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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주의 글>
용화산의 결투
옛날 강원도 화천군에 한 젊은 선비가 살고 있었어요. 선비는 신비롭게도 하늘의 별인 북극성과 화천의 명산인 용화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지요. 선비가 태어날 때 북극성과 용화산에서 선비의 집을 향해 빛을 드리웠거든요. 그 때문에 사람들은 선비가 훗날 화천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했답니다.
선비는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어요. 다만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마음대로 공부를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지요. 그래도 글공부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낮에는 밭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등잔불을 밝히고 열심히 공부를 했지요. 공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빨리 과거를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젊은 선비는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떠났습니다.
괴나리봇짐을 걸머지고 화천읍에 있는 냉경지나루를 건너 한양을 향해 걸어갔어요. 선비는 가난해서 노잣돈도 없이 과거를 보러가는 중이었어요. 자신의 신세타령을 하면서 뚜벅뚜벅 걷다가 보니 어느 새 용화산 중턱까지 왔어요. 그런데 날이 저물어 갑자기 캄캄해지면서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어요.
선비는 큰일 났지요. 캄캄한 산에서 어디 쉴 곳도 없었거든요. 게다가 용화산은 험하기로 소문난 산이었어요. 호랑이며 산짐승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용화산은 무척 높아서 변화도 심했어요. 해가 쨍쨍 내리쬐다가도 갑자기 먹구름이 일며 비가 오기도 했답니다.
선비가 캄캄한 용화산에서 헤매고 있을 때였어요. 마침 어둠 사이로 용화산 중턱에 지붕 모양을 한 큰 바위가 있는 것이 보였어요. 선비는 바위에 가서 밤을 지새우고 떠날 생각으로 허둥지둥 바위 근처에 다가갔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그 바위 안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어요.
선비는 무척 반가웠어요.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더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뜻밖에도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있었습니다. 불빛은 바로 그 기와집의 문틈에서 새어나왔어요. 선비가 보기에 너무나 황홀한 불빛이었어요.
깊은 산속 바위 아래에 고래 등 같은 큰 집이 있다는 것이 선비에게는 너무나 의외였어요. 그러면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을 생각하면서 기와집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어요.
“계십니까? 계십니까?”
선비는 대문을 두드리며 주인을 불렀어요.
처음에는 대답이 없었어요. 그래서 선비는 더 큰 목소리로 불렀어요.
“계십니까? 아무도 없습니까?”
그때 집안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등지고 한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 나왔습니다.
그 순간 선비는 깜짝 놀랐어요. 그 여인은 불면 날아갈듯 가녀린 몸에 화사한 얼굴이 너무나 예뻤거든요. 이런 산 중에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산다는 것이 무척 신비했습니다. 그 여인은 이 집의 시녀인데, 선비 앞에 다가와서 공손히 절을 했어요.
“어디서 오신 손님이신데 어두운 밤중에 주인을 찾으십니까?”
“저는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인데 날이 저물어 이곳에서 하룻밤 머물러 갈까 해서입니다.”
“네, 아가씨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시녀는 그렇게 대답하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조금 있다 나왔어요.
“대단히 죄송하오나 우리 집에는 방이 없어 머무실 수가 없으니 아랫마을에 가서 쉬도록 하시랍니다.”
“어허, 어찌하여 사람 사는 집에서 하룻밤 쉬어 가자는데 이렇게 박정하게 하십니까? 나는 지금 아랫마을에 되돌아갈 힘이 없을 뿐 아니라, 캄캄한 밤이라 앞을 분간할 수도 없소. 아무데서라도 좋으니 하룻밤 쉬어가도록 다시 여쭈어주십시오.”
시녀는 아가씨에게 알리지도 않고 대답을 했어요.
“남녀가 유별한데, 이 집에는 여자만 둘이 살고 있어 아주 곤란합니다. 송구스럽지만 저희들의 심정을 헤아려 주세요.”
“사정이 정 그렇다면 헛간에서라도 좋으니 하룻밤만 신세를 지고 날이 밝으면 떠나겠습니다.”
