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내가 태어난 집은 새마을 사업이 시작될 때까지 존재했던 초가집이다.
할머니와 함께 지낸 곳이며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초가집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그때까지 시골은 큰길 아니면 집으로 가는 대부분의 길은 사람이 겨우 걸어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었다. 어쩌다 지게를 지고 오는 사람과 마주치면 한쪽으로 비켜서서 잠시 멈춰야 했다. 길옆으론 좁다란 도랑물이 흘러갔다. 도랑물은 집에서 나오는 생활하수가 그대로 흘러들어 갔다. 지금처럼 화학제품이 드물었던 시절이어서 환경오염까지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시궁창이 되어 버린 도랑에는 모기유충을 비롯하여 실처럼 생긴 실지렁이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징그러운 벌레들이 바글바글 했다. 어쩌다 발을 헛디디는 날이면 시커먼 시궁창에 빠지면서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난 냄새보다 더 무서운 거머리에 물릴까 봐 기겁을 하여 도랑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젤 위쪽에 위치하였다. 경사진 외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집 사립문 앞에서 길이 뚝 끊어진다. 거기서부턴 뒷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로 이어진다.
사립문에 들어서면 좁고 긴 안마당이 눈앞에 펼쳐진다. 안마당의 전면엔 높이가 1m 남짓 되는 돌담이 있다. 돌담 밖은 채마 밭이다. 사립문 위치에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지금은 윗동네로 올라가는 넓은 길이 바위 뒤쪽으로 생겼지만 당시만 해도 바위가 있는 뒤쪽은 산기슭이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집터를 잡을 때 산기슭 바로 앞에 잡는 바람에 바위까지 울안으로 들어온 셈이다. 특이하게도 집체만 한 바위 아래쪽은 안으로 우묵하게 경사져 산에서라면 야생동물이 은신처로 삼을만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 깊고 음습한 안쪽에서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 물이 흘러나온다. 우리 식구들은 그곳을 ‘안샘’이라 불렀다.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땐 수량이 풍부해서 돌을 쌓아 물을 가두어 놓고 식수로 사용하였다. 넘치는 물은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알차게 사용했다. 물이 흘러가는 길에 두어 자 넓이의 도랑을 만들고 한쪽에 넓적한 돌을 깔아놓고 빨래를 하거나 체소를 손질하는 받침으로 썼다.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의례히 거기서 누나 아니면 어머니께서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뵈는 듯하다. 한 번은 빨래를 하느라 정신없는 누이의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살아있는 개구릴 잡아 목덜미 속으로 집어넣고 냅다 도망을 친 적도 있었다. 나는 후다닥 달아나면서도 누이의 커다란 비명과 함께 육자배기 욕지거릴 들으며 킬킬댔다. 밖에선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면서 집안에선 늘 말썽꾸러기였던 것이다. 사실 내 뒤에 할머니의 든든한 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샘 곁을 지나 본채로 가기 전에 외양간이 있다. 당시만 해도 집에 소 한 마리 키우면 부자 소릴 듣던 때였다. 조부께서 살아생전 나름 유명한 한의원이셨다. 농사일엔 거의 신경 쓰지 않고 환자들을 고쳐주고 번 돈으로 먹고 살만 하였다고 한다. 외양간엔 암소가 살았다. 일 년에 한 번씩 송아지를 낳으면 그것을 팔아서 생활에 보태 쓰곤 하였다. 외양간은 본채의 왼쪽 머리에서 기억자로 튀어나오듯 별도의 부속채로 지어졌다. 그러니까 본채 툇마루에서 보자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외양간 정면이었다. 외양간은 소의 등이 부딪히지 않을 만큼의 높이에 통나무 다락을 구비하였다. 정면에서 보면 공간이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별도의 문은 없다. 그곳에 각종 농기구나 살림도구들이 얹혀 있다. 외양간 전면은 커다란 구유가 소의 머리 정도 높이에 설치되었고 그 아래와 옆은 소가 빠져나오지 않을 만큼의 나무를 세워 고정했다. 외양간의 좌우와 배면은 낮은 중방 아래로 토석을 버무려 토담을 쌓고 중방 위는 널빤지를 세로로 세운 판벽이다. 아버진 늘 싱싱한 꼴을 베어와 구유나 외양간 바닥에 던져 주곤 했다. 겨울철은 커다란 가마솥에 쇠죽을 쑤어 구유에 부어주었다. 쇠죽은 볏짚을 잘게 자른 여물과 콩깍지와 가을걷이를 하고 얻은 말린 고구마 줄기 또는 옥수수 줄기 같은 것이 함께 들어있다. 쇠죽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면 쌀겨를 두어 바가지 집어넣고 골고루 섞었다. 쇠죽에선 이런저런 것들이 혼재된 구수한 냄새가 났다. 