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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머리말
2. 정감록의 자료
3. 택리지
4. 조선시대 洞의 형성 및 사례
5. 합천군이 주장 하는 근거와 문제점
6. 성주군이 만수동인 근거
7 성주와 합천의 비교 분석
8 만수동 위치 비정
9. 맺음말
사람이 살기 좋아 오랜 산다고 이름 지어진 만수동은 임진왜란이 시작하면서 가야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언제 명명되었는지 알기는 힘든 상황이다. 흔히 정감록을 바탕으로 한 조선십승지에 대한 내용도 여러 이본(異本)들마다 책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삭제, 추가 등 보완되어졌다. 현재 정감록은 수 십 가지 종류가 있다. 점감록에서 ‘가야산 만수동’이라 언급되는데, 성주 합천으로 제각각 기록되어 있어 정확히 어디인지에 대하여 여러 이론들이 많다.
현재는 합천군 가야면이 2011년부터 운영 되는 십승지읍면협의회에 참가하면서 가야면 홈페이지 등에 십승지 마을을 소개하면서 가야면 전 지역이 십승지라 주장을 하며 여러 활동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합천군 가야면은 만수동의 위치 비정도 하지 않은 체 ‘만수동이 합천군 어디엔가 있는데 지금은 알 수가 없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가야면 전 지역이 만수동이다’ 라 한다. 최근에 성주 십승지 연구소에서 가야산 만수동은 합천이 아닌 성주라는 사실을 밝혀내어 ‘만수동 마애 표지석’을 찾아 언론에 기사화 하였고, 그 내용을 ‘가야산 만수동의 통설과 실증’이란 책을 발간하였다.
그 동안 합천군 가야면이 가야산 남쪽이라는 내용을 확대 해석하여 마치 가야산 남쪽 전부가 합천이란 논리를 만들어 십승지의 마을이라 주장하고 있다. 합천군 문화예술과와 가야면 담당자와의 전화 통화를 하면서 문헌이나 현장답사 등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야산 만수동 비정을 위해서는 현장답사를 통한 검증이 필수적인데 이를 간과하고 ‘고문헌의 기록 (일부 합천군에 유리한 자료만 선택하여 적용)만으로 결론을 내린 것은 문제가 있다 ’라고 여겨진다. 성주 십승지 연구소는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본 자료에서 십승지 관련 자료의 여러 내용을 전부 검토의 대상을 하고, 그 자료들에 기록된 내용들을 현장답사 하여 실제 상황이 어떠한지 실측을 하였고, 고지도도 탐색하여 만수동 비정 작업을 하였다. 그 결과 가야산 만수동은 현재의 가천면 마수동과 법전동, 봉양리 일부 등 부근임을 밝혀냈다.
1. 머리말
2021년 8월 22일 만수동 마애 표지석 (마수리에 사셨던 어르신들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지만, 조선 십승지와의 연관성은 생각하지 않았다 판단됨)을 발견하고 유투버에 동영상을 공개한 바 있다. 합천면 가야면은 숭산마을, 치인2구 등을 십승지 마을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성주 십승지 연구소에서 합천 가야는 십승지가 될 수 없음을 자료와 함께 제공했지만, 아직도 가야면이 만수동이라는 증거와 자료를 확인시켜 주지 못 하고 있다.
십승지란 전쟁을 피하여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곳 이여야 한다. 전쟁은 침략군이 생존에 필요한 쌀과 곡식을 빼앗아 가고, 무자비한 살육과 코와 귀를 베는 등 온갖 만행으로 이어져 극심한 고통을 가져다준다. 오랜 기간의 전쟁은 정상적인 생업이 불가능하게 되어 굶어 죽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따라서 백성들은 전쟁을 피해 산간 오지로 피난을 가면서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성주에서도 임진왜란을 피해 산속으로 피난을 가다가 독용산성을 발견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평화 시에는 평지에서 생활을 하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가야산 골짜기로 생존을 위해 주거지를 옮기기 시작 했다. 가야산 동북쪽 아래 지역은 높은 해발에 마수폭포로 흐르는 수량이 풍부하고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경작지 조성이 가능한 곳으로 전쟁을 피해 오랫동안 살아 갈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1960년대 신작로가 개설되기 전까지는 가야산 아래의 마을인 마수리 법전리 신계리 용사리를 가려면 좁은 오솔길로 바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길을 지나야 도착하는 오지의 장소였다.
반면 합천군 가야면이 주장하는 숭산마을, 치인2구는 십승지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 하고 있다. 숭산마을은 거창고개에서 합천으로 내려오면 동네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전쟁을 피해 피난 가는데 밥 해먹고 살고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이는 곳이 십승지라 하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새터마을은 1872년 합천 지도를 근거로 분석하면 숭산면에 속한다. 이때의 숭산면은 현재의 1/3또는 1/4의 규모라 할 수 있다. 1872년 합천은 각사면, 상북면, 하북면, 현내면, 산어면, 숭산면, 신묘면, 구산면, 율서면, 두상면, 봉산면, 가의면, 상삼리면, 하삼리면, 천곡먄, 양산면, 대목면, 이사역면, 용주면, 홍류동, 은선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합천에 만수동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없다.
그리고 치인리는 최치원의 이름을 따서 치원리(致遠里)로 불리다가 치인리(致仁里)로 불리게 되었고, 1914년부터 치인리(淄仁里, 淄은 스님의 검은 옷)라 불리운다고 유래까지 있는 동네가 만수동과 연관이 될 수가 없다. 초막동 마장동 등 해발 800m라서 쌀 생산이 안 되어 약초 재배 한다고 합천군 홈페이지에 홍보하고 있다.
따라서 합천군 가야면은 십승지가 될 수 없으며, 합천군이 주장해 온 십승지의 자료를 보면 허구임을 쉽게 알 수가 있다. 가야면은 2011년 8월 25일 십승지 읍면협의체 회의를 가야면 사무소에서 개최 했다. 그후 2011년 11월 3일 새터마을이 만수동이라 안내석을 설치 하였다. 2016년 경북일보에 합천에 만수동을 찾을 수 없는데 아무 곳이나 만수동으로 잘 가꾸자는 내용이 기사화 하였다. 2019년 5월 1일 출간한 남민의 조선십승지 책에 새터마을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고, 최치원 해인사 팔만대장경 사명대사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합천군 가야면의 주장은 일관성이 결여된 문제점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정리하여 한국학 중앙연구원에 제출하여 성주가 십승지라는 사실을 인정 받았지만, 만수동은 지리산에도 있고 여러 곳에 있어 성주가 아닐 수도 있다. 지리산의 만수동은 대동여지도에서 万水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혹자는 만수동이 성주와 합천에서 공유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부류도 있어 안타깝다. 지금까지 통설로 알려진 합천 가야산 만수동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야산 만수동의 통설과 실증>이란 책을 발간하여 정리 하였다.
