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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스크랩 다시 보는 국보 1호 숭례문...이럴수가....
김선태 추천 0 조회 11 10.07.09 13: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서울 숭례문(남대문) 국보  1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관련자료
 
 
 

우리나라의 국보 제 1호인데 설명이 비교적 부족한 듯 하여 설명을 보충하여 다시 올립니다.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는 조선시대 성문.
지정번호 국보 제1호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4가
시대 조선시대
종류 성문



[정면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의 우진각지붕 다포()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며 원래의 이름은 숭례문()이다. 1394년(태조 4) 창건되었으나 지금의 건물은 1447년(세종 29)에 개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  )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 바닥에는 판석()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머리 [],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이 건물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특기해야 할 것은 이 건물의 지붕형태가 어느 시기에 변경된 것인지 뚜렷하지 않으나 당초에는 평양 대동문 또는 개성 남대문과 같은 팔작지붕이었다는 것이 해체, 수리 때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 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 출처 : 느티나무님의 블로그 >

 

개화기 숭례문의 모습입니다.
아아 !

대단합니다......

 

종   목   국보   1호
명   칭   서울숭례문
  (서울崇禮門)
분   류   성곽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   대   조선 태조
소유자   국유
관리자   중구

 

 작품명 : 숭례문(崇禮門)
 장르구분 : 관영건축
 지정종목 : 국보 제1호
 용도별 구분 : 성문
 제작시기 : 1447년(세종 30) 개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
 관련인물 : 태조(太祖, 1335~1408, 재위1392∼1398),
  세종(世宗, 1397∼1450, 재위1418~1450)

 

 
[하층 평면도]

 

 조선시대 서울을 한양으로 정하고 그 경계를 성으로 쌓고 성문을 내었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대문(大門)을 내었고 그 사이에 소문(小門)을 내었다. 대문의 이름을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할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따라 지었다. 동대문을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을 숭례문이라 하고 북대문은 지(智)를 정(靖)으로 고쳐 숙정문 (肅靖門)이라 하였다. 남대문인 숭례문은 도성 8문 중 가장 중요한 도성의 정문일 뿐만 아니라 교통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숭례문은 태조 5년(1396)에 창건하였으나, 세종 30년(1448)에 고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91~1996년의 해체 수리조사에서 조사된 바에 따르면 성종 10년(1479)에도 비교적 큰 보수공사가 있었다. 서울 성곽은 1907년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이 서울을 방문하면서 비루한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문의 좌우를 헐고 지나간 이후 급속도로 허물어져 나갔다. 따라서 동대문과 더불어 남대문도 좌우의 성벽이 모두 헐려져 나갔다. 그 후 서울의 발달과 함께 도로가 넓혀지면서 몸채만 길 한가운데 남아 현재의 모습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남대문은 옆으로 긴 2층 누각의 외관과 견고한 성문, 그리고 직선적인 처마선 등이 조선 초기 건축의 건실함을 나타내고, 새 왕조 신수도의 대문으로서 여전히 당당한 위엄을 지니고 있다. 또한, 후기에 세워진 동대문과는 달리 옹성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방어의 목적보다는 도성의 주입구로서 상징성이 강하다.

 

세종대왕의 형이신 양녕대군의 어필입니다.

 

