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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덕선원 심향법장
내가 게을러서 늑장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내게는 한계가 있다.
시야가 확보된 밝은 시간에 길을 떠난다는 것.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미명에 출발하기를 종종했다.
무더운 한낮을 피하는 이점은 있었으나 그 때마다 후회가 막심했기 때문에 아예 절대룰
(rule)로 정한 것이다.
나그네는 겨우 떠날 채비를 하는데 벌써 가게 문을 열고 있는 부부.
저들은 무슨 까닭으로 밝기도 전에, 어떤 손님이 찾아올 거라고 저럴까.
부지런한 건지 극성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뭔가 팔아주려고 했지만 늙은 길손과 전혀 무관한 품목들이라.
화개장터 북단의 화개교에서는 쌍계사길과 구례길(19번국도)로 갈린다.
구례군 토지면이다.
남도대교를 되건너오면 구례땅(간전면)이다.
이후, 얼마동안은 섬진강의 양안이 모두 구례땅이다.
광양(다압면)과 구례를 가르는 지점은 400여m 남쪽 중대천의 하천교니까.
계속되는 섬진강 서쪽길, 861번지방도로의 구례길(남도대교로)은 단1뼘도 늘리지 않고
기존 도로의 양쪽 가장자리에 페인트 두 줄만 그어놓았을 뿐이다.
자전거 1대가 안전하게 달리려면 폭 1.5m는 확보되어야 하는데 50cm~1m 폭도 못되는
갓길을 자전거전용도로라고 부르는 자들과 무슨 말을 섞겠는가.
110km남았다는 섬진강 자전거길 시발점인 임실 생활체육공원이 아득할 뿐이었다.
남도대교를 떠나 잠시 북상하다가 노변의 만덕선원(萬德禪院)에 들렀다.
호남정맥 만덕산(완주군)은 원불교 성지다.
'만덕'이라는 돌림과 육조(六祖)에 대한 궁금증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했으리라.
이른 아침의 늙은 불청객인데도 환대하는 심향법장(心香法藏),
그가 원장이고 유일한 원생이다.
내가 궁금해 하는 점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고 현실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그에게
빚쟁이처럼 채근할 수도 없지 않은가.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애매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좁은 지역사회에서 문화예술인들의 비영리단체 '(사) 산잡고 물감고'를 설립,
운영하는 것으로 보아 사회성은 인정해도 될 듯.
산이 자리잡고 물이 감아도는 자연은 소외된 곳이 없다는 명제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지역과 세대와 장르, 다문화 간의 교류와 조화'라는 거창한 주제를 주로 음악회를 통해
실천하고 있는 듯 한데 인적 자원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승려인 그가 나를 만행(萬行)중인 늙은이로 보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걷기를 기피함은 물론 더 좋은 차량을 선호하는 이즈음의 승려들이 만행을 하기는
커녕 염두에 두기라도 하겠는가.
그가 삼복염천의 늙은이를 염려해 주며 길손에게 필요한 것들(비상식량 등)을 챙겨주는
것은 불자로서는 당연한 도리일 것이다.
선원의 정체성은 의심스러우나 지향하는 운동은 사회구원 차원이므로 성공하기를 합장
축원하고 다시 걷는데 좁은 길가에 차량들이 늘어서 있다.
피서 차량이 아니고 도로정비 작업인들이 각기 몰고온 차들이다.
나그네에게도 시원한 물을 마시고 가라는 후한 인심인데 서로 합승해 오면 안되나.
늙은이의 지적에 이 사람들도 대답이 궁한지 얼버무리는 것이 법장과 같았다.
우리의 자동차 문화, 과연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가.
간전과 문척이 왜 다를까.
여태 2km남짓 왔을 뿐인데 놀라 걸음을 재촉하려 할 때 누군가 뒤에서 인사를 해왔다.
만덕선원을 나설 때 마주쳤던 자전거 탄 미녀다.
한 동네라 가끔 선원에 들른다는 여인은 만덕선원 직전에 있는 마방의 주거용 컨테이너
박스 주인이라고.
빼어난 미모를 가진 이 40대 여인은 화개장터에서 유료 마차와 승마를 운영하는 동생을
도우며 자연을 닮은 수제옷의 디자인, 염색, 제작 일체를 하는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다.
말들을 구경하려고 기웃거리다가 퇴짜맞았는데 바로 그 곳이란다.
승용차도 필요치 않아 자전거로 바꿨는데 아주 경제적일 뿐 아니라 편하고 좋다는, 내
맘에 쏙 드는 사고를 가진 젊은 여인이 어찌나 귀여운지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랬다 해도 설마 성 폭행으로 고발하지는 않으리라 믿지만)
잠시 같이 걷다가 면사무소에 일보러 먼저 떠난 그녀를 얼마 후 다시 만났다.
