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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의 인간학적 원리: 자유와 투쟁(2021)
현승효(玄勝孝, 1950-1977), 도서출판 모임, 2021, 08, 11. P.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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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책으로 나왔다. 회향의 인간학적 원리: 자유와 투쟁(2021)
아마도 이 책과 인연은 내 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노천희, 삶이보이는창, 2007년 07월 04일 출간)를 출간하는 시기에 노선생을 만났을 때일 것이다.
2008년에 A4 용지에 타이핑된 이 책의 초고를 보면서 나로서는 깜짝 놀랐다. 20대 중반에 방대한 독서를 소화하여 이런 글을 남겼다니. 이런 선배가 있었다니. 그 시절 철학 전반을 제대로 소개한 책도 별로 없던 시절에, 사회와 국가에 대하여 철학적 사유에서 예술, 종교(불교와 기독교)를 통합하여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일이 가능했던가. 게다가 억압과 폭력으로 서슬이 퍼런 시대, 인혁당 열사의 활동과 실재를 잘 알고 있는, 8인 열사중의 한 분인 여정남 열사의 직계 후배인, 젊은 그가 운동의 새로운 형식과 삶의 방식을 전개하는 글을 썼다. 나는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고, 연대와 공감을 표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후 잊고 있는 사이에 올해 2021년 봄에 출판을 위한 “가본”을 받았다. 출판 전 ‘가본’을 다시 읽으면서, 편집 정리를 독일 철학을 하는 쪽에서 정리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각 장을 나누고 절의 소제목을 붙이는 꼼꼼한 편집 작업을 하신 홍승용 교수의 노고에 감사를 표한다. 오늘 이 책을 받았다. 그리고 통화가 되어, 홍선생님에게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라고 했는데, 한 꼭지 써야 한다는 그 무게는 여전히 남아 있다. - 우선 선배님을 존경하며, 아래 연보와 조각글을 올릴 것이다.(54S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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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울에 있으면서, 역사와 시대를 가늠하는 이들로부터 자주 받는 또는 듣는 말은 “대구 경북은 왜 그래?”이다. 뭐, ‘우리나라는 왜 이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도 “한나라당, 지금은 국민의 힘은 왜 이래?”라고 거꾸로 물으면서 회피하는 것이 아니고, 질문자에게 문제제기를 되돌리는 것도 아니며, 함께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는 정도 일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 하는 것도 – 역사는 인생과 마찬가지로 불가역성이다. - 그렇다고 역사의 서술이 타당하다는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야만의 역사, 광기의 역사라고 한다고 해서, 그 시대를 살아왔던 현재의 사람들이 야만으로 또는 광기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니체가 공포를 조장하며 야만을 휘두른 자들이 오랜 역사에서 상층은 선하고 인민은 서툴다(나쁘다)라고 하는데 대해, 인민은 착하며 그들이 사악하다고 말한다. 니체가 인민은 서툴다고 하고서 비스마르크의 시대를 진단할 수 있을지라도, 또한 그 시대를 “시의적절하지 못한 시대(intempestif)”라고 징후를 알리는 것이 그의 임무 같을 지라도, 또는 인류사에 대한 19권의 백과사전이 있다고 하더라도, 서술로서 역사는 ‘만들어진 것들’(des faits)의 어느 한 항목에 머물 것이다.
보르헤스가 예를 들 듯이, 19권의 백과사전이 있다고 해서, 13권 14권 사이의 다른 항목들을 다시 만들 수도 있는 것이고, 19권까지 있었던 사실들에서 아직 기록하지 않았던 사실들에 대해 더 많은 권수를 만들 수도 있다. 기록의 역사는 흔적들과 유물들의 역사의 매우 작은 부분일지 모른다. 누가 사라졌다가 파헤친 어떤 유물들에 관심을 표현해도, 그것은 이미 “시의 적절치 못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간혹 그 시의에 맞지는 않는 행위를 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행위도 “적절치 못함”, “서툼”으로 남을 지라도, 내부에서, 심층에서, 인민의 함성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기록자는 사실을 기록한다는 또는 자기관심에서 보는 방향에서, 이런 소수자의 발언에 ‘옹알이’. ‘말더듬’, 들뢰즈 표현으로 ‘횡설수설 말하다, 알아듣기 어려운 방언을 말하다(délirer)’ 정도로 넘기면서 기록의 가치가 없다고 할지 모른다. 보르헤스가 백과사전 “사이”에 많은 것이 있고, 게다가 끝나지 않는 권수가 무한정하게 확장할 수 있다고 한다. 들뢰즈가 “무엇이 일어났는가?”,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라고 묻는 것은 철학보다 문학에서 더 많은 것을 실험했다고 한다.