성주와 합천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가야산 만수동의 위치를 찾아보고자 한다.
2. 정감록 자료
점감록과 정감록류의 책에서는 가야산 만수동을 아래와 같이 기록 하였다.
정감록 : 星州 伽倻山南有寄洞 (一作 萬壽洞) 周回二百里 可以得保
保身有 東北不可
감결 첨부: 陜川伽倻山萬水洞, 周回二百里,可得永報
남격암 산수 십승 보길지지 : 伽倻山下南有萬水洞, 周回二百里, 可得保身,
東北則不可
남격암 십승지론 : 伽倻山下南有萬水洞, 周回三百里, 可保身
십승지 : 伽倻山下南有奇洞, 周回二百里, 可以保身 東北不可
운기귀책 : 陜川伽倻山南有萬水洞, 周回二百里, 可得永保 , 東北不可避亂
然無鬚者先入則否
요람역세 : 陜川伽倻山下萬水洞, 周回二百里, 可得永保, 東北山金鷄山,
此亦兵不入, 賢相良將繼繼出.
정감록을 제외 하고는 양승목 교수님 조선후기 십승지론의 전개에서 김용주본을 참조한 내용을 인용 한다.
3. 택리지
택리지는 점감록처럼 예언서는 아니지만, 청화산인 선생이 직접 전국을 유람을 하면서 기록한 자료로서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또 수많은 이본(異本)들이 많은 정감록류보다는 신뢰성이 높다라고 여겨진다.
택리지에서는 성주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 山東北有萬壽洞亦深奧長谷稱福地可以栖遯
산 동북쪽에 만수동이 있는데 깊고 오지의 긴 계곡이 있고 복지 (살기 좋은 곳)이라 칭한다.
2) 慶尙即大丘琴湖星州伽川金山鳳溪幷甫田 腴壤自新羅至今人烟不衰地理生利俱可作世居之地 但不可避兵惟伽川鳳谿近嶺治亂俱可居止
"경상도에는 대구의 금호와 성주의 가천과 김산(현 김천)의 봉계가 있다. 모두 들이 크고 땅이 기름져 신라때부터 지금까지 사람 사는 집이 줄지 않는다. 지리와 생리가 모두 여러 대를 이어 살만한 곳이다. 다만 난리를 피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 오직 가천과 봉계가 고개와 가까워 평시나 난시에도 모두 살 만하다."
3) 壬辰亂金剛智異俗離德裕皆不免倭人 獨五臺小白及此山不至 故自古亦稱三災不入
임진왜란때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덕유산은 모두 왜적의 전화를 면치 못하였으나, 오직 오대산 소백산, 가야산에만 이르지 못했다. 삼재가 들지 않는 곳이다.
4. 조선시대의 洞의 형성 및 사례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은 조선에서 시행된 행정 구역 체계로, "경국대전에 의하면 수도인 한성에서는 5개의 호(戶)를 1개의 통(統)으로 구성하고 리(里)는 5개의 통(統)으로 구성하며 면(面)은 3~4개의 리(里)로 구성하여 통에는 통주(統主) 또는 통수(統首)를 두는 직제를 마련"합니다. 지방에서도 동일하며, 면에는 권농관(勸農官)이라는 관리관을 두었다.
즉 호구를 관리하고 범죄자의 색출과 조세 징수, 부역 동원 등을 목적으로 만들었던 것 입니다. 조선 후기에 사회가 불안해지자 역(役)을 피하여 호구의 등재없이 이사와 유랑을 반복하는 유민(流民)들과 도적들의 행태를 방지하는 데 주로 이용되었다.
경국대전에서도 통. 리를 기본 행정단위로 적용하는데, 동은 왜 생겨나고 어떻게 운영하였을까? 동은 리 보다는 크고, 옛날 면보다는 작은 특별 행정조직으로 사용되다가 동 과 리를 혼용해서 사용한 것은 아닌가 추정 된다. 이는 세종조 이선로가 작성한 상소문을 보면, 사람들이 근접하기 어려우나 농사 짓을 토지가 있는 지역으로 부역을 피하려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는 지역 (압록강 근처의 군사적 방어 목적도 있음)을 볼 때, 기존 행정조직이 아닌 별도의 洞을 만들었다고 유추 된다. 이는 옛날 지도를 보면, 압록강, 두만강 주변의 국경지대와 높은 산 주변에 洞으로 쭉 나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소의 주요 내용 입니다.
세종 27년 11445년 1월 4일 예조 좌랑 이선로가 함흥과 압록 사이의 빈 땅에 새로운 현을 세우고 경작하게 할 것을 아뢰다.
예조 좌랑(禮曹佐郞) 이선로(李善老)가 아뢰기를,
"신이 강계(江界)로 부터 여러 산(山)을 샅샅이 더듬어서 새 땅[新地]를 찾아보았는데, 압록강(鴨綠江) 이남은 의심할 바가 없사오나, 새 땅에 대한 말이 떠들썩한 지가 이미 오래서, 무지(無知)한 백성들이 요역(徭役)을 피하려고 온 집안이 도망하여, 혹은 사망하는 데에 이르고, 혹은 고생하여, 양계(兩界)의 백성들이 소란 스럽다. 지금 형세(形勢)의 대략을 보면 강계(江界)로부터 북청까지는 상거(相去)가 거의 15, 6일 노정(路程)이고, 함흥(咸興)으로부터 압록(鴨綠)까지는 상거가 거의 10일 노정인데, 그 사이에 있는 빈 땅은 사방으로 산이 둘러 싸여 있고, 여러 물[水]이 둘러 흐르고 있어, 토전(土田)이 경작할 만하여 사람이 살만하오니, 진실로 군현(郡縣)을 설치할 수 있는 곳입니다.