우적우적 쇠죽을 맛있게 먹는 소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건 내겐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본채는 기억자형으로 구성되었다. 정면 4.5칸, 측면 1.5칸이며 우측에 1칸이 튀어나온 충청도 지역의 전형적인 고패집 양식이다. 지붕은 당연히 초가집이다. 전면은 두자 이상 되는 높은 축대 겸 기단을 쌓았다. 배면 기단은 별도의 기단석이 없는 토단으로 구성되었다. 집의 왼편과 오른편은 경사진 기단인데 왼쪽 기단 옆으로 바위로 올라가는 좁다란 길이 나있다. 바위 윗면이 평평하여 장독대로 사용하는데 고추장과 된장 또는 간장 등을 푸러 갈 때 오가는 길이다. 바위의 윗면은 지금도 동일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집의 왼쪽 머리는 정면 1.5칸 측면 1.5칸으로 부엌이다. 오래되어 삐딱하게 기울어진 두툼한 널빤지 문을 열고 들어가며 보이는 왼쪽 반간이 나무를 쌓아두는 나무 간이고 그 뒤로 쌀이나 콩과 같이 주요 식량원을 보관하는 토광이다. 나뭇간과 토광을 거느린 부엌은 전후면 통간으로 안방과의 벽을 사이에 두고 부뚜막과 아궁이가 있다. 부뚜막엔 세 개의 무쇠 솥이 걸려 있다. 가장 뒤쪽에 있는 솥은 요즘으로 치면 야외에 걸어두고 쓰는 양은솥단지 만한 일명 국솥이다. 가운데는 제법 큰 솥인데 밥을 짓는 밥솥이다. 전면에 위치한 가장 큰 솥은 물솥으로 추운 겨울철 주로 물을 끓일 때 사용했다. 그 외에도 고구마를 삶거나 옥수를 찌는 등 특별한 요리를 할 때 이 솥을 사용하였다. 물솥 바로 오른쪽엔 툇마루로 드나드는 쪽문이 있다. 이곳을 통해 매 끼니마다 밥상이 들며 나며 했다. 특별한 볼일이 아니면 사람이 드나들진 않았다. 안방과 윗방 전면은 툇마루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등을 기댈 수 있는 툇마루 툇기둥에 몸을 기대고 놀던 기억이 난다.
툇마루는 기단에서도 꽤 높은 위치다. 어린 내가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발이 기단바닥에 닿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자반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마루판은 하도 밟고 다녀서 잘 익은 오디 색이다. 안방과 윗방은 세 살 외여닫이문으로 드나들었다. 안방의 배면엔 배꼽만 한 창문이 하나 달려 있고 윗방은 출입문 외에 별도의 창문은 없다. 부엌 위로 다락이 있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내 기억 속에 다락과 관련된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별도의 다락은 없었던 것 같다. 안방에서 윗방 사이에 사잇문이 하나 있는데 높이가 낮아 늘 머릴 숙이고 드나들었다. 안방에선 할머니와 부모님이 함께 거주하셨다. 나는 늘 할머니와 함께 했으니까 당연히 안방에서 잤다. 누이들은 윗방에서 함께 생활을 했는데 윗방이라는 것이 방이기도 했지만 겨울철엔 고구마를 보관하는 장소요 집안의 갖은 옷가지를 보관하는 장롱이 윗목에 한 자릴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좁디좁을 수밖에 없다. 거기서 누이 셋은 잠들기 전까지 늘 쌈질을 했다. 서로 좋은 자릴 차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호통소리에 겨우 잠잠해지면 등잔불이 꺼지면서 집안은 그야말로 깜깜 절벽이었다. 툇마루는 윗방 앞에서 뚝 끊어졌다. 대신 봉당처럼 생긴 바닥이 나오고 그 옆에 커다란 쇠죽솥이 걸려 있다. 봉당에 높은 댓돌이 하나 놓여있다. 그걸 딛고 엉거주춤 안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방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빌리자면 그곳이 조부께서 쓰시던 침방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병실인 셈이다. 할아버진 평생을 이 방에서 생활하셨다고 한다. 환자를 치료하는 방인 동시에 사랑방 같은 공간으로 보면 되겠다. 조부께서 돌아가시자 빈 방이 되어 각종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로 변했다. 언젠가 손님이 대낮에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그분은 특히 나를 귀애하셨던 모양이다. 오자마자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찾았다. 그게 영 부끄러워 얼른 할아버지가 쓰시던 창고로 숨어들었다. 날은 덥지 오신 손님은 얼른 가시질 않지 난 그 안에 숨어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릴 적 나는 어지간히 숫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쇠죽솥이 있는 전면으로 한 칸이 튀어나왔다. 별다른 벽이 없이 헛간처럼 뻥 뚫린 공간이다. 이 공간은 조부께서 살아계실 땐 각종 한약재를 보관하거나 제조하기 위한 용도를 쓰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고 집을 조부께서 지은 건 아니다. 귀동냥으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조부의 고향은 타지이며 이곳에 들어오시면서 남의 집을 샀다는 것이다. 대충 헤아려 보아도 지금부터 약 백여 년 전에 지어진 집이라고 보면 되겠다.
