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김흥수와 마광수와 나는
-흐르는 것이 어디 시간뿐인가요
김종희|수필가, 인문강사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의식은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입니다. 감각적 욕망의 존재인 내가 걸어가는 길은 또 어떤지. 그 길에서 마주해야할 숱한 선택과, 그 순간의 딜레마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는 어쩌면 오지 않는 사건에 대한 기우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눈앞에 펼쳐진 어떤 감각적 욕망은 나를 소외시킵니다.
김흥수의 작품 <파계승>은 욕망의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고민입니다. 한편 감각적 욕망을 절제하는 용기를 가진 인간의 의식을 병치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파계승>은 김흥수 화백이 가졌던 인간에 대한 철학적 물음의 완결판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저는 그렇다고 힘주어 말하기도 합니다.
철학과 석사과정 첫 학기 봄날이었습니다. 90명이 들어가는 운동장 같은 강의실에 달랑 4명이 불교철학 강의를 들었습니다. 여고 시절 불교학생회라는 연합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그해 여름 불국사 무설전에서 열린 일주일간의 수련회 이후 불교와 직접 만남은 처음이었습니다. ‘불교철학의 이해’로 개설된 강의는 우리 예술을 읽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되었으니 생각할수록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오월의 강의실, 밖은 화창하지만 콘크리트 강의실이 주는 냉기는 어깨를 움츠리고 무릎을 당겨 모아도 온기가 자꾸만 빠져나갔습니다. 시멘트 사이에 박힌 곰팡내들이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라와 손끝으로 빠져나가고 그럴 때마다 모든 감각이 밖으로 향했지요. 참을 수 없는 봄추위는 치기 어린 용기를 세웠고 마침내 당돌함으로 스님께 어떤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스님, 안은 춥고 밖은 꽃피는데 잔디밭에 앉아 소풍처럼 강의하시면 안 될까요.
-그럽시다.
콘크리트를 벗어난 세상은 황홀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지나며 남기고 간 풋풋한 향수에 아득한 길이 열리는 듯 했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강의실을 벗어나니 또 다른 욕망이 생겼습니다.
-스님, 이리 밝은 날에 스님의 일방적인 강의 말고 저희 질문에 답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럽시다.
질문이란 게 용기를 필요로 하잖아요. 첫 학기 수강생 셋은 저의 만행에 그만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질문이란 길의 시작입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그 순간이 가장 지혜로운 순간이라고 고대 그리스 신전에 주련처럼 걸려있었다지요. 빗장을 풀어 마침내 내 길을 걸어가는 시작이 질문입니다. 하지만 질문하지 않는 인간이 칭찬받는 교육을 받아왔던 당시로서는 질문이란 어쩌면 건방짐의 다른 말이었는지도 모르지요. 하긴 젊은이들에게 질문하게 했다는 죄명으로 독배를 받은 소크라테스도 있으니, 질문이란 기존의 질서에 파격을 가져오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날따라 궁금함이 옻오른 가려움처럼 스멀거렸습니다. 욕먹을 각오로 스님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스님,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요, 들어 봅시다.
-스님. 사람의 욕망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건가요. 욕망이 그렇게 두려운 것인가요. 영화 <아 제 아제 바라제>에서 토굴 수행자는 날마다 끓어오르는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자신의 남성을 거세하던데... 욕망이 무엇이기에 그 지경까지 가야 하는 것인지요... 더 궁금한 건 스님도 아침이면 그렇게 서는지요.
예상치 못한, 아니 위험천만한 이 질문에 동료들은 사색이 되었습니다. 금기를 건드린 것이지요. 해서는 안 될 말, 그것도 지엄하신 스님 앞에서 저급한 욕망에 대한 궁금함을 감히 들이댔으니 그 상황은 상상이 가고도 남지요. 모두가 아연실색, 눈치만 살피고 그 눈치가 나에 대한 어이없는 분노로 타오르는 그때였습니다.
-그럼요. 나도 스님 이전에 인간인걸요. 감각적 욕망이야 인간의 본능이지요.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 욕망이 있지요. 그러나 스님들은 욕망을 없애기 위해 간화선 수행을 끊임없이 합니다.