고을[邑]의 쓸데없는 땅을 베어 내어 따로 한 현(縣)을 세우자고 상소를 올립니다.
하였다. 이에 정부(政府)에 내려 의논하니, 정부에서 말하기를,
"선로(善老)가 아뢴 땅은 기후가 차서 오곡(五穀)이 잘되지 않으니, 읍(邑)을 설치할 수 없고, 삼수(三水) 등지는 갑산과의 상거가 심히 멀고, 도로가 지극히 험하여, 인물(人物)이 쉽게 서로 통할 수 없기 때문에, 부역을 피하는 사람이 혹 도망가는 자가 있고, 또 거군만수동(車軍萬水洞) 등은 적(賊)들이 경유하는 길이므로 방어가 더욱 필요한 곳으로 삼수에 읍을 설치하는 것이 편합니다."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삼수는 가장 춥고 살기 힘든 오지로 조선시대의 살인, 강도, 강간 등 중죄인들의 대표적 유배지로 한번 귀양 가면 호랑이 밥, 풍토병 등으로 살아오기 힘든 곳으로 알려져 있고, 삼수는 압록강, 삼수천, 어면강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으로 겨울철 영하 17~19도로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이다.
이처럼 국가에서는 깊은 산중으로 부역을 피하려고 도망가는 백성들을 관리해야 했을 것이고, 조선 중기가 되면서 왜란 호란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갔음을 이미 확인 되었고, 또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지쳐 노비가 되느냐? 호포세 등 이중적인 과세 등 양반의 횡포 등)의 선택에 몰리면서 양반들의 관리망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고 보여 진다. 조정에서는 이런 추세에 대응하기 위해 경국대전의 里와 유사한 더 큰 조직인 洞을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유독 옛날지도를 보면 평지에는 洞이란 명칭이 없고 面 (지금보다 단위가 적은 조직)으로 나타내는데, 지리산의 백무동 만수동 칠선동, 덕유산의 구천동 안의동, 가야산의 홍류동 만수동, 속리산의 화양동 용유동, 소백산의 백운동 등 洞名이 많이 나온다.
지명을 지을때도 사람 이름 짓듯이 심사 숙고하여 땅의 형태 등을 면밀히 관찰해서 지었다. 볕이 잘 드는 양평, 양촌 반면 해가 늦게 뜨는 곳은 음지, 소가 누워 있는 우면산, 삼성전자 반도체가 생산 되는 기흥과 청주공항 들어선 비상리은 이미 이름대로 운명이 지어 진 것인가? 器興,飛上里 및 1년에 반은 눈이 덮혀 있다해서 지어진 설악산, 용 9마리가 승천 했다는 구룡산, 호랑이가 업드려 있는 형상이라 복호산, 용머리 형태의 용두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산 이름은 봉화산(봉화대가 있는 산을 봉화산으로 칭함) , 청계천변의 모래가 많이 쌓여 생긴 사근동, 구룡산이 소가 누워 있는 형국에 소의 염통 위치라고 염통골, 정조의 화성 행차시 빨리 사도세자의 능을 보고 싶은데 왜 이리 느리냐고 물어 붙혀진 지지대 고개, 압구정 정자가 있어 있어서 압구정동, 산성이 있으면 산성동, 무덤이 근처에 있으면 능골 등 풍수지리, 형세, 역사적 사건, 구전 등을 토대로 작명되었다.
만수동이라고 작명한 시기 등은 알 수가 없으나, 가야산 주위의 장소가 사람이 살기 좋아 장수하는 마을 이란 의미가 함축된 만수동이라 불러졌다고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마수리 뒷산에 있는 만수동 마애 표지석의 글씨 마모 정도를 보았을 때 200여년 전에 암각했으리라 추측된다. 전쟁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이주한 사실이 사부랭이, 아전촌, 마수리 입향조를 통해 확인 된 사실로 감안하면 전쟁으로부터 목숨 보존이 가능했던 최상의 마을이었다 여겨진다. 그래서 황제에게 쓰여진다는 만수동이라 지어질 만큼 전쟁도 피하고, 생활에 필요한 식수, 곡식을 재배할 수 있는 초지 등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 하겠다.
洞이란 명칭의 생성 과정을 문헌에 찾아 보아도 아직 확인 하지 못 하였고, 옛 지도에 압록강 국경지대와 높은 산에는 예외 없이 洞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조선왕조실록의 함경도 삼수지역의 특수성에 대한 조사와 행정조직 설치에 대한 상소문을 바탕으로 추정하였다.
압록강에서 백두산방향으로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洞 현황
金洞 毛土里洞 長洞 乫軒洞 加羅洞 嗭洞 下北 長洞 細洞 古道水洞
旧
仇郞洞 介也之洞 拒柴洞 宰臣洞 玉洞 凾三洞 城洞 亇屹洞 大仂岩洞 間岺洞 板及洞 淸鉄洞 漆田洞 小淸金洞 大淸金洞 金同洞 三洞 淵洞 金倉洞 大水洞 食塩洞 豆之洞 莫従洞 直洞 城洞 家舍洞 北水洞 門岩洞 白水洞 兊洞 小雲洞 檜洞 河山洞 水永洞 塔洞
백두산 근처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洞 현황
斜亇洞 南阿時洞 西阿時洞 北阿時洞
북한 내륙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洞 현황
八板洞 黃淸洞 玉右岩洞 回仲洞 大洞 西大洞 德万洞
북한 장덕산 근처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洞 현황
崔世洞 就之洞 楸洞
북한 개화산 魚背洞 洚祥洞 능이령 龍洞 조가령 新里洞 두음령 聖人洞
동동령 上北洞 西洞 杜門洞 軒化洞 香洞
마현령 梨洞 박달령 鶴翼洞 청하산 直洞
금강산 長佐洞 万瀑洞 三億洞 束沙洞
구봉산 双鳳洞 개성 만수산 杜門洞
그외 枝里洞 佛岩洞 會洞 長洞 琻洞
남한 오색령 德積洞 청평산 加洛洞 홍천 0田洞 栢子洞 백덕산 逃花洞 인제 大隐洞 삼척 龍山洞 청화산 龍遊洞 仙遊洞 內仙遊洞
보령 肓蘸洞 건천 匪月洞 장성 불태산 平章洞 지리산 万水洞 灵源洞 黃岑洞
5. 합천군이 주장 하는 근거와 문제점
합천군은 성주 십승지 연구소에서 “합천은 십승지가 아니다”라는 주장에 2021년 11월 12일 아래와 같이 답변을 하였습니다. 1. 귀하께서는 성주 가야산 동북쪽이 십승지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정감록’과 ‘격암유록’에서는 “가야산 남쪽에 만수동이 있으며 그 둘레는 200여 리 가량 되어 몸을 보전할 수 있지만 가야산의 동북쪽은 아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2. 가야 주민들은 가야면 숭산지역 여러 마을과 치인2구 마장동 마을을 예로부터 만수동이라 불렀고 표지석도 세워 만수동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가야산 둘레 200여 리에 성주가 일부 포함될 수도 있겠지만 옛날부터 내려오는 여러 고서에서도 분명히 만수동은 가야산 남쪽 200여 리 둘레라고 밝히고 있으므로 이는 합천 지역에 해당됩니다.3.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가야산 만수동을 동북쪽으로 수정했다면 역사서에 따라 남쪽 200여 리로 재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정감록’과 ‘격암유록’ 등에서 분명히 “동북쪽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많은 학자들도 합천 가야산 남쪽이 십승지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합천이 십승지가 아닌 이유를 분석한다.
