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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 비평'제127호 신인상 (평론부문)/추천사
수상작
유민자 - 평론 <새의 모티프 혹은 소리 이미지>
유민자의 평론은 수필가 윤모촌의 작품론이다. 이 수필 평론이 주목받는 부분은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이 혼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민자 평론은 기존의 평론 문체와도 전혀 다른 변별성이 있다. 미셀러니적 수필문체 혹은 감성적인 문체로 비평적 논리를 전개 나가고 있는 점이 그 하나이다. 이런 문체로 비평문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염려는 부정적 시각이다. 그러나 비평문이 꼭 논리적인 문체이어야 한다는 문법은 없다. 문학평론이 문학의 한 장르이고, 창의적인 창작행위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담보되어도 좋을 것이다.
유민자의 <새의 모티프 혹은 소리 이미지>는 선비 의식으로만 바라왔던 윤모촌의 수필세계를‘새’ 혹은 ‘새 소리’모티프로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고 있다는 점과 그것을 망향민의 그리움으로 환치시키고 있음을 감성의 논리로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이 호감이 갔다. 문학의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감성의 논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핵은 감동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유민자는 입증이라고 하듯이 새로운 유형을 평론을 쓰는 있다는 점에서 주목했다.
하지만, 감성적 문체가 의미 전달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고, 논리의 일관성에 대한 관심과 새로운 시각을 갖춘 수필의 전문적인 비평가로서 정진하기를 빈다.
추천인 : 유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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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모티프 혹은 소리 이미지
- 윤모촌의 수필에서 나타난
유 민 자
1.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서의 ‘소리 ’
세상을 떠다니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아름답고,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기러기 떼가 찬란하다. 작가의 눈 속을 감도는 세상소리가 가녀린 빛이 되어 하늘을 떠다닌다. 작가의 귓바퀴를 간지럼 피우는 자연 소리가 호젓한 길섶마다 진하게 묻어 있다. 윤모촌은 고향 뒷산에서 울던 세상소리 곁에서 서정적으로 웃고 운다. 작가의 마음풍경으로 모여든 소리들이 모두 어머니의 영혼이다.
세상 밖의 소리들. 작가의 가슴을 밤마다 뒤흔드는 새 울음의 감성을 “산새 한 마리가 지뢰밭에 와 울고, 그 산새의 울음이 산새의 울음으로 들리지 않아, 어머니의 목소리로(<어머니> 중에서)” 치환(置換) 시켜 놓는 과정이 ‘모정에 대한 빛바랜 기억’으로 촉촉하게 가슴으로 스민다. 민통선(民統線)너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체는 바로 사무치는 사모의 정(情)인 것이다.
새의 울음은 천상에 있는 새의 노래다. 동서양의 의식세계의 차이점인지 ‘birds sing'의 우리말 해석은 ’새들이 운다‘ 이지만, 서양에서는 ’새들이 노래 부른다‘이기에, 울음도 눈물도 한국적 정서에 배어있는 모촌의 사상(事象), 즉 그리움을 불러들이는 몽상의 대상이 된 것이다. 새의 모티프 ㆍ혹은 소리 청각 이미지를 중심으로 바라본 우주는 잃어버린 고향의 숨결이기에, 그윽한 산마을 고향집에 사는 어머니의 즐거운 노래 소리가 되어 가슴으로 소복히 쌓인다.
“경칩이 지나면 개구리들의 시그널뮤직에 이어 뒷밭에 내리는 장끼소리, 앞산 뒷산에서 우는 뻐꾸기 소리에 서정을 키워왔고, 어스름 달밤 부엉이 소리가 자장가가 되었다.(<실향기> 중에서)며, 소리들을 “자장가“ 삼아 언어와 언어 사이 길에서 환히 웃거나 속울음으로 운다. 또한 , 삶의 징검다리를 종종걸음으로 건너 마음고향을 정갈하게 다듬고 짓고 또 부수며 새로이 담장을 낮게 쌓는다.
자연에게 말을 걸며 행복한 사람, 문학인 윤모촌. 우주에 떠다니는 세상소리마다 말을 걸며 물 흐르듯 살아가는 수필가 윤모촌. 그가 세상에 말을 거는 소리에는 비움과 채움, 울음과 웃음, 햇살과 그늘, 사실과 진실, 비절함과 영롱함, 화해와 고독이 상대적으로 살고 그리고 특히 ‘고향과 모정(母情)’이 새들의 울음소리로 치환되어 작가의 내면에 주관적인 상상과 공상으로 존재한다.
