은 자로되, 여러분 한 자체를 중심삼아 가지고 이 우주가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악의 세계가 대결하고 있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 말 한마디가 평상시에는 아무런 내용을 갖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 또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표정이지만 그 표정을 보는 사람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의 한마디 말과 하나의 표정은 역사성을 띤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말 한마디가 그런 기원이 되고 엄청난 악의 출발의 조성점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의 표정 하나가 사망세계를 결정할 수 있게 하고, 사탄의 완전한 무대가 출발할 수 있는 하나의 표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표정이 선의 길을 대신하고 하늘땅을 대신할 수 있다는 거예요.
먼저 하나님이 수고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생활을 하면서 맹세해야 할 것은 오른편이 하나님편이라면 하나님을 찾아 오른편으로 가야 되겠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향을 돌리면 여러분이 모르는 사이에 언제나 힘이 소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소모되는 힘을 어디에서 보급할 것이냐? 먼저 나 자신이 보급해 줘야 합니다. 나 자신이 보급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에는 현상유지는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힘을 보강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십년 동안 뜻길을 그렇게 갔다 할 때에 그것은 자기의 공로로 말미암아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수고하신 공적의 터전으로 말미암아, 수고의 실적을 통해서 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까지 뜻 앞에 남아졌고, 오늘도 뜻 앞에 있어서 내일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에, '역사과정에서 내가 하나님에게 너무나 많은 짐을 지웠고 빚을 졌구나'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앙길에서는 가면 갈수록 머리를 들어 자기를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변명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회개의 심도를 높여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머리 숙일 수 있는 겸손의 도를 높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 됩니다.
여러분의 신앙길을 존속해 가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자신이 모르는 가운데 밑바닥에서 선을 중심삼아 가지고 무한한 힘을 소모하는 수고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보상 밑에서 오늘날 여러분이 기쁨을 차지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혹은 선 앞에 섰다는 자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자각된 입장에 서야
오늘날 나 자신이 선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은, 나 자신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뻐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먼저 기뻐하신 후에 내가 기뻐해야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렇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 하나님을 따라가는 신앙자의 입장입니다. 내 개인을 중심삼고 볼 때도 마음과 몸에서는 하나님과 사탄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보태 주면 나는 하나님편으로 가는 것이요, 반대되게 될 때에는 사탄편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 계신다는 자각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어떤 외로움이 있고, 어떠한 어려운 수난길에 부딪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마음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기쁨을 맞으려면 최고의 자리에서 죽어야 됩니다.
우리가 신앙길을 가는 데에 있어서도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내적인 중심에 하나의 생명의 동기를 집약시켜야 됩니다. 만약 집약된 생명의 동기를 잃어버렸다면 그것을 찾는 데 있어서는 타의에 의해 피동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는 못 찾습니다. 주도적인 입장에서 이것만은 놓칠 수 없다는 심정을 가져야만 찾을 수 있습니다.
10년 신앙생활을 했으면, 그 10년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되기 위해 싸운 것이어야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떤 일을 대했을 때 커다란 기쁨을 느꼈으면 그 자극을 중심삼아 가지고 반드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날이 와야 됩니다. 그러한 생각이 언제나 끊임없이 여러분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신앙길에 있어서 슬픔에 사로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마음이 어느 한때에 풀어질 것이다' 하는 신념을 갖지 못한다면 신앙길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쁨을 주신 이유
여러분이 기뻐하는 그 기쁨은 창세 전 하나님의 심정으로부터 창세 이후, 그리고 복귀과정을 거쳐 가지고 복귀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시대적인 중심을 결정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중심뿐만 아니라 미래의 출발의 기원을 세우기 위한 기쁨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을 가졌다는 것은 역사를 대신한 것이요, 시대를 대신한 것이요, 미래를 대신한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타락한 이 악의 세계, 슬픔의 바탕이 되어 있는 이 세계에서 그 어떤 기쁨을 느껴 가지고 세상의 환경을 규합하여 그 기쁨 이상의 자리까지 나아가 거할 수 있는 한때를 가졌다면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겠느냐 이겁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더불어 가면서 주신 기쁨을 자기 것으로 알면 안 됩니다. 그것이 자기 것이예요? 자기 것으로 아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에게 준 것은 역사를 대신해서 준 것이요, 나를 그런 자리에 세운 것은 미래의 출발을 공고화시켜 달라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신앙자가 지녀야 할 올바른 자세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의 태도는 언제나 빚진 자의 자세여야 됩니다. 자신에게 어떤 기쁜 것이나 이익이 찾아오면 빚을 갚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은 빚진 자의 자세를 망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복귀의 행각노정에 있어서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중대한 문제를 맞게 될 때에는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초조함 속에서 복귀의 어려움을 알고, 또 이것을 해결짓기 위해서 밤을 새워 가며 몸부림쳐야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한 고비 한 고비 밟고 가는 길이 복귀의 길이 아니겠느냐? 한마디의 말, 한 가지의 행동을 잘못하면 자기 혼자만 걸려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땅이 걸려들어갑니다. 지금까지 잘 쌓아 놓은 공든 탑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한번 결정했다면 일생을 두고 해보십시오. 여기 칠판이 암만 새거라도 한번 금을 딱 그어 놓으면 지우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을 지우기 위해 일생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신앙길에서는 그런 것을 느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됩니다.
동정을 남기는 신앙생활
신앙길에 있어서 한번 잘못하는 날에는 그것을 바로잡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신앙자로서 생각할 수 없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을 했으면, 죄를 지었으면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나는 그런 기도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서기 부끄럽다고, 아버지 앞에 서기에 부끄럽다고, 자기 자세를 갖추고 또 갖추는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이런 자식이라도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될 아버지의 사정을 생각하고, 세상이 악하니만큼 이런 나를 필요로 하시는 아버지의 사연이 있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동정의 마음을 유발시켜 가지고 아버지를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버지라는 말만 하게 되어도 눈물이 앞서는 것입니다. 그래야 회개를 해도 그 회개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회개가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길에 있어서 빚진 자와 같이 처신해야 됩니다. 부끄러움을 가지고 부끄러운 자의 참다운 친구가 되어 주고 부끄러워하는 자를 감싸 줄 수 있고 보호해 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그런 입장에 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 서 보아야 예수님의 고마움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선생님이 고마운 분이란 것도 알고, 하나님이 얼마나 고마운 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빚진 자의 자세로 생활해야
여러분은 빚진 자의 자세로 생활해야 합니다. 즉, 자기가 잘못했다는 입장에서 언제나 빚진 사람으로서 자기 스스로를 다짐할 수 있는 그런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우리 앞에 사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침묵이 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할 수 있는 마음 자세
여러분을 동정해 주고 입증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거든, 동역자가 있거든, 혹은 어떤 스승이 있거든, 자기를 위해 수고해 준 그 뜻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몸 전체나 위신, 체면을 다 잊어버리고 그 앞에 완전히 종의 종이 되어도 좋고, 그 앞에 있어서 죽음을 당하여도 감사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완전히 감사하는 자리에서 그 은사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나는 악의 사슬을 벗어나는 데에 내 생명을 바치더라도 고맙다'고 해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데서부터 본연의 신앙자로서의 자세를 갖추어 출발하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번 죽더라도 감사하고, 자기 존재가 없어지더라도 감사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런 각오를 가지고 출발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한날의 생활, 혹은 하나의 표정, 하나의 행동에 있어서 그것을 가릴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갖고 가는 사람들은 망하겠다고 해도 하나님이 부활 할 수 있는 축복의 터전을 만들어 주십니다.
이런 것을 알게 될 때에, '나' 하나를 중심삼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타락으로 인한 복귀의 한을 품으시고 뒤넘이친 것만도 원통하실 텐데도 불구하고, '나' 같은 사람에 대해 이렇게 죽음의 길을 가려 주시는 그 은혜를 생각하면 황공 망극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자신의 심정의 거점에 있는 그 사람과 그 은덕을 하늘땅 앞에 돌려드리고 가뿐한 걸음으로 가겠다고 해야 됩니다. 이런 마음이 여러분 신앙생활의 바탕이 되게 될 때, 그것이 정상적인 신앙의 길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인이 해야 할 심정생활
심정적으로 빚지지 말아야 됩니다. 그런 신앙자의 자세는 망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언제나 보호하는 겁니다. 언제나 동정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 가든지 하나님이 동정하고 같이 느낄 수 있고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가면 비록 악한 세계에 있더라도 악한 세계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슬픈 세계에 있더라도 슬픈 사람이 아닙니다. 또 여러분이 어디 가든지, 혼자 있더라도 묵묵히 혼자 있는 그 마음 세계에서는 하나님과 접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는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이루어진 생활을 할 수 있는 세계와 연결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천국생활을 할 것이 아니냐?
가인을 굴복시키는 방법
타락은 부모가 했습니다. 그러면 참부모가 이 땅에 와서 잃어버린 부모의 자리를 복귀해야 됩니다.
타락은 부모가 했지만 아들(가인과 아벨)이 그 결과를 결정지었습니다. 타락은 부모가 중심이 되었지만 그 결과적인 존재로는 아들딸이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도상에 있어서 아벨이 나와야 됩니다. 그리하여 아벨이 역사를 통해서 부모를 찾아 나가야 됩니다.
이 세계는 화합된 세계입니다. 우주는 상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간섭도 상응적인 간섭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끌려올 수 있는 간섭을 해야 하는 겁니다. 내가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그 사람을 위해 주어야 됩니다. 그 위해 주는 것이 간섭할 수 있고 점령할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위해 주는 것은 뭐냐 하면 완전한 간섭입니다.
사탄은 뭐냐? 악이라는 것은 자꾸 높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악입니다. 그러니 높여 주라는 거예요. 하나님 이상 높여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을 하나님 이상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가인을 하나님 이상 높여 주면 가인이 그 이상 올라갈 데가 없습니다. 없으니까 내려와야 됩니다. 하나님 이상 높여 놓고 내려갈 때에는 혼자 내려가라고 해야 합니다. 내려오긴 내려와야 할 텐데, 내려올 길이 없는 겁니다. 안 내려오면 옥살박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구. 나 살려줘요' 하는 거예요. 그때서야 비로소 '아이구 내가 뒤를 따라갈 걸' 하는 거예요. '제발 살려줘요' 하는 것은 완전굴복하는 것입니다. 사탄을 잡는 방법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인을 복귀하려면 세 아들딸을 사랑하는 이상의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세계의 아들인 가인을 자기 앞에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자기 아들의 3배 이상 사랑하지 않고는 복귀가 안 됩니다.
부모를 바로 알아야 자식의 도리를 할 수 있어
여러분이 원리를 알았다는 것은, 그것은 결과적인 것입니다. 6천년 역사가 개인복귀완성하는 역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안 동시에 실천적인 실체가 결정됐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 전부와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그 가르쳐 준 모든 것을 절대시하고, 그것과 더불어 살고 그것과 더불어 죽으면 그것과 더불어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선생님에 대해서 더 연구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준 것은 탕감원리입니다. 이제부터는 복귀원리를 가르쳐 줘야 됩니다. 여러분은 이 복귀원리를 모릅니다. 복귀를 하려면 선생님이 있어야 됩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탕감해 왔습니다. 이제 선생님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까지 선생님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 다음에 복귀가 다 끝난 후에는 창조이상의 생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복귀를 거친 후의 때가 영광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고생길로 내모는 이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지 못하면 복귀하지 못합니다.
여러분과 내 아들딸을 보게 될 때에, 선생님은 여러분을 내 자식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복귀의 길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아들딸을 내 아들딸보다 더 사랑하지 않고는 망하는 것입니다. 이게 공식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가야 할 십자가의 노정과 피의 노정입니다. 선생님이 나를 더 사랑하기 위해서 고생시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수 있게끔 하나의 조건과 기대를 조성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가혹한 길로 내모는 것을 강행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누가 알아주겠어요?
