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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순서
(1) 공비토벌 준비 (2) 공비토벌 작전개시 (3) 보은 속리산으로
(4) 백암산으로 이동 (5) 소백산으로 이동) (6) 태백산으로 이동
(7) 함백산으로 이동 (8) 결론
(1) 공비토벌 준비(共匪討伐 準備)
1951년 1월 상순(上旬)경 경북영천(慶北永川)에서 일제도요다를타고 경북 청송군 진보면(慶北 靑松郡 眞寶面)에 진보 초등학교에 제110 연대본부(聯隊本部)가 주둔(駐屯)하고 안동시(安東市)에 있는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太白山地區戰鬪司令部)에 작전(作戰) 지시(指示)를 받고있섰다.
우리 대대(大隊)는 연대(聯隊)에서 약 4 km 거리에 신촌동의 신촌초등학교(新村初等學校)에서 모포(毛布)도 없이 마루바닥에서 취침(就寢)하며 훈련(訓練)도 받으면서. 병기(兵器)와 장비(裝備)를 수령(受領)하였다. 그때 병기는 M 1 소총(小銃). 일제 99식 소총. 38식 소제(蘇製) 아시바 소총등 각색(各色)에 소총을 수령(受領)하고 공비토벌(共匪討伐)할 것을 준비(準備)하고 출동명령(出動命令)만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待期)하는 동안 훈련도하고. 어느 날 야외교육(野外敎育)을 나가 야산(野山)에서 훈련(訓練)하고 쉬는데 어는 병사 가 솔(松)나무 껌질 을 벗기어 송진 껌질 을 먹는 것을 보고 흉년(凶年)에는 송진 껌질 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써 나도 배가 곱아서 송진 껌질 을 먹었더니 변비(便秘)가 생겨 얼마동안 고생(苦生)하든 일이 있다. 우리 대대(大隊) 앞 길 건너편 도로변(道路邊)에 외딴집이 있었는데. 그 집 앞마당 길 아래에 있는 옹달 샘물 맛이 특이(特異)하다 하여 물맛을 보았더니 톡 쏘는 사이다 맛나 는 약수(藥水)물 이였다. 참말로 설탕만 타면 사이다 맛이다.
그 집은 엿을 직접(直接) 만들어 파는 엿집이였다. 그후 나는 관광(觀光)차 그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나는 40년전 그때 그 물 맛이 생각이나 운전기사(運轉技士)에게 부탁(付託)하여 차를 새우고 내려가 보니 그 옹달샘은 그 자리에 철문으로 변화(變化)된 모습(模襲)으로 있고 물맛은 그때보다 똑 쏘는 맛이 덜 하였다. 그 집은 많이 변하고 집도 한 채가 늘고 엿을 그때까지도 팔고있었다, 나는 엿을 사면서 그때 그 분을 물어보니 돌아가시고 다른 분 이였다. 그때 엿집에서 엿밥을 파는데 다른 사병(士兵)들은 엿밥을 사먹고 있지만 나는 돈이 없어 배가 곱아도 사먹지를 못하고 있던 생각이 더욱 감회(感悔)가 깊었다.
하루는 그 근처 산골에 공비가 몇 명(名) 출몰(出沒)하였다는 연락(連絡)을 받고 우리 분대가 선출(選出)되어 출동(出動)하여 목적지(目的地) 마을에 도착(倒着)하니 집이 5채 가량 있는 산골 마을 이였다. 거기 주민 말의 의하면 공비 2명이 지나 갔다하여 별 성과(成果)없이 철수(撤收)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부대(部隊)에서 나오는 식사(食事)가 너무 적어 배가 많이 곱아서 우리들은 어는 아주머니에게 식사(食事) 부탁(付託)을 하니 우리 집은 쌀은 없고 잡곡(雜穀)밖에 없다 하시면서. 조밥을 지어 주었다. 나는 집을 떠난 후 처음으로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그런데 그 집 아이가 약 12세(歲) 가량 되어 보이는 다리가 약간 저는 소아마비(小兒痲痺) 아이였다. 나는 그때 그 고마운 아주머님에게 은혜(恩惠)를 항시(恒時)있지 않고 꼭 찾아 배울 것을 생각하고 있쓰나 아직도 찾아 배웁지 못하여 항시(恒時) 죄송(罪悚)할 뿐이다.
(2) 공비토벌(共匪討伐) 작전개시(作戰開始)
우리 중대(中隊)는 출동명령을 받고 청송군 군위군(軍威郡)
주왕산 어는 산골 마을에 배치(配置)되어 경계를 하고 있셨는데 그 마을 주민의 말이 어제까지만 하여도 인민군(人民軍)들이 인공기(人共旗)를 달고 지배(支配)하는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이였다고, 하였다
연락병 김영택(金榮澤)과 다른 사병하고 같이 공비(共匪) 1명을 생포(生捕)하여 대리고 와서 하는 말이 대대에 연락차 갔다 오다가 공비를 먼저 발견하고 숨어서 보았더니 인민군 복장(服裝)한 인민군, 사복(私服)입은 공비. 아이를 업은 여자 소를 몰고 가는 사람. 짐을 진 사람.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그야말로 오합지졸(烏合之卒) 행렬이 한참동안 지나갔다고 하였다. 연락병들은 숨어서 있는데 한 주민이 와서 지금 저 집에 공비 1명이 있다하여 연락병들은 그 집을 덮쳐 생포(生捕)하였다고 한다,
포로(捕虜)말의 의하면 인민군들이 후퇴(後退)를 하지 못하여 패잔병(敗殘兵)으로 또는 지방 빨갱이들이 산으로 모이여 숫자가 만타고 하였다, 그 당시 공비(共匪)는 지리산(智異山)을 기점(基點)으로 하여 산악지대(山岳地帶)에 1개 군단(軍團) 약 3만명(萬名)으로 추정(推定)되는 공비가 여기 저기서 출몰(出沒)하여 산골에 있는 민가에서 식량(食糧)이며 가축(家畜)들 닥치는 대로 약탈(掠奪) 하여 산중(山中)으로 도망(逃亡)가고 심지어는 야간(夜間)에 파출소(派出所)를 습격(襲擊)하여 무기(武器)를 탈취(奪取)하는 치안유지(治安維持)가 어려울 때였다.