아 ! 나는 그날 ‘나도 스님 이전에 인간’이라는 스님의 말씀에 불쑥 일어나 삼배를 올렸습니다. 이후 불교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깊어졌고 알아차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매미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신생, 죽어야 죽나 살아야 죽지 그러니 ‘탁’ 순간을 영원으로 마주할 뿐 아닌가요. 감각적 욕망을 절제하는 그 순간 ‘탁’ 가리마 타듯이 어떤 용기가 하얀 길을 내는 것이겠지요. 이것과 저것, 선택의 딜리마에 빠질 때 우리를 탁월함으로 이끄는 것 또한 ‘탁’ 깨지며 다가오는 어떤 의지 아닌가요. 인간은 그런 의지의 존재인 것이지요.
<파계승>의 도상 구성은 이렇습니다. 가로 441cm. 세로 256cm. 혼합재료로 1974~1994년까지 무려 20년에 걸쳐 탄생된 작품입니다. 승무를 추는 구도자의 세계와, 세 개의 복숭아에 얹어진 금줄과 부적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성과 속, 속과 성의 도상적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성 가운데 스멀거리는 속, 속 가운데 씨방처럼 존재하는 어떤 의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숭아의 상징적 의미는 다양합니다. 민속신앙에서 복숭아나무는 삿된 기운과 귀신을 쫒기 위한 주술적 의미를 지닙니다. 홍만선(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 따르면 ‘복숭아나무는 백귀(百鬼)를 제압하니 선목(仙木)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복숭아나무는 각종 잡귀와 질병을 치료한다는 설이 여러 민간에 전하기도 합니다. 한편,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 「탕액편(湯液篇)」에도 이러한 벽사ㆍ축귀의 기능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 속에 복숭아는 정력과 생식에 관한 더 강렬한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복숭아는 성적 이미지를 연상케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도화살’입니다. 오방살 중의 하나인 도화살은 부정적인 여러 남자 혹은 여자와 상간해야한다는 몹쓸 운명의 의미를 닫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복숭아는 금기의 상징인지도 모릅니다.
<파계승>은 한 개인이 가야 할 세계를 놓아버리고 허방에 빠지게 되는 감각적 욕망을 성적 욕망으로 이미지를 열어두었습니다. 이십 년에 걸쳐 작품이 제작되었던 시간성이 주는 메타포는 ‘사람의 길’ 아닐까요.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구도의 길인지도 모릅니다. 끊임없는 갈등과 문제해결 속에 텅빈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함을 알면서도 행하기 어려운 난제들이 도처에 혀를 낼름거리고 있습니다. 해결했다 싶으면 또 다른 문제가 등장하고, 산을 넘었다 싶으면 또 눈앞에 산 하나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의지를 찾아가는 것은 내적 갈등 끝에 발견한 길이겠지요.
지향점을 향해 묵묵하게 걸어가야 할 구도자는, 문득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졌을 겁니다. 어떤 선택의 순간에 마주하는 딜레마. 무엇을 선택한다는 건은 내 앞에 주어진 문제를 돌파하는 어떤 의지이겠지요. 치열하게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게 욕망이란 성장의 동력이기도 합니다. 내가 가고자 했던 그곳을 바라보며 오직 앞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탁월한 삶이란 선의지로 걸어가는 것이라지만, 이기적인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겠지요. 복숭아에 쳐진 금줄이란 절제할 수 있는 용기 다시 말해 자각의 존재로서 인간의 의지를 상징합니다. 살아보니 돌아서면 스멀거리고, 또 다시 눈앞을 막아서는 것이 욕망이더라고요. 욕망의 조각들을 시접하여 걸어가는 길이 생이라면 절제란 ‘알아차림’이겠지요.
‘삶이 바닷물과 같다면 어디를 가도 그 짠맛을 익히 안다'는 장자의 警句가 매화 잔가지마다 매달린 계절입니다. 살아가는 것은 욕망과 절제 사이를 물미끄럼 타듯 오르내리는 일이겠지요. 흐르는 것이 어디 시간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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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희
꿈꾸는 미학자로 익히 알려진 김종희 선생은 미학자이자 수필가이다. 1967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1999년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수필이 당선 등단했다. 수필집으로 『나는 날마다 신화를 꿈꾼다』, 『돌탑에 이끼가 살아있다』, 『사랑도 기적처럼 올까』, 『슈만의 문장으로 오는 달밤』이 있으며 인문채록집 『기억 장소 그리고 매축지 1, 2』, 『구술생애사로 경험하는 인문학』 등이 있다. 현재 전국 미학강사로 바삐 활동하는 가운데, 국제신문 인문학 칼럼과 계간 《사이펀》 편집위원으로 왕성하게 즐거운 늙음을 베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