사실(le fait)이라는 프랑스 단어는 ‘만들다(faire)’라는 동사의 과거분사형, 즉 일어난 것, 만들어진 것에 관한 것이다. 벩송이 당대까지의 철학사를 전도된 철학사로 보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에는 만들어진 것의 공간화된 언어와 논리가 지배적이었고, 스콜라철학자들이 죽 계승했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갈릴레이가 운동의 상대성을 말하고 나니, 철학자들은 사실들에 대한 상대성을 관계 사이의 법칙으로 다루고자 하였으며, 이들은 사실 또는 항목을 서로 뒤바꾸어도 고대 이래로 원리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벩송이 의학과 생물학의 발전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자연사이며 생명의 과정이고, 또한 인간사이며 개인 삶은 불가역성이다. 그래도 서술로 된 19편들을 읽고 정리하는 이들은 관계에 맞추어 항목들을 배열한다. 배열이 아니라 과정이라 해도, 19편들의 판단과 서술(해석)의 중요성은 변함이 없었다. 이에 저항한 쪽은 철학이 아니라 소설이었다는 것이다. 19세기에 왜 역사학에 앞서서 소설과 단편소설이 더 성행했을까?
요즘도 앵글로 색슨의 영향으로 팩트, 팩드라고 하는데, 그 팩트라는 사실(le fait)은 이루어진 것, 그것은 상층과 이성의 광기가 모아놓은 것이 아닌지를 성찰한 것은 푸꼬 였다. 그보다 먼저 벩송은 ‘만들어진 것(fait)’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것(se faisant)’을 철학이 다루어야 한다고 했다. 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생명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 중에 있고, 인간의 삶에서도 역사에서도 아직도 과정 중에 있다. 들뢰즈가, 철학도 이제는 언제, 어디서, 누가 등을 다루면서 드라마과정처럼 실행해야 한다고 성찰하였는데, 푸꼬와 비슷한 시기에 성찰하면서, 방향이 달랐을 뿐, 둘 다 사유의 새로운 가지치기를 하였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 ‘되기’ 중인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인류사에서 그 되기 중에 있는 것들이 불쑥 솟아오를 변곡점들이 있다고 한다. 토지(지구)에서 개인에서 공동체에서 솟아오르는 방식을 분출선(용출선, 도주선)이라 한다. 이런 분출선이 시의 적절하게 올려놓은 변곡점을 15장으로 된 ‘고원’을 마치 단편소설을 쓰듯이, 그리고 백과사전과 달리 이리 저리 순서 없는 듯이 보이듯이, 천개의 고원을써 놓았다. 내재성과 심층은 이런 방식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는가? 또는 거기에 적혀진 사실 또는 기록과 달리 알려지는 방식은 인문학의 지질의 층들(주름들)을 파고 들어가 유물들을 하나 또는 여럿을 건지면서, 심층과 내재성의 흐름을 확인하여야 하는 방식인가? 철학자는 그 유물들에 파고들다가 그 속에 매몰되는가? 푸꼬와 들뢰즈는 아니라고 할 것인데, 한 가지 점에서 일치할 것이다. 흐름, 되기, 자기배려의 주체화는 생명체의 실재성에서만 성립하고 현실에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고대의 논리, 르네상스의 상대성(관계), 근대의 변증법(종합) 등은 상층이 먼저라는 것인데, 벩송이 스콜라철학의 변형으로 본다. 이에 대해 심층의 실재성은 말한다. 어느 개체이든 현존의 개인 또는 모든 생명체는 생명현상인 한, 35억년의 최첨단(변곡점)에, 즉 최상위 위치에 있다. 이와달리 아버지, 할배를 거슬러 ... 소크라테스, 모세, 람세스, 쿠프라, 단군, 길가매쉬, 아담, 환인 등으로 올라가는 것은 논리상의 귀결이며 스콜라의 주장과 다를 바 없으며, 실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을 만들었다는 둥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둥의 이야기는 옛날의 이야기이다. 자연사든 역사든, 사실들(des faits)은 과정을 겪으면서 살아온 것들의 일부이다. 사실들의 과정에서 “사이”에는 엄청나게 더 많은 것들이 있다.