우리 중대는 청송군 진보면 을 중심으로 하여 오늘은 이 골짝 내일은 저 골짝을 수색하다가 2월경 영덕군(盈德郡) 어는 마을 뒷산에서 야간잠복(夜間潛伏) 근무를 하기 위해 산병호(散兵壕)를 파고 보리짚을 깔고 교대로 누었는데 볏짚보다 더 따뜻하였다 여러 곡식짚중에 보리짚이 최고로 따뜻하다는 것을 알았다. 발이 너무 시려워서 어는 병사는 담배 잎을 깔고 고초가루를 깔면 발이 시려원줄 잘 몰라 동상(凍傷)이 걸린다는 것을 알았다,
날이 밝아 아래 마을에 내려가니 어는 분이 고염(대추 만한 감)이라고 하여 장독에서 얼은 고염을 갖다 주었는데. 맛있게 처음 먹어 보았다.
영양(英陽)을 지나 봉화군(奉化郡) 일월산(日月山)으로 들어가 수색(搜索)하였는데 일월산은 광산지대(鑛山地帶)였기에 여기 저기 굴이 많이 있었다, 거기에서 공비사령관 김달성이가 죽은 지역이다, 일월산에서 수색을 마치고 문경(聞慶)으로 이동하여 조령(鳥嶺) 일명 새우재 고개 (*그 당시는 고갯길이 좁아서 헌병이 차를 새우고. 한쪽이 다 지나가면 통과시키는 일반 통행을 하였다.)를 중심으로 하여 그 일 때가 탄광(炭鑛)이 많아 경비도 하고, 충청도로 갔다 경상도로 갔다 그 일 때를 여기 저기 수색 하다가 어는 집을 가게되었다, 그러한데 그 집은 안방은 경상북도 건넌방은 충청북도라고 하였다,
공비토벌 수색중 어는 탄광을 보았다. 여기가 무순 탄광이냐고 물어보니 흑연탄광(黑鉛炭鑛)이라고 하였다. 마을에 내려가니 온 동네가 집집마다 곶감을 말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다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新奇)하기만 하였다,
곶-감이 많다고 하니 그 동네 주민이 말하기를 새재고개 너머로 충청도 쪽에는 감이 잘 안 열리고. 고개이쪽 경상도 쪽은 감이 잘 열린다고 하였다. 아마도 새우재 고개에 영양이 많이 작용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감나무가 여기 저기 많이 있었다.
소대는 동네에서 쉬기로 하고 각집에 사랑방에서. 자개 되는데 동네 이장님이 곶감을 가지고 와서. 한 사람의 1점 (100개)식을 주시면서 많이 잡수고 동네에 있는 곶-감은 손대지를 말라고 부탁하였다. 이장이 주는 곶-감을 먹으니 더 먹을 수가 없었다.
(3) 보은 속리(俗離)산(報恩 俗離山)으로
우리는 또 이동하여 충북 보은군(忠北 報恩郡) 속리산(1058m)을 중심으로 하여 수색작전을 하였다. 속리산에 화전민(火田民)을 모두 철수시키고. 법주사(法住寺)를 지나 문장대에 이르기까지 골짝 골짝을 모두 수색하다가 경북 쪽에 아담(雅澹)하고 정돈이 잘되어있는 묘지(墓地)를 보고 동네 분들에게 저기 묘(墓)가 누구의 묘냐고? 물어보니 “옛날,, 세조 대왕(世祖 大王)이 피부병(皮膚病)을 고치려고 문장대에서 약수(藥水)물을 마시고 내려오시다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나무꾼이 자기 방에다 뉘여 더니 그분이 바로 세조 임금 이였다. 세조는 고마워 너의 소원(所願)이 무엇이냐고 하니 나무꾼은 그저 나무나 실컨하게 나무가 많은 산(山)을 원(願)하여 그 부근 산을 주었다고 한다,
그후 상주(尙州) 원님(판관 종5품)이 권력(權力)으로 산을 빼앗고 거기다가 산소를 썼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 나무꾼의 자손(子孫)들이 이 동네에 산다고 하면서 이 동네에는 남자는 군대(軍隊)에 나가고 더러는 빨갱이에게 죽고 하여 남자라고는 어린아이 하나밖에 없다고 하였다.
우리중대는 법주사(法住寺)입구 마을 쪽에다 호(壕)를 파고 경계근무를 하며 일부는 속리산을 이 골짝 저 골짝을 수색하면서 지냈다. 속리산은 예로부터 소금강산이라 일컬어 왔었는데 과연 그러하다 속리산은 아직도 사람이 닫지 않은 곳이 많아 골짝 이에는 나뭇잎이 싸이고 싸여 썩은 잎이 발이 푹 빠지면 무릎까지 닿는 것을 보고 감탄(感歎)하였다, 어느 날 호(壕)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경기도 고양군에 사는 병사가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풋마늘을 밭에서 뽑아 가지고 와서 불에다가 구어서 먹으라고 주어서 먹어 보았더니 달콤한 게 먹을만하였다. 이것은 민폐(民弊)이니 앞으로 그만두어라 하였다.
어느 날 수색을 하다가 잠시 휴식(休息)을 하는 동안 잠깐 잠이 들어 있었는데 모두 출발하려고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일어나려고 하자 몸이 말이 듣지 않아 소리를 질러도 들은척하지 않고 있다가 내가 일어나지를 안차 나의 몸을 주물르고하여 일어났는데 나는 왜 소리를 질러도 못들은척 하였느냐고 물은즉 전우 하는 말이 아무소리도 못 듯고 죽은 것 처럼하고있써 일으켰다고 하였다. 아마도 죽는 사람이 정신(精神)이 있어도 몸이 말을 듣지를 않아서 몸이 굳어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곳을 출발하여 경북 상주군(慶北 尙州郡) 경계(境界)에 있는 보은군 마노면(馬老面)에 오니 그 동네는 집집이 지붕높이로 편편하게 만든대 다가 대추를 말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동네의 주민의 말의 의하면 말이 대추를 실어 나르다가 늙어서 죽었다하여 사당(祠堂)을 만들어 말을 숭배(崇拜)한다고 하였다. 사당을 들어다보니 말 화신(化神)을 만들어서 모셔져있는 것을 보았다. 전설에 의하면 마노면에서는 대추가 흉년(凶年)이 들면 처녀가 시집을 못 간다하는 전설(傳說)이 있뜨시 마노면은 전국에서도 대추가 많이 나며. 대추가 좋기로서도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우리 소대는 그곳을 소대본부로 정하고 장기간(長期間) 근무할 것같이 산에서 공비가 내려오는 길목 입구 야산(野山)에다가 호(壕)를 파고 있는데 동네의 여러분들이 오시오 이 자리에다가 누구든지 산소를 쓰면 동네가 망(亡)한다고 하면서 누구도 타인(他人)은 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이 자리를 피(避)하여 달라고 부탁(付託)하여 우리 소대장님은 그리하겠다고. 약속(約束)하고 호(壕)를 구축(構築)하였다.
