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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하 이승규(李承奎, 1860~1922) 선생. 개화기 마산의 선구자였다. 그는 서울에서 출생했다. 여섯 살 때 가족과 함께 동래로 이사한 후 의학과 한약을 공부하여 한의사(의생번호 5597)가 됐다. 1903년 마산으로 이주하여 손안로 선교사와 함께 1906년 5월 17일 성호리(城湖里)에서 독서숙(讀書塾)을 설립했다. 마산 최초의 근대학교인 창신학교로 발전한다. 1910년 부인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 선생은 교회를 설립했다. 1911년 노비산 아래 예배당을 신축하고 이전했다. 지금 마산문창교회의 전신이다. 선생은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갑성은 마산으로 내려와 이승규를 민족대표 33인에 포함시키고자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상황을 경남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마산에서의 독립의거는 남하선생을 비롯하여 기독교계의 유력 인사들과 창신학교 교원이었던 박순천(朴順天), 김필애(金弼愛), 학생 대표 한태익(韓泰益), 이정기(李庭紀) 등이 주동이 됐고, 이들은 노산선생의 공부방과 의신여학교 학생 최봉선(崔鳳仙)의 집에서 모의를 거듭하며,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그리는 등 거사를 준비했다. 1919년 3월 21일, 구마산 장날을 기회로 3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다.” 기독교 포교와 교육활동, 독립운동을 하는 등 개화기 마산의 선각자 이승규 선생은 1922년 3월 29일, 만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작고 전에 자신의 전 재산을 아무 조건 없이 마산시에 기부했다. 이를 추모한 17개 사회단체가 동년 4월 4일 사회장을 치러 고인을 추모했다. 무학산 기슭에 안장했다.
#2. 노산 이은상(李殷相, 1903~1982) 선생. 마산의 창신학교와 연희전문 문과, 와세다 대학 사학부에서 교육을 받았고, 일본 도쿄 동양문고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조선어사전 편집위원을 거쳐 1931년 이화여전 문과 교수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1932년 이후 동아일보 기자와 조선일보 편집 고문으로 일하다가 1938년 일제 탄압으로 전남 백운산 자락에서 은거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함경도 홍원경찰서 함흥형무소, 전라도 광양경찰서 등의 옥중에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해방과 더불어 풀려난 독립투사다. 조국의 입말과 글말, 그리고 민족얼을 사수하려다 잡혀가 죄인 취급을 받고 고초를 당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정신의 발로와 조국 강산에 동화되어 버린 시인이다.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역사의 질곡 속에서 고전 세계의 맑음과 고요와 조화를 예술성으로 개척하여 우리 겨레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민족애를 문학으로 표출하고 승화시키려 한 점에서 선생의 민족애와 성실성은 높게 평가돼야 한다. 광복 후 호남신문 사장, 광복회 고문, 이충무공기념사업회 회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한글학회재단이사, 학술원 종신회원 등을 역임했다. 1982년 9월 22일. 사회장으로 국립묘지 현충원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국립묘지 제1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3. 마산사회단체와 대한민국 정부가 사회장을 치러준 이승규 선생과 이은상 선생은 부자간이다. 이들의 삶의 보금자리는 상남동 102번지였다. 지금의 노산동 태양극장과 옛 북마산파출소, 은상이 샘 일대다. 전 재산을 마산시에 기부한 남하 이승규 선생과 ‘가고파’와 ‘옛 동산에 올라’ 등으로 마산을 노래하면서 민족의 심금을 울린 노산 이은상 선생의 고결한 정신은 되살려 기려야 한다. 창원시에서 추진하는 옛 마산의 도심지 재생사업은 대단히 적절한 조치다. 전국의 7대 도시였던 마산이 경남의 7대 도시로 전락했다는 자조 속에 마산 창원 진해가 통합됐다. 쇠락해가는 마산의 중흥을 위해서 노산동 일대의 재개발은 필수다. 이은상 프로젝트는 꼭 실현돼야 한다. 대를 이은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은의 길이다. 김복근(경상남도문인협회장) ※여론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