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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금릉중학(현재 김천 중앙) 시절
1967년 국민학교 졸업하고 집에 있을 때 형님이 A B C D 외우라고 닥달이다.
한달 정도 되어 다 외웠다.
고향의 2해 선배 순태, 동기 순배 등 3-4 명이 어울려 놀기 재미 있다.
낮에는 맛대이(자치기) 밤에는 뭐 했더라.
산에 나무도 하러 댕기고
공부는 뭐 에비 시디 외우는 것 말고 안했다.
요즈음 아들은 불쌍하다.
밥마 먹으면 다른 거 하는 것도 없고, 또 시키지도 않고
죽자사자 공부만 하라하니.
인생이 공부하러 태어 난게 아니다.
아주 극소수 몇명을 빼고는
공부는 좀 더 쉽게 돈 벌고 편하게 살아가기위해 하는 건데
공부만 하도록 되어 있으니
삐딱선 타는 애들도 많다.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천부적 재능을 살려서
재미있게 즐겁게 살아들 가야 한다.
축구를 하던
농구를 하던,
야구를 하던,
피아노를 하던,
노래를 하던,
미술을 하던,
수학을 하던
기술을 배워 기술자가 되던.
운전을 배워 운전을 하던
집에서는 나름대로 걱정이 많았다.
고향에서 그무렵 김천에 방 얻어서 생활하는 자들이 없고
집의 경제적 상태도 그렇게 좋은게 아니어서.
엄마의 고무 딸을 통해서
어찌 어찌 하다가 금릉중학 교문에서 100 미터 떨어진 김천 여고 입구에 방을 구했다.
하숙 대금은 쌀 2말 5되 이다.
내가 1말 2되 정도 먹으니,
나머지 1말 3되 정도가 수고료이다.
하숙집에는 할머니와
지금 우리 나이 정도의 주인 부부와
큰 아들과 갖 시집온 며느리와
중앙국민 학교 다니는 아들과
학교도 다니지 않는 애가 있었다.
처음 한달 있으니
할머니 친척 되는 분의 손자가 금릉고 3 인데
이름이 강구삼이고 고향이 조마이다.
그 형은 그런대로 성실파 이었고
바이 올린 공부해서 계명대 갈라고 했는데 꿈을 이루었지 모르겠다.
그래서 바이올린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처음 그 악기를 하숙집에 갖다 놓았을 때
그 악기를 두고 의견들이 많았다.
키타 같이 생겼는데 키타는 아이고 등등
1967년 3월 5일
그날은 새벽에 일어 났다.
새벽밥 일찍 먹고서
아부지는 쌀 2말 5되 등에 지고 나는 이불 보따리 등에 지고
김천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처음 목표는 고향에서 4 킬로 떨어진 배시내까지.
그때 까지만 하더라도 2킬로 정도 덜어진 감문중학 근처는 버스도 오지 않았다.
형님이 뒤 따라 오다가 아버지와 쌀을 교대로 짊어지고
가벼운 이불 보따리 진 나는 배시내로 향했다.
그 날도 보슬비가 간간 내리고 있었다.
배시내에서 버스타고 김천에 도착하여 하숙집을 몰라서
어느 가게에 짐 맡기고 입학식에 참석 했다.
고등학생들로 구성된 악대부가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 있었다.
입학식 마치고 아부지는 돌아 가고 나 혼자만의 삶을 시작 했다.
그 때 까지 고향의 호롱불 밑에서 생활 하다가
전기불을 대하다 보니 참으로 신기 했다.
비록 5 와트 짜리 전구이어서 요즈음은 그렇게 작은 것 사용하는 곳도 없지만
호롱불에 비하면 대단한 것이다.
15 와트 전구는 가게의 옷 수선 하는 주인집에만 켠다.
1 달 후에 강구삼이 형이 같이 있게 되었다.
고 3 이니 교문 통과 할 때 가끔 규율부 덕도 본다.
규율부는 어쩌면 공포의 대상이다.
조금만 복장에 이상이 있어도 벌을 주니까?
그 형은 악대에서 트롬본을 분다.
그래서 트롬본이 어떤지 알게 되었다.
트렘벳도 알고.
아마도 제일 불기 힘든게 트렘벳인가 보다.
학교의 교관목도 국민학교와는 달리
과목별로 선생님이 따로 있다.