밤이면 마을 입구 쪽으로 내려가 느티나무 밑에 호(壕)에서 2 명이 1개조(個組)가 되어 잠복하고 있는데. 나는 어느 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 산골짝 이에서 여자 울음소리가 애 - 고매하고 긴 목소리로 들리여오니. 그곳은 집도 없는데. 이상하다하여 다음날 주민에게 물어보니 “옛날에 그 곳에서 처녀(處女)가 목을 매어 죽었다하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좋치않았다. 소대가 그 골짝 이에 들어가 수색을 하니 아무 것도 이상한 것도 발견(發見)치 못하고 집이 있었던 터만 보고 돌아온 일도 있었다.
이 소식이 소대원에게 전(傳)하여지자 모두 그곳을 나가는 것을 실어하였다. 어느 날 송판만(宋八萬)이라는 전우(戰友)가 근무하고 돌아 와서. 하는 말이 겁을 먹고 경계를 하고 있는데 나무에서 무엇인가? “뚝,,하고 떨어져 ”깜짝,,놀라서 가서 보니 까마귀가 나무에서 떨어져 펄럭 펄럭하느것을 보고 아마도 까마귀가 나무 위에서 자다가 떨어졌다고. 하였다. 다시 다른 전우가 근무를 나갔는데 하는 말이 깜깜한 밤중에 여자 둘이서 우리를 보지를 못하고 촛불을 놓고 나무에다 대고 빌면서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누구냐고 소리치니 여자들은 “깜짝,, 놀라 애구 머니 하고 주져않고 벌벌 떨고있어 가서 물어보니 다름이 아니라 우리 며느리가 아이가 없어 이 나무에다 빌려 자식을 얻을 수 있다하여 왔다 하면서 나무 밑에다가 차린 음식(飮食)을 다 주어서 맛있게 먹었다고 자랑을 하였다.
다시 산골 마을로 수색을 나가보니 쟁기로 밭을 가라놓은 것 같이 땅을 뒤엎어놓은 것을 보았다. 주민에 의하며 아주 큰 산돼지가 내려와서. 마구 파 해친다고 하였다. 우리소대는 횡대(橫隊)로 서서 수색을 하면서. 산(山)을 오른 는 순간(瞬間). 골짜기에서 송아지 만한 큰 돼지가 낮잠을 자고있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큰 돼지였다. 총으로 쏠까하였으나 수색중이라 쏘지를 못하고 즉시 소대장님에게 알리는 순간 산돼지는 벌써 알고 일어나 아래로 내려가는데 새끼를밴 돼지라 배가 땅에 다을 정도로 불은 배로 나무 옆을 숨으면서 달아 나가는데 그때서야 쏘아도 좋타고 하니 벌써 나무숲으로 사라진 뒤였다.
소대원(小隊員)은 아쉬운 마음으로 어는 산골 동네에 들어가서. 노인 한 분을 만 낫다. 그 노인께서는 구한말(舊韓末)에 어는 골 을에 원님을 지내신 분이라고 하시면서, 저넘어가 상주(尙州)땅이고 옛날 신라시대(新羅時代)에는 인구(人口)가 지금보다 많았다고 하시면서 저기 산이 “옛날,, 신라시대에는 산전(山田)이었다고, 그 흔적이 지금도 저기 남았있다고 하시면서. 경주(慶州)에는 인구가 천만명(千萬名)이여서. 경주시가(慶州市街)는 기와집이 많아 비가와도 추녀 끝으로 다니면은 우산을 안 쓰고도 다닐 정도(程度)였다고 하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4) 백암산(白岩山)으로 이동(移動)
공비수색을 계속(繼續)하여 마노면(馬老面)에서 괴산(槐山)과 옥천(玉泉) 영동(永同)까지 산 속을 수색 하다가 상주(尙州)를 거쳐 예천(醴泉) 영주(榮州)를 해서 봉화군(奉化郡) 춘양면(春陽面)에 어는 산중으로 들어가니 그곳은 백암산(白岩山)(1,004m) 줄기이며 벌목장(伐木場)이였다. 산에 올라가니 아람 두리 나무가 많고 벌목한 나무를 산밑으로 끌고내려간 자국이 산 꼭대기부터 아래까지 나있다, 목재(木材)를 인부가 목도로 나르고 강(江)가에서는 우기(雨期)에 강물에다가 띄우려고 땟-목을 만들고 있었다.
태백본령(太白本領)을 이어받은 백암산(白岩山)은 울진군 온정면, 영양군 수비면에 이르는 크고 높으면서도 험하지도 않고 울창(鬱蒼)하여 사람이 잘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아름 두리 나무가 많이 있었다. 그때 비가 갑자기 내려서 비를 피(避)할곳을 찾으니 죽은 큰 나무가 사람이 둘 정도(程度)는 들어갈 곳이 있어 그리로 들어가서 비를 피(避)한적히 있었다.
수색중 공비가 마을에서 소를 몰고 갔다는 연락(連絡)을 받고 즉시(卽時) 추격(追擊)하여 인민군 1명을 생포(生捕)하였다. 포로(捕虜)는 인민군복장에 목에는 빨간 인민군 수첩(手帖)을 목에 걸고 있었다,(국군에 군번과도 같음) 수첩을 보았더니 입대(入隊) 일자가 1950년 11월로 되어 있어 물어보니 그때 입대하여 북(北)에서 산(山)을 타고 내려왔다 하였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모른다고 하였다. 그 당시에는 전면전(全面戰)으로 인하여 혼란시기(混亂時期)라 북한(北韓)에서 산맥(山脈)을 타고. 오대산(五臺山), 함백산
(咸白山), 태백산(太白山), 소백산 (小白山), 백암산(白岩山), 속리산(俗離山), 충북 옥천(忠北 沃川) 영동(永同)등 산악지대(山岳地帶)를 이용(利用)하여 지리산(智異山) 소굴까지 빨치산들이 왔다갔다하는 산맥(山脈) 류-트이다,
다시 공비를 따라 추격(追擊)을 하니 소를 잡아먹고 소머리와 다리 내장 등을 버리고 잔해(殘骸)만 남기고 불씨가 있는 것으로 보아 지나간지가 얼마 되지 안아 보였다. 공비들에 말에 의하면 밥솥이 없을 때는 쌀을 물에다 불렸다가. 베헌겁이나 러닝 셔츠 같은 헌 겁을 싸서 땅을 약간 파서 돌을 깔고. 불린 쌀을 그 위에다 놓고 돌을 덮어서 돌 위에다 불을 때면 밥이 되며. 박싹마른 무근 싸리나무는 연기(煙氣)가 나지 안아 묵은 싸리나무로 때면 발견(發見)이 안 된다고 하였다.