그 놈의 울음소리를 처음 들으면서도 접동새임을 쉽게 알았다. 피를 토하듯 들렸기 때문이다... 울면 울어서 깬 잠을 설쳐야 했고, 그치면 그쳐서 울기를 기다려 눈을 붙이지 못하였다. 가냘픈 듯 하면서도 깊은 밤을 흔드는 그놈의 울음에 실향의 만감이 실리곤 하였다. 육친과 헤어진 아픔이 골수로 스몄다...새벽달이 비친 창가에 나뭇가지 그림자가 어른거리면, 그 놈의 울음은 한층 처절했다...내 집에서 접동새 울음을 듣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이나 안사람이, 그 놈의 비절(悲絶)한 목청을 알 리가 없다. - <접동새> 중에서
고향을 향해 말을 거는 윤모촌 수필은 아침이슬이다. 한 밤중 고요의 틈새공략으로 풀잎마다 올망졸망 맺히는 이슬은, 진주보다 더 영롱한 아침의 보석이다. 새벽햇살 한 줄기의 감미로운 유혹으로 세상의 빛을 맛보는 아침이슬은 어제ㆍ오늘ㆍ내일도 온 우주에 맺혔다가 사라지고 또 돌아온다. 윤모촌의 잠결 속으로 쉼 없이 스며들었다가 녹아드는 모정(母情)이 아침이슬을 닮았다. “내 집에서 접동새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나 하나뿐이다...그놈의 비절(悲絶)한 목청을 알 리가 없다”는 작가 스스로가 아는 척을 해야 비로소 들리는 새소리처럼, 천천히 걸으며 고개를 숙여 두 무릎을 꿇고, 우리들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비로소 잘 보이는 아침이슬답다.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모여들어 하나 되어 땅 숲으로 떨어져 함께 스민다. 마치, 작가의 언어가 세상살이를 꺾꽂이 하듯 새소리를 접붙이며 어머니의 영혼마저 매어달다가 작가의 가슴으로 툭 떨어져 스미는 형상(形象)이 풀잎에 내려앉은 아침이슬을 무척이나 닮았다. 세상을 향한 공명(共鳴)이다.
통일로 주변, 멀리서 가까이서 뻐꾸기가 울고 있다. 그 소리가 슬프고 처량하다. 자유의 다리를 뒤로 하고 들어서려니, 어머니 말씀이 귓전에 와 울린다. -집앞까지 왔다 그냥 가려느냐....... 임진각에 온 사람들은 나의 마음을 알 리가 없다. -<분단의 현장> 중에서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윤모촌의 수필은 진주조개이다. 바다 빛이 진주 핵 속으로 섞여 은은하게 빛나는 진주는 눈물의 결정체이다. 피맺힌 아픔의 산물(産物)인 진주. 세상 밖의 강렬한 생채기로 출렁거리며,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야만 영롱해지는 진주. 진정한 아픔을 겪어내야 비로소 숭고한 한 알의 보석이 되어, 우리를 웃게 하는 진주. 그렇다. 윤모촌의 절절한 “실향의 만감”이 진주를 닮았다.
“육친과 헤어진 아픔이 골수로 스”며, 인간의 원형적인 정서인 한(恨)으로 뿜어져 나오는 현상들이 상상(想像)인가 공상(空想)인가를 묻고 싶지 않다. 허무맹랑한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인지, 글의 윤기를 주기위한 장치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집앞까지 왔다 그냥 가려느냐.......”. 한 평생, 듣고 싶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망상이어도 좋다. “불가항력의 현실이라고는 해도 꿈속에서 조차 뵐 길이 없는, 현실 같지 않는 현실이 억울하고 또 억울하고 분하고 또 분하다. -<어머니>중에서 ”고 토로하는 작가의 목소리 속으로 남북 분단의 애상(哀喪)이 있는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묘사된 애상의 주인공은 어머니에 대한 상(像)이다. 뻐꾸기인 것이다. 한국수필문학의 자존감으로 빛나는 수필가 윤모촌은 ‘잃어버린 고향의 숨결’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작품마다 펼쳐 보인다. 어쩌면 역사의 현장에 놓인 아픔의 잔상에 진주를 맞물고, 마음의 함정을 치유하는 과정이 진주조개답다. “안과수술(망막유착수술)이후에 시력의 장애가 심해진”, 동공 가득 먼 고향에 대한 진한 그리움으로 찰랑거리고 있다.
내가 이사올 무렵 마을 초입에는, 납작한 초가 한 채가 있었다. 그 초가를 보면서 잃어버린 고향의 숨결을 아침저녁으로 느끼며 지나다녔다... 아침이면 참새가 와 잠을 깨우고 봄이면 뒷산에서 장끼가 깃을 치며 운다. 아카시아 꽃향기가 마을에 번지기 시작하면 뻐꾸기 울고, 궁집 고목에선 꾀꼬리와 두견이 운다... 도회의 한 복판에서 아침저녁으로 새 소리를 듣는 것은 적지않은 복을 누리는 셈이다. - <실향기(失鄕記)> 중에서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간절함이 작가에게는 있다. 직관으로 얻어진 경험의 잔상이 여과된, 한 폭의 고향 풍경이 작가의 가슴에 살아있다. “고향의 숨결을 아침저녁으로 느끼며 지나다”니는 윤모촌의 하루에서 새에 대한 몽상(夢想)이 느껴진다. “15년 동안 붙박혀 사는” 홍은동 집이 옛 기억속의 고향의 숨결인양, 새의 모티프가 마음고향으로 내려앉는다. 작가의 우주공간으로 아픔의 크기가 커가고 사색의 깊이가 깊어져서 생각의 나래가 시공간을 넘나들수록, 점차 새벽의 여명을 따라 참새가 날아들어 재재거린다.