여러분이 불평하게 되어 있어요, 안 하게 되어 있어요? 「안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원칙이 거짓말이라 해도 인정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신앙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됩니다. '선생님이 우리 앞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 일대에 하고 싶었던 모든 내용이다. 또 하늘 앞에 억울한 모든 고비 고빗길을 뜻 앞에서 다 넘길 수 있도록 대신 조건을 세워주기 위해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마움을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빚진 자의 자세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
세계와 대한민국과 우리 통일교회가 딱 한 고빗길에 있습니다. 세계 정세와 아시아 정세와 한국 정세를 중심삼고 한 제단에서 제물을 쪼개는 때가 온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것에 대해서 최후의 결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고 자나깨나 통일교회 신앙자로서 취해 나가야 할 자세, 빚진 자의 자세를 갖춰 공의의 법도 앞에서 하나님의 동정의 마음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절실히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기 도
말씀선집 43권 4편, 원문
신앙자의 자세
1971.04.25 (일),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오늘은 이달 들어 마지막으로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을 맞는 통일의 자녀들을 특별히 사랑하시옵소서. 이들이 한 많은 복귀의 도상에 서서, 가야 할 운명길을 개척하는 싸움의 노정에 있어서 당신이 바라고 당신이 찾고 있는 자녀의 모습을 안팎으로 갖추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참다운 아들의 모습, 딸의 모습, 고귀하고 영광스런 가치를 지닌 자랑스런 모습을 아버지께서 얼마나 고대하고 계신가를 진심으로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들은 부자의 인연을 가지고 이 자리에 부복하였사오니 기쁘게 받으시옵소서. 아버지는 먼 곳에 있고, 관계 없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가까운 자리에 있고, 뗄래야 뗄 수 없는 자리에 있사옵고, 그런 부자의 정이 남아 있사오니, 이 시간 저희들이 아버지를 모시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흘러가는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희 일생의 노정이 무의미한 결과를 가져와서는 안 되겠습니다. 흐르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에, 이 노정은 계속적인 싸움의 노정이요, 생명의 뒷받침이 없으면 전진할 수 없는 노정임을 알게 되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이러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 저희 각자가 되지 못하여 당신의 보급이 없으면 안 되겠고 힘의 원천이신 당신에게 접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저희가 이 자리에 모였사오니, 아버님이여, 돌보아 주시옵소서.
저희가 어느때에 어떤 수난에 부딪칠지 알 수 없는 매일매일의 생활노정을 걷고 있사오니 아버지께서 지켜 주셔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흘러가는 역사 가운데 있어서 스스로의 갈 길을 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아버지 앞에 효의 도리와 충의 도리를 하는 데 있어서 가중된 책임도 짊어져야 된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상이 나를 끌고 가려 하고 있지만, 내 마음을 따라 거하시는 아버님이 나를 이끌고 있사옵니다. 그 사이에 끼여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해 볼 때에 아버지 앞에 한걸음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루하루의 생활을 다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모습임을 알게 되옵니다. 그러한 모습이 되기 위해 다짐할 수 있는 이런 자리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통일제단에 찾아와 지금까지 나온 걸음은 자기 스스로의 승리를 다짐하는 그런 걸음이 아니라, 개인을 넘어 가정을 구하여야 할 책임이 있고 가정을 넘어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까지 구하여야 할 엄청난 사명을 짊어지고 나온 걸음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탕감의 고빗길을 자기 스스로를 중심삼고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될 운명길을 가고 있사오니, 이들 앞에 당신의 무한한 사랑의 은사가 가일층 가해져야 되겠사옵니다.
이들이 외로울 때 당신이 위로하여 주시옵고, 슬플 때 당신이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부디 이들의 마음 몸을 당신 뜻 앞에 온전히 일치하게 하시옵고, 이들을 당신의 소망 앞에 없어서는 안 될, 당신의 뜻과 당신의 사명을 맡아 가지고 원수의 세계, 적진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하늘의 용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들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는 그 누구를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옵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태어났고, 세상의 악을 제거하기 위한 사명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을 절감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앞에 플러스되는 생활노정을 자기 일생의 행로에 얼마나 남길 것이냐, 자기가 가고 있는 행로에 있어서 얼마나 그 가치를 발견할 것이냐가 문제이옵고, 많이 남기고 많이 발견하기를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인류가 바라왔고, 역사가 바라왔으며, 섭리 전체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오늘 이 순간은 나 자신을 위한 순간이 아니옵니다. 오늘 이 생활이 자기를 중심삼은 생활이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역사의 운세를 통일시켜야 할 하나의 푯대가 되고, 하나의 선악의 분기점이 되어야 할 자신임을 확실히 깨달아야 되겠사옵니다. 하오니 아버님, 이 자리에 친히 찾아오시어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그 무엇은 없다고 권고하여 주시고, 저희들이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였을진대는, 아버지여, 이 시간에 당신의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퍼부으시옵소서.
저희들은 내일의 소망 앞에, 아버님 앞에 슬픔을 남기는 불쌍한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소망의 뜻 앞에 강하고 담대해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원수나 적들이 저희의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하늘의 일념과 더불어 전진을 그칠 수 없다는 자세로 아버지를 모시고 전진 또 전진하여, 승리의 결과를 갖고 아버지 앞에 개선가를 올려 드리어, 아버지로부터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가야 할 길을 지켜 주시옵소서. 당신께서는 이 나라 이 민족 앞에 사명을 부여하시기 위하여 수고하신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그 수고의 걸음이 헛되어서는 안 될 것을 또한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이 나라를 지켜 주셔야 되겠습니다. 이 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내일 모레 귀중한 하나의 책임을 결정하게 되어 있사오니, 이 나라를 뜻에 일치시킬 수 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세우시어, 아버지 앞에 순종하고 아버지를 모시는, 영광의 자리에서 당신으로부터 신임받는 자녀들을 세우시어 이 나라를 주도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금후에 있어서 아시아가 가야 할 입장이 어려운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당신이 이 나라를 친히 주도하여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저희들이 이 나라를 염려하고, 저희들이 일치단결하여 이 민족이 가야 할 길을 단호히 붙안고 아버지 뜻 앞에 일치될 수 있게끔 길을 닦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들은 바쁜 자리에 섰다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은 싸워서 이겨야 할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가를 느끼게 되옵니다. 저희들은 정의를 위하여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잘 알고 있사오니, 정의의 중심 되시는 아버지의 발걸음을 따라가고, 선의 목표를 향하여 굴하지 않는 아버지의 절개를 본받아 끝까지 싸워 나가고, 목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이곳을 향하여 마음을 모으고 아버지의 뜻 앞에 축수하는 수많은 자녀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옵소서. 그들의 갈 바를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들이 머물러야 할 자리도, 그들이 갖추어야 할 자리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니, 알고 움직이는 전체 위에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옵고, 사랑의 인연이 근거가 되게 하시옵소서. 당신이 친히 그 터전을 상관하셔서 그 곳이 승리의 발판으로 이 지구성에 뻗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출발점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아버지의 뜻을 위해 싸우는 마당 마당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옵소서. 더욱이 연약한 아낙네들이 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선두에 서서,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입장에 서서 하늘을 부여안고 눈물짓고 있사오니, 안팎으로 에워싸인 모든 환경에 부딪쳐 서러움을 느끼거든, 아버지, 천배 만배 위안하여 주시옵시고, 승리의 한 길을 개척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노정이 아버지의 뜻 앞에 필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노정인 것을 알고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에 있어서 하늘 뜻 앞에 부끄러웠던 한의 역사, 눈물의 역사를 밟고 넘어 갈 수 있는 귀중한 이번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하루가 당신 앞에 자랑스런 하루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모이는 곳곳마다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금후에 되어지는 모든 것을 당신 앞에 의탁하옵고, 오늘 이 시간을 친히 주관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인간들은 잃어버린 소망의 세계를 다시 찾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류 시조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여 타락한 그날부터 인류는 슬픔의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슬픔이 여러분이 사는 데 있어서 느끼고 있는 이 정도의 슬픔일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그 이상의 슬픔일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 빠져 슬픔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이 그 절망을 박차고 나오면 새로운 소망의 기운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슬픔의 경지에서 소망의 경지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우리 인간인 것을 생각할 때, 그 슬픔이라는 것이 자기 개체에게만 해당되는 슬픔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슬픔은 나를 넘어서 사랑하는 아내면 아내, 자녀면 자녀, 즉 가정을 중심삼고 관계되어 있고, 또 자기의 친척, 혹은 민족, 국가, 세계가 관계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지금까지의 전역사도 이 슬픔 가운데서 이어져 내려온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슬픔은 내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슬픔의 뿌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온 역사 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내가 당하는 슬픔은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인 내용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슬픈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
그러면 이 슬픔의 근원은 어디냐? 즉, 슬픔의 뿌리가 무엇이냐? 이 슬픔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연결되는 것이요, 이 슬픔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자포자기의 자리, 혹은 패배의 서러운 자리, 뿐만 아니라 사망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활하는 주변에서 기쁜 일을 보는 것보다도 너무나 많은 슬픈 사실들을 보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슬픈 환경을 박차고 나서지 않고는 우리가 소망하는 기쁨의 세계, 기쁨의 천국은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의 세계와 기쁨의 천국까지 가려고 할 때에 내 자체의 힘 가지고 갈 수 있겠느냐? 슬픈 자리도 벗어날 수 없는 내 자체의 힘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있어서 신앙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슬픔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 느낌에 비례하여 당하는 슬픔을 타개하고 제거시키고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힘의 모체가 필요합니다. 슬픔의 경지에 둘러 싸여 있는 우리 자신이 그 슬픔을 타파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자신임을 알게 될 때에,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중심자, 즉 어떤 실체를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현재의 입장을 극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요건을 찾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신앙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앙하는 사람은, 슬픈 자리에 동조하여 끌려갈 것이 아니라, 슬픈 자리가 되지 않게 방비하고 슬픈 요인을 제거시키고 밀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생활환경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라야 신앙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자의 자세를 두고 볼 때에 내 개인적인 입장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세계적 차원으로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용어로 말하면 천주적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천주적이라는 명사를 지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대한 천주적 노정을 거쳐가야 할 것이 오늘날의 인간이요, 인생에 있어서 필시 가야 할 행로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운명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홀로 계획하고 자신이 홀로 간다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는 그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신앙의 중심이 되는 그분의 뜻을 갖고, 즉 내 뜻을 버리고 그분의 뜻을 중심삼고, 내 목적을 버리고 그분의 목적을 중심삼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슬픔의 목적과 슬픈 자아의 입장을 버리고 기뻐할 수 있는 목적과 기뻐할 수 있는 자아로 어떻게 복귀해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결심을 했다 하더라도 그 결심이 일년을 못 가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한 해의 시작인 정월 초하룻날에 일년의 계획을 세워 결심하고 나선 그 행로가 몇 개월도 못 가서 바뀌는 것을 우리들은 주위에서 많이 보아 왔고, 또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내가 선에 대한 결심을 품었다 하더라도 타락권, 사망권에 포함된 나 자신으로서는 그 결심도 슬픔의 권내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이 슬픔권을 타파할 수 있는 소망이라든가 결심이라든가, 혹은 자각된 결의를 내가 어떻게 갖느냐 하는 문제, 내가 여기에서 살고는 있지만 여기에서 사는 내가 아니라, 이 사망의 세계를 초월해 가지고 피안의 어떤 선권내에 있다고 자처할 수 있는 자신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문제가, 현재의 슬픈 환경을 불식시키고 선권을 점령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절대자를 중심삼은 내가 되어야
그런 자리를 이미 결정했다 하더라도, 그런 자리를 이미 자각하여 가지고 결심했다 하더라도 그 결심은 한때에 불과하지 영속적이지 못합니다. 일년, 혹은 십년, 혹은 일생 동안 그렇게 나아갈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우리가 지극히 희망하는 문제임을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잘 느끼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스스로 결심을 했더라도 그 결심을 홀로 이뤄 나갈 수 있느냐 할 때에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타락의 사망권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홀로는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이요, 홀로는 갈 수 없는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쳐서 위로 올라가더라도 되돌아 내려오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 슬픔권을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이요, 그 한계권을 초월할 수 없는 내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 노력 자체가 자기로부터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자기에게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으로 말미암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자로 말미암아, 절대적인 신앙자로 말미암아, 절대적인 신앙노정을 통하여서만이 시작이 가능하다는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 신념을 갖고 나서는 나 자신이 그 길을 가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여기에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사탄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생활권내에는 선과 악이 뒤넘이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선악이 뒤넘이치는 가운데서 악한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슬픔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요, 선한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기쁨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탄편에 처하게 될 때에는 여기에 슬픔이 가중되는 것이요, 하나님편에 처하게 될 때에는 기쁨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 신앙자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선을 위주로 하여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절대적인 행복을 제시하게 될 때에, 비로소 이 슬픔의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모색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선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출발하게 될 때에, 출발하는 입장에 선 자신의 과거와 오늘이 얼마만큼 차이가 있느냐 하는 그 비례에 따라 자신이 전진할 수 있느냐, 후퇴하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어제보다도 오늘이 더 발전될 수 있는 내용을 겸비하게 될 때에는 선한 자리로 한걸음 전진할 것이요, 어제보다도 하나님 앞으로 가일보 전진할 것이로되, 어제보다도 오늘이 침체되게 될 때에는 선 앞에 있어서 반대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선을 중심삼고 절대적으로 관계를 맺었다면 나로 말미암아 선한 세계에 있어서의 슬픔은 걷힐 것입니다. 나 자신의 슬픔이 선한 세계의 슬픔을 가해 줄 수 있고, 타락한 인간 한 개체의 슬픔이 하나님의 슬픔까지 가중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엄청난 자리에 선 것이 우리 인간이요, 그러기에 노력하며 가고 있는 것이 신앙노정이 아니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내 개인의 슬픔은 나만의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세계에 슬픔을 가중시키고 하늘세계, 혹은 하나님의 심정세계에 슬픔을 더욱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이 나로 말미암아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그런 경지에 서게 되거나, 혹은 신앙길에 있어서 탄식하고 후회하며 좌절하는 자리에 섰다 하게 될 때에, 그 자리에는 나만이 선 것이 아닙니다. 슬픔에 접해서는 안 될, 슬픈 자리에 서서는 안 될 신앙의 중심 되시는 하나님이 그런 자리에 서신 것이요, 하늘 세계가 그런 자리에 선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선한 후손들이 가야 할 선의 터전은 물론이요, 지금까지 역사상에 왔다 갔던 선조들이 선을 중심삼고 싸워 이룬, 수고의 대가를 치러 이룬 역사적인 선의 터전이 있으면 그것 자체가 나로 말미암아 탄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에, 만약 나 자신이 그런 자리에 섰다면 나에게서 선한 길은 그만큼 멀어질 것이요, 하나님도 그마만큼 멀어질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은 그 멀어지는 차이에 비례하여 자기의 무대를 공고화시킬 것이고, 그 공고한 토대 위에서 나를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반기를 들고 공격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싸움터에 서 있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선악을 결정지어야 할 개인