중대는 다시 공비를 추격하고 2명을 선출(選出)하여 보급품을 가지고 오라 하여 나는 대대(大隊)본부로 가 보급대원(補給隊員)10명에다 식사(食事)와 실탄(實彈) 박격포탄(迫擊砲彈)등을 수령하여 보급대원을 인솔(引率)하여 지정한 고지까지 가니 작전은 끝나고 모두 경계태세로 휴식(休息)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는 보급품을 인계(引繼)하고 중대장님에게 보고(報告)하니 중대장님은 저기 망태기를 가지고 가서 대대(大隊)에 반납(返納)하라 하시었다.
망태기는 10개(個)였다.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하여 동료(同僚)에게 물어보니. 알 필요(必要)없으니 그냥 가지고 가라 하여 다시 물어보니 보여주는데 “악 “깜짝,, 놀랬다. 다름 아닌 사람의 목이 잘린 머리였다. 그 옆을 보니 머리가 없는 공비신체(共匪身體)가. 있는데 남자생식기(男子生殖器)가 잘려있고 잘린 자리에는 소기름 같은 하야케되어있는 것을 보고 누구인가, 못할 짓을 하였을까 하며 몸씨 안타까웠다.
나는 할 수 없이 보급대원 아저씨보고 모두 하나씩 짊어지라고 하니 모두 실타고 하여. 나는 하느수없이 총을 대고 강권(强權)을 발동(發動)하여 짊어지게 하여 산을 내려가는데. 그때 따라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산길은 미끄럽고 마음은 급(急)하니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보급대원 아저씨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내려와 대대에 망태기를 반납(返納)을 하였다.
중대로 복귀(復歸)하여 수색을 하다가 전투하든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는 집에서 아주머니가 울고있었다. 그 집은 우리들이 잠시 쉬었다가. 간 집이었다. 사연(事緣)을 알아보니 공비가 내려와서 국군에게 협조 하였다하여 남편을 사살(射殺)하고 산으로 도망 갔다하였다 우리들은 무엇이라고 위로(慰勞)할지 모르고 참으로 안타가운 마음으로 떠났다.
우리중대는 백암산(白岩山)을 중심으로 하여 수색하면서 정상(頂上)을 향(向)해 올라가니 덧에 걸린 산돼지가 죽은지 오래되어 썩어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산 등선에서 사주를 경계하면서 휴식(休息)을 취하고 있는데 별안간 “악,, 하는 소리가 나아 가보니 병사 한 명이 팔의 뱀에게 물렸다 하여 쩔쩔매고 있는 것을 보았더니 살이 쑥 빠져서 뼈만 남은 것 같이 보였다. 누구인가 말하기를 뱀에게 물리면 붓고 지내 에게 물리면 살이 빠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무엇에 물리였는지는 모르고 그 사병은 즉시 병원으로 후송(後送)시키고. 부대는 계속하여 산을 오르니 높은 산에 마을 이서. 논은 없고 밭만 있는 고산지대(高山地帶)의 마을이 었다, 우리 부대는 마을 중심으로 하여 경계를 하면서 지냈다,
아침 일찍이 백암산 정상(頂上)에서 바라보니 저 멀리 바다가 보이고 아침해가 뜨는 것을 보니 참으로 아름다웠으며. 아물 아물 하게 보이는 곳이 울릉도(鬱陵島)라 하였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훤히 저 멀리 큰 동네가 보이는데 내려가는 길이 약 60도 가량 경사(傾斜)진 곳에 나무 길 밖에 없고. 길은 99번이나 꼬불어졌다하여 아흔 아옵고개, 또는 아리랑고개라고. 마을사람들은 부르고 있다. 우리들은 꼬불어진 길을 따라서 하나 둘씩 새여가며 66번까지 샐무럽 척후병(斥候兵)이 공비 3명을 발견하고 사격(射擊)을 하니 모두들 전투대열로 배치되어 경계(警戒)를 하였다,
공비들은 산 등너머로 도망(逃亡)을 가느것을 보고 추격하여 산등성에 올라가 보니 아래의 움막집 같은 초가집이 3채가 있는 곳으로 도망(逃亡)가는 것을 보고 사격(射擊)을 하니 움막집은 예광탄(曳光彈)에 맞아 불에 타고, 가보니 공비(共匪) 3명은 사살(射殺)되고 여자(女子)가 팔에 총탄을 맞고 혼자 숨어있는 것을 보고 생포(生捕)하였다, 물어보니 경남 진주(慶南 晉州) 사람이며. 왜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어보니 빨치산을 모집(募集)하려 왔다 하였다. 그날의 전과(戰果)는 사살(射殺) 3명 생포 1명이였다.
동네를 향(向)하여 내려가니 개울물이 흐르는데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을 보고 신기(神奇)하여 만져보니 더운물 이였다. 그것은 온천(溫泉)이 있다는것이였다. 동네를 들어가니 아낙네들이 더운물에 빨래를 하고 집집마다 온천탕이 흐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온정 온천이라고 하였다,
(5) 소백산(小白山)으로 이동(移動)
백암산 수색자전(搜索作戰)을 끝내고 경북 풍기(慶北 豊基)로 집결(集結)하여 소백산(1,439m 충북 단양군 가곡면, 영충면, 대강면, 경북 단산면, 순흥면, 풍기읍, 강원도,) 3도(道) 경계를 이르고 있는 소백산을 수색임무를 명령을 받고 단양 근처 소백산 정상으로 출동하였다. 그런데 웬 일인지 점심때가 지나고 저녁때가 되어도 식사(食事)는 오지를 않아 배가 몹시 곱았다. 날은 어두워지고 기진맥진(氣盡脈盡)하여 정상 밑에 개울가에서 모두 누워있는데. 깜깜한 밤 누구인가? 발로 “툭,, 치면서 건빵 한봉지식을 던져주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배가 몹시 곱았던 참에 건빵을 먹으니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깜깜한 밤에 쫄쫄 흐르는 물 소리나는 곳으로 내려가 물을 마시고. 날이 밝아서 보니 시체(屍體) 10 여구(餘具)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들은 그 물을 밤색것 마신 것이 몹시 기분이 나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날이 밝자 보급품(補給品)이 도착(倒着)하니 할 수 없이 시체가 있는 위쪽 물에다가 밥을 지어먹고 소백산 죽령(竹嶺) 그처에다 배치되어 보니 정상은 편편한 풀밭 같았다. 또한 밑둥이가 허리만큼 톱으로 잘린 소나무가 썩어서 구멍이 생겨있는 것을 우에서 드려다 보는 순가 “깩,,하고 흰 뱀이 소리를 지르면서. 쭉 올라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른봄이라 아직은 뱀이 나올 때가 아니었는데 아마도 동면(冬眠)하는 것 같았다,
나는 누구에게 알리까 하였으나 뱀을 죽일까바 그냥 지나간 일도 있었고. 남들은 잔디(도라지 같이 생긴 것인데 쓰지 않고 짐짐하면서 달곰한 맛)라는 것을 캐다가 먹는 것을 보았으나 어덯캐 생긴 것인지를 몰라 도라지 잎과 비슷한 잔디 잎사귀를 얻어서 그 것을 가지고 잔디잎을 일일이 대조(對照)하면서 캐다가 먹을 일도 있었다.
