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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2:1-4 들은 것에 더욱 유의하라 찬송: 3, 26, 312장 교독문: 요일 5:1-12
성도의 믿음과 관련하여 히브리서에서 가르치는 바를 생각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에 대하여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편지요, 설교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전의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들을 향한 귀한 권면을 내포하고 있으며, 2차 증인들로 부름을 받은 성도들에게도 그의 신앙을 바르게 지켜가기 위한 방법과 내용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를 위하여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먼저 말하고 있는데, 이는 성도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세우도록 권면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는지에 대해서, 특히 대제사장으로서 당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신 귀한 사역을 감당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음을 설파하면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 3)를 헛되이 대하지 말 것을 권면한다.
이러한 논지를 계속 이어가는 가운데, 본문에서는 앞장에서 대조했던 예수님과 천사의 비교를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1절에서 말하는 대로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는 권면이다.
이 권면을 왜 하는가? 앞에서 말한 대로 어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들은 바 구원의 도를 버리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들은 것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복음의 내용이다. 이 내용은 히 1:2에서 들었던 대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이다. 그리고 이 아들은 “만유의 상속자”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그 본체의 형상”이 되신다. 그렇다. 우리의 구주는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왕적 메시아요, 구속주요, 그리고 창조주가 되시며, 우리에게 친히 찾아오시어서 우리의 구원을 십자가에서 이루셨다.
바로 이 놀라운 구원의 사실,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느냐는 염려와 권면의 말씀이 본문의 말씀이다. 어떻게 이러한 귀한 사실을 들었음에도 그것을 떠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1절에서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고 강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면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하여 2-4절에서 구약과 신약의 증언을 비교하면서 무엇이 더욱 큰 것인가, 무엇이 더욱 중요한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에 불순종한 자들의 결말과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의 결말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큰가를 비교하는데, 우리 주의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구약의 공정한 보응보다 더 큰 보응을 피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천사들을 통하여 주신 말씀은 모세의 율법을 의미하는데, 행 7:53을 보면 스데반의 설교 가운데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는 말씀이 있으며, 갈 3:19을 보면 바울이 “율법은…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 오른편에 천사들을 대동하셨다고 생각했다. 물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는데, 스데반과 바울은 천사들을 메신저, 즉 대언자로 생각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가 천사를 언급하는 이유는 히 1장에서 천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하였기 때문이다. 천사들을 통하여 주신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공정한 보응”이 내려질텐데, 천사와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주신 복음의 말씀을 등한히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응이 그것보다 작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이렇게 비교함으로써 저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굳게 지킬 것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위협이 아니라 권면이다. 지금 무엇을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가르침으로써 이 믿음을 더욱 지켜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만큼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 복음이 가장 값진 것임을 가르치면서 이 복음을 굳건하게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복음은 누구를 통해 주어진 것인가? 3절 하반절을 보면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 복음을 가르치고 십자가에서 친히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 복음을 친히 보고 들은 제자들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였기에, 히브리서의 편지를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의 자리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여기에 더욱 귀한 증인이 계신데, 그분은 바로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시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께서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으로 이 복음의 증언에 동참하셨고, 또 성령 하나님께서도 “자기의 뜻을 따라” 이 복음의 확고함을 명확하게 증명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받은 구원의 복음은 결코 물러날 수 없는 가장 귀한 보물이 되는 것이며, 끝까지 견고하게 지켜야 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부 하나님의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은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는 달리 그들의 어려운 삶의 환경 가운데에서도 그들을 굳게 지키시는 은혜를 의미한다. 또한 성령의 “자기의 뜻”도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구원을 적용하신 후 그와 계속 함께 하시는 은혜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은 눈에 보이는 인간 증인들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며, 이 복음은 또한 삼위 하나님께서 확증한 것으로, 우리가 받고 고백하는 이 구원의 복음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복음을 굳게 붙드는 것만이 성도가 지켜야 할 믿음의 내용이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히브리서 저자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2세대 증인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복음을 들은 1세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고, 이 제자들을 통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복음이 전달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천사에 대해, 구약의 율법에 대해, 그리고 왕적 메시아에 대한 예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1세대 증인들로부터 구약의 모든 예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고 있음에 대해서도 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구약의 율법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6장에서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히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저자는 여기에서 둘을 비교하고 있다. 