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총리 "모리 요시로"는 지난 5월 "일본은 신의 나라 이다."라고 발언 했다가 일본 국내의 언론 뿐만 아니라 중국등 해외로부터 까지 비난의 원성을 듣는 등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심지어 일본 국내의 언론은 "수상의 자질이 결여 되었다."는 등 모욕적인 취급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모리" 총리는 그 발언에 대해서 "사과는 하지만 취소 할수는 없다."고 한다. 오히려 "내가 뭘 잘못 했느냐."고 되묻고 있다. 얼핏 이러한 해명을 접하는 일반인들은 사고에 혼란을 경험 하게 한다. 그 말을 한 것은 사과 하지만 그 내용은 사실이기 때문에 취소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말과 내용은 별개인 셈이다. 그리고 수상의 이상한 행동은 계속 되는 것을 본다. 그 후 두 세 차례 더 "일본은 신국(神國)"이라는 발언을 하고 첫번째와 같이 그의 발언에 대해선 사과 하면서 내용을 취소 할 수 없다는 그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6월26일 중의원 선거에서 일본 국민은 이러한 총리를 둔 집권 자민당을 재 신임 하였다. 의석수가 전보다 조금 줄었지만 집권당으로써의 위치는 변하지 않고 "모리" 수상도 그 자리에 눌러 앉아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달 넘게 "모리" 수상이 벌린 "신국 발언"은 국내외의 호된 비판과 비난의 각색까지 곁들인, 그만 하면 괜찮은 수준급의 연출이 된 셈이다. 일본 국민은 선거를 통해 이를 추인 해준 것이다.
일본 헌법은 전쟁을 부인 하고 있다. 1947년에 발효된 일본 헌법은 미국이 만든 것이다. 2차대전후 일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진주만기습으로 촉발된 태평양 전쟁을 비롯하여 그 전에 일본이 일으켰던 모든 전쟁을 침략 행위로 규정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나라에게 군대를 보유 하게 하거나 교전권을 준다는 것이 극히 위험한 일로 간주 하였던 것이다. 일본 헌법 제9조는 전쟁을 포기 하는 내용으로써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인정 하지 않고 있다. 일명 평화 헌법으로 불리는 이유도 이 조항이 규정 하고 있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 때문이다. 금년 10월로 창설 50주년을 맞는 일본 자위대의 처음 명칭은 경찰 예비대였다. 당시 한반도에 6.25전쟁이 터지면서 군수물자의 하역, 수송과 같은 미군의 전투 업무를 도와 주어야 할 지원이 필요 하였던 것인데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은 군대가 아니라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나 생각 된다. 지난 50년 동안 자위대의 변신은 참으로 놀라울 정도다. 패전의 폐허 속에서 오늘날 제2 경제대국을 이룩한 것처럼 자위대 역시 경찰 예비대에서 세계에서도 손 꼽히는 군대로 성장 했다. 영토가 공격 받을 때에 한해서 최소한의 방어에 나선다는 전수방위(專守防衛)의 개념을 훨씬 뛰어 넘는, 방위 개념의 적극적 해석으로 선제 공격도 가능한 전방위(全方位) 방어 전략으로 바뀐지 이미 오래 되었다. 세계 경찰 역할을 하는 미국의 짐을 덜기 위해, 미국은 기회 있을 때 마다 일본의 GDP에 대비한 군사비 증액을 공공연히 요구 했던 것도 주요한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지만 일본 자신이 적극적으로 노력한 결과라고 믿고 있다. "PKO(유엔 평화 유지 활동)법"과 "주변 사태 법" 제정은 자위대의 해외 파병 길을 열어 두었고 한반도 유사시 주한 일본인의 신변 보호를 위해 한반도 상륙등 적절한 군사 활동을 할뿐 아니라 북한이 미사일로 일본을 공격 하면 북한내 기지를 공습 한다는 씨나리오도 세워둔 것으로 보도된바 있다. 이제 이러한 제반 공격성을 실천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소위 평화 헌법 제9조를 개헌 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에 일본은 자꾸 오른쪽으로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일본 수상의 "신의 나라" 발언과 황국사상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일본에서 神이라는 것은 天皇을 두고 이른다. 일본의 천황 계보는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한반도의 삼국시대 역사는 왜(倭)와 공유되는 부분이 많다. 백제 왕국은 한반도의 남부에 본거지를 두고 倭 열도를 경영 하면서 야마토(大倭,다이와) 정권의 실질적인 통치를 해 왔다. 백제 왕국은 현해탄이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두 지역을 국토로 한 帝國의 성격을 가졌던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주요한 고대 국가인 것이다. 