새소리는 작가적인 희망노래로 맞이한다. 슬며시 자신의 언어가 되어 생명성이 감돈다. 세상 밖으로 밤마다 들려오는 “참새ㆍ장끼ㆍ뻐꾸기ㆍ 꾀꼬리ㆍ두견이 울음소리”는 진자리 마른자리 깔아 놓고 작가의 마음을 갈아 뉘우는 어머니 목소리를 대치(代置)하는 작품으로 감성씨앗이 된다. 바로, ‘어머니의 노래’다. 새소리의 유혹으로 한 순간 걸음도 멈춘 채 옛 기억으로 들어가 어머니 목소리를 듣는다. 새가 된 윤모촌은 흐르는 물처럼 들판과 산야를 흐른다. 공기처럼 가벼운 몸을 새의 날개에 얹혀 하늘과 땅을 떠돈다. 고향생각으로 그리움에 붙잡혀 살다가, 어느새 정신없이 어머니에 대한 환청에 빠져 구름 속을 노니는 새처럼 난다.
“새소리를 듣는 것이 복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모촌. 어디선가 “초가 한채”를 보아도 새들의 노래를 들어도 어머니의 목소리로 되돌아온다. 비로소, 새는 고향인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애상의 상징은 “고향에 와 있음을 느끼는” 소리다. 마음 평화를 불러 모으는 세상소리다. 어쩌면 그리운 어머니를 내 마음고향 안으로 쉼없이 불러 모으는 소리다. 즉, 옛 고향내음인 것이다.
그러나 윤모촌은 세상살이, 인간의 소리를 이렇게 표현한다. “글줄이나 쓴다며 치기(稚氣)를 부린 사람은 예부터 있어 온 모양인데, 이것을 빗대서 와명선조(蛙鳴蟬噪)”라며, 개구리와 매미처럼 시끄럽다는 뜻에 빗대어, “사람이 빚는 소리보다 더 시끄러운 것을 없다- <와명선조(蛙鳴蟬噪)> 중에서”며 세상살이를 나무란다. 작가는 현대인들에게 자기주장만으로 목소리를 한층 높이고 나만이 옳다는 이기주적 사고를 치기(稚氣)라고 명(命)하며 옛 어른의 깨달음 한 마디를 가르친다. 그렇다. 세상 속으로 살아있는 소리를 들으며, 졸렬하게 말재주나 부리는 속물현상(俗物現象) 즉(卽) 삶의 옹졸하고 치졸한 마음을 자연 속으로 버리라고 명(命)하는 , 고사성어(故事成語)인 “와명선조(蛙鳴蟬噪)” 정신(情神)이다.
2. 새의 자유 혹은 실향의식
새가 하늘을 끊임없이 난다. 새처럼 날고 싶다. 새처럼 날개를 달고 자유를 원한다. 환상인지 상상인지 몽상을 따라 나서는 마음고향 길. 작품속의 나는 대지의 구속을 풀고 하늘을 동경하는 인간 군상(群像)들 속의 인간이 되어간다. 새가 되어가는 꿈을 꾼다. 새에게 사람의 영혼을 덧씌워서 하늘로 비상한다. 윤모촌 작품의 원재료는 ‘고향풍경의 회상(回想)’이다.
나는 지금 2층에 앉아 창 밖의 풀밭에서 우는 귀뚜라미 소리를 듣지만, 언제 들어도 그 놈은 혼자 말한다. 준절(峻節)하게 나무라는 것 같기도 하고, 체념의 장탄식 같게도 들린다. 두려움을 일깨우는 우레 소리로도 들리고, 어머니의 말씀처럼 자애롭게도 들린다... 창경궁 뻐꾸기 소리를 들어 보았느냐던 사람의 말이 생각난다. 우는 모습도 여는 새와는 다르다. 나무의 가장 높은 촛대 끝에 앉아 몸을 돌면서 운다. 방향을 바꿀 때마다 멀리서 들리다가도 이쪽으로 돌면 가까이서 들려, 마치 강약(强弱)을 붙여 피아노와 포르테로 우는 격이다. 나는 그렇게 우는 뻐꾸기 모습을 고향 뒷산에서 보아왔다.
- <서울 뻐꾸기> 중에서
멋과 맛이 있는 글. 글맛은 있으나 글 멋은 보이질 않는다. 장식적인 멋을 부리지 않아도 새소리가 단맛이고 작가의 정신세계가 작위적인 멋을 부리지 않아도 자연이 주는 청량함으로 싱싱하다. 생동감이 살아 있다. 자유로이 꿈을 꾸며 재주를 넘고 현실과 상상사이로 자유로이 넘나든다.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있다. 세상소리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작가의 서정이, 어딘가 고요 속에 사는 소리되어 작가의 허기진 가슴으로 쉴 새 없이 툭툭 떨어진다.