 서울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ㆍ수리하는 과정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62년 숭례문을 중수할 때 나온 숭례문 상량일자를 묵서(墨書)한 대들보가 세개 발견되었다. 첫째는 태조 때 창건 당시의 대들보요, 둘째는 세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요, 셋째는 성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이다. 창건 당시인 태조 때의 대들보에는 "홍무이십구년병자시월초지일상량(洪武二十九年丙子十月初之日上樑)"이라고 묵서되어 있으니, 홍무 29년은 태조 5년(1396)에 해당하므로 이 해 10월6일에 상량하고 2년 후인 태조 7년 2월 8일에 준공하였다. 따라서 숭례문은 태조5년에 창건하였고 2년 후에 다시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4년(1422) 도성을 개축할 때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하였다. 이때 개축한 이유는 숭례문이 기울거나 퇴락하여 개축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지대가 낮아서 볼품이 없고 또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구애되어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서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에 연결시켜 경복궁이 포국을 아늑하게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개축공사는 뒤로 미루어지다가 15년 후인 세종 29년(1447) 8월에 착공하였는데, 숭례문이 문루와 석문을 완전히 헐어내고 기지를 높게 돋우어 양쪽 산맥에 연결시킨 다음 그 위에 새로 석문을 쌓고 문루를 건축하였으므로, 보수나 중수가 아니라 완전한 개축이었다.1962년에 발견된 대들보 가운데 "정통십삼년무진삼월십칠일손시입주상량(正統十三年戊辰三月十七日巽時立柱上樑)"이라고 묵서한 것이 곧 이때의 대들보로서, 세종 30년 3월 17일에 상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그 후 32년이 지난 성종10년(1479)에 이르러 숭례문이 기울어졌기 때문에 또다시 개축하였다. "성화십오년기해사월초이일묘시입주상량成化十五年己亥四月初二日卯時立柱上樑)"이라고 묵서한 대들보에 의하여 성종 10년 4월 2일에 기둥을 세우고 상량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채수(蔡壽)와 좌승지 김승경(金升卿)등이 숭례문을 증수할 때 중국의 예에 의하여 문 밖에 옹성(甕城)도 쌓자고 하였으나, 성종이 "우리나라는 국력이 부족하여 일일이 중국을 본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이 숭례문까지 쳐들어온다면 그 때는 이미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니 옹성이 있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답하여 흥미롭다. 지금은 숭례문 중앙이 문이 아니라 양옆으로 난 도로가 지난날 성문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서울성곽이 동쪽의 남산에서 내려와 오늘날의 힐튼호텔 앞을 지나 숭례문에 연결되었고, 서쪽에서는 서소문으로부터 상공회의소 앞을 지난 성벽이 숭례문에 직접 연결 되어있었기 때문에, 사람과 가축은 이 성문을 통하지 않으면 도성을 출입할 수 없었다. 숭례문 주변의 성벽이 결정적으로 훼손된 것은 광무(光武) 3년(1899) 서울 시내 전차(電車) 노선 공사와 개통으로 인하여 동대문ㆍ서대문이 주변과 함께 헐리게 되면서부터이다. 더욱이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파괴가 가속화되었고, 특히 숭례문 남쪽으로부터 남산이 정상에 이르는 성벽은 남산광장에 일제가 소위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전연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현재는 남산광장에서 정상에 이르는 도보 길에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숭례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정면 5칸ㆍ측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처마을 받치기 위해 기둥 윗 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굴곡이 심하지 않다. '崇禮門'이라는 현판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의하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세로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썼다고 한다. 이 문은 임진왜란 때 성내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된 가운데 불과 몇 채 안 남은 건물 중의 하나로 비교적 고려말 이래의 다포(多包)집 양식을 충실히 남기고 있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 성곽(城郭)의 정문으로 문 이름은 숭례문(崇禮門)이며 태조(太祖) 7년(1398)에 창건된 후 세종(世宗) 29년(1447) 크게 개축(改築)되었다. 이 문은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木造建物)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석축(石築)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그 위에 정면(正面) 5칸, 측면(側面) 2칸의 중층(重層) 문루(門樓)를 세웠으며, 지붕(屋蓋)은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기둥 위에 짜여진 공포는 다포식(多包式)으로 힘이 있고 간결한 살미첨차가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수법(手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문은 외관(外觀)이 장중(莊重)하고 내부구조(內部構造)가 견실(堅實)하여 수도(首都)의 성문(城門)으로 당당한 면모(面貌)를 지닌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대표적(代表的) 건축(建築)이라 할 수 있다.
 
[종단면도]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의 중앙에 아치형의 홍예문을 뚫고 그 위에 2층의 목조 문루(門樓)를 세웠다.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상층 외곽의 기둥들을 하층 외곽의 기둥열보다 안으로 들이밀어 세웠다. 내부 중앙에는 4개의 고주가 일렬로 세워져 위층 지붕틀까지 지지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문루 내부의 공간이 앞뒤로 2분되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매우 견고한 구조체계를 이루게 되어 내부의 실용성보다는 구조적 안정성을 더욱 우선했다고 볼 수 있다. 1448년에 다시 세울 때 성곽부분을 높이고 더 웅장하게 만들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2층 지붕은 원래 팔작지붕이었던 것을 후대에 중수하면서 지금과 같은 우진각 지붕으로 개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둥 위에 많은 포작을 가진 다포계 구조를 채택했으며, 현존하는 다포계 건축 가운데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예다. 하층은 내외 모두 2출목이고, 상층은 외3출목, 내2출목의 포작 구성이다. 상하층 지붕 모두 양성을 했고,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용마루 양 끝에는 취두를 장식하여 최고의 격식을 갖추었다.