그때는 백제의 왕과 왜백제의 천황은 형제간도 있었고, 숙질간도 되는등 혈육이 서로 두 곳의 통치자가 될 만큼 불가분의 관를 유지 하였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7세기 초엽, 일본 최초의 왕으로 기록 되고 있는 "스이꼬" 천황은 성덕태자를 섭정으로 하여 불교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한다. 한반도의 3국으로 부터 불교 뿐만 아니라 천문, 역서등의 학문도 수입 하는등 일본이 국가로써의 근간을 마련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일본 최초의 헌법 17조를 만들어 공표 한 것도 604년 이때의 일이었다. 성덕태자가 이룩한 불령 국가의 전통은 19세기 중엽 메지 천황이 즉위 할 때까지 계속 되어 왔지만 尊皇洋夷의 근대화 세력은 神佛習合으로 불리우는 부처와 천황의 동일체 사상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빼고 神만을 받드는 이른바 황국사상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이로써 천황은 일본이라는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써만 활용 되어 군국주의 일본을 만드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국수 주의자들은 천황을 이용해그들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려 했던 것은 역사가 말해 주는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과 일본 두나라는 고대 역사의 한 부분에서 약700년간 같은 땅에서 같은 문화를 누린 동족으로써 서로를 더욱 따뜻한 눈으로 바라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백제의 일본 망명 이후 더욱 더 긴 기간인 천년을 넘게 따로 이질적인 삶을 살아온 일본은 그들 특유의 일본문화를 소유한 우리와는 이질적인 일본 민족으로 거듭나 오늘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들의 한반도에 관한관심은 거의 뿌리를 향한 본능에 가까운 정도가 아닌가 한다. 한일 두나라가 역사를 올바로 이해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한국은 식민 사관인 신라 위주의 역사에서 탈피하여 백제를 비롯한 우리의 큰 역사를 보아야 보고 후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일본은 편협한 황국 사관으로부터 벗어나 뿌리인 과거를 가감 없이 이해 할 것을 주문한다. 미국이 영국을 바라 보듯이, 또는 영국이 미국을 대하듯이 한일 두 나라도 그러한 관계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 한다. 일본은 한국이 왜 둘로 나누어 졌는지, 38선은 왜 그어졌고 비극의 비무장 지대는 왜 생겼는지를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非武裝 地帶(DMZ)를 解剖한다.(12)
일본인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가장 존경 하는 사람 가운데 한 분이 "쇼토쿠" 태자 (聖德太子)이다. 그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천황계보 중에서 제33대 천황이며 일본 최초의 여왕인 "스이꼬"(椎古) 천황 시절(AD592~AD628)인 AD593년 부터622년까지 30년간 천황의 섭정을 맡아 국정을 요리한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 였다. 천황의 권위를 넘보는 호족들의 권세를 억누르고 천황권을 확립하여 가는, 천황과 호족들간의 조화정치를 편 일본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정치 사상 시대를 구가 했던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 당시에는 천황보다 더욱 큰 세도를 휘둘렀던 "소가"(蘇我)씨 가문을 비롯한 몇몇의 호족들을 견제하고 천황이 직접 전국의 토지와 백성을 지배하는정책을 실행 하였던 것이다. 즉 그들의 반발 없이 유연하게 천황의 권위를 지켜 나갈 수 있었던 점을 그의 공로로 인정 하는데 역사가들은 인색 하지 않는 것이다. "소가"씨가 주장 하는 중앙 집권적 관료 지배 방식 보다는 불교를 정책의 기조로 삼고 佛(부처)과 法(가르침), 그리고 僧(불자)을 가리키는 이른바 3寶에 따르는 신정책을 실천 하였던 것이다. "쇼토꾸"태자는 섭정 시작 다음 해인 594년에 불교 중흥의 칙령을 발표하고 일본 역사상 최초의 헌법을 제정, 공포 함으로써 국가 통치의 불교 이념화를 구현 하였던 것이다. 이 모두가 국가 권력을 호족들로부터 되돌려 받음으로써 천황권을 확립 하려는 점진적 개혁주의를 실천 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 된다. 천황을 일본의 최고 지배자 내지는 절대 통일자의 지위에 올려 놓는 것이었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일본의 천황에 대한 개념이 아닌가 한다. 그때는 "3寶"라 불리우는 불교의 가르침이 통치 철학의 기조가 되어 실질적인 정치 세력인 호족들의 권력 남용을 억제 하는 순기능으로써 작용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근,현대사의 일본 제국주의의 모습은 오로지 국수적 민족 주의자와 군벌의 목적만을 추구하기 위하여 천황의 권위를 악용하고 천황의 역할을 조작하는 것이 다른점 이라고 지적 하고 싶다.