어디에서건 영혼을 덧씌워진 세상소리들에게 생명의식을 담고, 깃들게 만든다. 즉, 소리모음에 어머니의 영혼을 덧입힌 것이다. 귀뚜라미소리를 듣다가도 우레 소리인양 들으며, 세상사를 각성 시키며, 바람 따라 자유로이 들려오는 소리를 자장가인양 마음고향을 짓고 부수며 또 새로이 더 지으며 세상에 곱게 떠다니는 고마운 소리를 찾아내어 웃는다. 자유를 갈구하는 웃음이지만 웃어도 ‘체념의 장탄식’일 뿐이다. 청각)이미지의 모든 것이 어머니의 소리로 느껴지는 작가의 의식세계다. 세상소리에는 고향생각이 앉아 쉬어가고 어머니의 영혼이 존재하기에, 또 다른 소리모음에 귀를 기울인다. “시에는 음악이 다르듯이, 고향엔 언제나 음악과 시가 있다.”(<실향기> 중에서)는 것처럼, 그 생명 소리들이 시의 운율 되어 노래로 들리기도 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삶의 단맛 짠맛 쓴맛 쓴맛으로 세상사 리듬을 타고 놀기도 한다. 유독. 작가의 사색의 공간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강약(强弱)을 붙여 피아노와 포르테로 우는 격이다. 나는 그렇게 우는 뻐꾸기 모습을 고향 뒷산에서 보아왔다.”는 작가의 글처럼 ‘어제의 추억과 지금 이 자리의 현실’이 긴밀히 연계된 ‘새들의 합창’에 귀를 세우는 것이 그것이다. 바로, 윤모촌 삶의 일상이다.
고놈의 지껄이는 소리가 여느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한 놈이 유독 ‘째짹’하면, 저쪽 끝의 놈이 ‘쪼쪽’하고 묘한 소리로 응답한다. 포식거리가 생겼지만 경계하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연신 나를 내려다보다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면, 포로롱 날아갔다. 이내 되돌아와서 또 야릇한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내려앉아 먹자커니, 안된다커니 하는 모양이다. -<홍은동참새> 중에서
새의 대화를 엿보는 작가 내면세계가 진솔하게 표현되고 있다. 새의 다양한 개성적인 소리는 ‘인간의 주민등록증’이 되는 표시다. 온 우주를 떠다니는 새의 대화다. “한 놈이 유독 ‘째짹’하면, 저족 끝의 놈이 ‘쪼쪽’ 하고 묘한 소리로 응답을” 인지하는 작가적 상상(想像)이 신비롭다. 포식거리가 생겼지만 경계하라는 새의 언어를 상상하며 침입자를 인식하는 것이다. 새들의 합창소리. ‘째짹’ 소리 내면 ‘쪼쪽’ 답신을 보내며 경계의 끈을 조이며 위험을 동료에게 알리는 참새의 가슴언어인 것을 알아챈 작가 내면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광대한 우주의 자유를 껴안고 살아가는 새의 종(種)들. 민간신앙과 신화에서 인간의 영혼이 한 마리의 새라고 한다. 윤모촌의 가슴속에도 잠들어 있는 날개 하나를 지니고 산다. 수피족의 대 시인 파리드 알 딘 아타르는 ‘육체라는 그물에 갇힌 천상의 새’로 인간의 영혼을 비유했다. 윤모촌의 작품세계에는 새의 영혼이 들어와 산다. 새의 영혼 속에 살아가는 또 하나의 영혼이 겹쳐서 우리들에게도 보인다.
윤모촌은 하늘을 보며 자유를 그리다가 새들의 비상을 보며 고향을 떠올린다. 행여, 비상을 멈춘 채 땅 숲으로 내려앉아 둥지를 틀 때, 윤모촌의 마음 한 점이 같은 뿌리의 남과 북이 갈라진 군사분계선 민족적인 비극의 그 지점으로 내달린다. 남북으로 갈린 쓰라림에 갇힌 작가에게 ‘새는 고향’인 것이다. 새소리의 유혹으로 한 순간 걸음도 멈춘 채 옛 기억으로 들어가 어머니 목소리를 듣기도 하면서, 작가의 영혼이 흐르는 물처럼 들판과 산야를 흐를 것이다. 공기처럼 가벼운 몸을 새의 날개에 얹혀 하늘과 땅을 떠돌 것이다.
윤모촌은 분단된 조국의 상처받은 부상병이다. 아니다. 단지, 실향민(失鄕民)이다. “아수라와 같은 현실”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어 하는 현(現) 사회의 지식인이기에 “목숨은 무엇이고 자유란 무엇인가” 세상을 향해 묻다가 사색의 그늘을 찾아 앉는, 실향민일 뿐이다. 고향그늘을 찾아 하늘을 보며 “고향을 잃은 애상이 도지곤”할 때에는 “가난하고 서럽던 역사를 정선 아리랑처럼 뽑아내는 것 같기도 하고, 갈라진 산하의 시름을 우는” (<서울뻐꾸기>중에서) 뻐꾸기소리에 귀를 세운다. 때로는 새들의 날개 짓을 좇아 더불어 날다가, 고향생각에 젖어 한숨을 토하기도 한다. 날자. 날아오르자. 자유를 희망하는 자의 겨드랑이사이로 상상의 날개가 달자. 한 점 바람이 인다. 수필적 언어와 언어사이로 고향생각이 몰려가고 몰려온다.