무수내(舞袖川) 쉼터에서 한참 쉬지 않았더라면 재회는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부동산의 소유권 이전 절차를 마쳤다며 좋아하는 표정이 행복한 소녀같았다.
그녀의 해맑은 얼굴이 내 기분도 밝게 해준 듯 한데다 잠시나마 새로 난 강둑의 자전거
전용도로를 걷게 되어 폭염도 무력하게 기분이 고조되었다.
간전면 중심지를 우회하는 신설 자전거전용도로인데 괴이쩍게도 차량의 통행이 잦다.
하동포구80리길이 화개장터를 지나 구례로 이어지는 섬진강대로(19번국도)의 동방천
삼거리(구례군 토지면)와 간전면을 잇는 다리가 간전교다.
간전교 이쪽 끝에 거창하게 지어놓은 '섬진강어류생태관'에 들렀다.
이 분야에 무관심한 내가 간 것은 잘 가꿔놓은 환경에서 잠시 쉬고 싶어서 였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행사가 예정되어 있는지 넓게 배열된 식탁과 의자에서 막걸리 파티를 열고
있는 젊은이들의 인심이 고약하다 생각되었는데 마을 누리식당 주인은 한술 더떴다.
작은 식당이 아닌데 성시를 이루고 있는 것은 농공단지 덕인지 길목이 좋아서인지 또는
음식맛이 좋아선지 길손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바쁜 시간대라 해도 홀로 늙은이는 손님이 아닌가.
한쪽 구석에 방치했다가 3인조 새 팀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나를 합석하게 하려는 주인.
양해는 내게 먼저 구해야 하는 순서는 차치하고 독상 차리지 않으려는 꼼수를 간파하고
표정이 일그러진 어린 딸(홀 일을 거들던 고등학생?)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지세가 평탄하고 들이 넓어 한들이라는 대평(大坪)마을의 인심이 이리도 사납다니.
부디 그 아비의 그 딸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당을 나왔다.
다른 식당은 한가한데도,그래서 종업원을 두지 않기 때문인지 몇명 안되는 손님을 감당
못하고 새 손님 볼 겨를도 없이 쩔쩔매는 형국이었다.
식당을 만난다는 것만도 행운인 나그네가 오늘은 까탈을 부리는 것인가.
어제 섬진마을(광양다압면)에서 점심을 먹은 후 화개장터에서 저녁을 빵으로 때웠을 뿐
이므로 시장하지 않을 리 없는데도.
뒤는 커녕 옆에도 눈줄 것 없도록 인심 고약하다는 인상인 간전땅을 쏜살같이 벗어나서
문척땅에서 처음 만나는 화정(花亭)마을의 정자로 갔다.
라면을 끓이는데 한 집에서 김치를 주며 선풍기가 비치된 정자 안에서 편히 식사하란다.
이것이 우리네의 전통적인 인심이건만 특별하게 돋보이게 된 현실이 개탄스럽다.
응천상지삼광 비인간지오복(應天上之三光備人間之五福/해와달과별이감응하고 사람은
오복을누릴지어다)
상량(上樑)에 쓰는 전형(전통)적인 글귀지만 화정마을 정자 오봉정(五鳳亭)상량의 글이
유난히 돋보이는 듯 했다.
편히 쉬어가는 값은 치뤄야겠는데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오봉산(五峰山) 들머리 마을 정자라 해서 오봉정이라 했으려니 했는데 아닌 것 같다.
오봉교 건너에는 항일 애국지사 경당 임현주(警堂林顯周)의 오봉정사(五鳳精舍/구례군
향토문화유산제7호)가 있다.
오봉산, 오봉정사, 오봉정이 한 내력인 것 같으나 한자가 다른데 규명할 길이 없으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은 생리학적인 표현이다.
시장하면 아무리 빼어난 경치라도 제대로 보일리 없으니까.
눈에 들어오지 않던 대문짝 같은 '구례 섬진강 수달서식지 생태. 경관 보전지' 안내판이
식사 후에 비로소 제대로 보였다.
족제비과의 포유류동물인 수달(水撻水獺)이 서식하고 있다는 것은 그 지역의 물이 살아
있음을 의미한단다.
수달이 그 지역 물환경의 건강도를 판단할 수 있는 지표종이라는 뜻인데 문척을 비롯해
간전면과 토지면 일원에 서식하고 있음은 섬진강이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한데, 세계적으로 보호가치가 높은 이 야생동물이 우리나라에서는 멸종위기란다.