선을 옹호하고, 선편에 서서 선을 주장하고, 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동기가 되고 힘의 자극이 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하는 것이 신앙자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런데 선을 도리어 나쁜 의미로 자극시키고, 오히려 악이 선 앞에 대항하고 선을 희생시키는 입장에 서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내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좌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오늘 처해 있는 내 입장이 나만의 입장으로만 처해 있다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내가 하는 한마디의 말이 선을 결정하느냐, 악을 결정하느냐, 혹은 하나의 행동이 선을 결정하느냐, 악을 결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벌어집니다. 나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로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 즉 나에게 있어서 그것이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것이 되었느냐, 슬픔을 자극시킬 수 있는 것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 슬픔과 기쁨은 나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방대한 우주, 방대한 세계, 방대한 역사와 더불어 관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신앙자의 입장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우리가 신앙자로서 가는 길에 있어서는 한마디의 말도 함부로 할 수 없고, 하나의 행동도 함부로 할 수 없으며 한 가지의 생각도 함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말 한마디를 잘못하면 그 말로 인해 악이 자기를 시인할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선이 선으로서 주장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선이 아무리 주장해 봤자 그 주장하는 주장을 악 앞에 양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 한 자체는 지극히 작은 자로되, 여러분 한 자체를 중심삼아 가지고 이 우주가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악의 세계가 대결하고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 하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세계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엄청난 사실을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자기가 대하고 있는 사람, 즉 자기 자식이라든가, 혹은 자기의 친구를 일상 습관적인 자리에서 보게 될 때에는 그냥 그대로 옛날에 알던 그 사람일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여러분이 모르는 가운데 이 세계를 대표해 가지고 후대에 있어서 뜻을 이룰 수 있는 대표자로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한 그 사람을 옛날과 같이 습관적으로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대하는 여러분이 습관성을 가지고 악한 입장에서 그 사람의 마음에 타격을 주었다면, 그 타격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가는 길에 있어서 소망이 좌절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탄식의 자리에 떨어지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여러분 개체 개체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습관적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문제가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는 것이 됨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 말 한마디가 평상시에는 아무런 내용을 갖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 또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표정이지만 그 표정을 보는 사람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의 한마디 말과 하나의 표정은 역사성을 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기준의 자리에 섰다는 것을 여러분은 언제나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사람이 망하게 될 때에는 한꺼번에 망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때의 기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냥 지나갈 수 있는 한때의 기분이 망할 수 있는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말 한마디가 그런 기원이 되고 엄청난 악의 출발의 조성점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의 표정 하나가 사망세계를 결정할 수 있게 하고, 사탄의 완전한 무대가 출발할 수 있는 하나의 표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항시 생각해야 됩니다.
이와 같이 선악은 일생노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우왕좌왕하면서 한 발을 내딛게 될 때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 시작되는 것이요, 선한 생애노정도 한걸음을 가려 가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180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씩 한걸음씩 몇 걸음을 움직여 갈 때에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에 여러분 신앙자의 입장은 저울 눈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저울 눈을 맞추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눈금이 조금만 틀리게 되면 저울대가 반대로 왔다갔다합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선 것이 오늘날의 신앙자의 입장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표정이 선의 길을 대신하고 하늘땅을 대신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자리에 선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수고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생활을 하면서 맹세해야 할 것은 오른편이 하나님편이라면 하나님을 찾아 오른편으로 가야 되겠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른편 위로 올라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오른편으로 가고 위로 올라가는 것은 슬픈 입장에서 기쁜 입장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방향을 돌리면 여러분이 모르는 사이에 언제나 힘이 소모되는 것입니다. 이 힘을 뒷받침해 주지 않고는 현재의 입장을 견디거나, 혹은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힘의 소모가 가중되고 있습니다. 치열한 힘의 소모전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소모되는 힘을 어디에서 보급할 것이냐? 먼저 나 자신이 보급해 줘야 합니다. 나 자신이 보급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에는 현상유지는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힘을 보강해 주어야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힘을 보강받는다면 그것은 나 자신의 공로가 아닙니다. 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로입니다.
여러분이 십년 동안 뜻길을 그렇게 갔다 할 때에 그것은 자기의 공로로 말미암아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수고하신 공적의 터전으로 말미암아, 수고의 실적을 통해서 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까지 뜻 앞에 남아졌고, 오늘도 뜻 앞에 있어서 내일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에, '역사과정에서 내가 하나님에게 너무나 많은 짐을 지웠고 너무나 많은 빚을 졌구나'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앙길에서는 가면 갈수록 머리를 들어 자기를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변명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회개의 심도를 높여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머리 숙일 수 있는 겸손의 도를 높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니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오늘의 나는 과거를 돌아볼 때에 타락의 후예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현재를 볼 때에 자신이 선한 자리에 섰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과거의 선조의 공적은 물론이요, 하나님이 현재 내 생명의 터전을 남기기 위해 무수한 수난의 피의 대가를 치른 결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살고 있다고 합시다. 밥을 먹고 산다 이겁니다. 그렇지만 산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여러분은 아무러한 관계나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산다는 이 사실만을 압니다. 몸의 피곤은 하룻밤만 자고 나면 회복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고 있다는 이 사실 배후에는 사망이냐 생명이냐 하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모르는 가운데, 여러분이 살고 있다는 신념을 갖기 전에, 그 신념을 찾고 느낄 수 있는 여러분 자신의 밑바닥에서는 사망이냐 생명이냐 하는 문제로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싸움터를 중심삼고 사망선을 방어하고, 사망선을 뛰어넘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그러한 터전이 없게 될 때는 까딱 잘못하면 사망권의 침범이 시작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병이 날 때에는 고통을 받게 되는데, 그 고통은 어디서 오느냐? 그 고통은 사망세계에 순종하는 개체의 비극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일상을 습관적으로 살고 있지만 자기가 현재 생활하고 있는 터전, 그 밑바닥에서 치열한 생사의 투쟁을 하며 사망을 완전히 제압한 자리에 서 가지고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시 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세계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길을 존속해 가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자신이 모르는 가운데 밑바닥에서 선을 중심삼아 가지고 무한한 힘을 소모하는 수고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보상 밑에서 오늘날 여러분이 기쁨을 차지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혹은 선 앞에 섰다는 자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보답이 없고, 그런 대가의 치름이 없이는 자기 자신이 세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오늘날 타락권내에 처해 있는 자신의 뿌리가 그렇게 되어 있으면 뿌리 이상의 자리에서, 혹은 종교가 그렇다면 종교 이상의 자리에 나 자신이 서야 변화가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자각된 입장에 서야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악으로부터 출발한 인간은 악에서 결실돼야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나 자신이 선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은, 나 자신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바쳐 드리고, 하나님의 것으로서 원활히 주고 받을 수 있는 터전을 만들기 위해 생명을 걸고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야 점진적인 결과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의 자리는 나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뻐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먼저 기뻐하신 후에 내가 기뻐해야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렇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 하나님을 따라가는 신앙자의 입장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쁨이 있으면 '이것은 내 기쁨이다. 내가 잘해서 오늘 이 기쁨이 찾아온 것이니 당연히 내 기쁨이다'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부르짖고, 스스로 이 사실을 공인시키려는 자리에 서게 될 때에는 거기서부터 하나님 앞에 배치(背馳)되는 또 하나의 주체가 생겨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생각하여야 할 것은 우리는 삼각지대에 서 있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삼각지대입니다. 내 개인을 중심삼고 볼 때도 마음과 몸에서는 하나님과 사탄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보태 주면 나는 하나님편으로 가는 것이요, 반대되게 될 때에는 사탄편으로 가는 것입니다. 일생에 있어서 큰 책임을 한다 하더라도, 개인이나 가정을 넘어 종족, 민족, 국가적인 사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적인 기준에 있어서 삼각 작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한걸음을 잘 내디디면 국가적인 공신이 되는 것이요, 한걸음을 잘못 내디디면 국가적인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매국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정은 누가 하느냐?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원리에서 보는 것과 같이 개인이 하는 것입니다. 결정을 누가 하느냐? 이러한 책임분담을 내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정할 수 있는 요인을 어느 한때 가졌다 놓았다, 잃어버렸다 찾았다 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여러분들의 마음에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신앙자로서 무엇보다도 우선 싸워서 이겨야 할 최고의 표적이요, 승리의 기준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망각할 때에는 출발기점과 결과가 틀리게 되는 것입니다. 출발기점에서부터 그렇게 휩쓸려 갔다면 현재의 입장은 자연히 부정되는 입장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 계신다는 자각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어떤 외로움이 있고, 어떠한 어려운 수난길에 부딪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마음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기쁨을 맞으려면 최고의 자리에서 죽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나무는 가을이 되면 잎이 떨어지고, 겨울이 되면 모든 진액을 뿌리에 저장시킵니다. 그러한 나무는 겨울에도 죽지 않고 봄이 되면 그 뿌리로 인해 새로운 새 생명의 싹을 피어나게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길을 가는 데에 있어서도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내적인 중심에 하나의 생명의 동기를 집약시켜야 됩니다. 만약 집약된 생명의 동기를 잃어버렸다면 그것을 찾는 데 있어서는 타의에 의해 피동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는 못 찾습니다. 주도적인 입장에서 이것만은 놓칠 수 없다는 심정을 가져야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은 싸워 나가야 됩니다. 10년 신앙생활을 했으면, 그 10년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되기 위해 싸운 것이어야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떤 일을 대했을 때 커다란 기쁨을 느꼈으면 그 자극을 중심삼아 가지고 반드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날이 와야 됩니다. 그러한 생각이 언제나 끊임없이 여러분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려운 환경에 에워싸인 그런 입장에 서거든 '봄이 오면 내가 이것을 다시 한 번 발휘하여 하늘 끝까지 뻗어 나간다. 어느 한때 두고 봐라. 그때가 오거든 나는 이렇게 간다'라고 할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어려운 환경을 통하여 우리는 자료를 수집해야 합니다. 악이 얼마나 악한가와 그 악의 흉계를 알고, 악이 그 범위를 얼마나 크게 하고 있느냐, 범위가 얼마나 넓으냐 하는 것을 측정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악이 선을 대하여 공격하던 그 이상의 힘을 모으고, 그 이상의 공격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앞으로 총투입시켜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길에 있어서 슬픔에 사로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마음이 어느 한때에 풀어질 것이다' 하는 신념을 갖지 못한다면 신앙길을 갈 수 없습니다.