남북간에 겨눈 총구로, 이산의 아픔을 씻지 못하는 나에게, 그리고 그 ‘남침’이 ‘북침’으로 둔갑이 되어나오는 철없는 한국 젊음이의 목소리 속에서, 할 말이 있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길손이여,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우리는 겨레의 명령에 복종하여 이곳에 누웠어라.’- 무명 학도병수첩에서 발견되었다는, 탑신에 박혀 있는 비절한 구절...정치란 무엇이고 이념이란 무엇이며, 목숨은 무엇이고 자유란 무엇인가. 나는 이 전적지에 왔다가 지금, 아수라와 같은 현실을 떠났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한다.) 자유를 지키는 무명전사의 정신이 영원하기를 빌면서 - <파로호(破虜湖)> 중에서
실향민의 애상(哀傷)이 비목어(比目魚)를 닮았다. “‘남침’이 ‘북침’으로 둔갑이 되어 나오는 철없는 한국 젊음이의 목소리”가 ‘삶의 허무함으로 온 몸이 떨린다. 그렇다. 하나 되기를 희망하는 비목어의 애상(哀傷)’이 현(現) 분단의 아픔을 닮아있다. 비목어는 눈이 한쪽 밖에 없어서 두 마리가 좌우로 달라붙어 짝이 되어야 너른 바다를 노닐 수 있다. 아직도 임진강 너머로 헤엄쳐 갈 수 없는 어제의 역사가 남겨져있기에, 남과 북의 통일염원을 원하는 희망사항과 동일시되는 비목어다.
남과 북의 분단은 비익조를 닮았다. 마치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비익조(比翼鳥)라는 상상의 새, 그 현상(現想)을 닮았다. 눈 하나 날개 하나가 달린 비익조. 암컷과 숫컷이 사랑하여 짝이 되어야 날 수 있다는 비익조. 금슬상화(琴瑟相和)의 강한 의미다. 현실적으로 남과 북이 우리가 되어 웃으며 사랑노래를 더불어 부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화합된 내일의 표상은 짝을 이룬 비익조다.
남과 북의 “38선”의 애상(哀想)이 연리지를 닮았다. 뿌리가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사이좋게 나란히 붙어 있는 나뭇가지. 연리지는 거대한 고목이다. 대한민국 또한 한 민족 한 뿌리다. 어머니 잔상이 묻힌 “고향집인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기곡리 637번지.”는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대한의 땅이다. 남과 북이 하나 되어야 갈 수 있다는 ‘미래의 남북통일’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 강산 깊고 짧은 물줄기의 유역과, 높고 낮은 산자락에서 우는 그 놈의 울음은 청상(靑孀)의 한(恨)처럼 처량하다. 가난하고 서럽던 역사를 정선 아리랑처럼 뽑아내는 것 같기도 하고, 갈라진 산하의 시름을 우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놈의 울음에 그래서 고향을 잃은 애상이 도지곤 한다...서울의 복판에서 뻐꾸기 울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서울뻐꾸기> 중에서
새에게는 국경이 없다. 새들은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을 하며 자유로이 산다. 하늘을 나는 것이 새의 직업이다. 작가에게 은밀한 꿈은 하늘을 새처럼 나는 것이다. 새는 별을 보고 길을 찾지만, 작가 윤모촌은 새를 보며 잃어버린 길을 찾는다.
가끔은 작가 스스로가 텃새가 되어 철새도 되어 상상과 망상사이로 새처럼 하늘을 넘나들며 삶의 방향을 잡는다. 세월의 변화 속을 넘나들며 어제의 옛 기억과 오늘의 현실사이를 넘나들며 ‘가난하고 서럽던 역사’를 떠올리곤 한다.
같은 뿌리의 남과 북이 갈라진 군사분계선 북방 완충지대로 향수병이 도진다. 마음 한 점이 “그 놈의 울음”을 들으며 민족적인 비극의 그 지점으로 내달린다. 육친과 남북으로 갈린 쓰라림에 갇혀 사는 윤모촌에게 “뻐꾸기 울음”은 고향을 부르는 소리다. 마치 “그 놈의 울음”은 지난 역사의 흐흠 까지도 눈치 챈 듯,“가난하고 서럽던 역사를 정선 아리랑처럼 뽑아”내어 실향민(失鄕民)처럼 서럽게 운다. 작품속의 나는 새소리의 유혹으로 한 순간 걸음도 멈춘 채 옛 기억으로 들어가 고향하늘을 이리저리 넘나든다. 윤모촌의 상념은 새처럼 자유롭다.
3. 새의 비상, 현실로부터 일탈 하고 싶은 생명 의식
윤모촌의 가슴을 출렁이게 하는 것은 청각(聽覺)이미지의 소리이다. 세상보기가 삐딱하기도 하고, 세상소리를 듣기도 남다르다. 때로는 새의 울음소리가 절절한 애상의 대상이기도 하고, 때로는 시끄러운 세상 소음마저도 개인적인 감성을 얹고 그리움으로 발전시키며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꿈꾼다. 임진강 위를 끼룩거리고 나는 갈매기를 그리워하며 작가의 서정을 키운다. 개인적인 고된 슬픔이 고단한 사무침이 되어 욕망이라는 언어로 여기저기 흐느끼며 흐른다. 한국인의 깊은 정서, 한(限)이다. 정(情)이다. 실향의 고달픔이다. 군사분계선에 앉아서 바라보는 것은 내 안에 앉아있는 무수한 어머니의 그림자들이다. 가슴을 출렁이게 하는 것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갈망이다. 임진강 물위로 둥둥 떠다니는 어머니 빛을 건지며 가늠한다.