현승효의 회향의 인간학적 원리: 자유와 투쟁(2021)은 우리들 사이에도 더 많은 것들이 있다는 징표이다. 이 책에는 1975 5월 22일부터 1977년 6월 29일 세상을 뜨기 전 쓰여진 것으로, 한 인격의 ‘이루어지고 있는(se faisant)’, 즉 새로운 혁명가 되기의 과정이 있다. 햇수로 3년인데, 만 2년 1개월의 과정이 당시의 ‘시의적적치 않은’ 표면의 각질에 저항이었고, 또한 새로운 분출선을 만들려는 노력이 아니겠는가. 어느 시대든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그런 노력을 하는 이는 드물고 어렵다고 했다. 그 시절이 얼마나 엄혹해는지, 광기의 극단을 이었는지를, 지금으로서는 아는 이도 드물지만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대구 경북은 왜 그래?”, 부일자들, 지금도 숭일자들이 좍 깔려 있는데, 그 당시 현실에서 분출구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현승효는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에서 먼저 돌아가신 인혁당 여덟 열사의 막내격인 여정남 열사의 직계였다. 열사들이 체포당하던 시기에, 그는 대학에서 제명당하고, 그리고 강제 집징을 당한다. ‘편지글’에서 보면 ‘여정남 형님의 사형 소식을 당일에 군대에서 알았다’고 한다. 군사정권 부일자의 공포와 광기가 무엇인지를 잘 알았던 그는 훈련소에서 쓰고 있었던 최초의 글들을 보안문제를 생각하여 변소에 버렸다고 한다. 공포와 광기 – 이 책 속에서 공포라는 어휘가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 지로도 가늠할 수 있다 – 그 속에서도 실천해야할 일을 놓지 않고서, 1975년 4월 8일 여덟 분 열사의 사형 소식을 듣고서 무엇을 해야 할까를 깊이 생각했으리라. 다시 5월경부터 글을 쓴다. 그 글의 유고를 그의 연인이었던 노천희의 손에서 다시 불씨를 피운 것이다.
‘백과사전’에서 사라진 항목이 되살아난다. “대구 경북은 왜 그래?”, 그래요, 대구 경북은 탈주선을 탔던 많은 분들이 부일자와 숭일자들에 의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마치 일차대전 후에 독일이 스팔타커스를 제거하고 그 후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공산당과 사회당이 없은 것처럼, 그처럼 비스마르크 시대와 일차 대전의 독일의 방식을 배운 일본제국의 마름들이 우리나라 남쪽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생각해 보시라고. 그러면 ‘사라진’ 항목을 다시 만들어야 하느냐고.
“대구 경북은 왜 그래?”, 백과사전의 다른 권수를, 또는 같지 않은 이야기들을, 찾아 듣거나, 이루어지고 있었던 사실들을 탐험하며 실재성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들뢰즈는 소설과 단편소설에 빗대었지만, 지층의 밑에서처럼 심층의 흐름으로 대구 경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우선 인혁당 사건으로 불려지는 여덟 열사와 그 다음의 분출선을 만든 남민전 전사들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하활동이라 하지만 심층의 흐름은 지속되고 있었다. 들뢰즈 표현으로 노마드, 즉 전쟁기계들이 활동했었다.
다른 한편 현승효, 그는 군대에서 3년을 글을 쓰는 전사이자, 전쟁기계였다. 들뢰즈는 토인비를 인용하여 또 다른 노마드를 말한다. “노마드들은 꿈적이지 않는 자들이고, 이들은 떠나지는 것을 거절하기 때문에 노마드들이 된다.” 황량한 섬과 같은, 매끈하게 펼쳐진 사막같은 군대 생활에서 심층의 흐름을 떠나지 않은 저항. <한 독재자의 허영과 광신적 자기도취를 만족키 위해 선량하고 평화를 원하는 민중을 도구로 만드는 이 무시무시한 음모, 술수, 모략. 나는 온몸으로 거부하고 가슴 속에 치미는 반항을 질근질근 씹는다. - 현승효의 일기에서 1975. 9. 27. 일>
깊이 흐르는 선들은 언제나 분출선(탈주선)을 만들려 하며, ‘되기’(생성)를 갈망 한다. 가로지르기를 하거나, 다음의 도약을 위한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대구 경북의 흐름은 지속되었다. 위헌적인 ‘긴급조치령’에 의해 전국의 대학이 숨죽이고 있던 시절에, 1978년 가을에 저항의 분출선은 경북대학교에서 일어났다. 서울은 무엇하고 있었던가? 그들은 이철, 유인태에 이어서 이회찬 등의 구속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들 한다. 이 분출선이 도화선이되어 다음해 부산과 마산에서 항거로 이어지고 그리고 궁정동의 총소리가 났다. 심층에서 저항의 선들을 연대와 공감을 형성하고, 1980년 광주에서 인민의 항쟁이 일어났다. 대구 경북은 아픔과 고뇌를 안고 있다.