영어 선생님은 수업전의 인사를
차렷! 경례! 대신에
ATTENTION! BOW! 이렇게 시킨다.
영어 교재는
TOM & JUDY 를 사용하였다.
탐과 주디의 대화체 문장이 많았다.
약 5시가의 영어 시간중 3시간은 한국 사람이 갈키고
2시간은 평화 봉사단에서 파견된 MISS TOMSON 처녀 선생님이 가르켰다.
공짜는 귀중한 줄을 모르는 것 처럼
무식한 우리들은 그 좋은 기회를 별로 잘 사용하지 못했다.
얼마든지 공짜로 회화를 공부 할 수 있었는데.
2반 애들은 그 여자 선생님에게 수업시간에 영어로 욕하다가
그 여자 선생님 울면서 교무실로 돌아 가니
곧 바로 체육 선생님이 그 반 아들 운동장에 다 불러 내어
운동장에 얻드려 시켜 놓고 엉덩이에 몽둥이로 몇 대씩 때린다.
나도 나중에 후회 마이 되었다.
그 당시 원어민 여선생에게 회화를 많이 배웠더라면!
나는 완전 외톨이 신세다.
곡송에서 혼자 왔고 주위에 아는 사람도 없고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서 살게 되니까.
떨어진지 한달이 안되어 체육복 때문에 아부지가 김천 오셨다.
나고 어떻게 눈물이 그렇게 쏟아 지는지.
억제도 필요 없다.
둑터진 저수지 마냥 눈에서 눈물이 계속 줄줄줄줄 흘러 내린다.
감당이 안되더군요.
그것을 보는 아부지 마음도 않좋았으리라.
14 살 짜리 객지에 혼자 남겨두니
저렇게 눈물이 쏟아 지니.
그 날은 주인 집에서 국수를 내 놓는데 상당히 신경을 써서 만든 것 같았다.
평소에 그렇게 잘해 준다면 오래 있었을 것인데.
그 집엔 1학년 때만 있었다.
돈이 싸니가 그런가 반찬도 별로 이지만 무엇 보다도 도시락 반찬이 별로 이다.
고추장에다가 김치, 장아찌 같은 것을 싸주어 밥만 대충 먹고 교실 쓰레기 통에 버리니
언젠가 미술 선생님이 교실에 냄새 난다고 마이 머라들 카신다.
그렇다고 먹지도 않은 반찬을 그냥 가지고 갈 수도 없고.
학교 학생들도 가지 각색이다.
김천 국민학교 출신으로 입학 1등을 했다던
진의균( 입학 후 부터는 10등 안에도 안된 것 같음)을
비롯하여 모암 출신 김성룡, 용두동에서 오토바이 상회 한다던 강 석률,
서부 출신 최종국, 최종만,
실업선생 아들 조세환( 졸업후 재수 할 때 기차에서 만나니 경대 농대 다닌다 카던데---)
조마 증산의 윤 점수,박명수,---
김인복은 어디 출신인가 모르지만 아마 중앙 출신 같다.
3학년 때 아카데미 앞에서 놀다가 들켜서 언젠가 담임 선생님 정윤권 선생이
인복이 너는 마누라감이 국민학교 3학년이 맞다 캤는데
그 선생님의 예언이 인복이에게는 들어 맞았는지 아닌지 몰라도
지금 우리 집 사람의 학년이 그 당시 국민 학교 3학년 같다.
아천 출신으로 1등을 자주하던
이 종문( 지난해 전화 하니 부산 어느 금융지점 지점장이던데 )
1학 년 때 내 앞뒤로 앉아서 이름이 여자 이름이라고
앞장서서 '가시나'라고 놀려 대던 농소 출신 이 길우, 그리고 송 돈수
2학 년 때 같은 반 하면서 급장 하고 김고로 왔던 박윤규
윤규는 금릉 중학교 배구 선수 이었다.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 한다.
우리 카페에도 가끔 얼굴을 내민다.
그리고 3학년 때 개령에서 전학 온 김교덕,
교덕이는 중학교 3학년 때는 별로 친하게 지나지 않았지만
김고로 간 후 부터는 1학년 때는 같은 반 하고
2,3학년 때도 늘 가깝게 지냈다.
하숙집에서 100 미터 거리에 직지 다리가 있다.
상주 가는 길을 우리 아버지는 '상주 질라도'라 부른다.
그래서 내가 사는 곳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때 '상주 질라도'에 산다 그런다.