"쇼토꾸"태자는 누구인가. 그는 어디서 왔는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섭정을 맡기 시작한 해로부터 100여년전의 한반도로 무대를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AD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을 받은 백제의 개로왕은 허무 하게도 고구려의 군사에 붙잡혀 살해 되고 마는 사건이 있었다. 그 이듬해 후임 왕위를 두고 백제측과 왜백제(倭百濟) 측의 의견이 엇갈려 결국은 힘의 대결로 내전을 겪게 된다. 이 권력투쟁의 결과 왜백제 측이 패하게 되는데 패장(敗將) 목협만치(木協滿致) 는 그의 주군 곤지(昆支,개로왕의 동생)와 함께 왜(倭)로 망명 하게 된다. 당대 최고의 검객으로 알려진 그는 "다이와" (大倭)정권의 "유라꾸"(雄略)천황의 총애를 받고 왕실 최측근으로 발탁된다. 그가 바로 일본 고대사에서 빼 놓을수 없는,130여년간 일본 정치를 주무른 소가(蘇我)씨 가문의 시작인 "소가만치"(蘇我滿智)이다. 그는 천황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의 지명인 "소가"(蘇賀)를 그의 성씨로 개명 하였던 것이다. 소가씨의 가문은 아들 "소가고마"(蘇我高麗)를 거쳐 손자 "소가 이나메"(蘇我稻目)대에 와서 천황을 압도하는 권력자가 되고 "이나메"는 그의 두딸을 모두 천황가에 출가 하도록 하였다. "쇼토꾸"태자는 바로 "소가 이나메"의 외손자 이면서 31대 "요메이"(用明)천황의 아들이다. 그는 622년 병사할 때까지 화(和)의 정신에 입각한 천황권 강화정책을 펴고 외가인 "蘇我" 족벌의 전권을 견제 하였던, 천황의 상징성을 건설적으로 이룩한 최초의 정치인이 아닌가 생각 하게 된다.
"쇼토꾸" 태자가 최초로 강조한 뜻이면서 일본인이 가장 좋아 하는 단어, 화(和)의 의미는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아 일본의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걸맞는 인류 보편의 가치로 승화시켜야 할 이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일본은 21세기를 맞아 지난 50 여년간 이룩한 빛나는 경제력에 어울리는 "세계 속의 역할"에 대해 아직 정립을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정신적 방황을 하면서 이의 돌파구를 과거 어두웠던 모습에서 찾아 볼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념과 사상의 뒷밭침이 없는, 오직 천황만의 숭배 사상은 자칫 일본의 오도된 집단주의를 부활 시키고 또다시 일본을 세계의 골칫거리로 만들 오류를 안고 있슴을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경험한 바 있다. 세계 제2의 경제 대국 일본이 "자유와 공영, 협조와 이해, 문화와 계몽"과 같은 인류 보편의 이상에 초점을 맞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정립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 하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 걸프전을 시발로 하여 PKO법을 제정 하는등 해외 파병의 길을 열려고 무척 노력 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아무 거리낌이 없는 듯 하다. 이제는 북한이나 중국의 상황이 그들을 변신을 시도 하는 좋은 미끼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된다. 일본이 군사대국으로 가는 길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이른바 평화 헌법과 비핵 3원칙은이제 허울만 남은 빈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언제 실행 할 것인지 시기의 선택 문제만 남아 있는 것이다. 군사 대국이 되면 정치 대국은 그냥 된다. 경제,군사,정치대국이 되면다음은 무엇인가. 여기에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존재하는 천황의 권위가 이용 되고 있는 것이다. 현실 정치와는 거리가 먼, 정치에 참여 해서도 안되고 할 수도 없는 신의 영역에 존재 하는 천황을 앞세워, 천황보다 훨씬 더 큰 권력을 가진 현대판 호족들은 그들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 하려고 하고 있는 형국이다. "쇼토꾸"태자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여하튼 19세기말과 20세기 중엽까지 본 제국주의의 최대 피해자이면서 아직도 그 상처의 아픔을 간직 하고 있는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의 가장 큰숙제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한민족의 남북 갈등을 상징하고 있는 비장지대는 일본의 군벌이 뿌린 그 씨앗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非武裝 地帶(DMZ)를 解剖한다.(13)
전회(前回)에 이어 "쇼토꾸"(聖德)태자에 관한 얘기를 계속 하고자 한다. 그가 "律令'(律令)국가의 정치철학을 확립하고 발표한 일본 최초의 헌법 17조문은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군신간의 관계를 하늘과 땅에 비유하여 천황의 절대권을 강조 했으며,이하 신하들의 위계를 정함으로써 체계적인 계급사회의 기틀을 마련 한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 "쇼토꾸" 태자는 정치 분야뿐만 아니라 학문과 지리,역서에도 관심이 많아 섭정 시작년도인 593년에 유명한 사천왕사(사천왕사)를 건립하고 2년 후에는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귀화한 혜초,혜자 두승려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교의 국교화에 박차를 가했다고 한다. 신라와도 불교 교류를 하였는데 불교는 이를 통해 대륙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사태등 대륙사정을 알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이라는 국가를 이끌어 갈 지도 이념이 없던 시대에 안성 맞춤의 사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또 외교에도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AD600년에 중국의 수나라와의 외교를 위해 보낸 사신을 통해 "해뜨는 곳의 天子가 해지는 곳의 天子에게 고하노니....."로 시작 되는 외교 문서를 접한 수(隋)의 양제는 "야만국의 무례"로 격하하고 대노 하였다고 한다.그러나 7년 후인 607년는 "東의 天皇이 西의 天帝에게...."로 시작하는 칙서를 보냄으로써 중국과 통교가 시작 됐다는 기록이 보인다. 얼마나 당당한 외교인가. 당시 동북아의 패권을 다투던 3개국, 즉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중국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흥미롭다. 그는 또 소위 임나 문제로 신라에 파병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때는 이미 신라의 국력이 상승하는 시기 였으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지 4년후 그의 훌륭한 파트너 였으며 "소가 이나메"(稻目)의 아들인 "우마꼬"(馬子)마져 병사하며 그 2년후 "스이꼬"(椎古) 천황도 숨을 거두자 호족들의 세도는 다시 살아나고 그들의 권력 다툼은 천황을 실권 없는 상징으로 만들고 만다. 역사는 훌륭한 한 정치인의 가치를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과 시킨 후 만이 평가 하는가 보다.
