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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의 역사 통나무를 차차 더 개량하여 통나무를 여러 개 엮어서 뗏목을 만들거나, 아니면 커다란 통나무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싣고 노를 젓거나 삿대를 사용하여 바닥을 밀고 다니게 되었다.
통나무배
뗏목
또 고대 이집트 같은 곳에서는 갈대를 엮어서 배를 만들기도 하였다. 또 동력으로 사람 대신에 돛을 만들어 바람의 힘을 이용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제대로 된 배는 아마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었을 것이다. 비록 움직일 수 있는 동력 장치는 없었지만 그 크기가 대단하다. 그 당시는 측량단위를 손끝에서 팔꿈치까지 길이를 규빗이라 해서 사용 했다. 대충 1규빗을 45 센치 정도로 환산 한다. 노아방주의 길이가 300규빗(135M), 폭 50 규빗(22.5 M), 깊이 30규빗( 13.5 M)에서 물에 잠기는 흘수를 8 미터로 가정하고 앞뒤로 약산 날씬하게 만들어 졌다고 본다 하면 그 크기가 대략 화물을 실을 수 있는 무게가 2만톤 가까이 된다. 재료가 전부 나무이니 종강도를 고려 한다면 그 당시 기술로는 어마 어마한 배이다. 해방 후 1970년대 까지 우리가 건조 할 수 있는 최대의 배 크기 정도 되었으니. 그 후 로마, 그리이스, 중국 등은 각자 자기들 나름대로 독특한 배를 만들어 사용 하였다. 기원전 3000 년경 이집트는 돛을 사용한 배를 만들었다.
고대 이집트 갈대선 복원
그 후 그리이스의 트라이림 (TRIREME :3단 갤리선)전함, 로마시대의 거대한 상선, 바이킹의 날렵한 갤리선등이 등장 하였다.
14세기 이후로는 유럽의 해양국가 포르투칼, 스페인, 영국, 네들란드 등에 의해 대양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그 당시 유럽과, 아시아 , 아프리카 이렇게 밖에 생각지도 못하다가, 각 나라들과 항해가들은 지구가 둥들다는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 저마다의 역량을 쏟아 붓고들 있었다. 그러다 보니 거대한 범선들이 나타나기 시작 했고, 나침판의 발명으로 대양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었고, 화약의 발명으로 대적을 제압하기 위해 선박에 대포가 설치되기 시작 했다.
17,18 세기에는 거대한 돛과 새로 개발된 기술로 만들어진 군함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 했다. 저 유명한 영국의 넬슨의 함대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서로 맞붙은 트라팔가 해전도 이 때의 일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배들은 커야 고작 2000 톤 내외나 그 이하의 배들이었다. 그러다 1780 년쯤 증기기관이 등장 하면서 선박 동력에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1800 년대에는 증기 기관이 활발히 발전해 나갔다. 돛 대신에 프로펠러가 등장하게 되었다. 1900 년대에 들어 와서는 선박 재료로 철판이 사용되기 시작 했다. 철판 사용방식은 2차대전 전까지는 주로 리벳 이음 식 이었다. 2차대전 후부터는 점차 용접이 발달하여 리벳 방식은 자취를 감추고, 전부 용접 형식으로 바뀌었다.
배의 종류도 많이 바뀌었다. 우선 군함만 보더라도 2차대전 발발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거함거포주의로 우선 커다란 배에 얼마나 큰 대포를 달고 다니느냐에 따라 그 나라 군사력이 결정 되었다. 2차 대전 중 대표적인 거함거포의 배는 독일의 자매함 비스마르크호와 테르핏츠, 일본의 자매함 야마토와 무사시이다. 이들 군함은 수년간의 설계와 건조에 극비의 보안을 취했지만 결국은 2차 대전 중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체 상대방 항공기 공격에 의해 침몰되고 말았다. 반면에 새로운 형태의 배인 항공모함이 등장해서 2차대전 중간부터는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한 함대가 전쟁을 이끌어 가게 되었다.