 


 

발행일 1949년7월1일
발행량(장) 5000000 
액 면 50원 
디자인 남대문 
디자이너 김영주 
우표번호 54 
인면크기 20mm×24mm 
천 공 11 
전지구성 10×10 
용 지 물결무늬 

 
 
 숭례문의 건축 양식은 정면(하층) 5칸(70척 5촌), 측면 2칸(25척 6촌 5분)의 중층(重層)우진각지붕의 다포집으로 건평 53.79평이다. 그리고 현존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건축 구조는 성벽보다 일단 높게 화강석으로 육교를 만들어 성로(城路)를 잇고 그 아래로 홍예를 틀어 대문을 내어 출입하게 하고 장방형(長方形) 육교 상면에 중층루(重層樓)를 세워 완성하였다. 중층 목조건물의 일종의 기단인 육교는 내외벽을 큼직한 선단석상(扇單石上)에 무사석을 쌓아 홍예 기석을 받고 홍예 기석상으로부터 홍예석을 쌓아 올린 홍예 좌우로 크고 작은 무사석을 층층히 쌓아 이룩하였다. 이 무사석의 뒷몸은 길고 짧아 적심과의 연계를 꾀하고 적심과 무사석은 칸칸이 서로 중첩하여 상호연계를 한층 더 견고히 하였다. 누는 이러한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상층이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평면의 구성은 하층이 평주14개와 고주4개로 되고 상층은 근정전(勤政殿)에서와 마찬가지로 하층 우주내곽에 따로 세운 우고주와 하층으로부터 올라오는 4개의 고주 그리고 병연주로 이루어졌다.
 

 

 
초석은 모두 융기부(隆起部)가 있는 원형이나 고주의 그것은 판석형(板石形)이고 우고주의 그것은 방주형의 것을 윗몸으로부터 말각(抹角)한 모양의 것이다. 아래층 축부(軸部)의 짜임은 기둥 아랫도리에 높직한 하방(下枋)이 있고 벽은 없이 기둥 윗몸에 창방과 평방을 놓고 주두를 놓아 내2출목, 외2출목의 공포를 조성하였다. 상층도 하층과 같으나 주간에 중방을 끼우고 조그만 판문을 연속하여 쭉 돌려 낸 것이 첨가되었다. 공포는 마찬가지의 내2출목, 외3출목, 공포의 세부 짜임은 두공위로 삼제공이 겹쳐 놓이고 주간에서는 그 위에 바깥쪽으로 삼분두된 살미첨차가 놓여 외목도리를 받게 되었고, 기둥 위에서는 제공 위에 바로 대들보가 놓이게 되어 그것이 외목도리를 받게 되었다. 보머리도 역시 삼분두로 의장하였으며 이제공의 안쪽머리도 그렇게 하고 살미첨차의 뒷머리는 운각하여 변화를 주었다. 행공첨차는 두 끝으로 직절(直絶)하고 바닥을 둥글려 소위 고형 수법을 썼고 소로와 살미첨차 사이의 윗몸도 바닥에 따라 만곡부(彎曲部)를 넣어 당시 유행하던 수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고형첨차는 여말 다포집의 유례 이래 각 건물에서 일반적인 통성(通性)으로 보이는 것인 바 이것 여하에 따라 시대의 설정을 추정하기도 하는 중요한 부재(部材)인 것이다.
 