푸꼬가 말하는 고고학적 탐사의 한 부분처럼, 이 책에서 44년 전의 한 혁명가의 아픔과 고뇌의 찬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그래도 심층의 흐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광주가 민주화운동의 단체를, 그리고 제주가 다음으로 부산이 단체를 만들었던 깊이에는, 누가 뭐래로 대구 경북의 밑지층과 흐름이 있었다. 들뢰즈를 빌리자면 그 사건들은 소설이 아니라 철학이다. 현승효, 그가 있었다는 것은 자랑이며 고원이다. 경주의 수운 최제우는 말할 것도 없고, 일제 강점기 안동콤으로부터 해방 후 미군정 하에 10월 항쟁 등등, 이승만의 몰락을 앞당긴 대구 2.28 데모. 등 대구 경북의 기나긴 저항과 항쟁의 역사에 대해, 보르헤스 생각처럼 있을 수도 있는 것을 넘어서, 깊이 있는 ‘백과사전’에는 있었던, 그럼에도 표면에서 건너뛰었던, 한 권의 내용 중에 여러 항목들 가운데, 현승효와 노천희의 항목이 하나 더 채워져야 할 것이다. (3:36, 54SMB) (4:13, 54SMBC)
# 참조 1. ***
현승효(玄勝孝, 1950-1977) 년보.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현갑진, 어머니 조종순의 3남 2녀 중 막내로서 6.25가 났던 1950년 8월 6일 대구시 공평동 351번지에서 태어났다. - [본적: 칠곡군 약목면 복상동 60]
대구 중앙초등학교와 경북중학교를 졸업하다.
1968 경북고등학교 입학
1970년 “1970년, 서울에서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노천희를 만남.
1971 경북대 의대 입학. - 재학 중 학술서클 “청맥회”에서 활동.
1973년 11월 5일 월요일 10시 경북대생들은 본교에서 반유신 시위투쟁을 시작했다. 의과대학에서 현승효와 그 친구들이 시위에 참가하러 왔다.
1973년 12월 10. 경찰국 정보과 대공계 기록(전국 67개소에 불온유인물사건): 현승효(玄勝孝)(당24세, 본과1년)와 최영민(崔英敏)(당23세, 본과2년), 김권배(金權培)(당23세, 본과2년) 수배, 12월 13일 자수. (유신철폐촉구유인물 전국우송사건)
1974년 1월 경국도경 대공분실에서 7일 동안 심문 당함.
1974 현승효는 매일신문(1974. 2. 24)에 “불구자 불합격은 부당”이라는 기사를 투고했다. 이 일이 있고 2년 뒤, 경북대에서 장애인 입학이 가능해졌다.
[1974년 4월 3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은 ‘민청학련이라는 지하조직이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아래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해 인민혁명을 기도한다’는 요지의 특별담화를 발표.]
1974년 12월 5일 의과대생 1학년 70여명은 12월 5일 오후 4시 30분부터 6일 새벽 3시까지 1학년 강의실에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이를 주도한 이는 현승효였다.
그리고 6일에도 저녁 6시-11시 의대 강당에서 현승효의 주도로 시국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승효, 심오석(의학과 72학번) 등이 주도하여 70여명이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12월 13일 경북대학교에서 제명되었다.
1975년 1월 경국도경 대공분실에서 7일 동안 심문 당함.
1975 2월 21일 강제 징집. 논산 훈련소에서 전후반기 훈련을 마치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이 확정되고 다음 날 4월 9일 비상보통군법회의는 8인에 대한 형을 집행하였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는 등 이 사건은 유신체제하의 대표적인 인권침해사건으로 기억되었다.]