직지 냇가 방천 따라 조금 내려 가면 김천여고 옆에 '보트장'이 있다.
연못에 배 몇대 같다 놓고 임대하는 장소이다.
배는 못타 보고 타는 형님들 구경은 한적이 있다.
그리고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소장이 우리집의 직지천 맞은 편 북어리 동네 앞으로
이사를 왔다.
그래서 장날이 되면 새벽 부터 소장으로 가는 송아지 소리들이 음매 음매 들린다.
그 때 소장은 엄청 크게 열렸다.
과히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지구별 체육대회도 잊지 못한다.
금릉중학교는 1 미터 정도 되는 나무 막대기를 가지고 마스게임을 연습했다.
금릉 중고등학교는 '송구'와 배구를 많이 연습하고
또 김천 근방에서는 실려도 괜 찮았다.
축구부도 있었지만 그렇게 좋은 성적은 못 거두었다.
나는 등치가 좀 있어서 그런지 체육 선생님이
같은반 하던 모광 사는 전원표와 남아 연습하라
했는데 운동 신경이 하도 없어서
2달 정도 하다가 고등학교 선배의 호통 맞고 그만 두었다.
생각하면 참 잘된 것이었다.
직지사 아래 사는 김우용이는 금릉에서 축구 잘해서
김고에 특기생으로 나보다 1년 늦게 왔는데 지금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잊지 못할 사건이 하나 있다.
어느 날 어떤 정신 이상자 20대 중반이나 30대의 여자가
직지 다리 아래에 나타 났다.
치마만 걸치고 다니다가
사람들이 벗으라 하면 훌러당 벗어 버린다.
여자 나체 구경 하기 하늘에 별 따기 보다 힘든 시절에.
다듬지 않으니 피부는 좀 거무 티티 했지만.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학교 담너머 200 미터 길이의 도로로
김천 여중고생들이 다니는 길이다.
한번은 눈이 왔는데 그 눈으로 눈을 뭉쳐서 10 명 정도가
여학생들에게 3-4 미터 높은 곳에서 집어 던지니
눈 덩이 던지는 우리들은 재미 있었겠지만
여학생들은 죽을 지경 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하다가 선생님한테 들켜서 교무실 복도에 가서 굵어 앉은 적도 있었다.
체육 대회 때면 교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금릉 교가는 김중 교가 보다 행진곡이라 응원가로 부르기 더 좋다.
"푸른정기 고이 길러 산산에 들로
굳센 기상 뜻을 이뤄 겨레와 함께
청사에 본을 받아 전통을 세워
그이름 빛나거라 금릉
금릉은 우리의 자랑"
3절 까지 있다
한번은 김중과 축구 경기가 붙었는데 1:0 으로 지고 있다가 1골을 넣었는데
그게 엎사이드로 판결나서 얼마나 원통 했는지
중 2 때 수학 여행은
새벽 5시 완행 열차를 김천역에서 타고 출발하였다.
부산까지 역이 40개도 더 되었다.
부산에 도착하니 12 시가 넘었다.
용두산 공원 구경하고
부산에서 도라지호 배를 타고 거제의 성포를 거쳐 충무로 갔다.
배가 꽤 컸었다.
우리 수학 여행 학생들 200명 정도는 절반도 안되 었다.
충무의 밤 풍경 네온사인이 멋 있었다.
그 때까지 김천에는 네온사인이 아카데미 극장과 김천 극장에 있었던가.
한산도를 갖다가 다시 배타고 부산으로 와서
금강 공원 가서 케이블 탈려고 했는데 케이블카가 고장 나서 타지를 못했다.
하드 파는 애들이 와서 한개 5원씩 팔다가 안 팔리니까
4 개 10원에도 팔았다.
중학교 1학년이 끝나고
방학이 될 시점에 형님이 자전거 끌고 책상 가지러 왔다.
자전거 뒤에 조그만 책상 싣고
집으로 가다가
옛날 시청 맞은 편에 있는 빵집에 가서 찐빵을 사먹었다.
한개 5원씩 10개 50원어치 샀는데 다먹지 못하고
2개 싸가지고 집으로 왔다.
그 책상 정말 역사 있는 책상이다 .