각자 산병호(散兵壕)를 구축(構築)하고 일부는 근처(近處)를 수색(搜索)을 하여 죽령(竹嶺)도 가고 죽령고개에 따리 굴(물동이를 밑에다 바처이는 따리 와 같이 기차가 돌면서 올라 간다하여)까지 수색하고 돌아와서는 밤에 잠복근무(潛伏勤務)를 하는데 시계(時計)가 없어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보고 새벽에는 샛별을 보고 교대를 하였다.
다시 수색을 죽령 반대 방향 쪽으로 가니 작은 동네가 있는데 그 동네 주민이 말하기를 저 소는 3 도(道)풀을 먹는다고 하여 가보니 삼도경계선(三道境界線)에다 소말뚝을 박아 소를 매니 소는 강원도, 경산북도, 충청북도, 3 도(道)를 왔다 갔다 하면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또한 밤이 되자 산에서 불빛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도깨비불이라고 하여. 5명이 확인하러 그리로 가보니 찍개벌래가 파란 불빛을 밝히며 왔다 갔다 하고, 썩은 참나무가 야광(夜光)을 반사(反射)시키는 것 이였다. 우리들은 찍개벌래와 썩은 참나무를 가지고 와서 확인 시켰다.
다시 이동하여 소백산 정상에서 충북 단양군 영춘면쪽으로 내려가는 계곡(溪谷)을 따라 내려오니 동네입구에는 물레방아가 힘차게 돌고있고 마을은 큰 동네였다. 우리중대는 그곳에 이장(里長)님이 각집에다가 몇 명식을 배치하여. 그 당시에는 공비(共匪)따라 여기저기 수시로 이동하다보니 부락 이장님에게 쌀을 주어 군인(軍人)들 식사(食事)를 하게 하였다. 그래서 좀 생활이 나은 집은 자기네가 잡곡(雜穀)을 보태고 반찬(飯饌)도 잘해주고 어려운 집을 그냥 해주니 잘먹고 못 먹는 것은 그날 재수에 달려있다.
우리 분대를 배당 바든 집은 사랑방에다 훈장(訓長)님을 모시고 아이들에게 한문(漢文)을 가르치고, 생활이 여유(餘裕)있게 보였다 저녁에 버섯국을 끓여주었는데 쫄기쫄기하고 맛있어 꼭 닭고기 같았다, 물어보니 송이(松栮)버섯이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송이버섯을 맛보는 것이라 어디서 나느냐고 물어보니 주인 하는 말씀이 그 것은 자식에게도 않가리쳐준다 하면서. 소백산에는 솔 나무가 많아 솔잎이 떨어진 곳에서 송이버섯은 매일같이 돋아난다고. 하시면서. 해가 뜨기 전에 따야지 그렇지 않으며 시들어 없써진다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주인은 망태를지고 나가 시였다.
(6) 태백산(太白山)으로 이동(移動)
1951년 여름경 소백산 수색을 맞히고 밤에 도요다 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날이 밝으면서 도착한곳을 내려서 보니 강원도 철암(鐵岩)(현재 태백시) 태백광업소였다.그 동네를 보는 순간(瞬間) 나는 “깜짝,, 놀랐다. 어쩌면 우리 동네 사택하고 집이 똑 같았다. 마침 안암동 고향에 온 것 같았다. 그 집은 광업소 사택이라고 하였다.
우리중대는 수색임무를 받고 수색을 나셨다 주로 철암, 장성, 일대에 탄광지대를 수색하고 다니다가 도계(道溪)쪽에 오니 통리역과 나한정역 사이 기차철로(1,1km)가 15도(度) 급경사 때문에 승객들은 이 두 역 사이의 산기슭을 걸어서 오르거나 내려가야 했다, 하산길은 그나마 수월했다, 반면 한 시간이 꼬박 걸리는 등산길은 고역이였다, 연탄을 실은 화물차는 통리역에서 케이불(200마력짜리 큰 모-타)을 연결해 두 칸식 매달아 끌어 올리거나 내렸갓다고 동리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우에서 내려다보니 경사진 철로가 저 멀리 보이었다, 나는 처음오로 큰 모-타를 보았다, 이 철로는 연탄을 나르기 위하여 묵호(墨湖)(현재 동해시;)에서 도계까지 연결된 것이다,
우리중대는 철로와 그 부근(附近)을 경비(警備)하다가 교대(交代)하여 산중 수색작전 명령을 받아 출동하였는데 도계(道溪) 부근 어는 산 꼴에 집 3채가 있는 작은 마을에 들어가니. 약 천평(千坪)가량 되는 밭에다가 양귀비(楊貴妃)를 대량(大量) 재배(栽培)하여 양귀비 꽃봉오리에 칼로 그어 깜한 진을 내어 아편(阿片)을 많
든 것도 보았고 아편씨는 깨알 보다 작은 것을 보았다.
그 곳을 지나 산중으로 더 들어간 곳이 집 5채정도 밖에 없는 작은 마을이지만 한 집에 소를 보통 10마리 정도 기르는 부농 같았다. 낮에는 어린아이가 소 한 마리만 끌고 가면 소는 줄줄 따라 나서 산에서 풀을 먹이고 저녁에는 소를 몰고 와서 소우리에다가 들여보내면 소 우리는 부엌과 같이 있어 부엌에서. 옥수수대로 소죽을 쑤어서 바로 퍼서 뒤로 돌려 먹이를 주는 것을 보았다.
