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딸 ***
굳이 시큼한 사과만 먹고 싶다는데 어쩌랴
당구장에서 눈깔을 모로 떠 챙긴 버스값으로
사과 한 톨을 사들고
명동에서 원효로 4가 수돗물도 없는 땀방울을 달려
그냥 달려
전승보처럼 엥겨주던 아내가 첫딸을 낳았다
할아버진 어비
나는 *어야라고 어를 수록 물쑥 물쑥 크던 갸가
국민학교에 가던 날, 관학이 한테 얻은 시계로
빨간 아래 위를 사입혔더니
분꽃처럼 활짝 벌어지던 우리 첫 딸
그 첫 딸의 중학 진학은 내 당대의 최고 학력이라
당대 최고 요리 짜장면을 먹이며
나는 우두커니 눈물도 나고
신이 난 아내는 월부 피아노를 사주고
그걸 다시 팔아 통일운동에 바치며
피아노가 다 무언가 지금은
잠든 겨레의 가슴을 칠 때라고 속으로 울면
뒷 길로 고개 숙여 학교 가던 우리 첫 딸
그 첫딸이 대학선생이 되자 마루가 꺼지게
들썩이던 아내의 깨끼춤도 잠깐
어머니가 바라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거라며
노동현장에서
일년에 한두 번 고추장이나 훔쳐 가더니
동해바다 외로운 술집 벽보에 갸는 수배자
나는 도망자로 만났을 때
그 명단을 찢어 거센 동해바다에 던지며
아 나는 못난 애비됨을 얼마나 울었던가
그 첫 딸이 첫 딸을 낳았다
이름을 뭐라고 지을건가
그때보다 장막은 더 내리쳐
저 멀리 산비탈
*어야네 불빛은 번덕번덕
한사코 이 밤을 사르고 있는데
갸는 그저 에미 노릇만 할 건가
*** 백기완 ***〈아, 나에게도〉라는 시집 중에서, 〈첫딸〉의 전문, 1996
*** *어야 :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반짝이는 산비탈의 불빛, 어두움을 사르는 희망의 불빛이라는 뜻의 백선생님의 낱말 중의 하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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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뒤에 붙은 발문 중의 일부를 발췌.
〈첫 딸〉이라는 시에 관한 해설 부분입니다.
《자신의 가족에 대한 "그 분"의 애정이
얼마나 치열한가는 70∼80년대
독서계를 풍미했던 그 분의 저서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면〉
에 이미 역력하게 드러나 있다.
딸에게 주는 형식을 띤 이 글에서
그는 건강한 아름다움에 대해 적절하게,
그리고 매우 감동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위 시에 담긴 "그 분"의 가족에 대한,
딸에 대한, 아니 가족사 전체에 대한 애정은
그 현실성과 구체성에 있어,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있다.
정말 이 "구체로의 상승"이 증거하는
감동과 충격의 홀연일체 수준은
〈이 강산 낙화유수〉의 감동을,
"그 분"의 가계사 속으로 심화시키면서
동시에 역사를 현재화 시킨다.
맨 마지막행 "갸는 그저 에미 노릇만 할건가"
의 반전의, 짐짓 아무렇지도 않지만
실은 엄청난 속도와 보폭은
거의 전인미답 수준이라 하겠다.
그렇다. 그도 할아버지가 되었다.
이 속도와 보폭에는 격동을 헤치며
스스로 격동을 심화시켜온,
그의 온 생애의 무게가
매우 안온하게 담겨 있다.
달관과 지속적인 투쟁의지가
마침내 합일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렇다. 그는 다음의 시에서 보이듯이,
다시 벼랑으로 선다. 혁명도 문학도, 그리고
그 사이의 어떤 눈물겨움도 절정일 때이다.》
- 〈시인 김정환, 혁명과 인간, 그 사이 눈물겨운...
"백기완 시"에 대한 네개의 메모〉
- 그린내 주 : 발문에서 이 다음에 이어지는 시는
〈아, 나에게도〉입니다.
정말 혁명과 문학이 눈물겨움의 절정을 이루는
그런 시입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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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에 감사함니다 어렵게살던 지난 우리에 뒷 길를 보는것 같아서 눈시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