우리형이 중학교 입학하고 기념으로 이웃 동네 목수로부터
맞췄는데
중학교 1학 년 때 내가 사용하고 집에 가지고 갔다가
내가 대구에서 재수 할 때
버스운전사 눈치 무시하고 버스 운전사 옆의 엔진 위에 실고
대구 비산동에 갔다가
대구에서 예비고사 끝나고 대구역 근처에서 500 원 받고 팔았는데
고향에 오니 어머니가 팔아 먹었다고 어떻게나 혼을 내는지
그 다음날 다시 대구에 가서 보니 니스칠을 해놓고 1,000 원인가 달라 했다.
그래도 다시 사가지고 기차에 싣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중 2 때 샀던 책상은 좀 튼튼하지 못해서 아버지 돌아 가시고 버렸지만
그 책상 지금도 우리집 아랫방에 자리 잡고 있다.
내 생전에는 버릴 마음이 없다.
내가 10 살 때즘 샀으니 46년이 넘어 되었다.
중 1 때 옆방에 왔던 나보다 2 년 위인 김천 중 3학년인 선배는 집이 상주가는 쪽
김천 시내 바로 벗어 나는 곳에 살았는데 집에서 공부 하라고 일부러 하숙 시켰으나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우리 엽집에 사는 금릉중 다니는 선배와 만나면 레슬링이다.
만나면 레슬링 하는 사람도 처음 봤다.
중 2년 때는 집에서 만류해도 자취방 얻어 달라고 졸랐다.
하숙하다 보니 배가 고파도 해결할 방법도 없고 ,
또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도시락 반차도 그랬다.
남산동 산 곡대기 밑에 아는 사람을 통해서 정말로 맨 윗집을 구했다.
전기도 들어 오지 않아 호롱불은 어두워서 안되고 등불 켜고 살았다.
15살의 자취 생활
그것은 좀 어려웠다.
처음 대하는 연탄불
꺼지기 일수다.
학교 갈 때는 집에 없고 밤에도 잘 못하니.
꺼진 연탄불 살리기란 너무 힘들다.
숯을 사 넣으며 좋겠지만 그것은 돈이 들어 가니.
가끔 주인집 아주머니가 살려 줄 때도 있었다.
3월 부터는 고향 바로 윗집에 사는 1년 후배 정걸이와 같이 생활 하였다.
정걸이는 금릉중, 금릉고 졸업하고
영남전문대 자동차과 졸업하고
지금 구미 인동에서 자동차 정비차려서 한다 한다.
돈도 지금은 나보다 더 잘벌겠지.
고향에서 가끔 만난다.
일요일 날은 오전에 김천 제일교회 갔다 와서 오후에는 가끔 산으로 놀러 다닌다.
남산동 뒷산 너머에는 계곡이 있는데
아마 그 계곡 서부국민 학교 쪽으로 흘러 가리라.
그 계곡에 가제가 있는데
그 가제 잡기가
재미 있다.
정걸이는 몇마리 잡았지만 나는 한마리도 못잡았다.
그 가제 잡기가 일품이다.
개구리를 잡아서 뒷다리 하나를 찢어서
나무 꼬째이 에 실로 꽁꽁 묵은 다음 가제가 살것 같은 바위 밑 구엉에 쑤셔 넣고
한 5분 정도 기다려서 아무 반응도 없으면 가제가 없는 곳이다.
장소를 옮겨야 한다.
가제가 있는 곳은 입질을 한다.
입질 할 때 살며시 1-2 센치 당겨 낸다.
그러기를 수십차례 하면 가제가 밖으로 끌려 나오는데 그 때 잡으면 된다.
보통 한마리 잡을려면 10-20 분 걸렸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농사 지원으로 농고를 지나서 지금 법원 있는 쪽으로 모내기 하러도 갔다.
올 때 트럭을 탔는데 가로수가 앞을 막길래 팔로 막다가 팔에 껍질 많이 벗겨졌다.
절대 차에서는 차 밖으로 내 밀어서는 안된다.
우리 때에는 실업이라는 과목이 있었다는 것 기억 하시겠지요.
한번은 하루 날 잡아 가지고 전교생이 리아카 끌고 퇴비하러 다녔다.
많이 모은 반은 상품도 주고.
큰 비까리같이 화장실 옆에 쌓아 놓고 재래식 화장실 똥을 퍼 올리면
1년 후 좋은 거름이 된다.
난 똥퍼기는 한번도 안했다.
화장실 문 안쪽에는 낙서가 많다.