 
 < 출처 : 퍼온사진입니다. >
 
 쇠서의 곡선은 비교적 강직한 편이나 개성 남대문의 그것보다는 훨씬 곡선미가 짙고 홍화문이나 돈화문보다는 한결 경직(頸直)한 편이다. 가구(架構)는 상하가 동일한 방법이나 하층의 그것은 마루를 깔기 위한 수단에서 그쳤고 상층은 지붕을 구성하기 위하여 대량(大樑) 위에 높직한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고 종량에 중도리를 짜고 종량 위에 동자주형의 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얹었다. 이러한 수법은 개성 남대문과 동일한 것이나 개성 남대문의 동자주는 위가 좁아져 간 것이고 대량아래에 따라 귀밀이한 방주(方柱)를 세워 보강을 한 것이 다르며 서울 남대문에서는 대량과 종량 사이에 각재형(角材形) 덧보를 이중으로 놓고 거기에 따로 뜬창방을 짜돌려 중도리를 보강한 것과 고주위로 동자주를 더 받쳐 종량을 보강하고 나아가 종대공을 힘있게 받도록 한 것이 그와 다르다. 양의 단면은 심원사(心源寺) 보광전이나 후기 홍화문 등에서 볼 수 있는 어깨는 그냥 두고 바닥만을 굴리는 수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같은 시대로 보여지는 봉정사(鳳停寺) 대웅전 · 환성사(環城寺) 대웅전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명정문(明政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귀천장이 없고 하층의 그것도 홍화문 등에서와 같은 우물천장이 없고 귀틀이 그냥 내보이도록 되어 있다. 2층의 마루는 장마루를 깔았다. 아래층은 모두 토간(土間)이나 중앙문 즉 홍예문의 천장 부분에만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지붕은 겹처마, 각 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이 놓이고 양성한 용마루에는 취두가 있다. 그런데 1961년도 중수공사시 여러가지 명문이 발견되고 고단청(古丹靑) 문양 등이 검출되었으며 이에 따라 숭례문은 당초 팔작지붕이었던 것이 후에 우진각지붕으로 고쳐졌음이 밝혀졌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야경 시리즈 입니다. ^-^ 야경이 정말 아름답죠?   http://blog.paran.com/graysun
 
건물 주위에는 여장이 쌓였고 그 좌우 측면의 한쪽으로는 각기 통용문이 개설되어 있으며 여장내로 떨어지는 물은 석루조(石漏槽)를 통하여 모두 배수하게 되었다. 이 건물의 가치는 조선 초기의 성문 건축을 대표한다는 데 있다. 이 대표한다는 뜻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으니 하나는 시대적인 가치이고 또 하나는 건축사상의 가치이다. 전자는 서울에만도 대소 성문이 있으나 그 초루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 조선 초기의 것은 이 건물이 유일한 것이어서 받는 각광이고, 후자의 경우에서는 개성 남대문을 본떠 지은 집이나 개성 남대문에서 이루지 못한 다포집 성문의 표본을 여기에서 비로소 개화하였다는 점에 있다. 말하자면 임진왜란시 성내의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고, 불과 몇 개의 건물이 잔존하게 된 것 가운데 이 건물이 비교적 상세히 여말 이래의 다포집 양식을 충실히 남기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덧붙여... 남대문시장 지도 !!  조금 부족한 면도 없지 않지만 유용할 것입니다.
1. 남대문 18. 청자상가
2. 국제화재 19. 남대문1번가상가,케네디상가,한영상가
3. 대한화재 20. 올스타프라자상가
4. 남정상가 21. G동상가
....B1~1F 패션시티 .....B1~2F 윙스타운
....2~3F 남정악세사리상가 .....1F 대도레이디상가,대도퀸숙녀복상가
....4~5F 남정악세사리재료상가 .....1~2F 쟝띠모아
5. 뉴서울악세사리상가 .....1~3F 영타운
6. 연세악세사리상가 .....2F월드타운
7. 영창악세사리 상가 .....3~4F쉬끄타운
8. 국제수입상가 22. F동상가
9. 장안악세사리상가 .....1F 대도은남상가,포키아동복상가
10. 남도종합상가 .....2F 크레용아동복상가
.....1F 유성상가 23. F동상가
.....2~3F 남도종합상가 .....1F 부르뎅아동복상가,마마아동복상가,
11. 한성헤어프라자 .....대도마켓상가
12. 남대문상가 24. 삼호악세사리상가
13. 본동상가 25. 우주악세사리상가
14. 본동상가 26. 메사
15. 중앙상가 27. 자유상가
.....B1F 지하수입상가 .....B1F 지하수입상가
.....1F 중앙1층상가 .....1F 자유핸드백상가
.....2F 중앙2층상가 .....2F 탑랜드아동복상가
.....3F 중앙3층상가 28. 삼익상가
16. D동상가 .....B1F
.....B1F남대문수산물상가,대도지하수입상가 .....1F 포핀스아동복상가
.....1F대도종합1층상가 .....2~3F 패션모자이크상가
.....2F대도종합2층상가 .....4F 삼익악세사리상가
.....3F대도종합3층상가 .....5F 삼익남성복상가
17. E동상가 .....6F 삼익구두상가
.....B1F 지하수입상가 .....7~8F 유명의류 상설할인매장
.....1F 대도상가,맨코스상가 29. 굳앤굳디자이너월드
.....2F 남문악세사리상가,렝땅아르떼상가, 30. 제일은행
.........원랭땅상가 31. 신세계 백화점
.....3F 대도꽃도매상가,대도꽃종합상가 32. 한국은행

