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활한 인간관계를 위해
김 영 죽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우리는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잘 맺어야하는가 고민해 왔다. 결국 인간의 상호 관계에 있어, 누구도 해를 입지 않고 좋은 사이를 유지시킬 합리적 방법을 모색해 왔던 것이다.
실학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다산을 비롯한 많은 실학자들이 지배원리를 떠나 인간을 본연의 인간으로서 대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무시한 채, 무작정 사회 조직 내의 윤리의식을 강조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
몇 세기가 지난 이 시점에서도 ‘인간다운 삶’이라는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시공을 초월하여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삶에 있어 가장 큰 관심사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금까지도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대인접물(待人接物)에 관한 이론과 서적들이 이를 증명한다.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에 파생되어 나오는 삶의 ‘경영법’이 제대로 생산되지 못할 것이다. 실학의 사상적 기저 역시 이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상대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용서해야”
그렇다면, 원활한 인간관계에 고도의 기술이나 정치적 포석이 필요한 것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배려, 상대방에 대한 작은 예의를 실천하는 것 자체가 적지 않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형암(炯菴) 이덕무(李德懋)(1741~1794)는 다산과 동시대를 살았던 서류(庶類) 문인이다. 그가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와 함께 규장각 외각 검서관을 지낸 인물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서치(書癡)로까지 일컬어졌던 그의 수많은 저작 가운데 ≪사소절(士小節)≫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상의 윤리에 대해 이덕무가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여, 조선 후기를 살던 한 실학자의 생활 철학을 엿볼 수 있는 한 예가 되기도 한다. 물론 시대의 차이가 현격해 쉽게 공감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나 지금의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더러 보인다. 그럼에도 ≪사소절≫에서 피력한 그의 인간관은 현재 시점에서도 보편성과 합리성을 잃지 않고 있다.
특히 “남의 진실함을 취하고 우직함은 용서하며 남의 순박함은 취하고 어리석음은 용서하며, …단점을 인해 장점을 보아야 하고 장점을 꺼려 단점을 지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진무경(陳無競)이 남을 포용하던 방법이다.” “착한 말을 들으면 신분의 비천(卑賤)을 따지지 말고 복종해야 하고, 잘못이 있으면 조금도 거리낌 없이 고쳐야 한다.” 등의 말들은 상대방의 장점을 존중하며 단점을 감싸 안는 원활한 인간관계 형성을 지향한다. 이는 개인이 처한 사회적 지위와는 별개로 그 장점과 능력이 인정받아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서류 문인이었던 이덕무가 연암의 지우(知友)일 수 있었던 까닭 또한 연암의 인간관이 그와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의 행적을 기록한 ≪과정록≫에는 연암이 사람들의 비방을 감내하면서까지 서류 문인들과의 교유에 힘썼다고 되어 있다. 이덕무 역시 재주와 식견이 있는 중인(中人)들을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다. 동시대 중인 문인이었던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은 그를 추모하는 만시(輓詩)에서 “책상 옆에 앉아 천하의 일 논하는데/ 우리들에게 정을 쏟아 주셨지[膝席論今天下事, 情鍾在我輩中人]”라 하여 그의 인간적인 배려에 그리움을 표했다.
이외에도 ≪사소절≫에는 일상에서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소소한 예의를 일깨워준다. 일례로, 그는 가난한 친척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어려운 살림에 베풀어준 호의를 거부하지 말라는 당부를 한다. 이유인즉슨, 그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만을 염려하여 호의를 거절한다면 이는 남을 생각해주는 좋은 뜻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결국 그들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만드는 박정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세심한 정이 묻어나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인간에 대한 배려, 작은 예의의 실천이 해답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익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착취와 피착취의 구도가 반복되는 이 시점에 이덕무가 제시한 인간에 대한 예의는 너무나 절실하다.
최근 각 신문에 비정규직 청년들의 열악한 실태가 보도된 바 있다. 작금의 20~30대 젊은 세대들, 취업의 문턱은 높고 졸업과 동시에 대학 4년 학자금 대출 빚을 상환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운이 좋게 면접에 합격되어 정규직에 채용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나이는 차고, 밥벌이는 해야겠기에 뛰어드는 곳이 비정규직 일선이다.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이나 피자 전문점 등이 가장 대표적인데, 기실 이 기업들의 연매출은 많게는 연 1천 억대에 달하면서도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최저임금과 부당한 처우를 자행한다.
오래된 관행이었지만, 이제야 언론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유는 이들의 인간적이지 못한 시스템에 의해 한 아르바이트생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피자를 30분 안에 배달하지 못하면 가격을 할인해준다던가 무료로 해준다는 영업전략 하에 그 부담을 고스란히 안게 되는 이들은 아르바이트생들이다. 오토바이로 위험천만하게 시간 내 배달해야했던 어느 대학생의 죽음도 이로 인한 것이었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각 피자 전문점들에서 그러한 영업 전략을 철회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처우가 눈에 띄게 개선된 것은 아니다.
때로는 몸에 상해를 입는 것만큼이나 삶을 지치고 힘들게 만드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다. 일부 편의점이나 커피 전문점에서 점심 값 대신 유통기한이 지난 김밥을 준다든지, 그나마 점심시간을 주지도 않아 손님이 남긴 빵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본인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이덕무의 글은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이, 결국 각박한 사회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아울러, 이를 바탕으로 성립된 실학 정신의 계승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