1차 대전 후부터는 독일에서 잠수함이 개발되어 전과를 올리기 시작해서, 2차 대전 당시에는 대서양에서 미국과 영국 그리고 연합군들의 보급선단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2차 대전 후에는 원자로을 탑재한 선박들이 등장하기 시작 했다. 어마어마한 연료를 소비하는 군함들에게는 엄청난 희소식 이었다. 잠수함에 탑재하기 시작해서, 항공모함에 적용되어 현재는 전략잠수함 모두와, 항공모함 거의 원자력 추진식이다. 잠수함은 물속에서 행동해야 하므로 원자력이 거의 필수적이다. 하지만 안전문제와 다른 문제로 미국과 러시아 외에는 별로 채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선박의 역사는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발전을 해 왔다. 그 당시로는 외국과의 교역이 그렇게 많지 않아 그렇게 중요시 되지 못했다. 고려 말 화포가 개발되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세계 최초의 철갑선 거북선이 등장 하였다. 하지만 거북선의 설계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또 실물 거북선이 다 사라져 상당한 아쉬움이 있다. 어떻게 보면 중요한 자료이니 극비밀 문서로 취급되다가 사라졌는지, 아니면 못 찼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선 명종 때 개발되어 임진왜란에 크게 활약한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대표적 배이며, 1591년 좌수사 이순신에 의해 판옥선을 교묘하게 변형시켜 배위를 둥그스름하게 덮고, 그 위에 송곳 같은 철 못을 설치하여 적들이 활이나 조총으로 공격을 못하게 하는 동시에 배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여, 적 공격 시 선두에서 화포를 쏘면서 적들을 뚫고 나감으로써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하였다.
1970년대 울산의 현대중공업이 있기 전의 조선 기술은 세계적으로 각광은 커녕 푸대접 받는 단계였다. 하지만 1974년 현대중공업이 제대로 가동되고, 그 다음 대우조선, 삼성 조선이 제대로 가동된 1980년대 중반부터는 이 땅의 조선업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 했다. 이제 이 땅에는 한국최초의 대형 조선소인 조선공사의 뒤를 이은 한진 중공업, 세계단일 최대조선소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삼성중공업, 호남지방의 효자노릇을 하는 현대삼호중공업, 그리고 새로운 주자 STX, SPP, 성동, 등등 수많은 조선소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동안 많은 주요 부품을 외국에 의존하던 것도 우리들 손으로 국산화 시키고, 우리의 조선기술을 세계에 떨칠 때가 되었다. 우선 안전을 염두에 두어 작업장 재해가 없고 환경적으로 작업하기 좋은 곳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때 대한민국의 조선의 앞날은 밝을 것이다. A)살라미스해전 기원전 480년 9월 28일, 그리스 해군의 철수는 아테네군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 동안 그리스 함대에서도 응전 방법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만약 해전에서 패배했을 경우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살라미스 섬에서 철수하여 코린트 지방으로 후퇴할 것인지의 여부가 가장 큰 논란거리였는데, 전체적으로는 이 방법 밖에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에서 철수한다면 적의 진격을 쉽게 내줄 뿐만 아니라 아테네 시민과 영토를 포기하게 되며, 열세한 병력으로 좁은 해역에서 우세한 적의 함대에 대응할 수 있는 이점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두고 4회 걸쳐 회의가 계속되었는데, 4차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테미스토클레스는 첩자를 페르시아 진영으로 보내어 거짓 정보를 흘렸다. 첩자가 흘린 정보에 대해 헤로도투스는 ‘해전이 발생하면 그리스 내부에 친 페르시아파와 반 페르시아파간에 내분이 발생할 것’이었다고 적고 있고, 3대 비극시인 중 한 사람인 아이스킬로스(Aischylos)는 ‘페르시아 함대가 공격하면그리스 함대는 살라미스 섬에서 철수할 것’ 이라고 적었다. 어쨌든 이 정보는 페르시아군을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하려는 목적에 따라 흘린 것이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이 첩자의 말을 믿고 야간에 기동을 시작하여 새벽녘에 살라미스 협수로로 진입하였다. 이 시간에 그리스 군은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페르시아 함대가 협수로로 진입하고 있다고 급보가 날아 왔다. 회의는 즉각 중단되었고, 살라미스에서 일전을 불사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선두에 페니키아와 키프로스 함대를, 중앙에는 이집트와 그리스 점령지 함대를, 그리고 왼쪽에는 이오니아와 갈리아의 함대를 배치하였는데, 모두 750척이었다. 이에 대응한 그리스 함대는 380척으로 3열로 늘어 세우되 왼쪽에 아테네와 코린트 함대를 배치하였다. 페르시아 함대의 전술은 대함대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그리스 함대를 유인하여 넓은 해역에서 싸우는 것이었다. 페르시아측에 가담한 페니키아 함대는 살라미스 협수로의 입구인 Saronic 만에 배치되었다. 이때 그리스 함선 몇 척이 페르시아 함대 정면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페르시아 함대가 그리스 함선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는데, 너무 깊숙이 추격하고 말았다. 그러나 대기하고 있던 아테네 함대와 Aegina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북쪽에서는 페니키아의 이오니아 함대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충돌하였다. 이렇게 되자 길이 7km, 너비 2km 밖에 안되는 살라미스 협수로에 양측의 함대 700-800 척이 뒤엉키게 되었다. 결국 혼란에 빠진 페르시아 함대는 기동이 어렵게 되어 200척이 침몰되고, 4만명이 사망하였다.