모피동물이라는 죄(?)로 남획되고 하천의 황폐로 인해 수가 급격히 줄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생동물 1급 및 천년기념물 제330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는데 안내문 문장은
개성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오자(誤字)만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제330호'가 '제330조'(무슨 법조문인가)로 10년 이상 서있다니?
늙은 길손의 눈에도 보이는데 관계자들 눈에는 왜 안보일까.
'수달생태로'가 된 861번지방도로를 따라 금평(琴坪)마을에서 중산천 작은 다리 월금교
(月琴橋)를 건너면 월평(月坪)마을이다.
월금교는 두 마을에서 공평하게 한자씩 딴 이름인데 교량과 터널 등의 이름때문에 옥신
각신하기 일쑤인 다른 지방과 달리 한마을처럼 오순도순한단다.
월평 가게에서 막걸리 1병을 마시고 들른 월평정자도 화기애애한 인심이다.
폭염을 무릅쓰고 걷는 늙은 나그네에 대한 궁금증은 어디나 매한가지라 해도 인정만은
간전땅과 확연히 다르게 느껴지는 문척이다.
왜 그럴까?
혹, 간전농공단지의 영향일까?
급격한 산업화 과정이 우리의 후박한 인심청정지역들을 시궁창으로 만들어놓았으니까.
자전거가 밥 먹여주는가
월평마을에서 중산천 둑을 따라 섬진강 둑으로 이어지는 자전거도로가 신설되었다.
문척면의 중심지를 우회하여 사성암 입구까지 가는데 땡볕에 완전히 노출된 길이다.
차 없는 길이라면 그늘막 하나 없는 것이 문제되랴 마는 왜 차량의 내왕이 뻔질날까.
여기뿐 아니라 지금까지 걸어온 자전거길이 모두 그런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 까닭이 담겨있는 한 트럭 운전자의 볼멘소리가 늙은이의 기(氣)를 죽이는 듯 했다.
자유롭게 드나들던 농기계와 농사차량들이 어느 날 박아놓은 '자전거길, 차량통행금지'
푯말 하나에 위법자가 되었단다.
"자전거가 밥먹여 주는가, 농사는 어떻게 지으란 말인가"
강심에 서있는 강태공, 투망을 든 어부(?), 더위를 식히는(?) 이,
물이 감아도는 섬진강은 아직은 소외된 곳이 없는 자연이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강이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고맙다.
늙은이도 가는 길을 멈추고 훌러덩 벗어던지고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산수유마을은 산동면인데 섬진강 어류생태관 앞에 산수유쉼터가 있다.
노고단은 광의면인데 문척면 섬진강변에 노고단쉼터가 있다.
그렇다면 산수유마을 가는 길, 노고단의 위치 쯤은 안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주변 관광지 홍보도 중요하지만 첩첩이 둘러싸인 산들을 어림해 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
잘 찍힌 사진 확대, 인화해 이름 써넣는 일이.
관계자들의 마음 가짐이 문제다.
매우 유감된 표현이지만 소위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는 일에만 민감할 뿐 일을 하려 하지
않는 자세가.
문척과 구례군 도심을 잇는 다리가 2개다.
구례읍과 문척면 경유의 861번지방도를 연결하는 섬진강다리, 문척교가 건설된 시기는
1972년인데 30년도 못되어 새 다리를 놓게 되었다면 만인이 공분할 부실공사다.
13톤 이하의 차량만 통과할 수 있다니.
한데, 이처럼 한 곳에 2~3개의 다리가 놓인 것을 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리의 부실 시공과 도로와 교량건설 행정의 졸속성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들이다.
국민의 혈세가 도둑질당한 현장인데 다니는 차가 적고 물과 가까워 좋다며 이런 다리를
예찬하는 사람이 있고 대단한 뉴스인 듯 내보내는 신문도 있으니.
방부목 데크로 조성된 새 다리 밑은 오가는 오토바이들과 일부 주민들의 피서지인 듯.
길손도 떠나기 싫을 만큼 맑고 시원한 섬진강 강바람 길목이다.
광양땅의 공사가 중지된 자전거길들이 하나같이 시멘트포장로인데 구례의 사성암 둑길
역시 백색 시멘트 범벅이다.
자전거 전용길이므로 차량은 제외하고 사람도 자전거도 모두 원치 않는 유해 시멘트를
고집하는 것은 억하심정일까.
이 길은 백의종군로가 아니다
문척교 이후 죽연마을 앞에 들어설 때 돌연'남도 이순신길 백의종군로'푯말이 등장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충무공은 구례현 손인필(孫仁弼)의 집에 묵은 후(정유 4월 26일) 다음
날부터 송치(松峙) 아래 송원(松院) 정원명(鄭元溟)의 집에서 5월 13일까지 머문다.