선비의 딱한 사정을 방에서 유심히 듣고 있던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방문을 비시시 열면서 말을 했어요. 그 아가씨는 봄에 피는 화사한 꽃보다 더 예뻤지요. 선비가 보기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어요. 목소리도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 같았어요.
“우리 집은 금남의 집으로서 어떠한 사람이라도 남자 손님은 거절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손님의 사정이 하도 딱한 것 같으니 시녀 방에 들어가 하룻밤을 머무시도록 하세요.”
시녀는 머뭇거리다가 선비를 자기 방으로 안내하며 들어오라고 하였어요.
선비는 시녀의 안내를 받으면서 방에 들어가 여장을 풀고 있었지요. 그렇게 조금 있으니 주인아가씨가 밥상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반찬은 없더라도 많이 드십시오.”
아가씨는 그렇게 밥상을 놓고는 조용히 자리를 떴지요.
선비는 하루 종일 먼 길을 걸어오느라 시장하던 차에 저녁밥을 맛있게 들고 상을 물렸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시녀가 밥상을 가지고 나가면서 인사를 했어요.
선비는 아가씨 덕택에 하룻밤을 편히 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떠나려고 하였어요.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아가씨는 떠나려는 선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어요.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제가 앞일을 좀 볼 줄 압니다. 그런데 오늘은 일진이 좋지 않아 불길한 예감이 드니, 선비께서는 하루를 더 머무시고 내일 떠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선비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자신의 신변에까지 신경을 써주는 것이 너무 감동되어 하루를 더 머물기로 했어요.
다음 날 아침에 선비가 집을 나서려고 하니까 또 아가씨가 말을 했지요.
“밝은 대낮에 가시면 용화산에 살고 있는 위험한 인물을 만나 해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석양이 질 무렵에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선비는 환한 대낮을 두고 저녁에 떠나라는 것이 맘에 걸렸어요. 하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에게 해가 될 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가씨의 말대로 하기로 했지요.
선비는 아가씨가 하라는 대로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서산에 해가 져서 땅거미가 질 무렵 떠나려했어요. 그러자 아가씨는 선비에게 이렇게 일렀지요.
“오던 길로 약간 되돌아 내려가면 개천이 나옵니다. 그 개천을 따라 계속 산으로 올라가시되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라도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고 바로 가셔야 합니다.”
선비는 아가씨가 하라는 대로 개천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어요. 그런데 용화산 능선을 넘기도 전에 날이 어두웠어요. 선비는 캄캄한 밤길을 어찌 할지 모르고 허둥지둥 대며 올라가고 있었어요.
“여보시오!”
선비가 허둥대고 있는데 개천가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선비는 먼저 아가씨가 일러준 말을 까맣게 잊은 채 뒤를 힐긋 돌아다보고 말았어요. 그때 개천가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보이고, 건장하고 키가 훤칠한 백발노인이 갑자기 나타났어요.
“어디로 가는 누구신데 어두운 밤길에 이같이 분주하게 가십니까? 웬만하면 내 집에 들어가 나하고 이야기나 하면서 하룻밤 머물러 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때 선비는 어제 묵었던 집의 아가씨가 당부한 말이 생각이 나서 정신을 가다듬고 이른 대로 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기 때문에 때는 이미 늦었지요.
“어르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저는 산을 넘어야 합니다.”
선비는 노인의 권유를 사양하며 그대로 가려고 했어요.
“밤이 이미 깊었는데 누추하지만 이 늙은이의 집에서 머물러 가도록 하시지요.”
노인은 기어이 선비의 손을 잡으며 애원하듯 친절을 베풀었어요.
선비는 하는 수없이 노인을 따라 불빛이 깜박이는 곳에 가까이 갔어요. 그곳에는 깊은 물이 빙글빙글 돌며 큰 웅덩이를 이루고 있는데, 그 옆에 조그마한 오막살이가 있었어요. 노인은 그 집을 가리키며 들어가자고 했어요.