그날이 봉급(俸給)날이라 소대장님이 주인에게 이야기를 하여 돈을 주고 소를 사서 도살하는데 때마침 우리소대에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에서 사는 소대원이 도살장(屠殺場)에 다니였다하여 소를 잡으라 하니 소를 잡는데 능숙(能熟)한 솜씨로 잡아 소대원이 실컨 먹고 남은 고기이며 소머리 족발 내장 등은 주인에게 주었다.
여러곳을 수색하다가 몇일후에 양귀비(楊貴妃)밭에 와서 보니 양귀비는 간 곳이 없다. 동네 분이 하는 말이 군인 아저씨가 지나가고 난후 경찰관(警察官)과 사복(私服)한 사람이 와서. 모두 압수(押收)하고 일당 모두 잡아갔다고 하였다.
중대는 태백산(太白山)(1,567m 강원 태백시 경북 봉화) 수색임무(搜索任務)를 밭고 철암(鐵岩)쪽에서 태백산 정상(頂上)을 향(向)하여 여기 적기를 수색하면서 정상에 오르니 정상 밑에 절(寺)이 불에 타고 잿더미만 남아 있고 아직도 샘물이 있어서 물을 떠 마시고 정상에 오르니 둔굴개 단(壇)을 쌓아 이정표(里程標)를 새웠으며 정상에는 말라죽은 고산(高山)나무가 여기 저기 몇 그루 있고 산 정상은 편편한 풀밭이고 넓은 마당 같았다, 누구인가 말하기를 빨치산들에 훈련장(訓鍊場)이라고 하였다. 우리들은 별다른 성과(成果)없이 황지리(黃池里)로 내려왔다.
(7) 함백산(咸白山)으로 이동(移動)
태백산 수색 작전은 별 성과(成果) 없이 수색을 맞히고 태백산 아래 황지리(黃池里)에서 주둔(駐屯)하여 주위(周圍)를 경비(警備)하고 있었는데 황지리읍내는 부근이 탄광밀집지대(炭鑛密集地帶)라 술집도 많았고. 술집 색시도 많아 전시(戰時)인대도 호황(好況)을 누리고 이셨다.
우리 부대는 황지리 부근에서 여러 날을 묵으면서 태백산 주위를 오늘은 이 동네 다음은 저 동네를 수색하고 다니다 보니 행군 하면서 졸고 가다가 가로수에 부티치는 것이 여러 번 있었다, 어느 때는 캄캄한 밤의 갑자기 작전명령이 하달되면 행군(行軍)을 하여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앞사람을 바싹 따라야지 그러하지 않으며 부대를 이탈하게 된다, 그런대다가 앞사람이 서면 행군이 멈추는데 한참 동안 가지 않는다, 앞에 가던 사람은 뒤에서 따라오지 않으니 되돌아 가보니 졸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졸던 사람은 빨리 가니 뒤 따라 가기가 힘이 들었다,
며칠 후 함백산 쪽으로 소대별로 수색하면서 가는데 강원도 정선군(旌善郡)은 가는 곳마다 기암절벽(奇巖絶壁)이요 계곡(溪谷)이라서 산수(山水)가 조화(造化)된 아름다운 절경(絶境)이다, 그렇다 보니 산 이 험하여 대부 분의 밭들이 45도(度) 내지 60도(度)정도 경사(傾斜)가 진 곳이 많다. 우리는 양쪽으로 경사진 밭 골짝 길을 따라가는데 밭에서 아낙네들이 약 10명이 조(組)가되어 밭을 매면서 강원도 정성 아리랑을 구슬프게 그 것도 명창(名唱)으로 소리하며 저 건너편에서 소리를 밭아 부르는데. 골짝 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그야 마로 듣기가 좋았다. 정말로 강원도 정선 아리랑 발상지(發祥地)라 다르구나 하고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정선(旌善)에 아낙네들은 밭에 김을 맬 때 부르면서 일하기에 누구 나가 다 잘 부른다고 하였다.
우리는 아낙네들이 정선 아리랑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얼마를 가니 동네에서 산을 넘어가는 길이 경사가 심하고 높아서 나무길 같이 꼬불꼬불 좁은 길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동네가 멀리 보이였다, 그렇캐 높은 대의 동네가 있고 밭에는 채소(菜蔬)며 곡식(穀食)이 심어져있는 것을 보고 이런 높은 곳에도 동네가 있구나하였다. 소대장님은 지도(地圖)를 보시더니 이 박닥이 500고지(高地)라 하였다 이 근처 산은 낮이막 하여도 보통 600,내지 800고지였다.
우리 중대는 그 부락을 중심으로 하여 경계 배치되어 며칠동안 근무를 하게 되였는데 동네 분이 무를 삶았다 하면서 주시는데 고구마 같이 달콤 하고 맛이 있었다. 우리들은 이상하여 어떤 무 이기에 고구마 같으냐고 물의니 이 무는 둥글고 키가 짧다고하며 다른 대에서는 없고 높은 고산지대에서만 재배(栽培)가 된다 하면서 김치도 하고 반찬으로도 많든 다고 하였다.
다시 출발하여 도착한 곳이 정선역(旌善驛)이였다. 작전지시를 밭아 우리중대는 거기서 수색 하면서 이 부락 저 부락을 다니면서. 수색하던 중 중대장님이 대대(大隊)에 연락(連絡)을 전(傳)하고 오라, 우리 중대는 저 너머 동네로 가니 그리로 오라 하여 대대본부에 갔다가 그 동네를 찾아 가보니 군인(軍人)들은 없고 동네가 텅 빈 것 같아 가슴이 철렁하였다. 그때에 어느 분이 오시오 나는 이 동네에 이장(里長)이라 하시면서. 중대장님이 떠나시면서 편지를 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하시면서, 주길내 편지를 보니 “갑자기 변경되어 다음 동네에 가니 그리로 오라는 편지였다.
나는 가는 길을 자세히 물의니 이장님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마침 그 동네를 가는 색시가 있다 하시면서 약 18세(歲)가량 되어 보이는 쪽진 부인을 대리고 와서 길 안내(案內)하면서 같이 가라 하여 고맙다고 인사하고 같이 산길로 산을 넘어가면서 보니 삼(삼베 껌질)으로 많든 짚신을 신고있는 것을 보고 연유(緣由)를 물은즉 나는 얼마 전에 결혼(結婚)을 하였는데 신랑(新郞)은 군에 가고 친정(親庭)에 갔다가 시가(媤家)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면서 삼베껌질로 많든 짚신도 결혼하기 때문에 처음 신었다고 하였다, 약 2 키-로 쯤 가다가 보니 동네가 보이니. 색시는 우리 집은 이쪽입니다 저 동네라고 하면서 옆길로 가버렸다.
