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떠났습니다.
TV에 토막뉴스로도 알려지지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가족이 안동의 조용한 시골마을로 이사를 온 것은 1997년 봄이었습니다. 삭막한 도시생활에 염증을 내고 있던 나는 시골에서 농장을 하고 싶어 하던 남편의 뜻에 적극 찬성하였고 우리는 미련 없이 부산을 떠나 안동의 시골마을에 터를 잡아 우리의 꿈을 펼쳐나가기로 하였습니다. 남편은 우선 경험을 쌓기 위해 안동의 조그만 조경회사에 농장관리인으로 취업을 하여 아이와 함께 아무런 욕심 없이 단란한 생활을 꾸려나가기 6년, 2003년 5월 6일 갑자기 찾아온 남편의 고통사고 소식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남편은 사고현장에서 즉사하였고 충격에 빠진 나는 7살 난 아이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 대책도 없이 좌절과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자가 세상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닐 텐데도 난 세상이 무섭고 겁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남편 없는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고 문밖의 세상에 나가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악몽 같은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이제 나 이외에는 보호자를 두지 못한 아이가 내게 물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제 없지? 그렇지?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살아? 나 학교랑 학원에 다닐 수 있어? 우리 돈 있어?”
가슴이 쿵하고 저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래, 맞아. 난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었고, 그건 내 탓이 아니야. 하지만 내게 남겨진 아이는 학교도 보내야하고 남부럽지 않게 키워야해.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해. 이제 아이를 위해서라도 세상 밖으로 나가자’
나는 아이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날 이후 일자리를 찾아 헤메었지만 시골마을에서 아무 직장 경험이 없던 내게 주어지는 일은 농사철에 며칠간 농사일을 거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몇 년 전 허리를 다쳐 큰 수술을 했던 나는 그나마 주어지는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나에게는 남편의 사고보험금과 시골의 농기계 등을 처분한 4천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나는 이 돈은 아이를 위해 절대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터라 어디에 투자한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껴 써도 생활비를 지출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가진 돈은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막상 일을 하고자 하였으나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일자리를 찾아 매일같이 지역정보지를 뒤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세상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었으며 눈물은 말라버렸는지 더 이상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초조와 불안으로 1년여의 고통의 세월을 보내던 나는 2004년 8월 어느 날 지역정보지를 샅샅이 훑어보던 중에 우연히 소상공인지원센터라는 아주 작은 안내문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냥 물어만 보고 오는 거야. 설마 내게 사기치고 그런 곳은 아니겠지. 한번만 가보자, 그냥 가보는 거야.’
나는 혼자 가는 것이 두려워 그날 8살 난 아이와 함께 소상공인지원센터의 문을 들어섰습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은 채 안동소상공인지원센터를 찾은 나는 나의 형편과 앞으로의 살아갈 방편에 대해 상담을 하였습니다.
사실 첫 상담은 창업상담이 아니라 인생 상담이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센터의 상담사님들도 나의 하소연을 들은 후 앞으로 아이와 살아갈 방도를 같이 고민해 보자고 하며 자주 센터를 찾아오라는 부탁만 하였습니다. 그 날 이후 나는 일과처럼 거의 매일 센터를 방문하여 상담과 하소연을 병행하였고 그렇게 나는 그 곳에서 지푸라기를 잡았습니다.
센터에서 창업을 권유한 것은 내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센터상담사님들과 친밀감을 갖게 된 이 후였습니다. 나는 가진 돈을 투자하는 것이 무척 겁이 났지만 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었을 뿐 아니라 장기간 상담을 하면서 준비만 잘하면 절대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창업 결심 후 내가 가장 중점을 둔 부문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 업종과 점포선택이었으며 센터의 의견도 나와 일치하였습니다.
나는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내게는 엄청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별다른 기술이 필요 없는 조그만 소매점 또는 분식점이 전부인 것 같았습니다. 센터에서는 입지선정만 잘 하면 두 업종 모두 실패확률이 별로 없지만 소매점은 시내 중심가에 입점해야하는 제약이 있으므로 투자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좀 더 안정적인 분식점을 권유하였습니다.
일단 분식점을 차리기로 결심한 나는 점포를 구하기 위해 센터에서 추천해 주는 지역을 중심으로 안동시내 곳곳을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의 자본으로 임차할 수 있는 점포가 더러 있었으나 센터의 상담사님들이 현장을 답사한 결과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자리가 마음에 드는 점포는 보증금, 권리금과 월세가 너무 비싸 내가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한 이웃으로부터 옥동 아파트 상가 중에 아직 분양되지 않은 점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점포를 찾아간 나는 아직 개발이 덜 끝나 공터가 많이 남아있는 주변을 보고 실망하였습니다. 그래도 소상공인지원센터의 의견을 듣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던 나는 센터의 상담사님들과 함께 점포를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이 곳은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 처음에는 장사가 어려울 수 있지만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인근에 초등학교가 있으며 아파트 주민과 학생들의 주 통행로이기 때문에 당장에도 일정한 수익을 올릴 수 있고, 장기적으로 괜찮은 점포입니다.”
센터의 긍정적인 의견에 나도 두려움을 떨치고 이 점포에서 창업하기고 결심하였습니다.
점포의 가격은 임차 시 보증금 3천만 원에 월세 30만원, 구입 시에는 7천3백만 원이었습니다. 가진 돈도 부족하고 장사가 어려울 때를 대비하여 임차할까 생각했지만 며칠 간 센터 상담사님들과 함께 고민한 후 가진 돈 중 3천3백만 원에 센터에서 4천만 원을 소상공인지원자금으로 융자받고 월세 부담액으로 이자를 내는 것이 더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점포를 계약한 후 부터는 긴 잠에서 깬 듯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메뉴는 초등학생을 주 대상으로 떡볶이, 김밥, 어묵, 순대 등으로 정하고 입점일 까지 안동의 유명한 김밥집, 떡볶이집 등을 돌아다니며 맛을 보고 조리 기술을 습득하였습니다. 잘하는 떡볶이 집에서는 몇 시간이고 앉아서 조리하는 방법을 관찰하기도 하였습니다. 김밥과 떡볶이를 한 소쿠리 만들어 아파트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맛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맛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점포를 구입하고 내게 남은 돈은 채 1천만 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돈으로 간판과 인테리어를 최대한 싸게 준비하도록 하고 승부는 맛과 친절한 서비스로 내겠다는 마음을 가지라는 상담사님들의 조언과 격려는 그래도 조금은 남아있던 나의 불안감을 없애 주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2004년 10월 9일 나는 마침내 분식점 주인이 되었습니다.
첫 영업을 시작하던 날, 돈이 모자라 비록 거창한 개업식은 하지 못했지만 그 날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센터의 상담사님들 말대로 지금은 주변에 학원들이 많이 들어서 매상도 처음보다 많이 올라 융자금도 차질 없이 갚아 나가고 있으며 아이를 위해 적금도 꼬박꼬박 넣고 있습니다. 나와 내 아이에게 소상공인지원센터는 우리를 세상과 다시 마주 설 수 있게 해 주었고, 우리의 든든한 동아줄이 되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