5월 14일에 다시 손인필의 집으로 돌아온 후 5월 19일 동문밖 장세호(張世豪)의 집으로
옮기고 5월 26일 석주관(토지면 송정리)을 거쳐 악양(하동)으로 간다.
백의종군하라는 지엄한 명을 받은 그가 왜 송치로 가서 보름 이상을 보냈을까.
"상중에 몸이 피곤할 것이니 기운이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喪中氣困從氣蘇平出來)라는
권율도원수의 배려에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정원명은 충무공의 막하사(幕下士)로서 전공을 세워 록권(錄卷)을 하사받은 인물이다.
경로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손인필의 집에서 문척 동해,황전,괴목으로 해서 갔는지
손인필의 집에서 지금의 구례구역으로 직행해 황전, 괴목을 경유했는지는 알길이 없다.
다만, "송치를 떠나 찬수강을 걸어서 건너(粲水江下馬步渡) 구례현으로 갔다(5월 14일)"
고 했는데 찬수강이 황전면과 구례사이의 강(현 황전천?)이라니까 전자의 길이 맞을 듯.
그렇다 해도 푯말이 박힌 길이 아님만은 분명하다.
모든 강이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섬진강 역시 400여년 사이에 둑길이 들고나기를
거듭했을 것이며 이 둑길의 역사는 오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 10대로를 비롯해 여러 길을 걷는 동안에 확인한 것이 있다.
길과 유적, 기타 새로이 조명을 받게 되면 관련 주민들이 다분히 창작과 침소봉대, 아전
인수를 한다는 사실이다.
백의종군로 역시 그럴 여지가 다분하지만 동해마을의 무문정과 충무공을 결부시킨 어느
지역신문의 터무니없는 소설에 대해서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길이 백의종군로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엄밀히 보면 도원수의 휘하에서 통제사로 복귀되는 순간까지의 행로가 백의종군로다.
그 이전의 길은 백의종군하기 위해 군부대로 가는 길일 뿐이다.
설령, 그 길까지 종군로로 넓힌다 해도 송치길은 아니다.
그 길은 도원수부로 가는 길이 아니고 도원수의 배려로 휴가차 간 길이기 때문이다.
정답이 뻔한데도 이순신 장군이 위대한 분이라 해서 두루뭉술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위대한 분일 수록 누와 흠이 되는 일은 삼가야 하건만.
오산(鰲山) 사성암(四聖庵) 입구 주차장 옆 강가의 사성암인증센타 앞에 도착했다.
바위가 자라의 등껍질처럼 생겼다 해서 오산이며 연기(緣起/500년대), 원효(元曉/617~
686), 도선(道詵/827~898), 진각(眞覺/1307~1382)등 4명의 고승이 수도하였던 암자라
하여 사성암이라는데 인기있는 관광지인가 보다.
마지막 관광버스가 매점과 천막 식당 안팎을 뒤흔들며 해롱대는 손님들을 모아 떠난 후
조용해진 식당에서 막걸리 1병을 주문했다.
무거운 배낭으로 보아 70 이전으로 보았다는 인심 후한 주인여가 안주를 듬뿍 내놓았다.
관광지인데도 어르신이라 술값을 2천원만 받겠단다.
오늘 지출은 막걸리 2병, 4천원이 전부다.
무문정과 모기 없는 동해마을
폭염에 33km를 걸었으니까(섬진강 체육공원 110km가 77km로 줄었다) 옆에 있는 좋은
정자에서 마쳐도 되련만 아직 해가 있다는 이유로 다시 일어섰다.
데크인도가 길게 이어지는 이 길이 구례 섬진강변 10리벚꽃길이란다.
제철에는 장관이겠다.
인구 11명인 미니 마을 마고실(麻姑室)에도 멋진 정자가 있다.
시어머니가 삼을 삼는 형국이라 하여 마고실이라는 마을이 열녀효부의 마을이란다.
남자4명에 여자7명이 전부인데 열녀와 효부 빼면 없겠다.
10리 벗꽃길의 끝 동해마을까지 갔다.
남도대교에서 대체로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문척교를 지나 수직으로 남하해서.
훌륭한 정자를 두고 강쪽 노변의 평상에 앉아있는 늙은이들이 나그네를 붙들었다.
나와 동갑이라는 연장자가 정자와 평상 아무데서나 자고 가란다.
정자에 천막을 치려 하는 이유를 들은 그들은 모기 없는 마을이므로 아무 걱정 말란다.