합천은 “성주군 가천면이 십승지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기에 앞서 “합천군 가야면이 십승지인 근거를 찾아야 하는데 그 부분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 동북 불가는 여러 자료중 잘못된 내용 (합천군에 유리한 내용) 한줄 가지고 논박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여겨진다.
대부분 정감록이 伽倻山南이란 한자를 공통적으로 사용 한다. 가야산을 정확히 모르는 부류의 사람들이 가야산 남쪽을 합천이라는 선입견에 사로 잡혀 합천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유로 보여 지는데, 가야산 남쪽은 가야산성이 있는 성주가 합천보다 영역이 더 넓다. 아울러 합천 방향 가야산 남쪽은 해인사로 인해 일반 백성들이 살 수가 없었으며, 바로 남쪽은 사람의 접근이 불가한 곳이다. 반면 성주 방향의 가야산 남쪽은 가야산성에 우물도 있고 성곽을 따라서 군사들이 병영생활을 하기에 적합한 곳임을 지금까지 간과한 듯 하다. 가야산을 정확히 분석 이해하면 남쪽이 합천이라고 하는 오류를 알 수 있다.
성주 가야산 남쪽에 만수동 이라는 기이한 동네가 있다. 주변 이 백리는 가히 되고 몸 보신이 가능하며 동북지역은 아니다. 정감록의 여러 이본들 중 ‘東北不可’라고 ‘不可’라는 漢字를 추가 하였고, 남격암 십승지론은 ‘東北不可’라 하지 않는다. 언어는 세상에 있는 물질, 개념이 있는 경우 생기고, 예외로 없다(無)는 없음에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물론 ‘없다’라는 관념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가야산 동북쪽 불가’라고 쓰는 문장 자체가 문제가 있다, 가야산 동북쪽이 만수동이 아니면 그냥 가야산 남서쪽 하든지 하면 될 것을 동북쪽이 아니라고 기술하는 자체가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이라 판단된다. 이는 가야산 동북쪽에 만수동이 있음을 알고 의도적으로 부정하여 합천 입장에서 작성하였다 여겨진다.
정감록류의 내용이 상이한 가운데에도 ‘伽倻山下’의 단어가 많이 나온다. 가야산 아래의 범위를 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주군 십승지 대부분의 마을은 가야산 뒷산으로 형성되어 가야산 아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합천군의 가야산 아래 남쪽은 해인사가 대부분 차지하여, 마을은 치인1리 구원1리 구원2리 정도라 할 수 있다. 합천이 그 동안 십승지라 주장했던 숭산마을은 가야산 아래가 아니고, 치인2리도 가야산이 아닌 난석산 아래라 해야 한다. 합천군이 십승지로 가야면 전 지역이라 규정하는 것은 가야산 남쪽을 합천이라고 하는 오류에 이어, 가야산 아래의 범위도 비상식적으로 확대된 논리적인 주장이아니라 할 수 있다.
숭산마을은 거창고개에서 합천으로 내려오면 동네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전쟁을 피해 피난을 가는데 밥 해먹고 살고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이는 곳이 십승지라 하면 상식적으로 옳지 않다. 새터마을은 1872년 합천 지도를 근거로 분석하면 숭산면에 속한다. 1872년 합천은 각사면, 상북면, 하북면, 현내면, 산어면, 숭산면, 신묘면, 구산면, 율서면, 두상면, 봉산면, 가의면, 상삼리면, 하삼리면, 천곡먄, 양산면, 대목면, 이사역면, 용주면, 홍류동, 은선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합천에 만수동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10년 전에 설치한 만수동 안내석을 인정 해 달라고 하는 것도 아이러니함과 동시에 상식에도 맞지 않다 하겠다.
그리고 치인리는 최치원의 이름을 따서 치원리(致遠里)로 불리다가 치인리(致仁里)로 불리게 되었고, 1914년부터 치인리(淄仁里, 淄은 스님의 검은 옷)라 불리운다고 유래까지 있는 동네가 어떻게 만수동과 연관이 된다고 주장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초막동 마장동 등 해발 800m라서 쌀 생산이 안 되어 약초 재배 한다고 합천군 홈페이지에서 보았다. 이 쪽 지역은 가야산의 남쪽이 아니고, 가야산의 서쪽이라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지역은 난석산, 남산 아랫마을이다. 명색이 858m 1,085m 인데, 대한민국의 이 정도의 해발이 되는 산은 많지 않다. 이런 남산과 난석산을 제외하고 가야산 남쪽이라 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 치인2리는 성주 십승지 연구소에서 직접 실측을 했다. 초막동, 마장동은 마을 부락이 별로 없다. 이는 고불암 등 해인사의 소유로 민간인이 대규모로 살 수 있는 공간이 안 나온다. 이 곳은 200리는 커녕 마을로 보면 20리 겨우 되고, 산 넘어가면 거창군입니다. 가야산 남쪽은 해인사가 대부분이다. 일부 구원리 마을 2개가 있는데 가구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치인2리는 만수동은 될 수가 없다. 1872년 합천지방 지도에 홍류동, 은선동이라 기록 되어 있는데, 만수동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관청에서 작성 했을텐데, 만수동은 당연히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천은 이백리가 되는 지도를 성주 십승지 연구소처럼 현장 실사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합천군이 성주 포함해서 이 백리 된다는 것은 시작점이 어디이고, 종착점이 어디인지 밝혀야 한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성주를 포함시켜 이 백리라 하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왜 성주를 포함시켜야 하나 성주와 합천 경계 시점을 보면 민가가 없는 지역으로 연계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가야면은 “2011년 11월 3일에 새터마을의 유래가 적힌 비석을 만들어 설치하여 예로부터 만수동이라 불렀고 표지석도 세워 만수동임을 알리고 있다.”라고 주장하는데 10년 전에 만든 비석이 역사적 가치가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 된다.