"도꾸가와"(德川) 막부가 해체 되고 "메이지"(明治) 유신이 시작된 해로부터 4년 후인 1868년, 정한론(征韓論)의 선두주자인 "사이고 다까리"는 근대 일본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내전인 "세이난"(西南)전쟁의 희생이 되어 죽는다. "사이고 다까모리"는 일본을 근대국가로 이끌기 위한 유신 혁명을 이루기 위해 봉건 막부타도에 일생을 바친 큐슈 남부 "가고마"의 사나이 이다. 그는 정한론을 내세워 또다른 혁명주체와 이견을 보임으로써 마침내는 그의 옛 동지들을 적으로 한 "세이난" 전쟁을 촉발하고 그 전쟁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 한다. 그를 키워준 "가고시마"의 주군 "히사미쓰"로 부터 배신자란 지목을 받아 가면서까지 막부 타도와 유신건설에 매진 하던 그가, 막부타도로 인해 막상 거리로 내몰리게 될 200만 무사족들의 거취에 마음 아파 한다. 그는 혁명가 답지 않게 혁명의 역작용으로 발생한 부산물적 사안에 대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성이 강한 사나이 였다고 한다. 200만 사족들의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 즉 주군에서만 충성하던 무사들을 유신이 됨으로써 당장 소화 할 곳이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 해낸 것이 정한론이다. 그는 파한(派韓) 사절이 되어 서울에 파견될 것을 자청 하였다. 당시 쇄국주의로 빗장을 단단히 걸어둔 조선에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건 것이나 같았다. 만약 조선에서 그를 죽이면 정한론의 명분을 얻게 된다는 점을 배수진으로 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유신 혁명을 한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해외에 파병 한다는 것은 당시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지지를 받을지도 의심되고, 내정도 정비 안된 점을 들어 그와 의견을 달리 하였던 것이다.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 정한론은 혼란했던 그들 내정의 돌파구로는 가장 적합한 것으로 결론을 내놓은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임진 왜란 때도 그들 내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처방책이 조선에 출병 하는 것이었다. 지나간 한일 관계는 고려 시절 원나라의 강요에 못이겨 여몽(麗蒙)연합군이 큐슈에 침범 하였다가 태풍때문에 철수한 것 외에는 일본의 일방적인 침략행위로 점철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담 같지만 메이지유신의 영웅 "사이고"를 가장 존경 했다는 분이 일본의 방위청 장관을 지낸 "나까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였다고 한다. 우리는 그분을 중요한 지한파(知韓派)로 지목하고 몇차례 초청하여 강론행사도 개최 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분과 친하다고 했던 분이 총리직을 역임 한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 하고 있다. 아마도 그분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굳게 믿고 싶은 것이다. "나까소녜"씨는 한일 두나라가 힘을 합쳐 새로운 세기를 개척 해야 한다고 역설 한 것으로 보도 된바 있다.
여하튼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 후 국호를 日本(백제인이 볼때 왜열도는 해뜨는 곳이 된다.)으로 개명하고 한반도와의 인연을 끊으면서 두 나라는 원한의 관계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야마토(큰왜-大倭-다이와) 백제인들은 이렇게 장탄식을 했다고 한다. "아, 오늘로써 백제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말았구나. 이제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곳을 어찌 다시 찾아 볼 수 있단 말인가." 조상과 그들이 뭍힌 땅에 대한, 이 얼마나 애끓는 그리움인가. 한반도에 대한 애착이 탄식과 원한으로 바뀌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한반도 남부에 조상 대대의 삶터를 꾸려온 수많은 백제인들 뿐만 아니라 신라계 혹은 가야및 고구려인등 한민족은 그동안 수백년 동안 왜(倭) 열도와 왕래 하면서 조국과의 관계를 이어 왔건만 이제는 잃어 버린 조국과의 인연을 끊고 그들이 경영 해 왔던 왜 열도를 그들의 조국으로 삼고 새로운 국가 건설의 계를 맞이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반도에 대한 사무치는 원한과 증오를 쉽사리 잊을 수가 있었겠는가. 아마도 후손 대대로 한반도에 대한 정을 전했을 것이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한반도에 사는 우리는 일본인의 영혼 깊숙히 숨어 있을 이러한 역사적 원한을 풀어 주어야 할 방책을 깊이 생각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또한 일본인은 부질없는 우월감으로 역사를 조작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나타내고 가르쳐 "진정한 한일 우호의 새장"을 열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과거 한반도 남쪽에서 역사를 공유한 인연을 현대적 의미의 공존 공영으로 승화 할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반도는 일본인의 성지(聖地)가 될수 있다고 믿는다. 한 반도에는 그들의 과거가 있고 천황의 뿌리가 있으며 그들이 만든 것이나 다름 없는 비무장 지대가 있다. 우리는 그들과 공유 하였던 역사 문화를 정리하고 가꾸어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순례하고 음미 할수 있는,깨끗하고 품위 있는 공간을 갖춘다면 그것이 진정 "역사를 통한 우호"가 아니겠는가.