성도 가운데 여전히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자들에게 완전한 자리를 소개하고 있다. 이 자리가 어디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자리이다. 이렇게 완전한 데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미 배운 교훈의 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약속하는 영원한 안식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 그치는 삶이 아니라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통해 부활하여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 이 믿음의 내용을 1세대 증인들에게 들었으며, 이 증언을 믿는다고 고백을 했다면 이 믿음의 고백을 더욱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쓰인 시기는 A.D. 65-70년 사이로, 복음은 계속 멀리 퍼져 나가고 있지만, 박해와 반대도 시작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신앙의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고, 신앙이 보장하는 미래가 전혀 준비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전의 유대교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회의가 들었고, 이때 이미 돌아간 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는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탁월하심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받은 믿음 안에 계속 머물러 있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는 어떠한가? 우리의 믿음은 지금 어느 상태에 있는가? 진실로 확고한 믿음 위에 서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장 탁월하여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나의 이 믿음을 흔들 수 없다고 확신하는가? 초대교회 당시의 성도들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을 비교해 보라. 그들의 박해와 환난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솔직히 우리의 삶은 참으로 평안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더욱 평안하길 원한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마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솔직하게 우리의 믿음 없음에 대해 고백해야 한다. 그저 예수를 믿으니 천국에 갈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우리의 소망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진실된 믿음,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나의 구주요, 나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고백하며, 이 믿음을 따라 우리의 삶을 여기에서 바르게 세우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심판이 사라진 시대가 되었다. 가정에서 자녀를 체벌하지 않고 귀하다고만 하니 아이들이 방자하게 행동한다. 교회에서 잘못한 성도들을 권징하지 않으니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교인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렇게 심판을 듣지 못한 자녀들이나 교인들이 체벌을 받거나 권징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것은 즉시 반항으로 나타나고, 그들의 신앙을 버릴 것은 뻔한 사실이다. 그래서 가정이나 교회나 그저 좋은 이야기만 하는 곳이 되어 버렸고, 어떤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제재(制裁, 규칙의 위반에 대하여 제한하거나 금지함)를 선언하거나 제지(制止, 말려서 못하게 함)하거나, 분명하게 지켜야 할 바른 내용을 가르치는 일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가 어떻게 믿음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본문에서 저자는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에 대하여 “공정한 보응” 즉 심판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못 박고 있으며, 이와 비교하여 우리가 받은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면, 그 심판은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한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에 의해 계속하여 전달되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다. 이 심판의 내용이 울려 퍼지지 않으니 교인들이 방자하게 행동하며, 어떤 행동을 하여도 제지를 받지 않으니 신앙을 빙자하여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복음의 증인들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과연 우리의 믿음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꼭 붙들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믿음을 확고하게 세우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1절에서 말하는 대로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해야 한다. 우리가 들은 말씀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물살에 휩쓸려 위험한 곳으로 떠내려 가거나, 무한히 가치 있는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말씀을 쉽게 잊어버리거나 역경을 만나면 쉽게 빗나가는 사람들, 염려나 욕심에 쉽게 휩쓸리는 사람들은 결국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말씀을 읽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관심도 없으면서 아직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며, 후에 주어질 “큰 보응”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성도의 삶은 헌신과 책임이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달 받은 복음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 이전 세대의 믿음을 우리가 이어 받아야 하는 책임이요, 그렇게 증언을 받았다면 그 증언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이며,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저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며, 분명하게 그의 삶이 변화되어 헌신과 책임으로 나타나야 한다. 항상 두 가지를 비교하라. 성도로서의 헌신과 책임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에게 주어질 것은 심판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받은 큰 구원을 귀하게 여긴다면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영원한 안식이라는 선물이 주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