1975 5월경: 2월 24일부터 쓰던 일기를 5월 초순경 후반기 교육을 받을 때 보안문제와 심한 공포감으로 변소에 넣어 버렸다......‘여기는 양평이다’ [인혁당 사건을 상기할 것]
양평 부근 5사단 27연대 의무 중대 위생병으로 근무.
1975 5월 22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현승효의 일기는 그렇게 3여년을 이어진다. [햇수로 3년이지만, 만 2년 1개월이다.]
[1976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를 비밀리 조직한다. - 1979년 10월 4일부터 11월까지 이재문, 이문희, 차성환, 안재구, 이수일, 김남주, 이재오를 비롯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조직원 84명이 구속당하였다.]
1976 4월 그간 읽은 책들을 통해 “회향(廻鄕)의 인간학적 원리: 자유와 투쟁”이란 틀을 잡고 저술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제대를 4개월 앞두고 박격포부대로 전출되어 열흘 만에 구보훈련 중 쓰러져 사망하였다.
1977년 6월 29일 오후 4시에 쓰러져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스물여덟의 나이였지만, 불멸의 삶을 살게 된다. 필사본 유고, “회향의 인간학적 원리”를 남겼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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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내 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노천희, 삶이보이는창, 2007년 07월 04일 출간)
2017 청춘, 시대를 깨우다: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 1946~1979(여정남기념사업회 경북대학교학생운동사편찬위원회, 삼천리, 2017. P.456) - 참조: 65, 229, 230, 275-277, 281, 330-332, 347, 351.(8회)
2020 대구 경북 민주화 운동사(2020)(대구경북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P. 611) -참조: p. 27, 150, 164.
2021 08. 회향의 인간학적 원리: 자유와 투쟁(도서출판 모임) 출간 (54PKH) (54SMA)
*참조2. ***
청춘, 시대를 깨우다: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 1946~1979
여정남기념사업회, 경북대학교학생운동사편찬위원회, 삼천리, 2017. P.456. <현승효(1950-1977) 65, 229, 230, 275-277, 281, 330-332, 347, 351.(8회)>
의과대학 학생운동의 뿌리는 일제 강점기의 대구의전과 해방 공간의 국립 대구의과대학에 가 닿지만, 특히 4월혁명기에 격렬했던 학원 민주화 투쟁의 영향이후 많은 학생운동 참여자를 배출시켰다. 6.3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거쳐 3선 개헌반대운동과 반유신 투쟁에도 의과대학의 적지 않은 학생들이 투쟁 대열에 동참했다. 이 과정에 현승효, 심오석 같은 이들은 의문의 죽음으로 민주 제단에 생명을 바치기도 했다. (65)
정화영은 이강철에게도 [1973년] 11월 5일 투쟁을 공유하면서 인원 동원을 부탁했다. 이강철은 평소 가깝게 지내던 현승효(의과대 71학번)와 그의 의과대 친구들을 참여시키는 등 인원 동원을 측면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이광하, 최재룡(전자공학과 71학번), 장성백, 임규영, 최문수(농학과 72학번), 박명규(정외과 73학번), 김시형, 조태수, 이승룡 등도 각자 맡은 일을 처리했다. 이들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가까이 지내던 학우들에게 미리 연락하여 당일 아침 대기 상태에 있도록 했다. 황철식은 투쟁 시각에 임박하여 현사회 회장 백문태(사회학과 71학번)에게 함께 참여하자고 요청하여 이날 시위에 현사회 회원의 참여도 있었다. (229)
놀라운 점은 조직적으로 동원하지 않은 학생들 가운데 더 열정적이고 대담한 선동가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런 대표적인 학생이 윤규한(국어교육과 71학번, 80년 복교 후 경상대 회계학과로 전과)이었다. 험난한 시대가 자연 발생적인 투사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강철의 독려로 의과대학에서는 현승효(1975년 2월, 군입대 후 훈련중 사망)와 그 친구들이 시위에 참가하러 왔다. (230)
