玉葬 과 관련된 전통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홍산문명>의 옥장풍습이 동이의 장례문화중에 하나로서 수천년간 전통적으로 내려온것이라 추론할수 있습니다.
좌계님의 옥갑에 대한 <침묵거래>로부터 , 백송님의 후한서의 옥갑내용의 서술과 아울러 김성겸님의 부여와의 한 사이에 옥갑의 조공장소인 柵構婁의 내용들이 무려 <후한서>로 부터 삼국지 <위지동이전> 부여조, 후대에 당시대 두우의 <통전>에 이르기 까지 옥갑의 사용과 魏 문제의 薄葬令에 의해 금지 되기까지의 과정이 비교적 詳述 되어 있다고 하는것입니다.
옥갑은 분명히 동이족의 고대문명인 홍산유적에서 부터 평양 최씨낙랑유적에 이르기까지 지역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져 왔다는것이고, 한서지리지에 기술되어 있는 25개 제후국은 한나라가 범접을 할수없어 자치권을 그대로 인정할수밖에 없었던 동부해안지역의 동이국가들이었다고 판단이 됩니다.
부여는 당대 최강국이라는것이 위략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옥갑의 기술은 홍산,고조선에서 시작되어 국제무역관계의 기술분화에 의해 부여국에서는 3d산업으로 더이상 만들지 아니하고 ,어느시기로 부터 한나라에서 기술을 전수받아 부여국과 <침묵거래>한것 아닌가 판단이 됩니다.
따라서 <주몽>에 보이는 한나라 철기군 ,철검,주몽의 볼모는 고서적 하나 들추어보지 않은 작가의 무식의 소치로 밖에 볼수 없겠습니다.
옥갑은 황제만 사용할수 있는 <金縷玉衣>와 황후,태자들만 사용할수 있는 <銀縷玉衣>와 황제 친외척만 사용할수 있는 <銅縷玉衣>세 종류로 나누어 집니다.
옥갑의 발굴지는 하나같이 하북성,강소성 지역이며 지나학계의 발굴지 설명을 보면 전부 <제후왕>로 되어있고 한왕실의 유씨라 하고 있으나 불분명하게 해설함을 볼수 있습니다.
문제는 유방이 건설한 前漢에서는 옥갑의 기록이 없다는것 입니다. 왜 후한인 東漢의 기록에만 보이는것 일까요?
아래 사항을 보시면서 옥갑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한은 부여와 옥갑으로 <침묵거래>를 하면서 부여의 앞선 문명과 군사력으로 그들과의 직접적 무력충돌을 달래고 고구려와 같은 신진 성장세력을 제어하여 달라고 하는 국제간의 거래로 옥갑을 현토를 통해 사용하였을것으로 보입니다.
심제 (구)도불원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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