방에 들어선 선비가 보니 어젯밤에 잠자던 고래 등 같은 기와집과는 너무나 달랐어요. 초라한 토막집에다 방은 단칸방인데 노인 혼자였지요.
그러나 선비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하는 수없이 하룻밤 신세를 지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노인은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사실은 내가 사람이 아니고 용이 되려다가 아직 못된 늙은 이무기지요. 지금부터 수백 년 전의 일입니다. 나는 이곳 깊은 웅덩이 속에서 용이 되려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하루는 난데없이 큰 지네가 나타나 나의 영역을 침범해 왔습니다. 나는 영역을 뺏기지 않으려고 지네와 맹렬히 싸웠어요. 싸움 끝에 구사일생으로 나는 살고, 큰 지네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지네의 딸이 용화산 중턱 큰 바위 안에다 집을 짓고, 자기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고 음기가 가장 강한 매달 보름날이면 싸움을 걸어옵니다. 달의 기운을 받은 지네의 딸은 힘이 어찌나 세고 몸이 날쌘지 늙은 나로서는 도저히 당할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 지네는 내가 가진 여의주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도술까지 부리는 통에 나로서는 용이 될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벌써 용이 되어 하늘나라로 갔을 터인데 지금 이 지경이 되어 몸만 점점 늙어가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구려. 늦은 감은 있으나 지금이라도 저 교활한 지네만 죽여 없앤다면 용이 되어 승천할 기회가 있으니 선비께서는 나를 도와주실 수가 있겠는지요?”
선비는 늙은이의 하소연 같은 이야기를 신중하게 들었어요. 그리고 노인이 말하는 지네가 어젯밤에 만났던 아름다운 여인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선비는 노인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니 그 노인이 너무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선비는 그 노인이 용이 되어 승천하는 것을 돕기로 했어요.
“도와 드리지요. 그런데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자세하게 가르쳐 주십시오.”
선비는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물었어요.
“고맙소. 젊은 선비. 내일 날이 밝으면 곧 바로 용화산을 넘어 내려가십시오. 그곳에 가면 고탄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 마을에 가서 콩 한 섬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활 잘 쏘는 궁수를 찾으시오. 그리고 그 궁수를 데리고 다음 달 보름날 석양 무렵에 용화산 중턱 기슭에 있는 마당 같이 생긴 넓은 마당바위로 오시오. 그 바위 위에서 내가 지네와 대결을 하는데 파란색 옷을 입은 것이 지네인 여인네이고, 누런색 옷을 입은 것이 늙은 나입니다. 선비께서는 궁수를 데리고 용화산 정상에 올라가면 바위가 두 개 나란히 있는 쌍둥이 바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반드시 그 바위를 세 바퀴 돌고 동쪽을 향해 세 번 절을 한 다음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야합니다. 꼭 동쪽을 향해서 절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양기를 보충해서 정확히 여인을 명중시킬 수가 있습니다. 쌍둥이 바위 꼭대기에서 궁수는 나와 여인이 싸우는 것을 활로 겨냥하고 있다가 파란 옷을 화살로 명중시켜주십시오. 일이 성사되면 선비께서 용궁생활을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화천 일대를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이상향으로 꾸밀 수 있습니다.”
젊은 선비는 과거보러 한양 간다는 것은 까맣게 잊은 채 노인이 시키는 대로 고탄 마을에 가서 콩 한 섬을 어깨에 멘 활 잘 쏘는 궁수를 찾았어요. 그 궁수는 역시 듣던 대로 키는 육척 장승에다 몸은 채독 같이 생긴 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장사였어요.
선비는 궁수를 만나 사실을 여차여차 말하니 궁수는 쾌히 승낙을 했지요. 그리고 그 날에 있을 모든 작전계획을 짜놓고 있다가 다음 달 보름날 해질 무렵에 이르러 용화산 정상에 올랐어요.