非武裝 地帶(DMZ)를 解剖한다.(14)
4세기가 다 저물어 가던 AD396년 9월, 왜(倭)열도와 한반도에 새로운 운명이 창조 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 한다. 백제의 응신왕(應神王)이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공격을 받고 일본 열도로 피신 하게 된다. 이분이 바로 일본의 15대 天皇인 "오우진"(應神)왕이다. 응신왕은 황급히 피신함에 따라 근위대와 추종하는 중신들만으로 소규모 선단을 만들어 북큐슈 지역에 상륙한다. 그 이전 수세기 동안 한반도에서 이주한 우리의 조상들은 신라계,백제계,가야게등으로 부족 국가를 이루어 백제로부터 요즘말로 연방제 형태의 통치를 받아 왔던 것으로 역사 연구가들은 보고 있다. 이들은 본국의 백제왕이 갑자기 친히 왜(倭) 지역에 나타난 것을 두고 아연 긴장감과 함께 응신왕을 알현 하게 된다. 이것을 두고 "니혼쇼끼"(日本書記)는 "응신7년(396년) 백제인, 고구려인,임나인,신라인이 응신 대왕에게 와서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 하고 있는 것이다. 얼핏보면 한반도에 있는 신라와 고구려,백제와 가야국에서 일본에 사신을 파견 하여 조공을 바친 것처럼 해석 될수 있다. 일본서기는 720년에 씌어진 일본 역사서로써 그때는 한반도의 백제가 660년에 멸망한지도 60년이 지난 시기임을 참조 할 필요가 있다. 이제 한반도와의 인연과 미련을 모두 잊어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드높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보여진다. 한반도의 국가들과 비교해서 독립적이면서도 우월적인 위치에 놓기 위한 역사 왜곡의 서막인지도 모른다.
일본서기에 "응신7년"이란 년호를 사용한 것은 응신왕이 한반도의 백제에서 즉위한 390년부터 기산한 것이다. 일본에 상륙한 396년 보다 6년전의 즉위 사실을 인정한, 나라(奈良)백제,즉 다이와(큰왜,大倭=大和)정권의 기원이 한반도에서 시작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하튼 390년과 391년은 한민족 역사의 물줄기를 갈라놓은 두 영웅이 출현한 해이다. 390년에는 비류(沸流)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응신왕이 즉위하고 그 이듬해 391년에는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고국원왕의 뒤를이어 받는다. 이때까지 고구려는 요동과 만주에 있던 소규모 부족국가의 형태를 통합하고 동북아에서 중국과 자웅을 겨루는 북방 정책에 치중 해 왔으나 광개토 대왕은 즉위 하자 말자 백제를 겨냥 하는 남방 정책을 한다. 질풍 노도의 전술을 구사하며 용감 무쌍한 군사를 이끌고 이를 앞에서 직접 진두 지휘하는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을 백제의 응신왕이 대적 하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두 왕의 전쟁은 일방적으로 광개토 대왕에게 승리만을 안겨 주었다. 396년 응신왕이 국토와 백성을 포기하고 도망 치듯 본국을 떠나 식민지 왜열도로 피신 하기 전에도, 4~5년간 몇차례 전쟁을 치루었지만 결코 광개토 대왕을 이길수가 없었던 것이다.
응신왕은 광개토 대왕이 있는한 다시는 본국 백제에 돌아 갈수 없음을 알고 식민지 왜 열도의 호족들로 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비옥하고 넓은 땅에 나라를 세우기로 하고 국명을 큰왜(大倭,다이와=大和)라 명명하며 일본 천황국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그곳이 바로 현재의 오오사까 부근의 나라(奈良)시 지역이다. 한반도의 본국 백제에서 왜(倭)를 통치하던 제국의 대왕으로써의 체면이 깍이는 일이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본토에 있는 온조 백제와는 종주국으로써의 종적인 연방 국가 체제에서 횡적으로 서로 협력하는 국가 연합 체제로 바뀌게 되는 전환점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셈이다. 당시 온조 백제의 아신왕은 사력을 다해 고구려 군사와 대적 했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고 항복 하면서, "영원히 노예가 될 것"(永爲 奴客)을 서약 하고 사직 멸망의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한반도의 백제(고구려는 이를 百殘이라 일컬음)와 倭백제는 서로 왕조의 내왕과 교류를 함으로써 후일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 빌미를 주고 백제의 개로왕이 피살되기 까지 한다. 이때 왜백제의 "유라쿠"(雄略)천황은 백제의 建國神인 온조왕에게 제사까지 지냈다고 하는데 이는 한일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아닐수 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3만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침범 했다는 소식을 일본 천황이 듣고 이를 구해달라고 하늘의 천지 신명께 빌었다는 요지로 해석 될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일까.
