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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간 만에 반란 성공, 여수 시내 점령
지창수와 반란군이 성공한 시간은 새벽 1시로, 반란 시작 약 5시간 만이었다.
10월 20일 01:00 해군 함장은 해군 총사령부로 다음과 같은 무전을 쳤다. 「현재 여수읍은 불바다, 반도들은 약 400여 명, 경찰서는 방화로 연소 중이고 수십 명의 연대 장교 및 하사관이 피살됨.」
20일 03:30경, 여수 경찰서가 반란군에게 점령당했다.
20일 05:00경, 여수 시내 관공서 및 은행, 신문사 등이 점령되었다. 여수 시내에 인공기를 내건 것이 5시 30분이었다.
20일 09:00경, 여수시는 완전히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20일 10:00경 읍사무소 자리에 보안서를 설치했다. 또한 조선은행 여수 지점을 장악하여 ‘조선 인민공화국 중앙은행’으로 바꾸어 부르고 3550만원의 현금을 강탈했으며 각 은행지점 및 금융조합에서도 거액의 현금을 강탈했다.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인민공화국의 적기(赤旗)가 나부끼고, 불과 하루도 못 되어 여수 시내가 인민공화국 천지가 된 것을 볼 때, 저들이 14연대 반란을 사전에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때부터 남로당 중앙당 이현상의 지령으로, 김지회 중위가 반란군 사령관이 되고 지창수는 1개 대대로 여수에 남아 치안을 담당했다.
인민대회는 20일 15:00경에 열렸다. 중앙동 광장에서 약 4만여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인민대회’를 시작했다. 지창수 상사가 사회를 맡아 진행했고 남로당 여수지구당 위원장 이용기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보안서장으로 내정된 유목윤의 격려사, 지창수의 인사말, 민주청년동맹과 여성동맹 등 단체 대표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인민대회를 마치고 여수 시내는 순식간에 좌익 세력에 의한 인공치하(人共治下)가 되었고 눈뜨고 볼 수 없는 피의 살상극이 그치지 않았다.
한 경찰관이 반도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는데, 경찰관의 아들(8세)이 이를 보고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반도들은 애원하는 여덟 살 난 아이에게 기관단총을 난사해 죽였다. 아들의 죽음을 본 아버지가 땅바닥에 쓰러지자 그에게 기관단총을 퍼부었다.
처음에는 잡아온 인사들을 모두 유치장에 감금했으나 나중에 경찰관만은 격리시켰다. 경찰서 안에서 경찰들을 집단 구타하여 이미 반죽음 이었고 모두 실신하여 바닥에 쓰러지자 운동장으로 집합시켰고 모인 그들을 99식 장총으로 집단 학살 했다.
경찰서 뒤에는 방공호가 있었는데 반도들이 이 속에다 경찰관 30여 명을 몰아넣고 집중사격을 가했다. 그리고 한 사람도 살아나오지 못하도록 삽으로 방공호의 입구를 흙으로 덮어 버렸으며, 그것도 모자라 무너진 방공호 위를 트럭으로 짓뭉개 놓기도 했다. 경찰서 지하실에는 아직 처형되지 않은 경찰관 가족 30여 명이 있었는데, 휘발유를 뿌려 전원 태워 죽였다. 한 경찰관 부인을 강제로 옷을 벗겨 국부를 총검으로 찔러 학살한 채 길바닥에 버렸다.
21일, 여수 인민위원회의 기능이 시작되어, 은행예금 동결령, 재산몰수령을 내리고, 인구와 적산가옥(敵産家屋)을 조사했다.
22일, 군청 등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군수 이하 11명을 해임(파직)했다.
23일 오후 3시, 반란군은 여수읍 대판통 사거리(현 중앙동 로터리)에서 소위 인민대회를 통한 인민재판을 열어 사형이 결정되면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했다. 처벌 대상은 ‘반동’으로 분류된 약 800여 명의 경찰과 그 가족, 그리고 우익 인사들이었다.
이날 노총 여수지구 위원장이자 전국 항만노조 조직위원인 김창업에게도 총살형이 내려졌는데, 사형장에 선 그가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가 「울밑에 선 봉선화」였다. 그가 3절까지 부르는 동안 장내는 울음바다로 변했는데, 이 이야기가 퍼져나가 여순사건 기간 동안 「울밑에 선 봉선화」는 일제 강점기보다 더 유행하게 되었다.
23일 오후 3시, 남면지서 앞 갯가에서 남면과 화정면 지서 경찰관 9명을 총살했는데 그 중 강복암 순경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여수 경찰서장 고인수의 처형
고인수 여수 경찰서장은 경찰서를 사수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지키기 위해 방어 준비를 하고 4시간을 겨우 버텼지만, 새벽 3시 30분 여수 경찰서는 반란군이 손아귀에 들어갔다. 5명의 경찰관이 순직했고, 반란군이 50여 명의 죄수를 풀어주고 반란군에 가담하게 했다. 고인수 서장은 피신을 거부했지만, 정보과장 박명규에게 팔목을 잡혀 탈출하게 되었다.
20일 오전 11시경 고인수 서장은 경찰서를 사수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경찰관 정복차림으로 다시 본서로 향하다가 총으로 무장한 남학생 2명의 검문에 걸려 끌려갔다.