합천군 가야면은 감결 첨부 등의 합천 가야산이라 기록 된 자료를 바탕으로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2011년 6월 23일부터 영주시 풍기읍이 주도하여 운영되고 있는 단체인 십승지 읍면 협의회에 가입하였고, 2011년 8월 25일 합천군 가야면에서 읍면회의를 하였다. 아마도 객관적 자료가 없음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2011년 11월 3일에 새터마을의 유래를 아래의 내용으로 비석을 만들어 설치하였다 추정된다.
새 터 마 을 유 래
정감록 십승지에 가야산하 만수동은 인간이 수를 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예언하여 그곳을 찾아 옛 사람이 가야산 동서남북 기슭에 터를 잡고 자금까지 살고 있도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마을 앞 저수지에 물이 가득하니 이곳이 바로 만수동이라 산고.수장하여 살기 좋은 이곳 만수동에 약 300여 년 전에 터를 잡은 선조님께 감사드리며
1960년대에는 70가구가 살고 있다가 시대적 농도격차로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고 1982년 1차 2010년 2차 저수지 공사로, 마을 앞 옥토와 아랫담 가옥 전부가 저수지에 편입되는 아픔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후손들의 성씨와 이름을 이 비에 각하여 洞名 새터와 같이 새로운 터가되어 영세불멸의 명지가 될 것을 기원하노라.
서기 2011년 11월 3일
글 이학윤
추진위원장 고봉태
추진위원 김억민 김삼만 박동영 0 0 0 염종규
이석규 이환철 장상근 0 0 0 황이수
그리고 2016년 10월 17일 경북일보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편에 새터마을 이야기 없다. 오히려 성주 마수동이 십승지 였다는 구전도 있지만, 합천군에 만수동이 있었는데 어디인지 알 수가 없으니 아무 곳이나 만수동으로 여기며 가꾸며 살자고 제안을 합니다. 경북일보의 자료는
인터넷에서 확인 가능 합니다 .
2019년 5월 1일에 출간된 ‘남민의 조선의 유토피아 십승지를 걷다.’에 “피신처로 이보다 좋을 수 없다.라는 합천 가야편”에 이런 이야기는 전혀 없고 해인사 최치원, 팔만대장경, 사명대사 이런 이야기만 기술 되어 있다. 2013년 기준으로 도움 주신 분 정** (합천군 관광개발사업단장 ), 손**(풍수연구가, 합천군 문화관광해설사), 00 (합천 가야산 홍제암 큰 스님), 길** (합천 가야산 홍제암 보살), 이** (합천군 문화관광해설사) 라 소개를 하고 있다. 당연히 진짜로 십승지 새터마을로 전해져 왔으면 이 분들은 알았어야 한다고 판단된다.
합천군 가야면이 십승지라고 새터마을에 세운 비석과 경북일보 신문 기사, 2019년에 출간한 남민의 ‘조선의 유토피아 십승지를 걷다’의 내용들이 일치되지 않고 일관성이 없다. 이는 합천군 문화예술과 직원과 가야면 직원과의 통화에서도 십승지 관련하여 전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처음 들어 본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고, 2019년 5월 23일 가야면 홈페이지에 십승지 내용을 수정하였는데 근거 자료를 요청하니 없다고 하는 상황입니다.
합천군 가야면이 십승지라 주장했던 숭산마을은 거창고개에서 내려 오는 길에 마을이 한 눈에 다 조망되어 전쟁을 피하여 피난 가야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고, 치인2구는 해발 8~900고지로 피난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그러나 초막동 마장동 등은 합천군에서 논농사가 불가하여 약초 재배한다고 홍보하고 있으며,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식량생산이 불가능한 상태라 십승지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이 곳 또한 가야산 남쪽처럼 해인사의 소유로 민가가 형성될 공간이 거의 없다. 지금도 해인사 고불암 가는 길 근처를 가보면 민가가 몇 집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또 1872년 합천 지방도에 만수동 기록이 없고, 가야산 주변 2백리라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조건을 해인사가 대부분 차지 하고 있어 아무리 넓게 적용해도 백리 겨우 되고, 해인사를 제외 하면 50리도 안 되는 것으로 확인하였다. 이를 가야면도 알고 있는지 “가야산 둘레 200여 리에 성주가 일부 포함될 수도 있겠지만 옛날부터 내려오는 여러 고서에서도 분명히 만수동은 가야산 남쪽 200여 리 둘레라고 밝히고 있으므로 이는 합천 지역에 해당됩니다.”라는 논리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 가야면의 돼지골이 만수동이였을 것이라는 내용도 있는데 십승지는 사람이 사는 곳을 말하는 것이지 동물들이 살아가는 곳을 말하지 않는데 200리를 맞출려고 관련 없는 지역을 언급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가야면은 성주 십승지 연구에게 11월 22일 위의 내용으로 답변을 주기로 약속했다. 현장 확인을 하느라 시간이 필요하여 다시 12월 2일까지 답변을 하기로 하였으니 현재까지 답이 없는 상태이다.
6. 성주군이 만수동인 근거
성주군과 합천군은 가야산을 경계로 경북과 경남이 나누어지고 있다.
성주군과 합천군 지도
※ 합천군이 주장하는 치인2리는 가야산의 남쪽이라기 보다는 서쪽에 위치 하고 있다고 판단해야 할 듯 하다
가야산은 칠불봉을 기준으로 동쪽이 성주군 가천면 수륜면 관할이고, 우두봉부터 가야면 관할이라 하겠다. 가야산을 평평하게 두면 성주군이 3/4 관할, 합천군이 1/4 관할 한다 하겠다. 가야산 4면을 기준으로 하면 성주군은 가야산 동북부와 남동쪽을, 합천군은 서남쪽이다.