무얼 바라고 고 놈들은 서울 복판에 눌러 사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쩌다 서울에서 살게 된 나처럼, 놈들도 별수 없이 그렇게 됐다는 말인지. 날개를 가지고도 공해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꼴을 보면, 옮겨만 앉아도 부동산 재미를 보던 세월에, 주변없이 한군데서 15년 동안을 붙박혀 사는 나나 다를 게 없다. 약은 체하면서 살고는 있지만, 그 놈이나 나나 헛약은 게 분명하다. <홍은동 참새> 중에서
<홍은동 참새>는 작가 자신을 ‘참새’로 비유한 수필이다. 세상소리를 통해 정(情)에 대한 이삭줍기를 시도한다. 하늘을 나는 새와 땅위를 걸어 다니는 나를 동일시하여 양 어깨에 날개를 가진다. 윤모촌은 자유로움을 갈구한 채 지금 이 자리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작가다. 그의 마음풍경은 “나도 비오면 공연히 마음이 들뜨곤 하는 때가 있다”고도 하고 “약은 체하면서 살고는 있지만, 그 놈이나 나나 헛약은 게 분명하다”고도 토로한다. 작가는 기억 속에 남겨진 후회로 엎드려 운다. 피맺힌 속울음이다. 고향 길에서 예전에 들었던 뻐꾸기 장끼 불여귀 참새의 울음소리들이 어머니 목소리가 되어, 어제의 기억이 오늘의 현실세계로 옮겨져 실향의 고단함을 삶의 희노애락으로 치환시켜 나간다.
남몰래 행하는 치기(稚氣) 작업을 행하는 문학인 윤모촌. “세상에 상쾌한 것이 몇 가지 있지만...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행하던 냇가의 쾌변이 아닐 수 없다.”( <잃어버린 계절> 중에서) 는 작가의 개인 일상(日常)에 놓여진다. 그 어떤 쾌감을 마련한다는 것은 내 인생에 삶의 오락적 요소를 만들어 일상의 일탈을 꾀한다는 것이다. 유달리 어제의 기억을 사랑하고 빠르게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문학적 요소를 지닌 수필가 윤모촌이다. “양은도시락을 덜그럭거리며” 내달리는 개구쟁이 소년이 떠올려진다. 삶의 오락적 요소가 물처럼 흐르는 사색 공간이 가슴으로 응집되어 숨쉬 고 있다. 윤모촌의 언어 집은 자연이다. 진솔하고 단정한 문장. 그 속에 담긴 여유와 삶에 대한 애정이 담긴 문장. 자연이 주고 받는 생명의 텃밭을 언어로 일군다. 자연은 천진함으로 고갈되지 않는 상상력의 모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자연은 모든 생명체를 보호하고 인정한다. 풍경하나가 우리 곁으로 가물거린다.
“수필은 문장으로 그린 자화심상(自畵心象)이다.” (<수필 어떻게 쓸 것인가> 중에서) 처럼 그 때 그 시간의 풍경이 우리에게 그대로 느껴지는 심상(心象)이다. “고향의 빛깔들이 박꽃 환상의 미아라가 되어, 삭막해진 가슴속으로 숨을 쉬고 있을 뿐”(<실향기 2>) 중에서”이라는 그 환상의 실상(實像)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낀다. 하지만 작가는 단정한 삶을 살아가는 문학인이다. 다만. 현실로부터 일탈을 꿈꾸며 시공간을 넘나들며, 작가적인 영혼을 지닌 채 감성적 필체로 글밭을 일구는 수필가다.
서울 뻐꾸기가 처량맞게 우는 것은 서울이 서러워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지만, 호사스런 세월 속에 묻혀 살면서 그놈의 울음을 왜 슬프게 들어야 하는가. 개구리의 소란스런 울음이나 뻐꾸기 울음소리 혹은 귀뚜라미 울음 따위에 마음을 쓰게 되는 것은, 삭막한 도시 속에서 아직은 정감의 샘이 남아있다는 증거인가. 서울 속에서 새소리 벌레 소리 따위를 들으며 산다는 것은 그래서 조금은 위안이 된다. 뒷산 뻐꾸기는 마음 밭에 그렇게 물을 준다... 아무려나 나는 뻐꾸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서울 속의 봄이 삭막할 따름이다.