동네를 내려가 보니 개울에서는 맑은 물이 흐르고 물레방아간도 있었다. 어는 분을 만나 목적지 동네를 물의니 저기라고 가리키면서. 하는 말이 이 동네 저기 바로 보이는 물레방아간이 정선(旌善) 아리랑 민요(民謠) 발상지(發祥地)라고 하였다. 나는 그 분이 가르치는 대로 가보니 집들은 여러체가 있는데 강원도 산골 돈네치고는 좀 큰 동네였다, 지붕은 삼배 대(삼배 껌질 을 벗기어 남은 대 약 2m 내지 3m)로 역은집 또는 굴피집 너와집뿐이고 기와집도 있었쓰나 초가집이라고는 한 채도 보지를 못 하였다. 너와지붕이 햇빛에 말라서 틈새가 벌어져 있는 것을 보고 들어가 보니 하늘이 헌이보였다. 비가 오면 새지를 않느냐고 물어보니 비가 올라고 날이 구지면은 너와는 쭉 펴져서 비가 새지를 않으나 소나기가 내리면 좀 비가 샌다고 하였다.
어느 분을 보고 군인(軍人)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의니 저쪽으로 가면 군인 아저씨들이 많다하여 그리로 가보니 중대본부가 있었다. 병력(兵力)은 동네 주위(周圍)에 배치되어 있었고. 나는 중대장님에게 보고(報告)하니 수거 하였으니 좀 쉬라고 하여 동네를 보니 좀 큰 마을이고 사람들은 상투를 하고 짚신을 신은 분도 많았고. 남자 어린 아이는 머리를 길게 따서 처녀 같았고 서당(書堂)에 가보니 훈장(訓長)님이 망건(網巾)을 쓰고 학동(學童)들에게 한문(漢文)을 가르치는데 일부 학생은 목판(木板)(*들기름을 먹여서 반들반들 하게 많든 판(板*)에다 붓글씨 연습(練習)을 하고 물걸레로 닦는 것을 보았다. 좋이가 귀하여 목판에다가 글 연습(練習)하는 모양(模樣)을 보니 그야말로 옛날 풍습(風習) 그대로였다.
중대는 다시 출동하여 함백산(咸白山) 안쪽 깊숙한 동네 쪽으로 들어가니 집이 7채 정도가 있는데 논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삼베 밭이 많고 산비탈에다가 강냉이, 수수 조 감자 메밀 등이 많이 심었쓰며 함백산에서 첫 마을이라 그러한지 우물도 없이 개울물을 식수(食水)도 하고 빨래도 하는 산골 오지(奧地) 마을 이였다. 개울가에는 녹말(綠末)가루를 만들기 위하여 각기 자기 항아리에다가 석은 감자를 넣어 둔곳이 여러 개 있었다. 중대는 공비가 마을로 내려올 만한 곳에 병력을 배치하여 얼마동안 주둔(駐屯)하면서 수색을 다니었다.
우리들은 개울에서 칫솔로 이를 닦고 비누로 세수를 하니 그 동네 아가씨가 처음 보는 것이라고. 이상하게 보는것이였다 아가씨들은 신발도 없이 맨 발로였다. 그럼 빨래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니 수수 대나 조대로 불을 땐 재를 시루에다가 넣고 물동이를 밭친 다음 물을 부어서 내리면 누런 양재 물이 된다 하였다. 그 옆을 보니 누런 물에 빨래가 담겨져 있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이불도 가구도 세간도 없고. 방(房)바닥에는 진흙 위에다가. 가마니를 깔고 벽(壁)은 흙벽이며 식사(食事)는 팔뚝만한 강냉이를 가마솥에다 물을 붓고 삶으면은 강냉이 알이 뚝 터진 것으로 부식도 없이 주식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도 소화가 잘되느냐고 물어보니 여기는 물이 좋아서 잘 된다고 하면서 맛있게 먹는 것이다. 우리들은 강냉이를 먹으니 소화가 잘 않되는데
우리가 쌀을 드릴게 밥을 지어달라고 하니 쌀밥은 한 번도 지어보지를 못하여 못 한다고 하였다. 밤에는 등잔(燈盞)이 없이 방구석에다가 굴뚝을 만들어 놓고 솔 나무 관솔로 불을 밝히면은 이야기책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불이 밝다 하였다. 그럼 기차(汽車) 자동차(自動車)는 보았느냐고 물어보니 그런 것은 보지를 못하고 비행기(飛行機)는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쓸뿐이라고 하여. 서울에는 기차, 자동차, 사람도 많으며 높은 집도 만타고 하니 정말이냐고 하면서. 이상하다는 뜻이 고개를 기우뚱하였다. 정말로 도회지(都會地)의 문명(文明)과는 거리가 먼 오지(奧地)마을 이였다,
또 한 집은 생활(生活)이 나은 집이라 사랑방도 있고 안채도 있는 집을 보니 추녀 밑에다가 도라지 고사리 말린 것을 매달아 노았으며. 사랑방에 들어가 보니 천장에다가 양회봉지를 여러 개를 매달아 노았는 것을 보고 저 개 모두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여기는 쌀이 귀하여 제사(祭祀)때 쓸려고 미리 준비(準備)하여 할아버지 아버지 것을 조목(條目) 조목 쌀을 봉지에다 따로 담았다가. 제사 때 쓴다고 하며 도라지 고사리도 그때 사용한다고 하였다.
그때 마침 임시(臨時)로 개인취사(個人炊事)라 하여 쌀이 나오는 게 있써서. 쌀을 드릴 터이니 점심에 감자떡을 해달라고 하니 그렇게 하자고 하여 감자떡을 만드는데 감자를 갈아서 밀가루에다 반죽하여 동북을 넣어 송편같이 만들고 강냉이 술이라고 하여 막걸리를 주면서. 감자떡은 뜨끈뜨끈할 때 먹어야 한다면서. 식으면 맛이 없다고 하면서 주는데 처음 먹어보는 것이라 참 맛이 있었다. 막걸리는 껄찍하고 텁텁하여 쌀 막걸리만은 못하였다.