또,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를 악에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악과 더불어 본질적으로 화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주의하지 않고, 언제나 분별하지 않고, 언제나 선 앞에 기준을 맞추지 않고 가다 보면 악으로 돌아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습관적인 행로는 그 기원에서 이탈할 수 없기 때문에 악의 기원을 가진 우리의 습관적인 행로의 결과는 반드시 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신앙자의 생활은 스스로가 맹세하면서 가는 것과 반대 행로를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있어서 반발적인 힘은 언제나 비례적인 작용으로 나타납니다. 이 비례적인 작용에 의한 소모를 제거시키고 오른쪽이면 오른쪽, 위쪽이면 위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생활을 하루 하루, 순간 순간에서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늘편으로 전진 발전할 수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쁨을 주신 이유
오늘날 통일교회 자체가 그렇습니다. 통일교인들 가만히 보게 되면 한 때는 뭐 뜻을 위해 일한다고 야단법석을 합니다. 그거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까? 좋은 것은 역사성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또한, 좋은 것은 시대성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또한, 그것은 미래와 더불어 관계되어 있는 것도 알아야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역사성을 부정하게 될 때는 기쁨을 지닐 수 있는 자격자가 못 됩니다. 시대성을 부정하는 자리에서는 그 기쁨을 인정할 수 없는 거예요. 여러분이 미래성을 지니고 있는 그 기쁨을 부정하는 자리에 서면 미래를 향하여 가야 할 여러분 앞에 기쁨은 남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뻐하는 그것은 오늘날 통일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쁨은 창세 전 하나님의 심정으로부터 창세 이후, 그리고 복귀과정을 거쳐 가지고 복귀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시대적인 중심을 결정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중심뿐만 아니라 미래의 출발의 기원을 세우기 위한 기쁨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을 가졌다는 것은 역사를 대신한 것이요, 시대를 대신한 것이요, 미래를 대신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쁨은 내 자체에 뿌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현실에 심어 놓아야 되고, 미래에 심어 놓을 수 있는 기원을 마련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세계와 더불어 기뻐하고, 미래와 더불어 기뻐하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영계도 해원성사함을 받아 가지고 기뻐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원이 되었으면 그렇게 결과를 맺는 것이 우주의 이치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 혼자만 기뻐하겠다고 하다가는 그 기쁨을 다 놓쳐 버립니다. 역사와 관계맺은 기쁨은 역사가 나에게서 떠나게 될 때에는 그 기쁨도 거두어 갑니다. 시대적인 기쁨으로 관계되어 있는 기쁨이라면 그 시대적 인연을 내가 망각해 버리면 시대적 환경이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기쁨이 미래적인 기쁨의 터전이 되어야 할 텐데 미래의 기원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기쁨은 산산조각으로 갈라져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뭐 내용도 모르고 하늘이 어떻고 어떻고 야단하다가 나중에 지내고 보면 꿈만 같다는 거예요. 신령역사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면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할 때에는 열렬하게 증거하고 다녔지만, 그에게 그런 마음이 떠나게 됐을 때에는 '사생아로 살던 예수가 아니냐? 내가 그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라고 하는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서의 기쁨은 나를 위한 자기의 기쁨이 아니라 세계적인 기쁨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기쁨이 크면 클수록 자기 자체가 그것을 결실하려 하는 것보다도 더 높고 귀하고 가치 있는 그것을 향하여 전진해야 됩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타락한 이 악의 세계, 슬픔의 바탕이 되어 있는 이 세계에서 그 어떤 기쁨을 느껴 가지고 세상의 환경을 규합하여 그 기쁨 이상의 자리까지 나아가 거할 수 있는 한때를 가졌다면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겠느냐 이겁니다.
그것은 억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요, 이 시대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요, 과거를 가지고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3시대의 대가를 치른 입장이 아니고는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더불어 가면서 주신 기쁨을 자기 것으로 알면 안 됩니다. 그것이 자기 것이예요? 자기 것으로 아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도둑놈이 그러는 거예요. 그것을 나에게 준 것은 역사를 대신해서 준 것이요, 나에게 느끼게 한 것은 역사를 대신해서 느끼게 한 것이요, 나를 그런 자리에 세운 것은 미래의 출발을 공고화시켜 달라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그런 환경에서 그것을 마음대로 하겠다구요?
신앙자가 지녀야 할 올바른 자세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의 태도는 언제나 빚진 자의 자세여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돼요. 신앙자로서 제일 중요한 자세는 무엇이냐? 빚진 자의 자세입니다. 여러분, 빚져 봤어요? 빚진 것이 없으면 빚을 좀 져 가지고 단련해 보라구. 빚진 자의 수고가 어떻구나 하는 것을 알아 보십시오. 빚을 갚지 못하는 자리에 서 보라는 것입니다. 정말 비참합니다. 한 푼이라도 빚을 지면 그 조건으로 멱살을 잡힐 수 있고, 근본적으로 인격을 부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거기에는 인격이 없습니다.
빚이라는 것은 반드시 갚아야 되는 것입니다. 빚진 자가 빚을 갚겠다고 노력하는 것을 채권자가 보게 될 때에는 동정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그런데 빚을 갚을 것은 꿈도 안 꾸고, 돈 있으면 좋은 것을 사고 먹을 것 다 사 먹으면서 자기만 잘살려고 하는 날에는 화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빚진 자는 언제나 빚을 갚겠다고 하는 태도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빚을 갚고야 말겠다고 하는 태도가 빚보다 크게 될 때에는 채권자는 그 사람을 참소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를 동정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렇지요?
신앙자의 태도도 이와 같은 빚진 자의 자세라야 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기쁜 것이나 이익이 찾아오면 그것을 누구한테 돌려야 되느냐? 그럴 때에는 빚을 갚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자신에게 어떤 기쁜 일이 있으면 그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빚을 갚아 주어야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을 내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빚진 사람이 채권자의 재촉을 받았는데 거기에 대해서 불응하면 그는 완전히 부정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로 말미암아 기쁨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통일교회 간부들을 볼 때, 어떤 사람은 자기가 원리강의를 그렇게 해주어도 감사할 줄 모른다고 하면서 기분 나쁘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간부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평하는 사람은 불합격자입니다. 옛날에 유 협회장이 있을 때에도 유 협회장이 뭐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책임자로서 잘못한다고….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책임자로서 잘했느냐 이거예요? 집에 돌아가면 아들딸한테 잘해요? 친구들한테 잘해요? 천하의 공의의 자리를 다 차지해 가지고 선 것과 같이 뭐가 이렇고 저렇고 하는 사람은 사탄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탄의 직속 부하입니다. 앉아 가지고 나발불고 앉아 가지고 평하는 녀석들은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 그렇게 말하는 너 자신은 책임을 다했느냐 이겁니다. 누구에 대해서 평하는데 너 자신은 책임을 다했느냐는 것입니다.
효자는 자기 어머니 아버지한테만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효자는 자기의 아들딸에게도 잘해야 됩니다. 아들딸의 갈 길을 올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한테 손자까지도 효자로 만들어야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손자가 불량배가 되었는데 아들이 부모에게 '내 자식이 나빠서 그렇게 되었지만 나는 당신 앞에 효자입니다'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아들이 효자이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암만 그래도 그 집안은 망하는 것입니다.
평하는 사람보다 평받는 사람이 수난길에 있고 더 큰 기준에 있다면 그 고통의 자리에 서서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얼마나 힘드는지 아느냐는 거예요? 모르는 자리에 있어 가지고….
여러분은 넘어가야 할 길을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목이 잘리더라도 가야만 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다는 것입니다.
신앙길이라는 것은 영원한 목적을 표준해 가기 때문에 그 목적을 찾을 때까지 묵묵히 가야 하는 겁니다. 침묵이 선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복귀섭리를 누구한테 선포하시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무도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모르고 있는 가운데 역사는 그 한계점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빚진 자의 자세를 망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돈이 없거든 '나는 이렇게 이렇게 빚진 자다' 하는 가슴에 사무친 격한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를 붙들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심정을 가진 여러분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올바른 신앙자의 자세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빚진 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채권자를 만나 자기 변명을 하지 않고, 변변치 못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머리 숙여 눈물을 떨어뜨릴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면 채권자는 흐느끼는 그 사람에게 재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도 그렇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무시하고, 그런 사람의 목을 잘랐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치 않습니다. 천도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귀의 행각노정에 있어서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중대한 문제를 맞게 될 때에는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초조함 속에서 복귀의 어려움을 알고, 또 이것을 해결짓기 위해서 밤을 새워 가며 몸부림쳐야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한 고비 한 고비 밟고 가는 길이 복귀의 길이 아니겠느냐? 공적인 책임을 진 사람들은 그러한 입장에서 몸부림치며 뒤넘이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한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종족을 망하게 하고, 자기 선조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의 자세는 빚진 자의 자세여야 됩니다. 한마디의 말, 한 가지의 행동을 잘못하면 자기 혼자만 걸려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땅이 걸려들어갑니다. 지금까지 잘 쌓아 놓은 공든 탑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10년 세월을 보냈으면 그 10년 세월이 아까운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따라 생애를 바쳐 나왔다면, 그 지난날 자기의 청춘시절을 바쳐서 정성들인 것이 한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한스러운 것만이 아닙니다. 아깝다고도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만은 줄 수가 없다. 지금까지의 것을 고이 남겨 줘야 되겠다. 남기고 가야 되겠다'라고 해야 됩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초가을까지 왔으면 늦가을까지 가고, 늦가을까지 왔으면 겨울까지 지내 보라는 것입니다. 겨울 절기가 지나고 봄이 될 때까지 가 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가야 할 것이 신앙자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한 바퀴를 돌고 두 바퀴를 돌고 세 바퀴를 돌면서…. 한 바퀴를 도는 데도 탕감이 있고 두 바퀴를 도는 데도 탕감이 있고…. 돌면 돌수록 탕감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개인에서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로 점점 커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심이라는 것, 이 작은 자아가 지녀야 할 신앙자로서의 자세는 빚진 자의 자세입니다. 그러한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제물 드리는 사람이 종족적 제물시대가 오는데 빚진 자의 자세를 안 가지고 제물을 하나라도 바칠 수 있겠어요? 민족적 제물시대가 오면 민족적 제물을 드려야 하는데 빚진 자의 자세를 안 가지고 할 수 있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무대가 점점 가중되고 커지면 커질수록 빚진 자의 자세를 가지고 가야 할 길이 신앙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말은 순식간에 하지만 그 한마디를 잘못하게 되면 그것이 1년까지 갑니다. 한 순간 잘못 말한 것을 1년 동안 청산시키는 놀음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수난길을 개척하여 신앙의 터전을 마련해야
옛날에 감옥에 있을 때 일입니다. 항상 배가 고프기 때문에 어쩌다 콩밥을 해주는 날은, 그 콩 한 알이 세상으로 말하면 황금덩어리가 됩니다. 그것이 콩알이 아니고 금덩어리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집니다. 이 콩 하나를 뭐라고 할까요? 콩 하나 하나가 황금덩이보다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밥을 먹다가 콩 하나가 떨어지면 옆에서 얼른 집어 먹어 치우는 거예요, 인사도 없이. (웃음) 체면도 없이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겠지만, 그런 입장에 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감옥은 그런 곳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죄인들이 먹는 밥을 한꺼번에 전부 다 먹고 싶은 거예요. 죄수가 수십 명이 있으면 수십 명의 밥을 혼자서 전부 다 먹고 싶은 거예요. 자기가 전부 먹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인식이 되어집니다. 그렇게 하자고 하면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작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손을 내밀어 그것을 먹겠다고 하는 마음이 한번 들면 그 마음을 없애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것을 탕감하려면 밥을 몇 끼 안 먹어야 돼요. 밥을 몇 끼 안 먹어야 탕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아니고는 복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이 거쳐간 것을 고치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을 생각할 적마다 오늘날 타락한 인간을 악의 생활권내에서 선의 자리까지 옮겨 놓기 위한 하나님의 수고가 얼마나 컸겠는가를 알게 됩니다. 얼마나 힘의 소모가 컸겠는가를 내가 직접 해보니 알게 됐습니다.