-<서울뻐꾸기> 중에서
새는 지상으로 내려 온 천상의 중재자이고 영원성의 상징이어서 새들의 노래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 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들의 지혜, 에릭 사블레 지음 이은진 옮김 > 중에서) 윤모촌은 “새의 노래가 삶의 노랫말로 온종일 기웃거리다가 수필언어로 정착을 한다. 작품속의 ‘나’는 “개구리의 소란스런 울음이나 뻐꾸기 울음소리 혹은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서울 속의 봄은 삭막”하다고 몸부림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여기저기 흩어진 “시간을 저미는 소리ㆍ코고는 소리ㆍ젊은이의 목소리”들도 “동족상잔의 비극을 혼자 뒤집어쓴 듯하다. 실향의 아픔 등을, 그놈이 주마등(走馬燈)처럼 펼쳐 놓는다. 동서고금의 문사(文士)들이 귀뚜라미 울음에 가을을 쓸쓸하다 하였지만, 그와 같이 가슴속 적막감을 저며 낸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 중에서)고 작가는 쉼 없이 세상을 향해 토로한다. 그렇다. 온 누리는 생명 소리로 가득하다. 산 너머 고함친다. 강 따라 메아리친다. “남에서 북으로 날아올라, 임진강으로 가자...”고 작가의 영혼이 시공간을 넘나드는 뻐꾸기의 자유 따라, 그 자리로 날아오르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동행인들이 작가의 뒤를 따른다.
윤모촌의 언어는 철새와 텃새의 놀이터인 하늘에서, 생명의 씨앗을 움 솟게 하는 땅에서, 자신의 언어의 집인 수필문학에서, 이리저리 뒹굴다 보면 창조적인 언어가 되어, “고향의 빛깔들이 박꽃 환상의 미아라가 되어, 삭막해진 가슴속으로 숨을 쉬”다가 생명성으로 정착하기도 하고 문학성을 얻기도 한다.
윤모촌은 나그네다. 아니다. 나그네임을 자처하며 몸과 영혼을 풀어놓고 방랑한다. 그리움에 잡혀 산다. 세상을 떠다니는 가늘고 굵은 소리에게 귀를 열고, 사실적으로 들리는 소리들에게 잠시 넋을 놓고 상상(想像)의 미학을 삽입시키며 넋을 놓는다. 작가는 “서울 속의 봄이 삭막할 따름이”라며, 욕구(慾求)불만으로 속울음을 삼킨다. 삭막한 도시에서 질겅거리며 속울음을 씹는다. 정신없이 그리움에 빠져 외로이 고향땅을 떠돈다. 때로는 새의 날개에 어머니를 얹고 때로는 옛 기억 속에서 영혼이 떠돌며 때로는 배고파 우는 간난 아이마냥 ‘서울이 서러워서’ 꺼이꺼이 목 놓아 운다.
작가는 고향, 새, 소리 그리고 옛 사랑에 혼(魂)이 빠져 산다. 새의 울음이 삶의 노래가 되어, 어머니의 노래인양 듣고 산다. 울어도 웃지 않아도 소중히 여기는 저 너머의 고향 땅에 정신세계가 넘어간다. “나는 비가 오면 공연히 마음이 들뜨곤 하던 때가 있다. 육친과 남북으로 갈린 쓰라림”(<산마을에 오는 비> 중에서)이라며 스스로 욕구불만의 증상이라고 칭(稱)하며 세상을 향해 하소연 한다.
고향을 잊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의 길에서 지친 사람이다. 어디서나 정을 못 붙이고 사는 나와 같이,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어 연연하며 살아간다. 약관에 고향을 나선다는 말이 있으나, 인생의 낙제생이 돼 그저 자상(自傷)을 하고 있을 뿐이다.
고향에서 사는 길이, 비바람 속 나그네 같은 고된 길이라 할지라도, 동산에 뜨는 달의 장처럼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해주는 곳이 고향이다.
-<실향기(失鄕記) 2> 중에서
작품 속에 잘 갈무리된 그리움이 녹아있다. 좋은 수필감으로 바람 따라 흘러든 고향상념이 리듬을 타고 글감 깊숙이 정제된 글이다. 하지만 현실속의 작가는 “인생의 길에서 지친 사람이다.” 선비정신으로 무장된 꼿꼿함은 작가의 트레이드마크가 아니다.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어 연연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낙제생”이라 자조한다. “나는 비가 오면 공연히 마음이 들뜨곤 하던 때가 있다."고도 말하며 스스로의 가슴을 후벼 판다.
작가의 정신세계가 “고향에서 사는 길이, 비바람 속 나그네 같은 고된 길이라 할지라도, 동산에 뜨는 달의 장처럼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해주는 곳이 고향”이기에, 일상의 단정한 매듭을 풀고 방랑의 삶을 살아간다. 인생을 샘물처럼 맑게 풀다가도 불시에 고향을 떠올리며 작가의 삶에 날개를 달고 새처럼 하늘을 난다. 하늘로 향하는 동경의식(憧憬意識)을 지녔다.