선비와 궁수는 쌍둥이 바위에서 세 바퀴를 돌고 동쪽을 향해서 세 번 절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둡고 험한 곳에서 가시나무에 찔려가면서 엄청 큰 바위를 세 번 돌다 보니, 어느 쪽이 동쪽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어요. 동쪽을 알 수가 없어서 ‘이곳이 동쪽이겠거니’ 생각하고 아무 곳에나 대고 절을 했는데, 그만 서쪽으로 보고 절을 하고 말았어요. 그런 다음 쌍둥이바위 위에 올라 보니, 마당바위 위에서 파란색 옷을 입은 여인과 누런색 옷을 입은 노인이 싸우고 있었어요.
선비와 궁수는 노인이 꼭 동쪽을 향해 절을 해야 한다는 당부를 어긴 것이지요. 동쪽은 좋은 기운인 양기가 흐르고 서쪽은 나쁜 기운인 음기가 흘렀어요. 동쪽은 노인의 기운을 북돋는 것이고요, 서쪽은 여인의 기운을 북돋는 것이었어요. 선비와 궁수가 서쪽을 향해서 절을 했기 때문에 여인을 돕는 꼴이 된 것이었어요.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마당바위 위에서 노인과 여인은 서로의 기를 토하며 싸웠어요. 여인은 푸른 불빛을 입으로 토하고, 노인은 붉은 불빛을 입으로 토하며 온 힘을 다하고 있었어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팽팽하게 맞서서 불꽃을 튀기고 있었어요. 봄꽃처럼 화사하고 수양버들처럼 하늘하늘한 여인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솟아났어요. 오히려 키가 훤칠한 노인이 밀리는 듯 했지요. 두 사람의 싸움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치열하였어요. 마당바위를 빙글빙글 돌며 엎치락뒤치락 하늘로 치솟았다가 바위로 떨어지며 싸움은 계속됐어요. 푸른 불꽃과 붉은 불꽃이 부딪혀 튀기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었어요.
궁수는 노인과 여인이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것을 보고, 때를 놓칠세라 힘껏 활을 당겨 목표물에 겨냥을 하였어요.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고 안개가 자욱하며 먹구름이 용화산을 둘러쌌어요. 이윽고 천지가 진동하며 번개가 번쩍하고 억수같은 비바람이 불어왔어요. 궁수는 그만 사지가 후들후들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지요. 누가 여인이고 누가 노인인지 분간이 안 되었어요. 그 바람에 궁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활을 쏜 것이 뜻밖에도 누런 옷 입은 늙은 노인을 쏘아 맞혔어요. 바로 선비에게 도움을 청했던 용이 되려고 하는 이무기였어요.
노인은 화살을 맞고 죽으면서 선비와 궁수를 향해 마지막 말을 했어요.
“참으로 안타깝구려. 내 선비의 기상이 남달라 부탁을 했거늘 이루지 못하고 말았구려. 아직 때가 되지 못하였군요. 이 또한 운명인데 누구를 원망하리오. 내 원래 하늘의 뜻으로 화천을 용화세계인 이상향으로 만들려고 이곳에서 도를 닦은 것이오. 그러나 어찌 하겠소. 선비의 공부가 미진하여 동쪽의 양기를 얻지 못하고, 실수로 서쪽의 음기를 불러들이고 말았소. 이 기운은 이제 천 년이 갈 것이오. 그 때문에 천 년이 더 지나야 화천은 이상향인 용화세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오. 때를 기다릴 수밖에….”
선비는 천 년을 기다려야 된다는 말에 놀라서 물었어요,
“더 빨리 이상향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노인은 가쁜 숨을 겨우 쉬면서 말을 이었어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계절마다 하늘의 기운을 얻고, 부정을 물에 흘러 보내는 축제를 열면 세월을 앞당길 수 있지요. 세계인들이 모여 난장을 이루는 축제를 열어 신들을 부르시오. 용신을 부르는 축제를 ….”
노인은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이무기로 변해서 죽고 말았어요. 이무기가 막 죽자, 이무기의 몸에서는 아주 작은 물체가 나와 하늘을 향해 날아갔어요. 천년 후 다시 태어날 이무기의 넋이지요.