본채의 동쪽에 변소가 위치한다. 사방 한 칸에 해당하는 크기인데 재를 버리는 장소와 볼일을 보는 장소가 따로 구비될 만큼 꽤 큰 변소다. 특이하게도 벽을 순수하게 돌로만 쌓고 사모정처럼 추녀를 걸고 그것에 의지하여 서까래를 조립하고 초가를 이어 마감했다. 전면 한쪽으로 치우쳐 열린 곳에 별도의 문은 없고 거적 대기 하날 도리에 매달아 놓았다. 멍석처럼 짠 거적이 얼마나 무거운지 힘없는 나는 볼일을 볼 때마다 힘차게 휙 하고 젖혀야 했다.
할머니께서 홍시를 참 좋아하셨다. 아버진 홍시를 따서 항아리에 담아두고 겨우내 할머니의 간식으로 잡숫게 하셨다. 그 홍시 역시 당연히 내 차지가 되었다.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고 결국엔 탈이 났다. 그것도 이만저만한 탈이 아닌 엄청난 큰일이 터지고 말았다.
섬유질로 가득한 홍시를 얼마나 먹었는지 배변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나오질 않았다. 할머닌 용을 쓰며 괴로워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곁에 오셔서 “그려 그려 한 번만 더 힘을 주거라 옳지 어이구 내 새끼 죽네” 할머니의 비명에 아버지께서 달려오셨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나의 소중한 밑이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진 얼른 양말을 찾아 불에 뜨듯하게 데워가지고 오셔서 나의 소중한 그것을 살살 구슬리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참말로 기가 막힌 일이다. 어찌어찌해 나의 소중인 다시 제 집으로 들어갔고 사건은 일단락 지었다. “엄니 그러니까 얘한테 자꾸 홍지 먹이지 말어요 이러단 사람 잡것슈” 할머닌 아무런 말씀을 못하였지만 새끼만 괜찮으면 되었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날씨가 포근한 겨울 어느 날 높은 기단 아래에다 삼태기를 세워 놓고 그곳에 등을 기대고 해바라기를 하며 놀았다. 그때 내 손에 예쁜 구슬이 세 개 쥐어져 있었다. 구슬을 들어 햇볕에 비추면 영롱한 구슬 속에 아름다운 형상이 보인다. 각각의 구슬마다 색다른 세계가 구슬 속에 숨어있다. 그걸 요리조리 들여다보았다. 거기까진 좋았다. 왜 그걸 입속으로 털어 넣은 건지 아직도 난 모르겠다. 오물오물 사탕처럼 빨다가 그만 꿀꺽하고 목구멍 속으로 구슬들이 넘어갔다.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곧 죽을 거라고 생각을 하였다. 울면서 할머니께 달려가 자초지종을 알렸다. 할머닌 걱정하지 말라며 “이따가 똥이 마려우면 변소에 가지 말고 마당에서 보거라 그러면 나올 거야” 나는 이제나 저제나 그것이 마려우길 고대하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드디어 푸드덕 암탉 소리가 나면서 내 소중인 다시 큰일을 해냈다. 할머니께서 나뭇가지를 하나 들고 오셔서 거시기를 뒤적뒤적하며 “아가야 다마가 몇 개였냐” “시 개유 할머니” “그려 됐다 여기 다마 세 개가 다 나왔구나” 하시며 거시가 묻은 구슬을 내게 보이셨다.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방금 전까지 울상을 짓고 있던 나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날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