윤모촌은 신유목민(新遊牧民)이다. 자유를 갈망(渴求)하는 현대인이다. 스스로 새가 내가 되어 날고 싶어 한다. 내가 새가 되어 하늘을 난다. 38선 군사분계선으로만 흩어져 가는 마음을 새로이 모으기 위해 양과 소의 목초지를 따라 광야를 헤매는 유목민이 되어, ‘자유의 길’을 끊임없이 걷고 싶어 한다. 수시로 마음의 짐을 꾸려 ‘잊혀져가는 고향 길’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어쩌면 작가는 ‘고향이라는 짐’을 머리에 인 채, 고달프게 걷는 고향 잃은 떠돌이다. 고향생각으로 외로움을 타고 그리움으로 가슴을 젖시는 현대인이다. “눈 녹은 양지에 참새 두어 마리가 몸을 비비고 있다.”(<세한도> 중에서)는 문장 묘사의 새처럼 마음에 훈기를 주고, 가슴 한 자락에 풍류도 안기는 한적한 풍경이 그려진다. 윤모촌은 자신을 ‘고향을 사랑하는 유목민으로 인식하는 노마드적인 영혼’을 임진강이라는 공간인식을 지닌다. 또한. “분단의 사연이 이끼가 되어 남아 있을 뿐”이라며 군사분계선 근처 고향집에서 아득한 서정을 재인식하는 시간적 안배를 세월의 무상함으로 형상화한다. 수필언어의 문학성을 드러낸 작품으로 일구어 낸다. 작가에게 있어 ‘삶의 옹달샘’은 어머니 그 자체다. “분단의 사연”. 그 흐느낌으로 살아가면서 매해 돌아오는 따뜻한 봄이 어머니의 온화한 정(情)으로 응집되어 작가에게 다가온다.
하늘세상을 동경하는 수필가 윤모촌. 같은 뿌리의 남과 북. 작가의 정신이 분단된 조국의 상처받은 부상병이다. 마음 한 점이 하늘을 보며 자유를 그리다가 ‘시각을 저며 내는 소리’ 속으로 ‘외양간에선 여물 먹는 소리 속으로 ’주인의 코고는 소리‘ 속으로 군사분계선 민족적인 비극의 그 지점으로 끝도 없이 내달린다. 같은 뿌리의 남과 북. 육친과 남북으로 갈린 쓰라림에 갇혀 사는 윤모촌에게 세상소리의 소음까지도 그저 평화롭다. 소쩍새의 유혹으로 한 순간 걸음도 멈춘 채 옛 기억으로 들어가, 고향의 소리로 대치(代置) 된다. 공기처럼 가벼운 몸을 새의 날개에 얹혀 하늘과 땅을 떠돈다. 고향생각으로 그리움에 붙잡혀 살다가, 어느새 정신없이 고향집에 대한 환청에 빠져 구름 속을 노니는 새처럼 난다.
윤모촌은 밤이 새도록 무엇 때문에 새의 울음을 생활화 했으며, 내면의 속울음으로 빚어 동일시 현상을 만들었을까? 과거의 정지된 화면 속으로 표현 되어진, 집착도 꿈도 아니다. 남과 북. 분단의 아득한 상처는 분노와 슬픔이지만, 자기내면을 단련하며 새소리로 생동감을 드러내는 현상(現象)이다. 38선 이후부터 시작된 상처에서 벗어나 새의 영혼으로 어머니의 분신을 보며, 스스로의 허약함을 거부하고 고통을 자각하며 빠져나오려 함이다.
새의 모티프 혹은 소리 청각 이미지 상(像)을 중심으로 바라본 우주는 잃어버린 고향의 숨결이다. 그윽한 산마을 고향집이다. ‘매질로 바위를 뚫던 금속음향의 징소리’의 거친 소리도, ‘고기를 다지는 도마소리를 내는 놈인 속똑새’ 소리마저도 ‘간부(姦夫)에게 밤참을 해주는 놈’이라 칭송하는 소리로 치환(置換) 시킨다. 삶의 소음이 아니라 소박한 노래다. 세상살이. 풀기 어려운 숙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얼굴에 아침햇살다운 어머니사랑을, 노마드다운 방랑하는 영혼을, 마음고향을 사랑하던 자유의지를, 새의 소리로 형상화시킨다.
우리는 산새소리를 머리에 이고 세상소리를 가슴에 담고 물처럼 흐르던 수필가 윤모촌을 떠올린다. 작가의 그늘진 마음에 햇볕 한 줌이 되어 주던, 새의 영혼은 고향인 것이다. 퇴색 되어가는 남과 북의 분단의 아픔들. 세상소리를 불러들인 윤모촌의 작품세계가 생명의 영원성으로 재탄생 되어, 무성한 숲이 이루어질 것을 희망한다. 소리들의 합창은 ‘생명의 부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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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윤모촌 수필을 나와 다르게 새로운 각도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긴 글 쓰신 언니 대단합니다 .감탄이 절로 나오고 부럽습니다.
참, 고마워요.새벽미사님. 진정,부끄럽네요.
언제 이렇게 졸고의 글까지 손수 올려주신 울 선생님...
참으로 은혜로운 선생님이신걸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수필창작을 넘어서 평론까지 영역을 넓혀가시는 작가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참으로 고마운 인환언니의 축하인사...정성껏 평론의 얼굴을 하나 또 하나 임하려 해요!
제목이 인상적이라 꼭 읽고 싶었어요~ 새소리의 청각 이미지 평론이라니~정말 독특하네요~ 감탄~감탄~
졸필의 언어를 향해 "독특"하다고 "감탄"으로,
제게 힘을 북돋아 준 경애님덕분에 행복해요. 참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