B)트라팔가 해전 1803년 프랑스와 영국은 다시 전쟁으로 끌려들어갔다. 넬슨은 함대를 다시 지중해로 이동시켰고 그곳에서 해상봉쇄로 프랑스 함대를 투롱에 꼼짝 못하게 가두었다. 프랑스 군대는 1805년 악천후 속에서 영국의 해상봉쇄를 벗어났다. 넬슨은 대서양을 가로질러 프랑스군을 추격해 다시 봉쇄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스페인 함대와 합류한 데 이어 자신들의 육군과도 합세, 영국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넬슨 함대는 프랑스군과 정면으로 대결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33대27척으로 함정 수에서 영국 함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넬슨은 세밀한 작전계획을 다시 짜 이를 각 함장에게 시달했다. 그리고 자신은 기함 승리호 상에서 “조국은 모든 병사에게 각자 맡은 바 작전임무를 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는 메시지를 보냈다. 넬슨은 그런 다음 프랑스·스페인 동맹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쌍방 함대는 1805년 10월21일 스페인 트라팔가르 곶(串)에서 만나 치열한 해전에 돌입했다. 이 해전은 정확히 넬슨의 작전계획대로 진행됐다. 영국 함대는 열세 번째와 열네 번째 함선 사이를 뚫고 들어가 19척의 적함을 격침 또는 나포했다. 이 작전으로 영국은 단 한 척의 함정을 잃었을 뿐이다. 트라팔가르 해전 후 영국은 100년간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고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꿈은 트라팔가르 바다 밑에 수장되고 말았다. 그러나 넬슨은 이 위대한 승리를 끝까지 살아서 지켜보지 못했다. 그는 전투초기 프랑스의 1급 저격수가 근처 선박 돛대 위에서 쏜 머스킷 구식 총알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이 위대한 영국의 해군제독은 “나는 이제 만족해. 조국을 위해 내 임무를 완수하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한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긴 뒤 숨을 거뒀다. C)미드웨이 해전 미드웨이 공략은 나구모 주이치 제독의 항모기동부대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주변 해역에 대한 제공권을 장악하고, 미드웨이 섬의 항공 전력을 파괴하면, 이어서 중순양함대가 지상군을 상륙시켜 미드웨이 섬을 점령해서 태평양 해상을 지배하겠다는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제1기동부대는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이끄는 기함 아까기를 비로하여 항모 가가, 히류, 소류 와 전함 기리시마 하루나호와 그 외 순양함 3척, 구축함 12척, 급유선 5척 으로 5월 27일 먼저 출발하고 , 그 뒤를 이은 주력 부대는 야마모토 제독이 이끄는 항모 즈이, 호쇼, 사상 세계최대의 전함 야마토를 비롯하여, 전함 나가토, 이세, 무쏘, 휴가, 후소, 야마시로, 공고, 히에이, 그리고 순양함 3척, 구축함 21척, 수송선 12척, 잠수함 21척의 총 150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5월 29일 출 발 했다.