가야산 남쪽이 모두 합천군 가야면 관할이라는 오류에 빠져 있는 듯 하다. 가야산 남쪽은 성주가 더 넓다. 또 가야산 남쪽만 분석해 보자면 성주군은 가야산성이 있어서 군인들이 병영생활을 하였고, 가야산 탐방로가 있는 수륜면 지역은 많은 민가들이 살수 있는 조건이다. 옛날에는 동북쪽의 만수동과 동남쪽의 만수동이 가야산성을 중심으로 동(洞)이 형성 되었을 수 있다고 추정 된다.
아니면 조선시대의 지리 자료는 일관성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독도의 자료도 울릉도의 동쪽이라 기록되기도 하고, 울릉도 남쪽이라 기록되기도 한 것처럼
측량 기술의 부족으로 정확성은 떨어져 남쪽(지금의 수륜 백운리)과 동쪽 (지금의 수륜 봉양리)의 구분을 정확히 못 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봉양리는 만수동 마애 표지석이 있는 곰시와 인근 위치에 있다.
정감록에서 성주 가야산 남쪽이라 기술하고 있고, 감결 첨부, 운기귀책, 요람역세에서는 합천 가야산 만수동이라 하고, 남격암 산수 십승 보길지지, 십승지는 伽倻山 東北則不可 라는 전제를 달면서 성주를 배제 시킨다. 東北不可는 가야면이 성주가 십승지가 아니라고 하는 논리로 사용하는 문구이다.
언어는 발생부터 없는 사실에 대한 단어가 없는 것이 통례이다. 물론 예외로 ‘없다’라는 개념의 단어로 無를 만들어 냈다. 이마저도 서양문명에서는 ‘is not' 으로 어쩌면 ’없다‘라는 의미도 보다는 ’아니다‘로 동양문명의 ’없다‘와는 포함하는 뉘앙스가 좀 다르다 하겠다.
따라서 “伽倻山 東北則不可 는 만수동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가야산 동북쪽이 만수동이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아니다.“라고 표현했다. “만수동이 합천 가야산 남쪽이다” 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가야산 동북쪽은 아니다 ”라고 기술한 것에 대하여 의구심이 들게 한다. 만수동이 가야산 동북쪽인 성주에 있고, 합천의 가야산 남쪽에 만수동이 없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1) 성주 가천 마수리(법전동) 뒷산에 만수동이란 글씨가 쓰여진 표지석이 있다. 동네 주민들은 이미 표지석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십승지 관련된 표지석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필자는 십승지 가야산 만수동 탐구하면서 이 표지석이 성주가 가야산 만수동임을 확인해 주는 증거임을 확신하고 성주신문(2021.9.14.일자)에 기고하였다. 만수동이 아닌 곳에 ‘만수동이란 표지석’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 정감록에서 星州 伽倻山南有寄洞라 기록이 있다. 정감록은 성주라고 기록 되어 있고, 가야산 남쪽은 성주군이 합천군보다 2배나 크다. 합천의 가야산 바로 남쪽은 사람이 살 수가 없는 조건이고, 성주의 가야산 바로 남쪽은 군사들이 생활을 하였고, 비상시에는 일반백성들도 전쟁을 피하여 성안으로 들어가 생활을 하였음이 옛 기록에 나와 있다.
3) 택리지에서 山東北有萬壽洞이라 기록이 있다. 여러 필사본의 내용이 상이한 상태인 정감록보다는 보다는 택리지가 신뢰도에서 우위라 판단 한다. 이 경우 합천군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필자는 가천의 마수리 곰시 봉양리 사가정 계곡과 수륜 백운동 가야산성의 거리를 실제로 측정해 보았는데, 성주지역의 사라진 마을 윗사부랭이, 염주실, 서침실과 옹기점 등은 현장을 가보지 않아 포함시키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200리에 이를 만큼 공간이 있음을 확인했다.
4) 성산지 (가천면 마수동편)에서 사봉 김천석 선생께서 “도덕동”이라 기술 한다. 도덕동이란 도가 잘 지켜져 살기 좋은 동네란 뜻이다. 이것은 지금도 지리산 청학동을 “도인촌”라 부르는 것에 비유 된다 하겠다.
5)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칠불봉과 동성봉 만물상을 잇는 지역의 가야산성과 금봉리 뒷 산에 독용산성이 있다. 전쟁이 발생하면 주위 생산된 곡식과 가축을 데리고 산성으로 들어 가면 된다. 외적이 가야산성 침입이 무척 어려울 것이다. 신계용사는 가천에서 30리가 넘는 오지 이고, 1960년대 신작로 개설 전까지는 오솔길 수준이었으며, 해발 400m 전후로 합천의 주요 마을과 비교시 고도가 높고 마을이 산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아 쉽게 접근할 수가 없다. 따라서 당시 신계용사로 가는 산길은 외적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야시대 수축된 것이라 판단되는 독용산성이 있다.
6) 성산지에 進上乾枾亦出於此이라 하여 ,“진상품으로 곶감을 생산한다.”라고 한다. 곶감은 상주 청도 진영 등이 유명한데, 마수리에서도 곶감을 진상한다 하는 것은 청정지역의 좋은 기운을 받은 곶감을 임금이 드시라고 지정했다 판단 된다.
7)성주군지 (가천면 마수조)
”마수리는 가야산의 아랫자락으로서 예로부터 병란을 피하고, 생리의 덕이 있는 명지의 일처로 일컬어져 만수동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예부터 난세에 많은 은사들이 이곳을 수양처로 삼아 정착했다“고 했다. 또 곰시조에는 ”가야산 산봉의 동북쪽의 가파른 산언덕 아래 자리한 마을로서 마수 마을과 더불어서 천혜의 피병지이며, 난세의 은거지로 알려져 있다“고 적혀 있다.
남격암 십승지론는 伽倻山下南有萬水洞, 周回三百里, 可保身라고 기술 하고 있다. 남격암 십승지론은 300리라고 하는데, 필자가 직접 가 보지 못한 지금은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윗 사부랭이, 서침실, 북다랑, 시여골 등을 포함 하면 300리도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가야산 남쪽은 합천 보다 성주가 더 넓기 때문에 성주 수륜면의 가야산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는 성주 가야산 만수동의 200리를 산정함에 있어서 포함 되어야 하는 곳 이다.