응신왕이 본국 백제를 버리고 한반도에서 쫒겨간 망명 정권이란 사실을 일본의 역사는 숨기고 있는 것이다. 굳이 캐내려 노력 하지도 않을뿐 아니라 알아도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그 사실 자체가 일본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인지는 몰라도 역사는 사실에 입각 하는 것이지
조작 하거나 숨긴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닌 소설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 역사의 왜곡은 바로 이 부분부터 시작 되는 것이 아닌가 여겨 진다. 우리의역사 쪽에서도 백제의 역사를 비류계와 온조계로 나누어 두 왕조의 실상을 정확히 구분하여야 하며 일본을 직시 하기위한 기본적인 우리의 자세는 왜 열도를 경영하고 건너간 비류 백제의 당시 상황을 가감 없이 드러내야 할 것으로 믿는다. 백제가 한반도 남부에서 본거지를 두고 북으로는 고구려와 자웅을 다투고,서쪽으로는 바다 건너 요동과 산동반도 그리고 양자강 하류의 중국 서해안 일대를 지배 했으며 남으로는 일본 열도까지 식민 경영한 해양 제국이었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은 일반 상식처럼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왕국의 왕이 일본으로 건너가 "다이와"나라를 새로 세우고 일본의 실질적인 천황이 됨으로써 백제의 통치권이 통째로 일본으로 이동한 사실은 백제가 곧 일본이고 일본이 곧 백제라는 사실을 함께 이해 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비무장 지대는 38선이란 한반도의 분단 개념을 그 바탕으로 하여 발생 하였다. 분단 개념의 제공자는 이땅에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적 인연을 가진 국가일 개연성이 높다. 그것은 비뚤어진 욕심일 수도 있고 버리지 못하는 미련일수도 있다. 여하튼 요즘 남북 정상 회담 이후 비무장 지대의 개발론이 심심찮게 거론 되고 있다. 제1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 있던 날,경의선을 복원 한다는 합의가 있었다고 보도 되었다. 끊어진 철길 문산과 장단까지의 12km,그리고 장단에서 북쪽의 봉동까지 8km,도합 20km를 잇는다고 했다. 금년 가을에 착공하여 3년안에 개통 될 것이라 했다. 복원 지역인 비무장 지대와 그 인근에 대한 환경 평가 작업도 끝나 공사에 문제가 없다고 당국자는 발표 하였다. 며칠후 8월4일에는 금년 9월에 착공하여 1년안에 개통 될수 있다고 정정 하였다. 필자가 환경 평가 결과에 대한 질의를 환경부에 내 놓았으나 아직 답을 받지 못한 상태이다. 경의선 복원은 중요한 일이다. 아무도 부인 할수 없다. 그러나 절차가 있다. 기존의 생태 환경이 지속 가능한 상태에서 복원작업이 이루어 져야할 것이다. 산적한 민생 문제를 이렇게 과감하게, 민첩하게 대응 했으면 한다.