일본해군 기함 아까끼
비행기 조종사들은 진주만 기습의 경험들이 있는 배태랑들이 많았다. 한 마디로 미드웨이를 박살내고 하와이 까지 침공할 계획이었다. D 데이는 1942년 6월 4일 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이 수립되는 동안 그 비밀 암호가 미군에 의해 해독 되고 있었다. 그 계획을 눈치 챈 미국의 니미츠 제독은 즉각 산호해 해전에서 피해를 입어 진주만 도크에서 수리중이던 항모 요크타운을 3개월이 걸려야 가능한 것을 1400명의 인원을 총동원 시켜 최단시간인 3일만에 주요 부분만 수리하여 하도록 하고, 항모 엔트프라이즈, 호넷을 대기 시켰다. 16 기동 함대인 엔트프라이즈와 호넷은 5월 29일 진주만을 출발 했고 , 17 기동 함대인 요크타운은 5월 31일 진주만을 출발 했다. 요크타운은 배가 출발을 하고서도 기술자들이 탑승하여 항해를 하면서도 배의 이곳저곳을 고쳤다. 일본 잠수함들은 6월 1일 진주만에 침투 했으나 미군항모들은 이미 출발한 뒤여서 미해군 항모들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미드웨이 섬 방어도 강화 시켰다. 전투기 26대, 폭격기 50대
그리고 병력 3600명 정도의 최정예 부대로 맞서게 했다. 6월 4일 해 뜨기 전 항모 아까기와 히류에서 발진한 108대의 항공기가 미드웨이를 공략 했다.
미드웨이에서 방어하는 미군기들은 일본의 지로기의 맛수가 되지 못했다. 1차 공습 이후 일본 항모는 육상용 폭탄을 장착하여 2차 공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 항모 갑판위에서는 또다시 2차 공습을 목표로 지상용 폭탄을 항공기 에 탑재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런 와중에 미군 호넷트, 엔트프라이즈, 요크타운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이 갑자기 상공에 나타나기 시작 했다. 일본군 지휘부는 그 근처에 미군 항모가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미리 예측은 어느정도 했지만 미해군 정찰기에 의해 어렵게 발견 되었다. 일본 지휘부는 당황하기 시작 했다. 육상용 폭탄과 선박 공격용 폭탄은 성질이 틀려서 교체 시켜야만 했다. 일본 제로 전투기들은 발진 하여 미군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벌이고 일본 항모 갑판 마다 육상 공격용 폭탄에서 항모 공격용 폭탄으로 바꾸느라고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미군 폭격기들이 항모를 덮치고 있었다. 미드웨이 부근은 인류 역사 이래 최대의 항공기 전투가 전개 되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하늘에서 대로 미군 전투기와 일본 제로 전투기들이 전투를 벌이고, 미군 전폭기들은 그 와중에서 대공포를 피해 일본 항모에 폭탄 세례를 퍼 붙기 시작 했다. 일본 폭격기들도 늦으나마 미군 항모에 폭탄을 퍼 붓기 시작 했다. 2시간 가까이 전개된 전투에서 일본 항모 아까기, 가가, 소류 3척이 침몰 하고 있었다. 히류호의 함장 야마구찌는 즉각 반격을 시도해서 요크타운으로 접근 시켜서 전투를 벌였다. 빗발치는 대공포로 인해 일본군 비행기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중의 폭탄 1개가 요크타운 굴뚝으로 명중되었다. 요크타운의 전기는 정전되고 , 일본군의 2차 공격을 받은 요크타운에서 함장은 배를 버리고 하선 명령을 내렸다. 결국 요크타운은 2일 뒤 일본 잠수함의 공격으로 수장되고 말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기로 부터 공격 받는
미항모 요크타운
일본 항공기에 의해 파괴된 미항모 요크타운의 갑판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일본 항공기로 부터 공격 받는
미항모 엔트프라이즈호
일본군 손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후 야마모토 총 사령관은 그 뒤를 따르던 수많은 전함들과 순양함 구축함들의 뱃머리를 돌리라고 명령한다. 공중 엄호 없이 전함들의 전진은 무모한 결과 밖에 낳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은 진주만의 패욕을 얼마만큼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전투가 단순히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일본은 이 전투를 기점으로 일본은 계속 밀리고 또 밀리어 결국 패전국이 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 한산해전에서 치욕스런 맛을 보았고 그리고