 

 

우표 한장 덧붙입니다.

 

 

숭례문 이모저모
 
 

한성도
한양의 성을 나타낸 지도입니다.
중앙에 동그랗게 표시해 놓은 부분이 한양성이고 빨간 동그라미들이 한양의 문들인데 대문이 4개 소문이 4개 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모르겠음)
한양성의 가장 아래부분에 큰 산이 하나 걸쳐있는데 그 산이 남산이고
남산 때문에 남대문은 정 중앙에 위치하지 못하고 남산 왼편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지도의 맨 아래부분 진하고 굵은 검정색으로 가로 질러 있는 것이 한강입니다. 한강에는 돗단배들도 다니는군요 ^^;









숭례문 바로 안쪽
기와집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한양에는 인구밀도가 무척 높았다고 합니다.



남대문통
남대문통입니다. 숭례문 바로 안쪽에 성벽을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남대문통"이라는 명칭은 일제때 지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으로 들어오는 일본군




일본인 거류지역으로 가는 일본군




전차 개통 당시




숭례문 우립


숭례문 우좌
"우립"과 "우좌"는 "소가 섰다", "소가 앉았다"라는 뜻의 한자입니다. 별 내용아닙니다. ^^;




숭례문 칠패(시장)




1897




1897원경




1900년대








1910




1950




한국 전쟁 직 후
전쟁으로 숭례문은 전체적으로 내려 앉아서 완전히 해체해서 다시 조립하는 대공사를 하게됩니다.




보수 공사가 끝난 모습..



 

 

 

 

‘국보1호’ 남대문에 불…“전기합선 추정”

 


[한겨레] 10일 밤 국보 제1호인 숭례문(남대문)에서 불이 나 누각 2층 일부가 사라졌다.

이날 저녁 8시50분께 서울 중구 남대문로 4가 29 숭례문 2층 누각 천장에서 불이 나 2층 일부를 태운 뒤 출동한 소방대원들에 의해 진화됐다. 서울 중부소방서는 “일단 화재 원인은 전기 합선으로 추정된다”며 “방화 가능성을 포함해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날 불을 끄기 위해 소방차 28대와 소방대원 88명이 출동했다. 경찰은 이날 불이 남대문경찰서 교통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으로 목격돼 지령실을 거쳐 소방서에 신고했다고 밝혔다.

숭례문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해 태조 7년(1398)에 완성됐다. 현재의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이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최현준 기자 symbio@hani.co.kr

 

 

 

'숭례문을 지켜라'

 

 



]10일 밤 서울 중구 숭례문에 원인불명의 화재가 발생한 가운데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노컷뉴스 박정호 기자 pjh2035@cbs.co.kr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숭례문 화재 진압 하는 소방관들

 



]10일 밤 서울 중구 숭례문에 원인불명의 화재가 발생한 가운데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노컷뉴스 박정호 기자 pjh2035@cbs.co.kr


 

숭례문 화재 현장 '치솟는 연기'

 



]10일 밤 서울 중구 숭례문에 원인불명의 화재가 발생한 가운데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노컷뉴스 박정호 기자 pjh2035@cbs.co.kr


 

자욱한 연기 피어나는 국보1호 숭례문

 
【서울=뉴시스】

10일 저녁 8시 50분께 서울 중구 국보 1호인 숭례문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해 소방당국이 진화작업을 하고 있다.