1974년 12월 5일 의과대학 1학년 70여명은 오후 4시 30분부터 이튿날 새벽 3시까지 1학면 강의실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다 교수들의 만류로 해산했다.이날 [본과]1학년들은 해부학실습 강의가 끝난 후 ‘진정한 주체성은 무엇인가? 무엇이 진정한 애국 애족인가?’라는 양심선언문을 배포하며 농성에 돌입하며,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했다. 밤 11시부터는 80여 명이 침묵 농성에 참여했다. 연락을 받고 부모들이 찾아오자 이들은 시위에 합류하러 온 2학년들과 함께 2학년 강의실로 옮겨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그리고 6일에도 저녁 6시-11시 의대 강당에서 현승효의 주도로 시국토론회를 개최했다 / 이런 상황에서 현승효, 심오석(의학과 72학번) 등이 주도하여 70여명이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민청학련사건으로 대거 구속된 경북대생들의 석방과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철야농성은 큰 충격을 주었고, 학교당국은 강경한 징계조치로 이를 잠재우려 했다. 의대 본부는 12월 6일 실시할 예정이던 시험을 무기한 연기하고 무기한 휴강에 들어갔다. / 당시 경북대 의대생들의 농성 사건에 대해 공간 기관은 이 사건이 민청학련 사건의 여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일어난 점,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현승료가 가담했다는 점, 학생들이 정면으로 ‘유신철폐’를 주장한 점을 들어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했다. / 12월 15일 급히 박희명[박명희] 의대 학장실에 총장 김영희, 경북경찰국 정보과장 김상조, 대구남부경찰서장이 참석하여 회의를 열었다. 이날 남부경찰서장은 농성 해산 조건으로 이 사건을 형사 사건화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으나, 며칠 뒤 이시영 학생과장실에서 정보과 형사 입회하에 주동자 색출을 벌여, 이미 과거에 긴급조치 4호를 위반한 전력이 있는 현습효는 제적, 심오석, 남복동(71학번), 이정화(72학번), 채종민(71학번), 조시복(71학번), 유경석(71학번) 등 6명은 무기정학, 비교적 가담 정도가 경미한 오세진(72학번) 등 3명은 근신처분을 내렸다. / 대학본부의 강한 학생 처벌에 반대하는 박명희 학장과 이시형 학생과장이 사표를 제출하자 의대 교수 중심으로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처벌학생 구제완화를 요구했지만 12월 18일 현승효만 제적되고, 다른 학생의 징계가 해제되면서 일단락되었다. / 12월 5일 의과대 1학년이 시작한 농성 주도자들은 현승효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후배들이었다. 현승효는 경북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청맥회’라는 학술서클에서 활동하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현승효는 경북대 의학과에 다니면서 이후 후배들과 함께 사회과학서적도 읽고, 시국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의과대학 학생운동 조직을 결성해 나가고 있었다. 또한 현승효에게는 서울대에서 한일회담 반대 운동에 앞장선 현승일이라는 형이 있었고, 고등학교 선배이면서 경북대 운동권 선배인 김성희의 특별한 학습지도가 있었다.현승효는 징계를 받은 이후에도 변함없이 학생운동을 했으며, 이후 강제징집 당해 1977년 군복무 중 훈련과정에서 의문사하고 말았다. 후배 심오석도 강제 징집되어 군대에서 의문사 했다. (275-277)
이처럼 우리의 현실이 비정하고 살벌하고 음흉하고
무시무시한 것일 줄은 정말 미처 몰랐다.
온 벽에, 공장에, 학교, 관공서, 역에 할 것 없이 살풍경한 시뻘건 글씨로 멸공 반공 초전박살!!! 심지어는 노래까지.
나의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르게 한다.
민방위, 향토방위 TV나 확성기를 통해 수도 없이 숨통을 누르는 것 같은 격렬한 언어들, 총소리, 표독함을 극대화한 이북 사투리, 비명소리, 가슴이 저려온다. 왜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사회는 이토록 미치광기의 심리를 가진 자의 손아귀에 있어야 하나.
나의 지성, 나의 이성 그리고 타는 듯한 정열은
이 거대한 병영을 거부한다.
한 독재자의 허영과 광신적 자기도취를 만족키 위해 선량하고 평화를 원하는 민중을 도구로 만드는 이 무시무시한 음모, 술수, 모략. 나는 온몸으로 거부하고 가슴 속에 치미는 반항을 질근질근 씹는다.