이순신이 전사한 명랑해전에서는 조선 판옥선 12척에 의해 왜선 100척이 수장 된 이후 일본해군 최대의 치욕스런 전투가 되었다. 1980년대 미드웨이라는 영화가 이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이었는데 그 영화를 보고 얼마나 많은 일본인들이 눈물을 흘렸다던가! 이 전투 이후 해군 전함은 그 바톤을 항공모함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더 이상 커다란 대포와 두꺼운 장갑으로 무장된 전함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D)사상 최대의 전함 2차 당시 최대의 신형 전함들은 독일의 테르핏츠와 비스마르크, 일본의 무사시와 야마토 전함 이었다. 독일 일본에서 가각 극비리에 제작 되었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벌 떼처럼 수백 대의 상대편 항공기들에 의해 격침되고 말은 비운의 전함들이다. 각각 독일과 일본에서 동시에 만든 각각 같은 크기의 전함들이다. a) 야모토 전함 만재 배수량 72800 톤, 증기터빈 4기 4축 15만 마력 엔진으로 최고 속도 27 노트, 승무원 2,800 명, 장갑 두께 410 밀리. 주포 18인치(460 밀리 , 포탄 한발 1400 킬로그램)포 9문, 1937년 극비리에 건조를 시작 하여 1941년 취역. 1945 년 오끼나와 기지근처의 미군 함대를 격파하러 가던 도중 수백 대의 미군 항공기 공격을 받고 침몰
건조중인 야마토 전함 b)비스마르크 전함 만재 배수량 50,400 톤, 장갑두께 320 밀리 , 최대속도 30노트, 승무원 2,000명, 주포 15인치(380 밀리, 포탄무게 400 킬로) 8문. 1936년에 시작하여 1940년 취역. 1941년 노르웨인 근해에서 영국 군함과 교전 중 영국 순양함 후드를 격침 시키지만 뇌격기의 지중공격을 받고 침몰.
비스마르크 전함의 위용
거북선
거북선 건조 광경 (그림이 미국에 있기에 재미 교포가 찍은 사진) 임진왜란 후 상당 기간 경과
좌수영 거북선 그림
통제영 거북선 그림
돛은 후에 지은 거북선에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 사용한 것 같다고
남해 대교 옆의 복원된 거북선
조선말 서양선교사가 찍은 거북선
(전해내려오는 그림과 상세히 비교하면 좋은 자료가 될 것 같네요)
400년 전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무장 전투함이다.
그전 어느 기록에도 거북선처럼 만들어진 선박은 없었다.
비록 배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았어도 위력은 대단 하였다.
파도가 갑판을 넘어 가도 배가 가라 않지 않으니 물속으로 다닌다는 소문들도 있었으리라.
배의 수면 위 높이가 2-3 미터밖에 되지 않으니 배가 큰 파도를 만날 때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배가 바다 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거북선은 길이 20미터, 폭 8미터, 높이 4미터, 물에 잠기는 높이 흘수1.5 미터 정도로 추정된다.
배수량은 약 200-300톤 정도 이고 승무원은 130명 정도이다. 정확한 기록이 담긴 도면이나
실물은 존재 하지 않고 대략적인 기록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기록이 조금씩 상이한 것은 만든 장소가 한곳이 아니라 각각 다른 조선소에서 만들어 졌을
가능성도 있고, 또는 기존 판옥선을 개량하여 만들었을 수도 있다. 상갑판 위에 거북 등처럼
둥그스름한 또 다른 갑판을 만들고 또 그 위에 철갑을 씌운 후 송곳을 꽂아 상대편 조총으로
공격이 불가능 하고 또 가까이 접근해도 적들이 갑판으로 뛰어 내리지 못하도록 함은
물론 사방에 대포가 있으니 적진을 돌파하는 선봉 돌격선으로는 제격 이었을 것이다.
또 선수에 용머리처럼 생긴 곳에서 연기를 뿜어 연막술도 가능한 신출귀몰한 배 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터에서 도무지 조총같은 자기들 무기로는 공격 불가능한
배가 출현하여 자기들 함대 사이를 포를 쏘며
마구 휘젓고 다녔으니 왜놈들은 얼마나 당황들 하였을까?
생각만 해도 통쾌할 뿐이다.
그러나 정치적 모함으로 승전을 계속 하는 이순신을 옥에 가두고,
승전하던 조선해군을 패전으로 몰아넣어 결국은 정치 모리꾼들에 의해
전국토를 왜놈들의 손아귀에 넘겨주고 말았던 게 아니었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