무엇이 이 정권을 이토록 급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에 홀려 이렇게도 황급한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일까. 의문의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非武裝 地帶(DMZ)를 解剖한다.(15)
백마강은 백제의 역사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백마강은 곧 금강의 한 부분에 대한 명칭이다. 금강 줄기 중에 부여읍 정동리앞 범바위에서부터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약 16Km구간을 백마강이라고 부른다. 금강의 상류 시원은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사이의 여러 계곡을 발원으로 하여 북쪽으로 흐르면서 부근의 제 지류를 합치고 공주, 부여, 강경을 지나며 큰 강줄기를 이룬다. 강 줄기는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경계를 만들고 하구는 장항과 군산 두개의 항구를 이루어 놓은 후 서해 바다로 접어든다. 백마강으로 불리는 부분의 강변에는 천정대와 범바위로부터 시작되어 낙화암과 조룡대 (용암-龍岩)-부산(浮山)과 대재각-엿바위(窺岩)와 자온대-정암(亭岩-맞바위)과 요월대지-황바위 (북고리 나루)와 두남진(斗南津)-인강사지와 희어대, 파진산 등의 경관이 아름다운 사적과 명소가 계속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 고유의 기와 형태의 단아한 한옥 숙박시설이 띄엄 띄엄 숲속에 위치 한다면 얼마나 멋있는 관광지가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백마강은 백제의 역사가 구비칠때 마다 등장하는 백제의 역사와는 뗄래야 뗄수 없는 지명이다. 응신왕(應神王)이 일본으로 건너감으로써 백제의 대왕이 식민지 왜(倭)에서 "오우진"(應神)천황이 되어 통치권을 행사하고 큰왜(大倭,다아와)정권을 세웠다는 말은 전회에 하였다. 응신왕은 한반도 백제를 탈출 할때 고구려의 침공을 위해 준비해둔 군선을 타고 망명 할때도 백마강을 빠져 나갔다. 광개토 대왕이 백제를 공격할때 흔히하던 육로를 택하지 않고 이번에는 해로를 통해 백마강에 상륙 하였다. 응신왕의 주력부대가 북쪽의 고구려와의 국경 근방에 진을 치고 있을때 광개토 대왕은 그 허를 찔렀던 것이다. 응신왕 도왜(渡倭) 이후 약 260여년이 지난 660년 당나라의 군사도 신라군과의 약속에 따라 이 강을 따라 침공 하였으며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을 따른 수많은 궁녀들도 이곳 백마강 기슭의 낙화암에서 몸을 날려 최후를 마친 슬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백제 항복의 소식을 받은 왜(倭)의 야마토(大和) 정권은 천황인 "사이메이"(齊明)천황의 명을 받들어 "나노쓰" (娜大津,지금의 "후꾸오까")항에 군선을 건조 하는등 백제의 구출을 위해 대규모 반격 작전을 준비 한다. "사이메이" 천황은 의자왕의 친누님 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백제 광복을 보지 못하고 662년 68세를 일기로 눈을 감지만 백제 복국(復國)을 유언으로 남길 만큼 한반도의 백제에 대한 관심이 컸었다. 일본 조정도 후임 천황의 즉위까지 뒤로 미룬채 백제 광복 전쟁을 준비 하였다. 마침내 663년 6월 400여척의 군선에 나누어 탄 2만 7천명의 야마토 지원군은 백마강에서 당군과 혈전을 벌렸지만 참패하고 만다. 백제 광복군과 야마토 지원군의 잔류 부대는 그해 가을 식량이 떨어지고 마지막이 다가오자 당군을 향해 돌격 하면서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 이는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과 그의 5천 결사대가 최후를 맞이 하는것과 같다. 태평양 전쟁때 "카미카제" 특공대나 남태평양 외딴섬의 자살 절벽을 연상 하게 되는것은 유독 필자만의 느낌일까. 여하튼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한국사의 거대한 물줄기의 방향을 바꾼 전환점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계백 장군의 사당을 만든다던가,백마강 주위의 사적들을 "일본인을 염두에 둔" 역사 관광지로 복원하여 그 역사적 가치를 발굴 보존하는 슬기를 촉구한다. 이것이 일본인과 과거 역사를 공유한 인연을 바탕으로 한 이해와 우호를 기대 할수 있는, 서로의 윈윈 전략을 추구하는 실질적인 한 방법이라고 확신 한다.
일본 서기는 백제 멸망 년도를 660년으로 보지 않고 야마토 지원군이 백마강 해전에서 패배한 663년으로 기록 하고 있다. 3년간에 걸친 백제 광복 전쟁은 상상을 초월하는 처절한 저항 이었다. 그 전쟁 이후 3100명에 이르는 백제의 지배층이 일본으로 이주 하고 일본 본토에는 신라와 당나라의 침략이 있을 것을 예상 하여 성(城)을 축조 하기도 한것은 한반의세력에 의한 피해 의식이 어느 정도 였는가를 가늠케 해준다. 일본 서기의 기록에는 백제의 왕에 대한 이야기로 점철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은연중에.신라를 증오하고 적대시 하는 글귀가 많다. 이 역사서가 백제가 멸망의 충격후 새로운 국가 건설을맹약 하고도 60년이 지난720년 경에 만들어 졌으니 중국의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케 한 신라를 염두에 두었으리라는 유추가 크게 무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책에는 왜(倭)가 가야를 복속시키고 신라 영토를 침범하여 편입 시켰다.는 글귀등, 倭가 많이 등장 하지만 여기서 倭라는 의미는 연방국 시대의 백제를 지칭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일본의 고대사가 한국사에 편입 되는 단초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고분을 발견 했다 하면 대부분 한반도와 관련된 것들이다. 고분에서 출토 되는 문화재,유품,부장품은 한반도의 것과 같고 고분의 주인도 백제와 가야인등 한국인들의 조상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아무런 이해나 관심이 없다면 예민하고 섬세하기로 이름난 일본인들의 보통 상식과는 거리가 먼 일이 아닐수 없다.