그 집에 9세(歲)된 여자(女子) 아이가 부엌일을 하는 것을 보고 저 아이는 누구길내 어린아이가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니 저 아이는 밑 며느리로 보리쌀 2가마를 주고 대려왔다 하여 그럼 아들은 몇 살이냐고 물의니 9살이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한입 덜 여고 어린 나이에 한참 뛰어 놀고 어리광을 부릴 딸자식을 양식(糧食)을 밭고 남의집 밑며느리로 보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셨으나 사실(事實)이 그러하니 나는 300년전 시대(時代)에 온 것 같았쓰며. 어린아이가 구진일을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참 불쌍 하구나 하였다
그 동네에는 넓은 함백산이 있어 약초(藥草)도 많고 야생화(野生花)도 많아 토종(土種) 벌통들이 집집 마다 있고 야산(野山)에도 벌통이 많이 있으며 주민들은 약초 석굴 등을 채취(採取)하면서 삼베도 많이 심어 생활을 하고 있다. 하루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벌들이 무수히 목이 잘려 죽은 것을 자세히 보니 벌집입구에 벌들이 양쪽에서 침입자(侵入者)를 물어서 목을 자르고 하느것을 보았다, 또한 어떻집에는 주인이 상(喪)을 당하니 이상하게도 벌들은 목에다 흰 것을 두르고 드나드는 것을 자세히 보니 밀을 발르고있었다. 벌들은 영물(靈物)이라 하였다.
함백산을 수색하려고 중대가 출동하여 함백산에 올라가니 산은 험하지가 않아서 그런지 포근 하면서도 마음이 편안(便安)하였다. 그 산은 북쪽 오대산으로 가는 누-트 인지 나무에다 암호(暗號)로 표시(表示)한 것도 많이 발견하고 어떤 곳에는 사람 하나. 들어가게 여기 저기에다가 땅을 파고 우에다 풀이나 잔디를 지형(地形)에 맞게 덮어서 감쪽같이 위장(僞裝)하여 그 위를 밝고 지나가면서도 모를 정도로 위장(僞裝)한 것을 보고 감탄(感歎)하였다.
그래서인지 공비(共匪)를 보고 추격(追擊)하면은 공비를 발견 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어디를 지나가니 암벽(岩壁)밑에서 어는 농부(農夫)가 무엇인가를 찾고있어 무었하느냐고 물어보니 석꿀을 찾는다는 것이다.(석꿀은 벌들이 돌 틈에다 벌집을 지어서. 꿀이 돌같이 굳어져 있는 것)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잘 만나면 몇백년된 것 도 발견한다 하였다. 다시 마을 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벌통이 있는 것을 보고 어는 사병이 삼베대로 벌통 뚜껑을 살짝 열고 담배 연기를 슬슬 불어대니 벌들은 왕-왕 하면서 모두 벌집 아래로 내려가니 뚜껑을 열고 숟갈로 떠서 먹으면서 나에게도 주기에 먹으니 깊은 산골에 약초 꿀이라 그러한지 목구멍이 알깔한게 달면서도 독하였다. 모든게 처음 보고 처음 먹어보는 것 이 많아 신기(新奇)하기만 하였다, 어는 사병은 꿀을 먹고 술에 취한 듯이 얼굴이 빨가 지면서 힘들어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들은 얼마동안 정선(旌善) 일대 여러곳을 수색을 하면서 다니다보니 개울가에서 유리 원료(原料)를 채취(採取)하는 것도 보고 사금(砂金)을 채취하는 것도 보면서 오대산(五臺山) 근처까지 다니면서 수색을 하다가 공비토벌 작전을 끝내었다.
부대는 약 1년동안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配屬)되어 경북 청송군 진보면을 기점(起點)으로하여 경북 청송, 주왕산, 봉화, 일월산, 울진, 백암산, 문경 새재고개 충북(忠北)에 옥천, 영동, 괴산, 보은 속리산, 소백산, 강원도(江原道)에 태백산, 함백산, 오대산, 까지 전면전(全面戰) 보다는 몰아서 오대산까지 추격하는 것을 목적(目的)으로 오대산까지 1년간을 산간(山間) 골짝이 오지마을, 또는 사람이 들어가 보지 못한곳도 수색을 하면서 추격하다가 1952년 2월 상순경에 공비토벌 작전을 끝내고 기차(汽車)를 타고 전북 남원(南原)으로 이동하였다.
(8) 결론(結論)
서기 1950년 6월 25일에 38선(線)을 넘어 인민군(人民軍)이 경북 낙동강(洛東江)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을 유엔군과 국군(國軍)이 반격(反擊)으로 적(敵)은 거의 전멸(全滅)되고 더러는 후퇴를 하였으나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으로 포위(包圍)되자 패잔병은 산중으로 들어가니 지리산에는 빨치산 지방 빨개이가 합류(合流)를 하니 공비(共匪)가 약 3만 내지 4만명이되었쓰며. 마을에 내려와 식량과 소 가축(家畜)을 마구 약탈(掠奪)하고 파출소(派出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奪取)하는 등 치안유지가 어럽게되자
처음에는 지리산(智異山)을 중심으로 제11사단이 공비토벌을 하다가 제8사단(師團)에 인계하고, 수도사단(首都師團)도 가담하고 예비사단(방위대), 육군본부 직할 경비대대, 전투경찰대(戰鬪警察隊)를 투입(投入)하여 전북(全北) 남원(南原)에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와 경북(慶北) 안동(安東)에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을 두었고, 산전민(山田民) 그리고 산골짜기에 부락민을 이주(移住)시키고 강원도 오대산에 미리 제5사단(師團)을 매복(埋伏)시키고 공비소탕전(共匪掃蕩戰)을 전개(全開) 지리산부터 몰아서 추격하니 공비들은 날은 춥고 보급이 차단(遮斷)되니 북으로 도주(逃走) 하다 동사(凍死)한 공비 굶어죽은 공비 병들어 죽은 공비. 산에서 수 없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국군은 늦추지 않고 공비를 계속 추격하니. 공비들은 북으로 도주하다가 오대산에서 매복(埋伏)하던 제5사단에 의해 수 없이 사살되고, 생포한 공비만도 만명(萬名)이 넘는다고 하였으나 통계에 의하면 사살(射殺) 5,000명 생포(生捕) 4,00명으로 되어있다,
나는 근 50년전 공비토벌로 각 유명한 산(山)에 계곡(溪谷)을 수색하고 또한 사람이 들어간적이없는 곳에도 수색을 하면서 명산(名山) 정상(頂上)에 올라가 보았고. 또한 산중 오지(奧地)마을에 풍습(風習)과 신기(新奇)한 것들을 많이 듣고, 보고한 것 을 영원(永遠)이 사라질 번 한 것을 기억을 더듬으며 기록을 하고 보니 참 잘 하였구나 하였다. 만약 돈을 주고 관광(觀光)을 한다하여도 수박곁 할기로 겉에서만 보았을 것이지 속속이 볼 수 없으니 더욱 잘하였구나. 하였다. (1999년, 6월, 25일, 안암동에서 홍순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