악한 우리들을 이 자리까지 끌어올리기 위하여 배후에서 얼마나 하나님께서 수고하셨겠느냐? 여러분도 한번 해봐요? 해볼 테면 마음 놓고 한번 나가서 해봐요. 그것이 얼마나 신앙길에 자극이 되고 도움이 되는지 알아보세요. 몸과 마음이 한번 결정했다면 일생을 두고 해보십시오. 여기 칠판이 암만 새거라도 한번 금을 딱 그어 놓으면 지우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을 지우기 위해 일생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신앙길에서는 그런 것을 느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이 공석에서 곧잘 여러분을 책망하지만 그렇게 책망할 때 얼마나 여러분의 신앙길을 걱정하는지 알아요? 책망의 천만 배 이상을 돌려 줄 수 있는 자리에서 책망했다면 내가 책망한 것이 오히려 여러분에게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길에 있어서 악한 것은 자꾸 긁어내야 됩니다. 긁어내야 그것이 떨어져 나가잖아요? 그러나 선한 것을 긁어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요? 선한 것을 통해서 선을 지키는 것입니다. 악은 선편에서 싹 쓸어내야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악을 빨리 제거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그런 작전을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까지 나가기 위해서 그저 어정쩡하게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수한 수난의 길을 개척해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내 책임이기 때문에 그렇게 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評)하는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안팎으로, 이론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딱 제시해 줄 겁니다. 여러분이 그런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은 '선생님이 차를 타고 다니시니 우리도 타고, 선생님이 이렇게 사시니 우리도 그렇게 살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이렇게 사는 것은 생애를 바쳐서 투쟁해 나온 그 결과입니다. 여러분은 반석을 뚫어야 되는 것입니다. 반석을 뚫고 나서 거기에 좋은 옥토가 있으면 그 옥토에 뿌리를 박아야 하는 겁니다. 옥토에 뿌리를 박는 데 있어서, 반석을 뚫는 신앙에 있어서는 말이 필요없다 이겁니다. 복귀노정에 있어서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동정을 남기는 신앙생활
신앙길에 있어서 한번 잘못하는 날에는 그것을 바로잡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그렇지요?
신앙자로서 생각할 수 없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을 했으면, 죄를 지었으면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나는 그런 기도 못합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으면 기도가 안 돼요. 아버지라는 말을 하기가 너무나 부끄러워요.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여러분 그런 것을 알아요? 그저 철부지같이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사랑하는 아버지…' 하는 것은 떠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워해야 됩니다. 자기의 동지를 만나도 예절을 지킬 수 있는 마음이 앞서야 돼요. 하나님 앞에 나서기 부끄럽다고, 아버지 앞에 서기에 부끄럽다고, 자기 자세를 갖추고 또 갖추는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이런 자식이라도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될 아버지의 사정을 생각하고, 세상이 악하니만큼 이런 나를 필요로 하시는 아버지의 사연이 있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동정의 마음을 유발시켜 가지고 아버지를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버지라는 말만 하게 되어도 눈물이 앞서는 것입니다. 그래야 회개를 해도 그 회개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회개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죄 짓는 것이 당연하고, 하나님은 용서해 주시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닙니다.
처녀가 시집을 가는데 좋은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단장하여 어엿한 신부 차림으로 가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옷을 빌려 입거나 혹은 꿰맨 옷을 입고 갔다고 해보세요. 옷을 장만하지 못하고 그렇게 가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겠어요? 여러분은 그와 같이 얼굴을 들 수 없는 한때를 당해 봐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느껴 봤어요? 생사 문제를 중심삼은 결정적인 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 그 이상의 길을 달려가는 데 있어서 그 이상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데서부터 보다 깊은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길에 있어서 빚진 자와 같이 처신해야 됩니다. 부끄러움을 가지고 부끄러운 자의 참다운 친구가 되어 주고 부끄러워하는 자를 감싸 줄 수 있고 보호해 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그런 입장에 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 서 보아야 예수님의 고마움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선생님이 고마운 분이란 것도 알고, 하나님이 얼마나 고마운 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뭘 느낍니까? 여러분들은 옛날의 그 모양 그 습관을 가지고 언제나 들락날락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여기 본부의 물건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뭐예요? 요전에는 또 일본 식구의 물건이 없어졌다는데,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런 사람은 회개의 심정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선악의 분별 노정을 모르니 그 꼴이라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를 잘못한 그 부끄러움을 바로잡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 본연의 자세인데도 불구하고, 남의 물건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대어 제 욕심을 채우면 그건 화약고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미친 짓이 있어야 되겠느냐 그거야. 그 참 나, 연구 자료라구. 그것을 가져다가 뭘 하겠다는 거예요? 또 시계를 주웠으면 주인을 찾아서 돌려줘야지. 그런 사람이 커 가지고 뭐가 되겠어요? 이런 등등의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신앙자는 빚진 자의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침묵이 흐르는 것입니다. 언제나 침묵이 흐르는 거예요.
내가 공석에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이 4월 달에는 젊은 식구들을 대해 가지고 말했는데 내가 더 힘들었습니다. 말할 때까지는 오랜 침묵 기간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말하기 전에 침묵의 기간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무아의 수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열 번 이상을 생각합니다. 그런 자리로 자기를 몰아넣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말들은 아주 잘해요. 말은 남의 말을 하고 행동은 남의 행동을 하면서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나는 다 됐다'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신앙자의 자세는 빚진 자의 자세라는 것을.
자기의 신앙생활에 동정을 남기고 가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장이 나는 거예요. 지금 선생님 자신도 그렇습니다. 나 자신이 물론 공적인 입장에서 어디를 갔다가 예배 시간에 늦게 되면 나오기 전에 기도합니다. 또 어떤 주일에는 예배 시간이 됐는데 못 가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반드시 회개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주체적 책임을 짊어진 자로서 그래도 식구들이 나를 걸고 복받겠다고 하고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성들이고 있는데, 그 시간에 가지 못한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억울한 자리, 죄인의 자리에 서 보아야
여러분은 빚진 자의 자세로 생활해야 합니다. 즉, 자기가 잘못했다는 입장에서 언제나 빚진 사람으로서 자기 스스로를 다짐할 수 있는 그런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 우리 앞에 사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공판정에 선 죄수와 마찬가지입니다. 검사가 조건이 없어서 여러분을 못 거는 것이 아닙니다.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데는 그 범죄 결과를 중심삼아 가지고 판결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범죄의 동기가 피동적이냐, 능동적이냐에 따라 판결에 천지의 차이가 벌어지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가 주범이냐, 혹은 용의자냐에 따라 천지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행동은 같이 했지만 동기에 의해서 하늘땅의 차이가 벌어집니다. 그렇지요? 동기가 나라를 위한 애국심에 불탄 것이라면 그것은 도리어 하늘 앞에 칭찬 받을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원칙을 두고 보면 죄입니다. 그러면 나라를 위해서 나라의 원수를 죽였을 때도 죄가 됩니까? 왜 살인을 했느냐 할 때 '이 사람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이기에 그 피해가 전국민 앞에 미칠 것이 틀림없지 않느냐? 그래서 내가 죽였다'고 한다면 공판에 못 거는 것입니다. 걸었다 하더라도 도리어 칭찬의 결과는 될 수 있어도,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자리에는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동기에 의해 천태만상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누가 있느냐? 사탄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말 한마디하게 될 때에도 반드시 그 말을 걸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서 '넌 내 것이다' 하고 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변호하고 하나님과 하나되면 '당신은 하나님 것이다' 하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끝내는 변호사와 검사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엄연한 하늘의 공의의 법도로 치리하시는 하나님 앞에 있어서 공판정에 선 죄수와 같은 입장입니다. 전부 다 그렇다는 거예요.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눈물 없이는 회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형편이 무인지경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 자신도 그렇습니다. 내가 통일교회 책임자라는 생각을 안 한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잘못했으면 그 잘못한 기준을 중심삼고 무자비하게 자신을 추궁합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 아녜요? '나는 누구의 아버지다. 나는 판사의 아버지다'라고 한다고 용서가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것입니다. 공판정에 서게 되면 언제나 원수입니다.
내가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내 일생에 몇 번씩 공판정에 설 수 있었던 사실입니다. 이것으로 큰 경험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악한 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조건을 걸려고 하는 검사의 마음, 악한 사람이 아닌데 악하다고 조건을 걸고 들어서는 것을 느껴 봐야 합니다. 선생님에게 그것은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또, 변호사가 변론하는 데 있어서 자신은 자신의 죄 값이 사형임을 당연한 것으로 느끼는데 변호사가 그 생명을 구해 주기 위해 변증할 때에 느껴지는 죄스런 마음도 느껴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자리에 섰을 때에, 여러분을 놓고 예수님과 사탄이 일생 동안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통일교회 선생님과 사탄이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각에 처한 운명의 판가름 도상에 있어서 자기의 생명 되시는 분, 생명의 발판이 되시는 분이 계시니 여러분 앞에 천번 만번 폭풍이 불어치더라도 그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보답할 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런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자리에서 변론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뻔뻔하게 발뺌하고, 자기는 잘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내가 한꺼번에 큰 도가니 속에 집어넣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언제나 빚진 자의 자세를 지녀야 됩니다. 빚을 져 보라구요.
