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는 대자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부인 문화 유씨(柳氏)와 합폄한 1기(基)의 묘로 만들었다. 장방형(長方形)의 2단 호석(護石)을 두른 방형묘 (方形墓)로서 곡장(曲墻)을 설치하였다. 묘 앞에는 좌우에 묘비와 충혼비 가 있으며 상석,혼유석(魂遊石), 향로석(香爐石)이 있고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 각 한쌍이 좌우에 배열되어 있다.
봉분은 사각이며 윗편에 아버지 최원직의 묘가 있다. 최영은 충숙왕 3년(1316)에 동주(東州 : 지금의 철원)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철원(鐵原) 이며, 어릴때부터 뛰어난 재주와 위엄이 있었고 기골이 장대하였다. 장군이 무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양광도 순문사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여 공을 세운 때부터였다.
공민왕 3년(1354)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남쪽의 8참(站)을 수복하고 1358년에는 왜구의 배 400여 척을 격파한 뒤, 이듬해에는 홍건적(紅巾賊) 4만이 서경(西京)을 함락하자 이를 물리치고 서북면 도순찰사(都巡察使)
가 되었다. 1361년 홍건적(紅巾賊)이 일어나서 개성까지 점령하자 이를 격퇴하여 수도를 수복한 공으로 훈일등에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고
1364년에는 덕흥군(德興君)의 왕위 쟁탈 반란군을거의 전멸시켰다.
우왕 2년(1376) 왜구가 삼남지방(三南地方)에 침입했을 때 홍산 싸움에서 적을 크게 무찔러 그 공으로 철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388년에 요동 정벌을 결정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평양에서 군사를 독려 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요동 정벌은 좌절 되었다. 이성계 군이 개성이 들어와 장군을 체포하여 고양 고봉 (高峯)에 유배시키고 다시 합포(合浦 : 지금의 마산)에 옮겼다가 창왕 1년 (1389)에 개성에 압송해 참형시켰다. 그가 처형되던 날 도성의 사람들은 일제히 모든 일을 그만 두고 원근의 어린 아이를 비롯해서 부녀자들 까지도 눈물을 흘렸다. 장군은 고려를 지키려는 마지막 보루로서 일생 동안 80여 회의 전투에서 항상 승리한 명장이었고, 강직하고 용맹하며 청렴결백한 인물이었으나 그가 죽자 고려 왕조는 몰락하였다. 시호는 무민(武愍).
찾아가는길
최영장군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위치해 있다
지하철 타고 구파발까지 나가서 인공폭포있는 버스정거장에서 금촌이나 문산방향버스를 탄다. 버스가 많다. 기사분께 필리핀참전비앞에서 내려달라고 부탁하고 내리셔서 좀 걸어가야 한다. 마을버스가 다니기는 하는데(26번) 배차간격이 1시간이라서 것는게 빠르다.
필리핀참전비정거장에서 우측으로 길따라 가다보면 이정표보이고 조금더가서 또 우측으로 좀 걸어가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