조회 시간이나 걸어갈때 남자 여자 선생님이 같이 걸어 가는 것 보면
화장실 문짝에 기사가 올라 온다.
중 3 때는 같은 남산동이지만 과하주샘 아래로 이사 왔다.
거기는 전기가 들어 왔다.
하지만 방옆에는 쥐가 많이 다닌다.
비가 많이 오면 조금씩 새기도 했다.
그 방에서 쥐를 몇 마리 잡았다.
방안에 쥐가 있으면 정걸이와 나는 쥐를 밖으로 쫓을 생각 않고 방문 꼭닫고 쥐사냥을 한다.
두 명이서 각각 손에 빗자루를 들고
책상 밑 같은 곳을 뒤 진다.
뒤지다가 안 보이면 책상 서랍을 열면 서랍에 쥐가 있을 때도 있었다.
여름 방학 마치고 오니 쥐벼룩 때문에 애를 먹은 적도 있다.
3 학년 때는 2달 정도 영어 선생님이 안계셨다.
보충 수업을 해도 시원찮은 판에.
그게 공립과 사립 차이인가.
중학은 공립에 다니고 고등은 사립에 다녔는데
중학교 때는 가끔 선생이 비는 경우가 있어도
고등학교 때는 도중에 선생이 비는 경우가 없었다.
2 학기가 되어 진로 문제가 생겼다.
담임 선생님이 상위권 애들을 금릉으로 남겨 두려고 애를 썼다.
나와 몇명은 그 것을 뿌리치고 김고로 갔다.
중학에서 고등 가면서 중도 결원 80명 정도 뽑는데
약 160명 정도 왔었다.
그러나 금릉에서 원서 냈다고 다 된것은 아니다.
김교덕, 김동인, 박윤규, 서정선 이렇게 고등학교는 바꿨다.
그리해서 내가 김천 고등학교에 온 게 되었다.
시험 합격자 발표는 김천 문화 방송이었던가
라디오로 발표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서 정 선' 이름이 전파를 타게 된 것은 유일하게 그게 전부이다.
겨울 방학 때는 조그만 책상을 들고 형이 자취하던 그 유명한
평화동 80 번지에 가게 되었다.
참고로 평화동 80 번지는
일종의 난민촌 비슷했다.
잠시 짐만 갔다 놓자 한 것이 집안 형편상 고등학교 3년 동안 그 집에 있게 되었다.
그 집은 여자 혼자 5살 정도 되는 애와 사는 집이 었는데
성질이 대단 하엿다.
그래서 나는 내혼자 아니 형에게도 미친개라고 까지 불렀다.
물론 듣기지 않도록.
우리들은 옆방을 돈 주고 사용하니 그런대로 괜찮다.
하지만 남에게는 대단 하다.
여자 혼자 살아 날려면 그렇게 살아야 하나 보다.
아마 어떤 남자가 잠자리 같이 해서 애만 하나 낳도록 하고 버린것 같다.
언제가 한 번 남자가 찾아 오기도 했다.
그 집은 집안에 화장실이 없으니 공중화장실을 이요해야 하는데
정말 힘들었다.
설사 같은게 있을 시에는
동네기 동네 인지라 이틀이 멀다 하고 싸움들 하는 소리이다.
언젠가 고등학교 가고 체육 대회 못 참석 했다 하는 변명을
독일어 조욱연 선생님이 하라 하길래 80 번지에 산다고 하니 놀라 시던군요.
1학년 때는 외사촌 형님이 김천 취직하러 와서 방이 없길래 2개울 정도 같이 잇었고,
또 4촌 영복이는 고향 감문중학 졸업하고 김천당에 금방 기술 배운다고 2개월 같이 있었다.
그래서 집에 가서 하소연 했다.
도대체 공부 환경이 너무 안된다고.
영복이에게는 좀 마안 하지만 어디 다른 방을 구하라 쪽지에 서 놓으니 바로 엽집을
구해서 있었다.
지나고 나니 다 후회스러운 일들이다.
영복이는 큰 아버지가 일찍 돌아 가시는 바람에 국민학교 때부터 큰 어머니 혼자서
자식들을 길렀다.
그나저나 영복이는 술을 좋아 했는데
선산서 정금당이라는 조그만 금방 하다가 지난해 지병으로 이 땅을 하직했다.
그 아들 하나는 목포해대 나와서 배탄다 그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