8) 만수동 이주 사례
임진왜란이 발생하니 가야산을 향하여 첫 번째 이주한 가문이 경주최씨 광정공파 (慶州崔氏 匡靖公派) 二十一 世孫 智山公이고, 字는 遠之 號는 隱溲입니다. 공은 明宗 丁卯 九月 二日生으로 宣祖 壬辰當倭亂超然獨往避于星州伽倻山下沙夫郞村 故後人稱幽巖處士甲申十二月八日卒 墓星州勿爾坊沙峴洞右蔍亥坐有床石 ( 선조 임진왜란을 피해서 혼자 가야산 아래 사부랭이로 왔다. 그리하여 후세들은 유암처사라고 불렀으며 1604년 갑신년에 사망하다. 묘는 성주 이물방 사현동 우측 능선 해좌로 조성했으며 상석이 있다. 배우자는 칠원윤씨로 아전촌 뒷골 임좌에 조성했다.) 경주최씨 족보에는 임진왜란을 피해 이주했다고 기록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십승지가 연관되어 있다 하겠다.
사부랭이 마을 입구에 만들어진 경주최씨 은수공 유서비
사부랭이 마을 입구에 은수공 유서비가 있는데, 최근에 도로 확장으로 위치를 새로 생긴 사부랭이 마을 입구에 옮겨져 있습니다.
두 번째는 김영김씨 15세손 명중(命仲) 공 이다. 자는 時彦 으로 1603년생 10월 10일에 돌아가신 것으로 김영김씨 족보에는 기록 되어 있다. 상주에서 14세 군석 공의 비문 내용의 일부 이다.
壬辰倭亂 七年國難을 克服하시고 十五世祖 謂 命仲公을 낳으십니다. 謂命仲先祖께서는 龍蛇之亂을 避하고 隱遁自活을 위한 世居地로 이곳 伽倻山 北麓 蛾泊山 앞줄기 꽃밭등에 앉은 나비모양 능선 아래의 峽谷盆地를 蛾田村이라 名하여 入鄕하시고 이후 後孫은 代代로 산비탈을 墾耕하고 窮村을 가꾸며 四百餘年을 살아왔다. 김영김씨 명중 공은 피란으로 와서 농토를 개간하는 등 십승지를 찾아 가는 조건에 거의 완벽하게 부합된다 하겠다.
세번째 김해김씨 58세손인 정남(貞南)공으로 字 道餘 號 星齊 입니다. 공은 光海 丁巳 生으로 마수리에 입향은 성년이 된 기준으로 본다면, 인조 전후 즉 정묘호란 전후 일수도 있다고 추정 된다. 辛未년에 蔭宣務郞行 掌隸院府事를 지내고 忌九月 七日 별세 했습니다. 공은 星州郡 伽泉面 馬水洞 其洞 未坐 에서 영면중 이십니다.
네번째 진주강씨 20세손 문환(文煥) 공으로 字는 光重 號호는 誨山 자(중광) 이다. 공은 司僕寺正으로 英廟(祖) 乙丑년에 입향하여 사신 듯 하다. 墓는 馬首村 北力洞 子坐이며, 진주강씨 족보에는 마수 입향을 사대부로서 피난지 찾기 위한 십승지와 직접 연관성은 부인 하고 있으며, "자손들이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하기 위해 입향했다"고 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십승지 조건에 하나임으로 볼 때 가야산 부근의 십승지 형성 과정을 설명할 수 있겠다.
경주김씨는 19세기 중반 옹기점에 입향하셔서 5대(현재 4대조 부터 입향)가 살았으며, 지금은 도시로 이주 한 상태 이다. 보통 15가구 정도가 쭉 살다가 지금은 5가구로 줄어 들었지만 왜란 호란을 겪고 保身을 위해 입향하셨다 하겠다. 이 외에도 아전촌 영산신씨 덕좌공파도 김영김씨와 비슷한 시기에 입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 족보 등 문헌적 기록은 확보하지 못 하여 구전의 내용을 밝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일 먼저 십승지 가야산 아래 사부랭이 지역으로 이주한 가문은 경주최씨 광정공파 21세손 지산(智山)공 이후, 경주최씨 후손들은 사부랭이에서 독산 올미 금바우 등 신계용사에서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으며, 예전 동네의 규모는 각 마을마다 7~80여호에서 지금은 도시화에 따라 젊은이들이 도시로 전출한 영향으로 현재는 20여호 가구 수준으로 축소 되었다. 윗사부랭이, 염주실 등 동네는 현재 주민이 살고 있지 않다.
김해김씨 문중도 시차를 두고 입향한 것으로 추정 되며, 후손들이 현재도 살고 있습니다. 진주강씨 만호공파 문환 (文煥)공은 집성촌 문중중 가장 늦은 영조 1761년에 입향하여,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으며, 마수리 또한 거주하는 주민은 많이 감소한 상태이다.
성주인들의 피난경로
7. 성주와 합천의 비교분석
성주 지역의 마을은 합천보다 높은 4~500m 지대에 형성되어 있고, 합천 지역은 4~400m 지대를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성주의 가야산 가는 길은 1960년대 신작로를 건설하기 전에는 오솔길로 되어 있었는데, 바로 앞도 볼 수 없는 숲길을 걸어가야 아전촌, 마수리, 갈골, 들리미를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피해 산 속으로 가다가 발견한 독용산성은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었다 하겠다.