- 현승효의 일기에서 1975. 9. 27. 일 (281)
그러나 남민전 관련자 2명(정만기, 임규영)과 사망자(현승효, 이승룡)은 학교에 돌아올 수 없었다. 박정희가 죽었다고 유신의 싶은 상흔은 씻은 듯이 없앨 수 없었다. 민주주의를 원하는 이가 있으면, 박정희 독재정권은 목숨을 거두어가거나 청춘을 앗아갔다. .. 유신시대는 민주주의와 통일투쟁의 선봉이자 경북대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여정남만 살해한 게 아니었다.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시대에 경북대는 또 다른 이들을 잃었다. 아직까지 행방불명 상태인 심오석과 군대에서 사망한 현승효, 그리고 한때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프락치’로 죽음을 맞은 이까지 비극적인 대가를 치렀다. 1978년 11월 투쟁으로 구속된 전병옥(1978년 당시 독어교육과 2학년)도 몇 년 뒤 정신적 충격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전병옥은 ../심오석은.. / 현승효는 심오석의 한 해 선배다. 1971년도에 의대에 입학해 1972년 교련과 유신 반대 투쟁에 참여한다. 1973년에는 독재 정권에 항의하는 궐기문 사건으로 도피하다 1974년 1월 경국도경 대공분실에서 7일 동안 심문을 당하기도 했다.그는 일찍부터 인권의식이 발달해 있었다. 1974년 2월 치과대에서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 학생이 입학시험에 합격했음에도 ‘불구’라는 이유로 불합격 처리한 사건이 발생했다. 많은 대학들의 의과대와 사범대가 장애인 불합격을 당연시하던 때, 현승효는 매일신문(1974. 2. 24)에 “불구자 불합격은 부당”이라는 기사를 투고했다.이 일이 있고 2년 뒤, 경북대에서 장애인 입학이 가능해졌다. / 그런데 시대를 앞선 그의 인권 의식에 학교는 시비를 걸며 과잉 대응했고, 1974년 연말 의대 철야농성 투쟁을 이유로 현승효를 제적시켰다. 의대시위 관련자 중 유일하게 제적당한 현승효는 이듬해 2월 강제징집으로 군에 입대하다. 군에서도 반독재, 반유신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 군 입대 3년째, 제대를 앞둔 그는 학교로 돌아오고 싶었고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977년 3월 11일 연인에게 보낸 편지에 “역시 최전선의 길은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라 생각하고 잘 풀릴 거라 믿고 있으니, 염려 말고 그것이 안 될 때는 용감하게 넓은 세상에 도전하는 거요”하고 의연히 적었다. 그런 그가 제대를 넉 달가량 남겨두고 1977년 6월 29일 사망하게 된다. 군에서는 그가 구보 훈련 중 열사병으로 죽었다고 통보해 왔지만, 열사병으로 죽은 이의 몸이 일반 열사병 시신과는 너무 달랐다. 자유와 학문에 대한 열의에 불타던 청연의 삶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그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일찍이 독재정권의 말로를 예언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의 이 빼앗긴 자유, 독재에 대한 역사의 심판은 오랜 세월을 요하는 것일 지라도 우리의 승리로 끝날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세계사가 그것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330-332)
연애는 언제 어떻게 시작될지 누구도 몰랐다. 다만 저마다 설렘이 있는 곳에서 연애가 시작됐다 누구는 한양서점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그곳에서 눈을 맞추고, 누구는 갓 들어온 신입생을 낚아챘다. 연인관계를 꼭꼭 숨기려 해도, 들뜬 흥분에 이내 들키고 마는 경우도 있었다. 청춘 남녀의 뜨거운 눈빛을 무엇으로 감출 수 있으랴. 또 그렇게 모질게 독재정권과 싸움을 하면서도, 집안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두고두고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남긴 애를 한 이도 있었다. 많고 많은 연애 스토리 가운데 70년대 최고의 연애는 단연 현승효였다. 길가에서 처음 만난 여성에 반해 쫒아가서는 “나는 모가지 떼놓고‥… 연애할” 거라던 현승효의 사랑은 결국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열정적으로 사랑했지만, 툭하면 도망 다녀야 하는 시대의 남자와 나누는 사랑은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결국 1975년에 그 사내는 강제징집 당했다. 현승효는 위험을 무릅쓰고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일기로 썼다. 일기는 불꽃같은 사랑이었고 위로였고 사상이었고 시대의 일지였다. 일기와 편지에는 애인에게 귀여운 투정도 감추지 않았다. 결혼을 약속했던 두 청춘은 현승효의 의문사로 강제로 사랑을 멈춰야 했다. (347)