또, 어떤 때 억울한 심정을 갖게 되느냐? 여러분이 어쩔 수 없는 자리에 몰려 가지고 남의 물건을 훔쳐 죄를 졌다고 합시다. 어쩔 수 없이 훔쳤다는 거예요. 그 동기를 보면, 틀림없이 천배 만배 갚아 줄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아시는데….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도 있잖아요? 나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공의의 뜻을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협력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걸 알겠어요? 오히려 큰 수욕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했는데 수욕을 당했을 때 그때의 그 슬픔, 그런 자리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의 슬픔은 곱절의 슬픔입니다. 보다 선한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다 나에게 요런 물건이 없었느냐? 아무것도 아닌, 서푼 짜리밖에 안 되는 물건으로 인한 사건이 이렇게 내적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줄 줄이야…. 그러니 억울하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은 공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선한 환경을 이루어야 됩니다. 만일에 악한 일로 억울하고 분함을 느낄 때에는 하나님 앞에 '이것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것을 위해서입니다'라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후대에 반드시 천배 만배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용서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악이 아무리 참소하는 자리에 섰다 하더라도 당당한 것을 느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을 가지고 사탄세계에서 빼앗아 오는 것은 죄가 안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빼앗아 오는 데 있어서의 형태는 싸워 가지고 빼앗아 오는 것과 몰래 빼앗아 오는 것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알겠어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알게 빼앗아 오는 방법과 모르게 빼앗아 오는 방법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역사 가운데에서 그런 일을 하고 계십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에게 복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걸리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아까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틀림없이 천배 만배 갚아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서 상대에게 행동했다면 행동한 자체는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서 지탄받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공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중심삼고 복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놀음이 있습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은 이런 원칙을 알았기 때문에 복귀섭리를 해 나오는 과정에서 그런 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을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고생하라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내가 여러분을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고생시키는 자체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생시킨 것을 천만 배의 대가로 갚아 주게 될 때에는 고생을 시켜도 타격을 안 받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기준을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할 수 있는 마음 자세
여러분이 선악의 경계선에 서 가지고 우왕좌왕하는, 판가리 싸움을 하는 입장에서 한 걸음 잘못하면 사망의 세계로 떨어지고 한 걸음 잘하면 생명의 세계로 출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뜻 가운데'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자리로 가야 됩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까딱 잘못하여 한번 벗어나면….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어떤 때에는 12시간, 흑은 24시간 동안 기도해야 할 문제가 있었어요. 그때에는 생각으로 싸우는 겁니다. 어떤 사실을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치열한 싸움을 하는 겁니다. 그런 싸움을 경험하는 자리에 있어서는 생각 일체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심각한 경지의 수난길이 있는 것을 알고 이것을 해결할 때까지는 자기에게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좋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외적인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외적인 것을 자꾸만 잊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비참한 거예요. 아무리 배고파도 배고픈 것도 잊어버리라는 거예요. 심각하면 그런 면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길에 있어서, 이런 싸움의 노정에서 선악을 가려 가지고 악을 밟아치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노정이 여러분의 깊은 신앙의 길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지금 여러분의 입장에서 해야 할 사명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문제를 알고 빚진 자를 대신해 침묵으로써 나 자체의 모습을 어떻게 풀며 나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을 동정해 주고 입증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거든, 동역자가 있거든, 혹은 어떤 스승이 있거든, 자기를 위해 수고해 준 그 뜻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몸 전체나 위신, 체면을 다 잊어버리고 그 앞에 완전히 종의 종이 되어도 좋고, 그 앞에 있어서 죽음을 당하여도 감사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완전히 감사하는 자리에서 그 은사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나는 악의 사슬을 벗어나는 데에 내 생명을 바치더라도 고맙다'고 해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데서부터 본연의 신앙자로서의 자세를 갖추어 출발하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번 죽더라도 감사하고, 자기 존재가 없어지더라도 감사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런 각오를 가지고 출발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특별히 좋은 일이 있더라도 선생님은 절대 안 나타납니다. 그것은 왜 그러느냐? 복귀역사를 보면, 누구부터 속죄를 받았느냐? 만물부터 속죄 받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만물이 속죄를 받았지요? 그 다음에는 무엇이 속죄를 받느냐? 종들이 속죄를 받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누가 속죄받느냐? 양자가 속죄받습니다. 그 다음은 아들이 속죄를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도 속죄를 못했기 때문에 속죄를 하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부모가 속죄받는 것입니다. 전체 순서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좋은 것은 나부터다' 하면 거꿀잡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는 아직까지 더 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에 누가 만나자고 해도 안 만나 주는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잘못하게 되면 대한민국이 걸려들어가게 되는 문제도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선생님은 못 믿어요. 또, 자기가 뭘 했다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못 믿겠어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 갈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빚진 자의 자세로서 침묵을 지키지 않고는 안 됩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부끄러운 수치를 누가 덜어 줄 것이냐? 그 수치에 대해 하나님께 동정을 바랄 수 있는 대변자가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대변자의 입장에 선 것이 변호사이기 때문에 그의 증거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치를 받았다면 참소하는 사람에 대해 얼마나 원한에 사무쳤겠어요? 원한에 사무치게 한 녀석을 들추어내서 제거해야 됩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한날의 생활, 혹은 하나의 표정, 하나의 행동에 있어서 그것을 가릴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갖고 가는 사람들은 망하겠다고 해도 하나님이 부활 할 수 있는 축복의 터전을 만들어 주십니다. 죽겠다고 하는 길은 부활의 길이지 죽음의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죽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만약 그런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죽었다가는 큰일나는 겁니다. 죽을 자리에 가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달려들어 가지고 살려 주는 겁니다. 망할 자리에 들어가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도중에서 가로막습니다.
이런 것을 알게 될 때에, '나' 하나를 중심삼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타락으로 인한 복귀의 한을 품으시고 뒤넘이친 것만도 원통하실 텐데도 불구하고, '나' 같은 사람에 대해 이렇게 죽음의 길을 가려 주시는 그 은혜를 생각하면 황공 망극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자신의 심정의 거점에 있는 그 사람과 그 은덕을 하늘땅 앞에 돌려드리고 가뿐한 걸음으로 가겠다고 해야 됩니다. 이런 마음이 여러분 신앙생활의 바탕이 되게 될 때, 그것이 정상적인 신앙의 길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까지 그런 생활을 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인이 해야 할 심정생활
어떤 때에는 밖에서 늦게 돌아오면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게 되는데, 그럴 때에는 아이들에 대해 '야, 너희들 얼마나 이 아빠를 불러 봤니?' 하고 물어 보고 싶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르다가 피곤해 가지고 이렇게 자게 될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게 남의 일이 아니라구요.
어머니면 어머니에 대해서도 피곤하여 누워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수고했으면…. 이런 마음이 듭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 수고를 알아주고도 남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통일교회 교인들을 놓고도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눈만 뜨면 지방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지방 가기가 바쁩니다. 애기를 보고 싶은 마음 이상 그들이 보고 싶어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보고 싶어하는 그 이상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나는 죄인입니다. 빚지는 자가 되는 겁니다. 저 나라에 갈 때에 하늘 공법 앞에 선조들 앞에서 참소를 받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에게 일을 시켰으면 선조들 앞에 참소받을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참소받을 그런 길은 안 갑니다. 그래서 나가서 일하는 사람들도 선생님을 대해 가지고 욕을 하고 싶어도 욕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빚지지 말아야 됩니다. 그런 신앙자의 자세는 망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보호하는 겁니다. 동정을 언제나 남기는 생활, 결론은 간단해요. 언제나 동정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걸어가는 꼴만 봐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왜 그러냐? 그럴 수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몇 번씩이나 동정해 주었는데도, 동정해 줄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정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디 가든지 하나님이 동정하고 같이 느낄 수 있고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통일교회의 여러분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가면 비록 악한 세계에 있더라도 악한 세계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슬픈 세계에 있더라도 슬픈 사람이 아닙니다. 또 여러분이 어디 가든지, 혼자 있더라도 묵묵히 혼자 있는 그 마음 세계에서는 하나님과 접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는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이루어진 생활을 할 수 있는 세계와 연결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천국생활을 할 것이 아니냐? 이런 것을 여러분이 잘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현재 자신의 생활에서부터, 자신에서부터 사탄이 틈타지 않게 해야 되고, 사탄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없애야 됩니다. 그러한 자신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은 거기까지 가야 할 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동정을 받고 그것을 확대시키기 위한 격정의 도상에서 회피할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내가 지고 피해를 내가 입겠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죽음의 자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쓰러질 수 있는 생애의 종착점이 어디냐? 대한민국이냐? 세계의 끝이냐? 자기 집안을 위해 죽을 것이냐, 객사하는 모습이 될 것이냐 하는 이런 것에 개의치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더 동정할 수 있고, 하나님의 큰 뜻이 깃들 수 있고, 또 그것을 남겨 줄 수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개의치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가는 사나이라면, 기필코 역사적인 인물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이것을 명심해야 되겠어요.
책임진 부모의 입장을 알아야
더우기 금년 1971년도에 발표한 '통일기반 확보'라는 표어는 이러한 내적인 신앙 문제를 중심삼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원리를 공부했지요? 원리는 탕감복귀 원리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벌써 배운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까지 탕감복귀역사를 해 나오는 수고의 하나님밖에 몰랐습니다. 그러나 복귀됐을 때의 하나님, 복귀해 가지고 영광의 자리에 참석하시는 하나님은 다릅니다. 탕감복귀의 운세를 이끌고 부딪혀 나오시는 하나님과, 복귀된 입장에서 섭리를 추진시키는 하나님, 복귀의 역사를 다 이루어 가지고 영광의 자리에 서서 만민을 아들딸로서 품고 세계를 하나로 거느리시는 아버지, 즉 영광의 하나님과는 다릅니다.
여러분은 탕감복귀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나오고 있는 겁니다. 알겠어요? 「예」 그리고 선생님은 복귀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님에게도 영광의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복귀된 가정과 복귀된 종족을 중심삼고 복귀된 나라를 어떻게 이룰 것이냐, 복귀된 세계를 어떻게 이룰 것이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을 넘고, 국가를 넘어 세계로 향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의 국가와 세계가 이루어질 것이요,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통일된 영광의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때까지는 여러분이 고생해야 됩니다.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부모가 쉼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쉼으로 말미암아 부모가 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도 내가 일해 줘야 뜻을 이루지, 선생님이라고 별 수 있어? 통일교회 교인들 없이 별 수 있나?' 라고 하는데 천만에요. 그건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타락은 누가 했어요? 부모가 했습니다. 부모가 한 거예요. 그렇지요? 부모가 타락했기 때문에, 복귀는 잃어버린 그때의 그 상태대로 가서는 복귀가 안 됩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참부모가 이 땅에 와서 무엇을 복귀해야 하느냐? 잃어버린 부모의 자리를 복귀해야 됩니다.
복귀하는 데에는 환경이 그와 같은 환경이 안 되면 안 됩니다. 그때의 환경이 어떠했느냐? 타락할 때에 아들딸이 있었어요? 아들딸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습니다」 당연히 없다 이겁니다. 그때는 누가 있었어요? 천사, 천사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타락할 때의 환경입니다. 그렇지요? 「예」
그러면 참부모를 환영하고, 또 참부모가 의논할 상대는 누구예요? 참부모가 의논할 상대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의논한다면 누구와 해야 돼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말고 말예요. 누구와 의논해요? 천사장입니다, 천사장. 천사장이 복귀역사를 도와주게 되어 있어요, 망치게 되어 있어요? 타락하는 데에 있어서 천사장이 협조했어요, 망쳤어요? 망쳤지요? 망쳤습니다. 그러니 고독단신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김 협회장이 있지만 의논하지 못합니다. 선생님의 길은 홀로 가는 길입니다. 외롭다면 세계에 없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모르는 것입니다.
어머니도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말을 들어서 되겠어요? 해와의 말을 들으면 어떻게 돼요? 통일교회 교인들은 선생님은 어머니의 말은 잘 들으시대' 이럽니다. (웃음) 그것이 원칙에 맞아요, 안 맞아요? 잘 듣는 것 같지요? 잘 듣는 것 같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원리가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를 키워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재창조하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머니가 그런 자리를 거쳤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어머니 아버지 시대권에 있기 때문에 여자들이 나가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가정에도 여자들을 내세워서 탕감복귀하자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활동한다고 하는 것은 하늘편 여자들이 사탄세계에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자들이 나가 일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가 얼마만큼 왔느냐 하면 원리를 보면 압니다.