구분 | 성 주 (마을명) | 합 천 (마을명) | 비 고 |
955m | 독용산성 정상 | ||
924m | 초막동 (남서쪽) | 924m | |
897m | 해인사 고불암 | 897m | |
854m | 가야산정상아래 절터 | ||
844m | 독용산성 밭 | ||
780m | 마장동 | 780m | |
744m | 독용산성 동문 | ||
587m | 치인리 | 587m | |
521m | 성주 경계 지역 | 521m | |
519m | 가야산 탐방 입구 | ||
650m | 독산 | ||
529m | 갈골 | ||
505m | 백운리, 신파리 | ||
500m | 가야산생태공원, 들리미 | ||
487m | 모래재 | ||
455m | 들리미 | ||
429m | 해인사매표소, 죽전리 | 429m | |
427m | 금바우 | ||
426m | 구원리 | 426m | |
411m | 곰시 | ||
397m | 구원리 | 397m | |
387m | 가천리 (더내마을) | 387m | |
342m | 마수리 | ||
339m | 봉양리 | ||
333m | 황산리 | 333m | |
325m | 가천리 (지산마을) | 325m | |
320m | 사촌리 | 320m | |
320m | 구미리 | 320m | |
301m | 사촌리 | 301m | |
255m | 매화리 | 255m | |
247m | 가야농협(소재지) | 247m | |
244m | 숭산천 | 244m | |
217m | 동원리 | ||
138m | 화죽리 | ||
120m | 수륜소재지 |
조선십승지 논란 관련 성주, 합천 비교
성 주 | 합 천 | 비고 | |
가야산 관할 | 가야산 동북쪽, 남쪽(가야산성) | 가야산 남쪽 (해인사) | |
가야산 아래 마을 | 들리미, 갈골, 전동, 올미, 독산, 사부랭이, 금바우 돌티, 세마, 모래재, 곰시 마수리, 아전촌, 옹기점, 봉양리, 백운리, 신파리 (염주실, 서침실, 북다랑, 시엇골 산성 등 마을 없어짐) | 치인1리, 구원1, 구원2리 | |
200리 | 가야산 3/4 관할로 200리 실측 (300리도 가능 사료) | 가야산 1/4 관할로 200리 불가 (해인사 제외하면 50리도 안됨 ) | |
십승지 조건 | 임진왜란을 피해 이주시작 (사부랭이, 아전촌 등) 1960년 도로확장전 하늘만 보였던 오지길 이었음 | 숭산마을 (거창고개에서 보면 한눈에 동네가 다 보임) 십승지 불가 | |
만수동 | 200년 정도 된 표지석 발견 (가천 법전리 산 112-1) | 새터마을을 만수동이라 안내석 설치 (2011년 11월 3일) | |
만수동 유래 | 만수동을 일제시대때 馬首洞 ⇒馬水洞 으로 변경 (일제 칙령 존재) | 치인리가 만수동이라 주장 치원리(致遠里)⇒치인리(致仁里)⇒1914년부터 치인리(淄仁里, 淄은 스님의 검은 옷) | 치인2리는 서쪽 |
고문헌 | 점감록 星州 伽倻山南有寄洞 (一作 萬壽洞) 周回二百里 可以得保保身有 東北不可 | 감결첨부 陜川 伽倻山 萬水洞, 周回二百里,可得永報 | 논란 多 |
참고 문헌 | 택리지 “山東北有萬壽洞亦深奧長谷稱福地可以栖遯 ” “慶尙即大丘琴湖星州伽川金山鳳溪幷甫田 腴壤自新羅至今人烟不衰地理生利俱可作世居之地 但不可避兵惟伽川鳳谿近嶺治亂俱可居止” | 없음 | |
기타 문헌 | 성산지 “洞口有沙峰洞門道德洞刻字亭後有遺墟刻字” “進上乾枾亦出於此” |
기타 문헌 | 성주군지 ”마수리는 가야산의 아랫자락으로서 예로부터 병란을 피하고, 생리의 덕이 있는 명지의 일처로 일컬어져 만수동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예부터 난세에 많은 은사들이 이곳을 수양처로 삼아 정착했다“고 했다. 또 곰시조에는 ”가야산 산봉의 동북쪽의 가파른 산언덕 아래 자리한 마을로서 마수 마을과 더불어서 천혜의 피병지이며, 난세의 은거지로 알려져 있다“고 적혀 있다. | ||
이주 사례 | 경주최씨, 김영김씨, 김해김씨, 진주강씨, 경주김씨 등 집성촌 족보 확인 | ||
십승지 유추 | 임진왜란 피난가다 독용산성 발견 되었다고 증명 | ||
옛날 지도 | 성주지방도는 훼손 되어 확인 불가 (독용산성 지도 有) | 1870년 합천 지방도에 은선동, 홍류동 만 있음 . 합천에 만수동이 없기 때문에 이 지도에 만수동이 기록없음 | |
합천 주장의 허구 | 2011.11.3. 새터마을 만수동이라 안내석 설치 2014 남민의 조선십승지 책에 새터마을에 대한 내용 無 2016 경북일보에 합천에 만수동 기록이 없는데 만수동을 잘 가꾸자 주장 | 일관성無 | |
합천의 십승지 관리의 의문점 | 합천 문화예술과는 십승지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답변 가야면의 인터넷 홍보 근거를 요청하니 없다고 답변 (풍기의 경우 정확히 응대중) | ||
기타 | 치인2리는 해발 800m 이상으로 논농사 불가하여 약초를 재배한다고 합천군 홍보 중 (쌀 생산 없는 십승지 불가) 가야산 아래가 아닌 비봉산 아래 마을임, 동네가 적음) 합천은 남쪽을 너무 넓게적용 | ||
성주 십승지 연구소의 질문에 1차로 보낸 답변을 받고, 그 답변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데 답변 11월 23일에서 12월 2일로 연기한 후 아직도 답변이 없음. | |||
핸드폰 가야면 홈페이지에 2021년 10월에는 조선십승지 소개가 있었는데 11월부터는 없어짐. (컴퓨터 홈페이지는 조선십승지란이 그대로 있음. 이것은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있다고 판단 된다.) |
8. 만수동 위치 비정
주소 : 경북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 산 112-1
(마수동과 경계 지역) 크기 : 마애 표지석 가로 320㎝ 높이 116㎝ 윗부분(앞뒤) 160㎝ 萬寿洞 글씨 : 가로 72㎝ 세로 27㎝
만수동 마애 표지석 사진
만수동 마애 표지석의 GPS상 위치
마수리 법전리 지적도에서 본 만수동 마애 표지석
만수동 마애 표지석 기준으로 만수동 위치 비정
만수동 주면 이백리 실측
대동여지도에서 지리산에 있는 만수동은 萬寿洞이 아니고 万水洞입니다.
9. 맺음말
성주 가야산 만수동 위치는 현재 만수동 마애 표지석을 기준으로 모래재, 마수리, 곰시, 봉양리 일부라 하겠다. 조금 더 확대 한다면 아전촌이 포함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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