불은 숭례문 누각에서 발생, 일반인 접근이 금지된 곳이어서 야간조명 시설에서의 누전으로 관측되어지고 있다.

진화를 위해 소방차 40여대와 소방관 80여명이 현장에 출동했으며, 주변 도로 일부가 차단되면서 교통 정체를 빚고 있다. /박세연기자 psy5179@newsis.com

 

 

숭례문 화재로 전소 붕괴... '총체적 관리-대응 부실' 노출

 

[SSTV|종합뉴스팀] 대한민국 국보1호 숭례문이 화재로 전소되고 무너져 내렸다. 대한민국 국보1호이자 우리문화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려 버린 것이다.

10일 오후 8시 50분쯤 발화한 숭례문 화재는 자정을 넘기면서 불길이 확산돼 기와가 떨어지며 붕괴가 시작됐다. 발화장소인 2층 누각에서 진화에 힘쓰던 소방당국은 계획했던 해체작업을 포기하고 화재 진화에만 주력했다.

문화재청과 소방당국은 화재가 발생한지 3시간만인 11시 50분에 숭례문 지붕에 대한 해체작업을 시작했지만 이미 불길은 목재 나무속을 깊숙히 파고 든 이후여서 손을 쓰지 못하고 최악의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봐야만 했다.

숭례문의 화재는 당초 전기누전에 의한 발화로 알려졌으나 방화에 의한 화재로 원인이 모아지고 있다. 경찰과 언론사에는 화재가 발생하던 시간에 50대의 남자가 쇼핑백을 들고 2층 누각으로 오르는것을 봤다는 택시기사등의 증언이 속속이어지고 있다. 숭례문 근처에서 승객을 기다리고 있던 택시기사 이 모(44)씨는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쇼핑백을 들고 숭례문 옆 계단으로 올라가는걸 봤는데 잠시 뒤 2층에서 빨간 불꽃이 일어나 신고했다"고 말했다.

야간경비를 맡고 있는 KT텔레캅측도 밤 8시 47분쯤 적외선 경보가 발령되어 바로 보안요원을 출동시켰다고 밝혔다. KT텔레캅측은 구조물에 발을 들여놓기만 해도 바로 경보가 울린다고 밝혀 이번 화재가 방화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소방 당국과 경찰은 처음에는 누전 가능성을 두고 수사를 벌였으나 현재는 방화로 인한 화재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최초 신고자 등을 상대로 진술 확보에 나섰다.

'국보1호 숭례문'의 붕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은 화재는 결국 문화재의 보안의 허술함, 초기대응 실패, 문화재청과 소방당국의 협조체제 미흡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남기고 우리에게서 사라졌다. 결국 화재로 전소됐지만 화재가 아닌 '인재'였던것이다. 여기에 건물 내부의 독특한 내장재와 스프링클러 부재도 한몫을 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불이 붙은 곳은 2층 누각의 '적심'부분인데, 이 '적심' 부분 위쪽에는 '강회다짐'이라는 방수벽이 가로막고 아래로는 '회벽바름'이?칠해져 물이 침투할 수 없는 내장재라는 것이다.

 
 
 

[동영상]숭례문 (崇禮門, 남대문)대형 화재발생!

 
(고뉴스=고뉴스TV 기자) 2008년 2월 10일 20시 48분경 중구 남대문로 4가 29 숭례문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대형화재가 발생되었다.

화제는 최초 2층 누각내에서 발생되었으며 20시 50분경 종로, 중부, 용산소방서에서 화재진합을 위하여 39대의 소방차가 동원되었다.

화재로인한 인명사고는 없었으며 과학수사대는 화재의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사진-0117> 국보 1호 붕괴

 
(서울=연합뉴스) 서명곤 기자 = 11일 새벽 숭례문이 화재로 일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숭례문 화재 진압

 
(서울=연합뉴스) 이상학기자 = 10일 밤 숭례문에 화재가 난 가운데 긴급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국보 1호' 남대문 전소… 완전 붕괴

 

10일 오후 8시48분쯤 국보 1호인 서울 중구 남대문(숭례문)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해 2층 누각이 완전 붕괴되는 등 큰 피해가 발생했다. 1층 누각도 완전 연소되는 등 크게 훼손됐으며 불은 남대문을 모두 태운 뒤 화재 발생 5시간여 만인 11일 오전 1시55분쯤 꺼졌다.