그럼 '선생님이 통일교회 교인이 없어 가지고 뜻을 이룰 수 있느냐?' 그러는데 이러한 말이 성립돼요, 안 돼요? 원리적으로 얘기해 보자구요. 돼요, 안 돼요? 「안 됩니다」 안 돼요. 여러분이 없더라도 내가 통일교인이 되고 여러분이 없더라도 일본 사람이 좀더 고생을 하면 잘 싸울 것입니다. 외국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지금 말을 못해서 그렇지 말을 배울 때까지 고생하면 될 수 있는 거라구요. 선생님은 그런 생각 안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한 명도 없으면 내가 부흥강사로 나서서 외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경삼아서라도 사람들이 많이 몰려올 것입니다. 시민회관에서 한다하게 되면 사람이 찰 것 같아요, 안 찰 것 같아요? 통일교회 문선생이 부흥회를 한다면 구경삼아서라도 한 번쯤은 올 것입니다. 목사들도 와 가지고는 구경할 것입니다. 목사 공청회 때도 문선생에게 관심이 있었지, 공청회에는 관심이 없었잖아요? 내가 여러분을 대하던 마음을 갖고 하게 되면 순식간에 여러분 이상의 수를 규합할 수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지요?
가인을 굴복시키는 방법
타락은 부모가 했지만 아들이 그 결과를 결정지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그렇지요? 보라구요. 가인과 아벨은 타락의 결과적 존재입니다. 타락은 부모가 중심이 되었지만 그 결과적인 존재로는 아들딸이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도상에 있어서 누가 나와야 되느냐? 아벨이 나와야 됩니다. 그리하여 아벨이 역사를 통해서 부모를 찾아 나가야 됩니다.
여러분을 중심삼고 보면, 여러분도 가인 아벨의 관계에 있습니다.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럼 가인 아벨의 노정에 있어서 아벨이 가인의 말을 들어 가지고 뜻을 이룰 수 있겠어요? 말해 보라구요. 또, 가인이 아벨을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어요? 원리대로 얘기해 보자구요. 말할 자격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그럼 누구만이 말할 수 있어요? 「아벨입니다」
그럼 사람이 말할 때에 좋은 말만 해요? 나쁜 말도 하게 되지요? 가인이 아벨을 대해 가지고 책망할 수 있어요? 대답해 보라구요. 평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그러면 아벨은 가인에 대해 말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책망할 수 있어요, 없어요? 간섭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그 간섭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이렇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 세계는 화합된 세계입니다. 우주는 상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간섭도 상응적인 간섭이다 이겁니다. 알겠어요? 저 사람이 나에게 끌려올 수 있는 간섭을 해야 하는 겁니다. 내가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그 사람을 위해 주어야 됩니다. 그 위해 주는 것이 간섭할 수 있고 점령할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위해 주는 것은 뭐냐 하면 완전한 간섭입니다. 그렇지요?
사탄은 뭐냐? 악이라는 것은 자꾸 높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하나님 대신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악입니다. 자꾸만 높아지려는 것이 사탄의 본질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본질적인 조상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너희도 그런 녀석이다 이겁니다. 그러니 높여 주라는 거예요. 얼마만큼 높여 주느냐? 하나님 이상 높여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을 하나님 이상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그거라구요.
그러면 가인을 하나님 이상 높여 주었다면 가인이 그 이상 올라갈 수 있어요? 올라갈 데가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없으니까 내려와야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 이상 높여 놓고 내려갈 때에는 혼자 내려가라고 해야 합니다. 내려오긴 내려와야 할 텐데, 내려올 길이 있어요? 안 내려올 수 없는 겁니다. 안 내려오면 옥살박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아이구. 나 살려줘요. 나 살려줘요' 하는 거예요. 그때서야 비로소 '아이구 내가 뒤를 따라갈 걸' 하는 거예요. '제발 살려줘요' 하는 것은 완전굴복하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사탄을 잡는 방법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만큼 높여 주라구요? 「하나님 만큼요」 하나님 만큼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이상으로 높여주라는 것입니다. 가인을 하나님 이상 사랑해 주는 데도 불구하고 그 이상 불평할 수 있어요?
여러분이 가인을 복귀하려면 세 아들딸을 사랑하는 이상의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는 안 됩니다. 세 아들은 3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3수는 완성수이지요? 소생, 장성, 완성, 그렇지요? 완성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세계의 아들인 가인을 자기 앞에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자기 아들의 3배 이상 사랑하지 않고는 복귀가 안 됩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서 이런 원칙에 의해서 하나님도 구약시대, 신약시대, 성약시대를 거치는 섭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생활 가운데서 불평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가인을 그 이상 높여 줘야 할 나로서, 지금 훈련받고 뛰어야 되는데, 그 일을 못하면서 어떻게 불평을 해요? 나를 높여 달라고 할 수 있어요? 자기를 높여 달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절대 아벨이 될 수 없습니다. 아벨이 못 됩니다. 자기를 알아 달라는 사람은 전부 다 가인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돼요. 불평을 하면 불가피하게 가인이 되는 거예요. 가인이 되지 아벨은 절대 못 됩니다.
아벨이 될 수 있다, 없다? 「없다」 불평하게 되면 아들딸이 될 수 있다, 없다? 「없다」 없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역사노정을 홀로 걸어 나오신 것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가르쳐 줬어요, 안 가르쳐 줬어요? 성경이 이러한 골자를 가르쳐 줬어요, 안 가르쳐 줬어요? 「안 가르쳐 줬습니다」 안 가르쳐 줬습니다. 못 가르쳐 주는 거라구요. 다 이루어 놓기 전에는 못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부모를 바로 알아야 자식의 도리를 할 수 있어
오늘날 통일교회의 원리 말씀도 선생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선포된 것입니다. 우주적으로 보아도 중심이 있기 때문에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있어서도 내각을 조직할 때에 밝혀지기 전에는 그 내용을 모릅니다. 결정해 가지고 선포해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예요. 결정되어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포하면 다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리를 알았다는 것은, 그것은 결과적인 것입니다. 6천년 역사가 개인복귀완성하는 역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안 동시에 실천적인 실체가 결정됐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 전부와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그 가르쳐 준 모든 것을 절대시하고, 그것과 더불어 살고 그것과 더불어 죽으면 그것과 더불어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길에 있어서 심각해야 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아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평면적입니다. 평면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알겠어요? 그러나 선생님은 입체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생각이 맞겠어요, 안 맞겠어요? 방향이 맞겠어요, 안 맞겠어요? 근본적으로 틀리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여러분만한 일 밖에 못 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생님과 안 맞는 것 같지만 결국 지내 보면 맞게 됩니다. 그러면 되잖아요? 암만 안 될 것 같은데도 그렇게 된다 이겁니다.
통일교회가 망할 것 같지만 안 망합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도 안 망합니다. 내가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예요. 지금까지 망할 길을 얼마나 거쳐왔어요? 그렇잖아요? 앞으로 거쳐갈 것보다도 더 많이 거쳐왔어요. 이제 거쳐갈 것은 쉽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이제는 어려운 고개를 다 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돼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지금까지 생명을 바치고 생애를 바치며 이 세계에 있어서 고립된 자로서 나왔는데 망할 수 있어요? 얼마나 심각했는지 생각해 보라구요.
여러분 보라구요. 아들딸 7, 8명 거느리고 사는 부모가 재산을 다 탕진하여서 따라지가 됐을 때 밤잠을 못자지요? '어떻게 할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생각하면 아리까리할 때가 많지요? 밑천이 한 십만원밖에 안 남았는데, 이렇게 결정하면 망할 것이고, 잘못했다가는 몽땅 없어지는데 어떻게 하나 하며 생각할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밤을 새우면서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 얼마나 왔다갔다하겠어요?
한 가정의 운명을 책임진 책임자도 그 가정을 걸고 밤잠을 못 자고 그러는데, 하늘땅을 위해 일하는 책임자가 하늘땅을 걸고 밤잠을 못 자고 그러는 것이 얼마나 많겠나 생각해 보세요. 한번 잘못 결정하는 날에는 천지가 왔다갔다하는 거예요. 마음대로 될 것 같아요? 선생님이 적당히 생각해 가지고 움직이겠어요? 내가 피어린 투쟁과 피어린 담판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모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이 이렇게 하고 있는데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사람이 그냥 그대로 해서 될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러한 중차대한 문제, 세계가 왔다갔다하는 문제를 결정할 그 당시에 얼마나 심각했겠어요? 여러분은 그것을 모르지요? 암만 알려고 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나에게 '당신은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지?' 하면 그 한마디에 십년 이상 통곡할 수 있는 사연을 풍부히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죽을 때까지 갖고 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두고 볼 때에, 하나님을 따라 나가고 하나님을 모시고 나가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그러한 자세로 밀고 나가고, 자기가 참관할 수 있는 참관인이 될 수 있고 감시 감독할 수 있는 판단관의 입장에서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선생님에 대해서 더 연구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준 것은 탕감원리입니다. 이제부터는 뭐냐 하면 복귀원리를 가르쳐 줘야 됩니다. 여러분은 이 복귀원리를 모릅니다. 복귀를 하려면 선생님이 있어야 됩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탕감해 왔습니다. 이제 선생님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까지 선생님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렇잖아요?
그 다음에는 무엇이냐? 복귀가 다 끝난 후에는 창조이상의 생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복귀를 거친 후의 때가 영광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탕감의 노정과 복귀의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영광의 하나님을 못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자신으로는 탕감노정을 못 가는 것이요, 복귀노정도 못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을 의지하고 또 선생님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위기대가 되어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것이 사위기대 원칙이 아니냐, 결론이 딱 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효자인 아버지가 자기 아들한테 바라는 데 있어서, 자기가 아버지 앞에 효도한 것보다도 더 못하기를 바래요? 그래요, 안 그래요? 대답해 봐요. 그래요, 안 그래요? 「안 그렇습니다」 누구나 집안이 더 잘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아버지 앞에 효도한 것보다 더 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욕심입니다. 자기 집안이 세계적으로 발전하기 위하여, 흥성하기 위하여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통일교회 문 선생이 고생을 했으니 여러분을 문 선생보다 더 고생시키고 싶겠소, 안 시키고 싶겠소? 대답해 보라구요. 더 시키고 싶겠소. 안 시키고 싶겠소? 말은 잘 들었지요? 그래 어떤 거예요? 나는 죽을 자리에 가서도 효자가 되고 싶은데, 여러분도 그렇게 하겠어요? 모가지 짜른다고 해도 효도할래? 「예」 이것이 아들의 입장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효도하는 자식이 어버이한테 하는 도리가 아니겠느냐?