선비와 궁수는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울상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푸른 옷을 입은 봄꽃처럼 화사한 여인이 불면 날아갈 듯한 예쁜 시녀를 데리고 선비와 궁수 앞에 나타났어요. 그러더니 생긴 모습과는 달리 아주 무서운 말을 했어요.
“내 너희들이 늙은 이무기를 돕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래 인간은 양의 기운을 타고 나서 음기를 띤 우리 지네와는 상극이다. 너희를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하는데, 오늘은 봐주겠다. 서쪽으로 향해 절을 해서 음기를 모아 나를 돕고 늙은 이무기를 활로 쏘아 나의 원수를 갚아준 은혜로 알거라.”
여인은 외모와는 달리 아주 표독스런 말을 했어요. 선비와 궁수는 너무나 의외의 상황에 무서워서 벌벌 떨었지요. 여인은 또 말을 이었어요.
“너희는 날이 새면 화천을 떠나 먼 곳에 가서 살아라. 나를 도와 준 보답으로 너희들이 살 수 있는 약간의 금은보화는 주겠다. 여기서 용화산 등줄기를 타고 한참 동안 가게 되면 설통처럼 생긴 굴이 있는데 그 굴에 들어가면 호랑이 가죽과 금은보화가 있으니 그것을 가지고 가거라.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마땅히 너희를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하나 너의 얼굴에 이상한 기운이 있어 함부로 죽일 수 없구나.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하는데 ….”
그리고 아리따운 여인은 시녀를 데리고 스르르 구름처럼 사라졌지요.
선비는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지네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어요. 그동안 지네의 농간에 놀아났던 것이었어요. 선비는 가슴을 치며 통탄했어요. 그러나 이제 상황을 돌릴 수는 없었지요.
선비와 궁수는 여인이 알려준 대로 그 굴에 가보았더니, 그녀의 말대로 호랑이 가죽은 물론 금은보화가 있었지요. 선비와 궁수가 한평생 호화롭게 살 수 있는 양이었어요.
선비와 궁수가 동쪽을 향해 절을 해서 노인을 도왔으면 화천 전체가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이상향으로 바뀌었을 텐데 서쪽으로 절을 해서 여인을 도왔기 때문에 두 젊은이만 잘 살고만 것이지요.
선비는 화천을 떠나지 않기로 했어요. 화천에 남아서 이상향을 앞당길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 것이지요.
“축제를 열어 용신을 부르라고….”
선비는 곰곰이 노인의 말을 떠올렸어요. 그래서 용신을 부르는 축제를 열면 좀 더 빨리 화천을 이상향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한 노인의 말을 퍼뜨리기로 했어요. 혼자서는 축제를 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선비는 여인에게서 받은 재물로 매년 정월대보름이 되면 용신에게 밥을 드리며 부정을 씻는 어부식이라는 용왕제를 지냈고요, 가을이면 용화산에서 도를 닦다가 죽은 노인의 집 옆에서 용화세계를 앞당기는 기원제를 열었어요. 이것이 훗날 화천에서 열리는 축제의 시원이 된 것이지요.
선비의 정성은 금방 화천사람들에게 전파되었어요. 그 때문에 화천사람들은 노인이 말한 천 년 후 이상향을 꿈꾸며 매년 계절별로 축제를 연답니다.
정월대보름에는 어부식이라는 행사를 하여 용신에게 음식을 드리고, 여름에는 쪽배축제를 열어 용신을 기쁘게 하고, 가을에는 용화축전을 열어 용신에게 오곡을 드리고, 겨울이 되면 얼어 잠든 용신을 깨우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모아 산천어축제를 열고, 아울러 한 여름 용의 여의주를 닮은 토마토축제를 열어 용을 불러 여의주를 희롱 하게끔 하고 있답니다.
그 때문에 노인이 말했던 천 년 후 화천사람이 다 잘사는 이상향을 이룰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지요.
첫댓글 사뿐사뿐이라는 단어에 교수님이 웃으시며 춤추는 모습이 떠오르내요? ㅋㅋ
너무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