최초 불길은 외부로 치솟지 않았고, 짙은 연기만 나왔으나 화재 발생 2시간쯤부터 육안으로도 지붕 위 불길이 확인될 정도로 화재가 심각해졌다. 화재 발생 4시간이 지난 11일 오전 0시30분에는 불이 2층 누각 전체로 번졌고, 오전 0시40분쯤 누각 일부 기왓장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이후 2층 누각 지붕이 무너기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화재 당시 남대문 내부에는 화재를 대비한 스프링클러가 없었으며, 소화기 8대도 1, 2층에 나누어 비치되는 등 소방시설이 미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감지기 등 화재 경보설비는 없는 상태로 확인됐다. 또 홍예문이 개방되는 오전 10시에서 오후 8시 사이에 평일 3명, 휴일 1명의 직원이 상주하며 관리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무인경비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다. 이번과 같이 홍예문 폐쇄 시간에 발생한 화재 상황에는 신속한 대처가 어려운 상황이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불은 남대문 누각의 두 지붕 중 위쪽에 있는 지붕 쪽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방당국은 오후 9시55분에 화재 비상 2호, 10시32분에 한단계 낮은 비상 3호를 발령한 뒤 펌프차와 사다리차 등 소방차 50여대를 동원해 화재 진화 작업에 나섰다.


소방 당국은 오후 10시30분쯤 화재가 진압된 것으로 판단하고, 잔불 진화작업에 나섰다. 현장 소방관들은 취재 기자들에게 "대충 불길을 다 잡고 잔불처리 작업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방 당국 판단과 달리 오후 10시40분쯤 숭례문 2층 현판 부군에서 직경 6m가량 불길이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소방 당국이 이 불길을 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 불길은 오후 11시쯤 2층 지붕 전체로 번졌으며, 11시50분쯤 지붕 위로 옮겨 붙은 것으로 알려졌다.


소방당국은 발화지점과 원인을 밝혀내고 추가 화재를 막기 위해 문화재청으로부터 문화재 해체 승인을 얻은 뒤 불씨 제거를 위해 남대문 현판 일부를 잘라내기도 했지만 이미 불씨를 잡기에 때는 늦은 상황이었다.

소방당국은 화재 초기 남대문 누각은 일반인 접근이 금지돼 있어 방화 가능성이 적은 것으로 보고, 야간 조명을 위해 설치한 전기 시설에서 누전이 발생한 것 아니냐는 관측을 했다.

그러나, 소방관이 실제 2층 누각에 올라보니 전기시설이 없었던 것을 확인됐고, 방화 가능성을 제기하는 제보도 잇따르고 있는 상황이다.



국보1호 숭례문이 화재로 무너져내렸다. / 사진부 정경열 기자

택시기사 이모(44)씨는 "근처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50대 정도로 보이는 어떤 남성이 쇼핑백을 들고 남대문 옆 계단으로 올라갔다"며 "잠시 후 남대문에서 불꽃놀이를 하듯 빨간 불빛이 퍼져 나왔고, 신고를 하고 보니 그 남자가 내려왔다"고 말했다.

이씨는 "경찰이 그 남자를 쫓아가지 않아 직접 차를 몰고 쫓았는데 찾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소방관과 함께 경찰 40여명도 화재 현장에 출동해 화재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소방당국은 11일 오전 2시 현재 1차 화재진압을 마친 상태로, 남은 잔불 정리를 하고 있다.

남대문(숭례문)은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395년(태조 4년)에 짓기 시작해 1398년(태조 7년)에 완성된 누각형 2층 건물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으로 1961~1963년 해체·수리 작업이 이뤄졌다.

 
 

숭례문 화재 진압

 
(서울=연합뉴스) 이상학기자 = 10일 밤 숭례문에 화재가 난 가운데 긴급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출처;daum 너와집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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