이 마을을 벗어나면 모기의 극성에 잠못이룬다며.
믿기지 않았으나 사실이다.
정자의 이름도 무문정(無蚊亭)이다.
한데, 모기 없는 정자에 모기장 덧문이 설치되어 있다니.
이 난센스(nonsense)는 시공자의 과오일 뿐이라며 모든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천막을 드나들 때마다 모기와 전쟁을 치뤄야 하는데 맘놓고 한데 나와 섬진강의 야경을
즐길 수 있다니.
나그네 생활을 통틀어 처음 경험하는 아주 별난 마을의 밤이 갚어갈수록 더해가는 궁금
증을 누르지 못해 플래시(flashlight)를 들고 나서서 찾아낸 것이 전설이다.
무문정 기둥들에 가로 쓰인 글판들과 정자 안 벽에 높이 달려있는 같은 내용의 글이다.
미득온면문뢰훤(未得穩眠蚊瀨喧) / 강공석숙차강촌(姜公昔宿此江村)
지금멸식갱무흔(至今滅息更無痕) / 호시일경가금후(好是一經呵噤後)
모기 돌여울 소리 요란해 편안한 잠 못이루어 / 강공이 옛날 이 강마을에 유숙했는데
지금은 시끄러운 소리 없어져 그 흔적이 없네 / 한번 꾸짖었더니 좋아지기는 했는데.
문맥으로 보아 순서가 바뀐 것 같다.
"옛날에 이 강촌에 유숙한 강공이 모기와 여울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번 꾸짖었더니 좋아지기는 했는데 지금은 그 소란한 소리가 없어져서 흔적이 없다"로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모기를 마을 밖으로 쫓아내고 여울소리는 오산 절벽으로 보냈다는데, 이후 모가가 없고
물소리가 사라져 잔수라 부르게 된데 반해 오산 바위에 귀를 대면 물소리가 난다나.
잔수의 내력에는 더 오래 전의 전설이 있다.
원효대사가 오산 정상(사성암?)에서 참선 수도할 때 그의 모친을 번거롭게 한 섬진강의
시끄러운 물을 잔잔한 흐름으로 바꾸어 잔수라고 했다는.
아무튼,모기 없는 마을 주민들의 여름철 생활은 타지역민들에 비해 경제적인 면을 떠나
서도 윤택할 것이 분명하다.
강공은 귀주대첩의 신화를 만든 고려의 강감찬(姜邯贊/948~1031) 장군을 말한다는데
번개를 낚아채 잘라냈다는 일화와 맥을 같이 한다.
사소한 잘못에도 번개의 응징으로 민초들이 불안에 떠는 것을 본 그는 일부러 우물가에
변을 보아 번개를 유도하고 잘라냄으로서 백성이 안심하고 살게 했다는 것.
한데,강공을 이충무공으로 대체해 놓은 한 지역신문에 대해서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이름 대로 무문정에는 모기가 없고 모기가 극성을 부리는 밤중에 무문정 마을을
두루 걸어보았지만 마을 어디에도 모기는 없다.
왜 동해마을만 모기가 없을까.
강감찬장군의 신통력을 정말 믿어야 하나.
모기와 상극관계인 무엇이 동해마을에만 있는 것 아닐까.
편백나무를 모기가 싫어한다는 이가 있으나 아닌 것이 분명하다.
전국에 산재한 나무니까.
나무와 풀, 물과 흙, 공기까지, 동해마을의 모든 것을 분석해서 모기가 싫어하는 물질을
발견한다면 경제효과는 말할 것 없고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이 윤택해질 텐데. <계 속>
첫댓글 무문정이 궁금하고 인상적 이네요 .혹시 근처에 계수나무가 많이 심겨져 있는것이나 아닐지요 ? 계수나무의 향기는 벌레를 쫒아내지요 . 계피 향을 소주에 우려내 몸이나 옷에 뿌리거나 계피차를 즐겨 마시기만 해도 모기가 못 달려 든다거든요.그래서 저는 밭일할때 계피가루를 직접 옷에 바르고 일 하곤 하는데 땀나는 살에 계피가루가 닿으면 몹시 따갑지요.
10리 벗꽃길입니다.
뒤는 오산이고 앞은 섬진강이고.
섬진강가에서 5일 밤을 보냈는데 모기로부터 자유로운 유일한 곳이지요.
계피가루를 천막에 뿌려놓으면 되겠네요.
앞으로 시도해 보겠습니다.
천연 모기 기피제로 에탄올 에다가 계피를 담가 여러날 우린후 그 물을 침구나 옷에 뿌려 주면 모기기피제도 되지만 찐드기 정도는 죽고 살균력도 무척 좋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