부모가 자식을 고생길로 내모는 이유
내가 고생했습니다. 여러분도 고생했지만 나도 고생했습니다. 청춘시대는 물론 일생 동안 고생했습니다. 나란 사나이도 멋진 사나이예요. 선생님도 이런 것 저런 것 생각하지 않고 살았더라도 멋지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욕심을 내 봤어요? 연애를 해봤어요? 전부 여자들한테 단련 받으면서 나왔어요. 나를 함정으로 몰아 죄를 한 무더기 덮어 씌우려는 일도…. 별의별 일들에 치였습니다. 기가 막히다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데데한 사나이가 아닙니다. 자기가 어떻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느냐? 왜 그렇게 나와야 되느냐? 그러지 않고는 안 되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지 못하면 복귀하지 못합니다. 신앙길이 따로 없습니다. 나에게는 무슨 명예욕도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몽땅 넘겨 주려는 것입니다. 주는 데는 무엇까지 넘겨 주려고 그러느냐? 내 아들딸까지 내 가정까지 여러분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알겠어요? 사랑하는 자식들까지 여러분한테 넘겨주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자식을 데려다 죽이겠어요?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또 하나님을 대해서 어떻게 가려 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더 어려운 문제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자기가 낳은 아들딸이니까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고 마음대로 가릴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하는데, 여러분은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 앞에 더 어려운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더더욱 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한 문제가 여러분에게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과 내 아들딸을 보게 될 때에, 선생님은 여러분을 내 자식보다 더 사랑합니다. 사랑했어요, 안 했어요? 여러분을 더 사랑했습니다. 처자식을 다 버리고 여러분을 사랑하려고 미쳐서 나온 것이 통일교회 길입니다. 그래서 복귀의 길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을 선생님의 아들딸로 만들려면 내 아들딸보다 더 사랑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되겠어요? 자기 아들딸보다 더 사랑하려면 훈련을 안 해 가지고 되겠어요? 사탄세계의 아들딸을 내 아들딸보다 더 사랑하지 않고는 망하는 것입니다. 이게 공식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가야 할 십자가의 노정과 피의 노정입니다. 이런 생애노정을 거쳐야 하나님의 제2의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그런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아이고, 선생님이 그렇다면 나도 그럴 게 아냐' 할지 모르나 입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나를 더 사랑하기 위해서 고생시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이 부모보다 더 못하기를 바란다면 망하는 겁니다. 그런 부모는 망하는 거예요. 잘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가혹한 시련 노정에 있어서 망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런 시련 노정에서도 내용을 갖춘 여러분을 내세우고, 그런 여러분을 사랑하면서 여러분을 걸어 하늘나라에 상정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 가지고 '당신이 찾아 나오던 복귀는 이런 것이요, 당신이 찾아 나온 사위기대의 도상이 이런 것이 아니겠소'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수 있게끔 하나의 조건과 기대를 조성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가혹한 길로 내모는 것을 강행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누가 알아주겠어요?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이 불평하게 되어 있어요, 안 하게 되어 있어요? 「안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원칙이 거짓말이라 해도 인정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신앙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됩니다. '선생님이 우리 앞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 일대에 하고 싶었던 모든 내용이다. 또 하늘 앞에 억울한 모든 고비 고빗길을 뜻 앞에서 다 넘길 수 있도록 대신 조건을 세워주기 위해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마움을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빚진 자의 자세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 가운데 선생님하고 사돈 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를거라. 그렇잖아요? 얼굴이 잘난 사람과 사돈 될 것인가, 어떤 사람들과 사돈 될 것이냐? 그런 생각 안 해봐요? 여러분이 생각이 깊으면 그런 생각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선한 조상으로서 선한 길을 가겠다면 이렇게 이렇게 엮어 가지고 땅을 대신하고 하늘을 대신한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애기를 밸 때부터, 애기를 낳아서 기를 때부터 눈물로써 정성 들이고, 밤을 지새워 가면서 하나님 앞에 정성들일 수 있는 가정이 어디에 있겠느냐? 이러한 가정을 하나님께서 찾으실 것 아니예요? 이런 큰 뜻을 품은 사람들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통일교회 교주로서 그런 면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받는다는 것보다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줄 것인가, 잠을 안 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도 그래요. 공장에 가게 되면 열두 시까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동정을 안 합니다. 나는 열두 시가 아니라 한 시 두 시까지 한다 이겁니다. 이 바쁜 시절에 슬픔이, 괴로움이 문제가 아닙니다. 안 먹고, 안 자고, 안 쉬고 정성을 다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한다고 하는 데 있어서 안 먹고 안 자는 것하고, 먹고 자는 것하고 어느 것이 정성을 더하는 것입니까? 어떤 것입니까? 먹고 자면서 일하는 것보다도 안 먹고 안 자며 하는 것이 정성에 있어서 못한 거예요, 더한 거예요? 「더한 것입니다」 그거예요. 남이 먹을 때 먹고, 남 잘 때 자고, 남 말할 때 말하고, 남 놀 때 놀고서 어떻게 정성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느냐 이겁니다.
요즈음에도 내가 열두 시에 자게 되면 두 시에도 일어나고 그럽니다. 그런데도 낮에 활동하면 피곤한 줄 모릅니다. 머리가 아픈 것도 모릅니다. 그런데 차를 타면 자신도 모르게 잘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런 시간에는 하나님께 미안하다고 기도하면서 자는 거예요.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더불어 같이 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때에는 무심코 자다가 놀라 깨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이 계속되기도 합니다. 그런 때에는 운동을 합니다. 선생님은 특별한 운동을 합니다. 노곤할 때에는 신나는 운동을 합니다. 운동까지 연구해 가지고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앞으로 여러분에게 그 운동법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비법도 생각합니다. 그러한 비법도 생각해 가지고 일합니다. 내가 이미 나이 50이 넘었는데 한 20년, 80세까지는 이렇게 돼야 될 텐데…. 선생님 나이가 몇 살 때가 2천년이예요? 내가 2천년 역사의 고비를 넘는 날에는 이렇게 돼야 될 텐데 하면서 최후의 역사 앞에 표적을 맞추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맞아 떨어져야 할 텐데…. 그 생각 외에는 뭐 다른 게 없습니다. 지금까지 고생을 해 나왔습니다. 죽을 건데 어때요? 석양을 향해 가는 노인이 아까울 게 무엇이 있겠느냐? 선생님은 이렇게 생각하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런 각오를 하고 가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를 따라가는 신앙자의 자세는 본질에 가깝고, 본형에 가깝고, 본기준에 일치될 수 있는 그런 자세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인격적인 면이라든가 모든 면에 있어서 천추만대에 하늘 앞에 있어서, 땅 앞에 있어서, 영계에 가서까지 자기의 후손들 앞에서 칭찬받고, 흠모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통일교회를 믿었다는 위신이 서겠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이런 엄청난 문제가 여러분이 이제부터 가는 길 앞에 남아진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바쁜 것입니다. 나 같으면 그저 하루에 세계를 전부 다 뒤집어 엎고 싶어요. 전부 다 요거 요렇게 하고 요렇게 하면 틀림없이 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맞춰 가면 통일교회 패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올 때까지 영계를 통해서 예우를 해 가지고, 울타리를 해 가지고 들이 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은 복종할 줄 알아야 돼요.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은 1971년도에 여러분 가정의 주부들을 내보내고 있는 통일교회의 움직임을 알아야 됩니다. 아시아의 현재 입장이 얼마나 절박해요? 그렇잖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에 결정을 했으면 딱 나서는 것입니다. 세계가 지금 얼마나 절박한 입장입니까? 세계와 대한민국과 우리 통일교회가 딱 한 고빗길에 있습니다. 이것을 잡아채서 하나가 풀리면 다 풀리는 겁니다.
그러니 보세요. 세 가지 제물을 쪼개는 기준에 맞는 것입니다. 세계 정세와 아시아 정세와 한국 정세를 중심삼고 한 제단에서 제물을 쪼개는 때가 온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것에 대해서 최후의 결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고 자나깨나 통일교회 신앙자로서 취해 나가야 할 자세, 빚진 자의 자세를 갖춰 공의의 법도 앞에서 하나님의 동정의 마음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절실히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기 도
아버지, 저희는 진정 당신이 그렇게 심각하셨던 분인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저희는 당신이 심정에 사무친 정열을 가지고 인류를 찾아오셨다는 것을 진정 몰랐습니다. 당신이 치열한 사망권과 싸우시기 위해 하루도 쉬지 못하고 6천년간 싸움의 노정을 거쳐오신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가 쉬는 시간에도. 생각하지 않는 시간에도 당신은 얼마나 초긴장한 자리에서 싸움을 계속하고 계신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 싸움의 주인이 당신이 아니라 아들이요 딸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할 적에 주위에 아들딸이 없이 싸우는 아버지의 서글픔이 얼마나 컸다는 것을 직시하고도 남음이 있사옵니다.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고도 남음이 있을 수 있는 역경에 있어서도 오늘날까지 소망의 아들딸을 부르면서, 바라보면서 싸워 나오신 아버지인 것을 아옵니다. 그런 아버지 앞에 오늘날 통일교인이 당신의 절망을 오히려 촉구시킬 수 있는 한 모양의 아들딸이라 생각할 때에 어이없고 면목이 없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이 자식이 철부지한 그때서부터 오늘까지 이끌어 주신 수고를 생각하면서 역경의 노정을 가일층 책임지시며 저희들을 권고해 나오신 당신의 깊은 뜻 앞에 진실로 감사드리옵니다.
오늘날 이 시점에까지 왔사옵니다. 믿을 분은 당신밖에 없고, 의지할 분도 당신밖에 없습니다. 사연을 터놓고 인연을 맺을 분도 당신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인간과 인연을 맺다 보면, 그것은 절망의 대상이 될 뿐이요, 신앙인으로서의 노정을 걸어 나오다 보면 마음에 화살을 꽂고 마는 것이 인간의 빈번한 역사적인 사실인 것을 많이 보았고, 많이 당했고, 많이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버릴 수 없는 하늘의 운명길이 남았기 때문에 이 길을 극복할 수 있는 생활을 연속시켜야 할 책임이 오늘날 통일교단을 지도하는 여기에 서 있는 아들의 책임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고요한 가운데서 당신이 분부하신 그 말씀, 저를 품고 사랑하시며 몸부림치시고 통곡하시던 당신의 그 사정을 제가 알았사옵니다. 제가 당신이 소원하는 그 자리에서 충효를 낳은 결과의 세계를 못 이루면 당신을 부르지 않겠다고 각오한 것을 당신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곳을 향하여 가는 데 있어서 세월이 흘러가고 환경이 변할지라도 임을 향한 일편단심, 그 마음이야 변할 수 있겠습니까? 날과 시간이 거쳐가고 환경의 어지러움이 더할 적마다 당신의 마음 깊은 자리에 저희가 들어가 처할 수 있게끔, 당신께서 저희를 이끌어 주신 은사를 고맙게 생각하옵니다.
세상이 뭐라 하더라도 당신과 이 뜻은 남아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뜻을 위해 수고하는 무리들도 기필코 남아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거쳐가야 할 수난의 노정이 남아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기뻐하실 수 있는 당신의 형상을 바라는 아들이 있고 딸이 있거든, 이 길이 응당 인간으로서 가야 할 길이요, 타락한 슬픔의 한의 고개를 극복하여야 할 운명길인 것을 알게 하시옵소서. 그러기에 감사의 일념을 자기 생애의 후덕으로 남기면서 가야 하는 것이 저희 통일교단에 선 하나의 신앙자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자세를 갖추어 가겠다고 이 시간 결심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배가 고픈 것이 슬픔이 아니옵고, 환경에 몰려 억울한 자리에 선 것이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것, 그 이상의 슬픔이 없는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는 자리는 아무리 없는 자리일지라도 무한히 있는 자리요, 아버지가 계시는 자리는 지옥의 중심일지라도 천국으로 화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저희들은 죽으나 사나 있어야 할 곳은 아버님이 계신 곳밖에 없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님 밑에서 저희의 행복이 있는 것이요, 아버님 밑에서 저희의 소망이 있는 것이요, 아버님 밑에서 저희의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이와 같이 저희들의 모든 승리의 요인이 되고, 행복의 요인이 되며, 결정적 가치의 기준이 될 수 있는 분이 우리 아버님이라는 사실을 미처, 미처, 미처 몰랐나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외적인 무엇을 추구하기 전에 내 마음 깊은 가운데에 이미 가치 있는 내용을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너와 나의 행복의 기원이 어떠한 피안의 대상적인 세계에 있는 줄 알았더니 저희 마음속 깊은 데에 이미 그 뿌리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통일교단을 통하여 새로이 부활된 생명의 총아로서 아버지 품에 안길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을 고대한다 할진대, 저희 자신은 그런 자리에 서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러하오니 겸손히 뜻을 대해 온유의 화신체가 되어 당신의 동정을 살 수 있는 귀여운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통일교회 신앙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였사오니, 이들이 새로이 결심하여 아버님을 위한 충의 도리, 효의 도리를 다하는 금후의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요, 과거 현재 미래를 위한 건설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있는 자신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고귀한 생명의 가치를 스스로 느끼면서 아버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귀여운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서울에 있는 자녀들이 야외에서 집합하겠사오니 그 자리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나아갈 장래와 저희들이 소망하는 나라와 저희들이 아버지를 모시는 영광의 한때가 당신의 사랑과 더불어 인연되어 성사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이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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