암살대장 서종현의 표적이 되었던 고인수 경찰서장은 첫 발에 오른팔, 두 번째 발에 왼팔을 맞은 후, 피투성이가 된 두 팔을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다가, 연이은 3발의 총탄을 맞고 두개골에서 붉은 선혈과 함께 하얀 뇌수가 쏟아져 그 자리에서 순직했다.
이때 살아있던 경찰관들이 상관의 죽음에 반도들에게 대들었다. 이에 8명의 경찰관을 여수 경찰서 담에 묶어서 세운 후 한 명씩 트럭으로 들이받아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특히 여수 경찰서 소속 여(女)경 국막래(24세)를 붙잡아, 대낮에 군중 앞에서 발가벗긴 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부분에 총 두 발을 쏘아 죽였다. 같은 여수 경찰서 소속 여(女)경 정현자(鄭玄子)는 폭도들이 옷을 갈기갈기 찢고는 목에 쇠사슬을 매어 가지고 시내를 1시간 동안 일주하고 다시 경찰서로 돌아와 총탄 2발을 쏘아 죽였다.
10월 20일까지 이틀 동안 여수경찰서에서 희생당한 인원은 경찰관 59명, 의용경찰 20명, 의용소방대원 5명, 우익계 인사 10명, 기독교인 7명, 경찰관 가족 40명이었다.
순천 경찰서 장악
여수를 장악하고 인민공화국으로 만든 반란군은, 20일 새벽에 순천으로 향했다. 반란군 3개 대대중 1개 대대만 여수에 남고 2개 대대가 출발했다(약 2,000명).
순천 경찰서는 이미 14연대 반란 사실을 연락 받고도, 사태의 심각성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여 결국 20일 오전 10시 30분경 순천 경찰서가 반란군에게 점령되었고 10여 명의 경찰이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장성 경찰서 응원부대가 순천에 도착한 것은 10월 20일 오전 9시, 총무과장(현 경무과장) 임해휴 경위를 비롯 10명의 경찰이 폭도들과 싸운 끝에, 박태환, 정삼화, 김진용, 김규환 등 4명이 총에 맞아 죽었고, 총상을 입은 임 경위는 경찰서 후정으로 끝려갔다. 거기에는 이미 수십 명의 경찰관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고, 그 역시 총에 맞아 죽었다.
14연대 반란군이 순천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순천시의 좌익 세력들과 중고등학생이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20일 오후 3시, 순천 경찰서에는 인공기가 달려 있었고, 반란군은 그곳을 본부로 정하여 인민위원회 간판을 걸었다. 반란군은 순천을 24시간 안에 장악했다.
21일 새벽, 호남은행지점(현 조흥은행) 앞에서 반란군과 지방폭도들이 경찰관과 우익 인사들을 10명씩 줄지어 끌고 와서 은행 벽에 세우고 사살했다.
21일 오후에 700-800명이나 되는 우익 애국인사가 반도들에 잡혀 형식상 취조라는 것을 받고 총살, 타살, 교살(絞殺), 소살(燒殺) 등 살해방법이 결정되면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
순천 경찰서장 양계원 총경의 처형
당시 순천 경찰서장 양계원 총경의 처형은 가장 처참하여 공산분자들의 악독함과 잔인성을 여지없이 보여 주었다.
양 서장은 처음에 잡히지 않으려고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21일 오전 10시 마주친 서너 명의 학생들이 양 서장의 특징인 썬글라스를 알아보고는, 지방 폭도들에게 신고해 버렸다.
폭도들은 양 서장을 경찰서 뒤뜰 느티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물을 먹이더니 참나무 뭉둥이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 서장을 시내에 끌고 다니며 ‘나는 순천 군민의 고혈을 빨아먹은 서장이요, 그 동안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라는 말을 외치게 하고, 외치지 않으면 죽을 지경까지 구타했다. 썬글라스를 끼고 다니던 것이 거슬렸던 그들은 서장의 눈알을 뽑고, 이정렬 청년단장과 함께 군용 차 뒤꽁무니에 매단 채 의식을 잃을 때까지 읍내를 돌았다. 폭도들은 돌로 양 서장의 머리와 다리를 마구 내리쳤다. 양 서장은 이정렬 청년단장과 함께 현대 중앙극장 앞 전신주에 나란히 매달려 총살되었고, 폭도들은 그 죽은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순천 감찰서장 한운경 감찰관도 경찰서로 끌려가 무기고 앞 벽에 세워져 총살당했고, 반란군은 그의 시체에 콜타르를 칠해 불태웠다.
반란군은 순천 경찰서 관내 별양지서와 벌교서 관내 조성 지서를 점령했고, 창성 지서에서는 경찰관 30명을 발가벗기고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20일에서 21일 사이에 광양, 남원, 구례, 보성의 경찰서들이 하나둘씩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구체적으로 20일 저녁과 21일 사이, 남원에서는 반란군의 일부가 도착하자마자 폭동이 일어났고, 구례 경찰서는 토착 좌익들에 의해 이미 수 명의 경찰이 피살되었고, 보성은 경찰 및 우익 인사들이 피신해 버리자 지방 토착 좌익들이 경찰서를 공격하여 무혈점령했다. 고흥에서는 순천에서 들어온 반란군과 그에 동조한 지방민들이 행동을 같이하여 고흥읍을 점령하고, 그에 저항하는 경찰관 7명과 주민 6명을 총살 혹은 살해했다(광주신보 1948. 10.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