함께 하는 독서나 토론보다 대체로 혼자 읽는 책들이 많았다. 개인의 독서 취향도 저마다 다양했다. 문학청년 김동호는 신동엽 시집을 끼고 살았고, 복현문우회 소속이었던 임광호는 김수영의 시를 매우 좋아했다. 현승효는 군대에서 읽은 책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독서벽 때문에 군대에서 인격까지 모독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기억했다. (351) (54PKI)
*참조3***
대구 경북 민주화 운동사(2020)
대구경북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지역민주화운동사 연구총서 7, 도서출판 선인, 2020, P. 611. <현승효(1950-1977) 27, 150, 164.(3회)>
민청학련사건 이후 10월에 경북대의 여러 단과대학에서 구속자석방투쟁이 줄기차게 진행되었다. 특기할 점은 타 지역과 달리 의과대학에서도 12월에 강력한 구속자석방투쟁이 일어났고, 이때 강제징집을 당한 현승효, 심오석은 군에서 의문사 당했다. 1975년 4월의 한풍회 회원 박명규 등이 주도한 시위 이후 1978년 11월 경북대시위까지는 소강상태였다. 하지만 계명대에서는 1976년 6월에 발생한 홍정회사건으로 백현국 등 6명이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1년 전에 받은 김상진 열사의 유서 등을 배포하려한 혐의로 구속시킨 사건이다. 3년간 지역 대학가의 침묵에 정권은 학원대책이 성공한 것으로 여겼다. (27)
1973년 11월 5일 월요일 오전 9시 교양과정부 4층 건물에 모인 한풍회 회원 40여명은 삼삼오오 긴장된 표정으로 모였다. 일부는 다른 건물에 선언문과 격문을 가지지고 파견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제히 오전 10시 정각이 되자 <경북대학교 반독재민주구국투쟁위원회> 명의의 <반독재민주국선언문>과 격문을 뿌리며 반유신 시위투쟁을 시작했다. 얼마후 일청담 부근 로타리에 200여명의 학생들이 집결해서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대열의 선두 학생들은 ‘박정희 물러가라’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구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짠 채 후문을 나가 도청다리 중간까지 진출하였다. 이때까지도 진압경찰은 나타나지 않았다. 의과대학에서 현승효(1974년 군입대후 훈련 중 사망)와 그 친구들이 시위에 참가하러 왔다. 또 이날 이들과 연계되지 않은 윤규한 등 몇몇 학생들의 맹렬한 활동은 주동학생 못지않은 것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교내 신문 보습소가 불탔다. 몇 시간 진행된 시위와 성토 투쟁에서 직접 참가한 학생이 많을 때는 1000여명을 육박했다. (149-150)
운동세력은 이를 돌파하기 위해 감시가 소홀한 대학에서 활로를 찾고 있었다. 의과대는 4.19이후 운동의 주요한 근거지로서 6.3사태, 6.8부정선거규탄운동, 3선개헌 반대투쟁에도 대중적으로 참가했던 곳이다. 교련반대투쟁부터 운동세력이 약화되었다. 의과대생 1학년 70여명은 12월 5일 오후 4시 30분부터 6일 새벽 3시까지 1학년 강의실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다 교수들의 만류로 해산했다. 이날 해부학실습 강의가 끝난 후 <진정한 주체성은 무엇인가? 무엇이 진정한 애국 애족인가?>라는 양심선언문을 배포하며 농성에 돌입하며,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했다. 그리고 다음날 6일에도 저녁 6시-11시 의대 강당에서 현승효의 주도로 시국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승효, 심오석 등의 주도로 의대생 70여명이 철야농성을 진행했다. / 민청학련사건으로 대규모로 구속된 경북대생들의 석방과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철야농성은 잠잠했던 의과대학에 큰 충격을 주었고, 학교당국은 강경한 징계조치로 이를 잠재우려 했다. 이 사건으로 현승료는 제적되고, 채종민, 조시복, 이정화, 유경석, 심오석, 남복동은 무기정학 처분되었다. 이런 대학본부의 강한 학생처벌에 반대하는 박명희 학장과 이시형 학생과장이 사표를 제출하자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처벌학생 구제완화를 요구했지만 12월 18일 현승효만 제적되고, 다른 학생은 징계 해제되면서 일단락되었다. 현승효는 이후에도 의과대학에서 지속적으로 학생운동을 하다, 강제 징집되어 1977년 군에서 의문사했고, 심오석도 강제 징집되어 군에서 의문사 했다. (기초조사보고서, 105쪽) (164) (54PKH)
[** 사라진 “마실에서 천이틀밤” 안에는 내 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2007)(노천희, 삶이보이는창)에 대한 글이 있었다. **]
(9:33, 54S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