일본은 우리에게 애증(愛憎)이 교차 하는 대상임에 틀림 없다. 일본도 그렇게 생각 하는지도 모르겠다. 약 100년전 조선조 말에 일본은 "조선을 그냥 두면 러시아나 다른 외부 세력에 의하여 병합 될것이니 일본의 안위를 위해서 한일 합방은 불가피한 조치이다"라고 강변 하였다. 우리는 흔히들 극일사상을 논한다. 지나간 역사가 그러 했으니 그러한 생각은 당연하다. 그러나 극일은 구호와 생각만으로는 이루어 질수가 없다. 행동의 뒷밭침이 없는 사상은 空論에 불과하다. 일본은 이제 우리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 물론 기우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뜻있는 분들은 극일의 3대 요건으로 경제와 기술 그리고 군사의 "일본 수준화"이다. 이것은 시간이 걸리는 어려운 일이지만 일본과 선의의 국제경쟁과 대등한 상부상조를 염두에 둔, 우리가 지향 해야할 원모심려(遠謀深慮)임이 틀림없다고 본다. 지난 97년말 IMF체제 이후 기업,노사,금융,공공부문의 4대개혁을 목이 쉴 정도로 외쳐 댔지만 3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 과연 무엇이 제대로 됐는지 깊이 반성 해볼 일이다. 최근엔 현대그룹의 자금사정은 문제 없다고 정부 당국자가 말하고 있다.정작 현대그룹의 경영진들은 그룹위기에 뒷짐을 지고 있는듯 하다. 그럼 현대 그룹의 경영은 누가 하고 있다는 말인가. 뭔가 뒤죽박죽된 느낌이다.
일본의 유명한 기업 총수와 평론가는 한국의 산업 기술이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의 만년 하청국이 될 것이라고 충고 해주고 있는데도 관련당국과 당사자인 기업들은 마이동풍인것 같다. 우리의 상품 수출이 늘어나면 대일 무역 적자가 비례 한다는 말은 수십년 전부터 들어 왔다. 금년 7월말 현재 대일 무역 적자가 무려 70억불에 달한다는 것은 다른데서 벌어 들여 일본에 갖다 바치는 격이다. 이 왜곡된 산업 구조를 알고서도 고치지 못한다면 국가기관의 존재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부품의 자급자족을 위한 중소기업을 육성하고 이들 산업 인재를 확보 하기위한 교육 정책을 수립 하는등 종합적인 처방책을 내놓는 보도를 보지 못했다. 오죽 답답 하면 일본인 스스로가 우리에게 대놓고 훈수 하는 것일까. 그래도 당국은 아무런 수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듯 무감각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중소 기업청이 있지만 상호금고 수준의 대출 업무나 심사하는곳이 아닌 진정한 중소기업 육성처가 되었으면 좋겠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장관 자리에 누가 앉는지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우리 언론에서도 알았으면 한다. 언론의 사명에도 우선 순위를 두어 국리민복이 그 으뜸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 하다.
국가 경영의 또다른 표현인 정치의 현실은 우리에게 더욱 암울한 전망을 내 놓는다. 집권 여당은 밀실에서 차기 정권의 대권을 두고 야합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배다른 형제들이 있는 한 재벌가의 대표를 두고 흥정을 하는듯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국가 미래의 비젼 이라던가 민족 장래의 활로 개척 보다는, 소외 받고 있는 서민들의 원성과 박탈감에 허탈해 하는 빈민들의 신음 소리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오로지 정권 재창출의 꼼수에만 골몰하고 있다. 자유,민주,복지의 균형 사회를 가져다 줄 큰 정치는 우리에게 언제나 올 것인가.
非武裝 地帶(DMZ)를 解剖한다.(16)
오늘 8월 15일 광복절에는 서울과 평양에서 실로 눈물 없이는 볼수 없는 감격적인 남북 이산 가족들의 만남이 있었다. 지난 6.15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 정신에 따라 이루어진 이번 상봉은 남과 북에서 각각 100명씩의 한정된 인원 이었지만 7천만 온겨레가 지켜본 남북 전체의 만남 이었다. 아니 온세계가 지켜 보고 박수친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가 아닐수 없었다.북에서 50년만에 어머니를 찾아 남쪽에온 아들은 어머니를 부등켜 안고 어머니를 마음껏 불러 보면서 오열 하였다. 그리고 "누가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눈물을 닦으며 울부 짖었다. 우리는 모두가 눈시울을 적시고 한없는 기쁨을 함께 맛보았지만 한편으론 이 어처구니 없는 모습에 저 아들이 외쳤던 것처럼 누가 이러한 비극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는지 생각하게 된다.그리고 분노 하게 된다. 6.25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남북의 분단의 단초는 누가 제공 했는지 우리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또 보아야 할 것이다. 또다시 이러한 비극을 자초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사가 있을 적에는 어김없이 "우리의 소원"을 합창 하게 된것이 하나의 자연스런 관습이 된지 오래다. 남에서도,북에서도, 그리고 일본과 미국의 교포 사회에서도 이 노래를 부를 때는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때의 마음과 정신을 살려 이산가족의 만남을 정례화 하고 만남 자체도 거추장스러운 형식들을 거두고 순수한 가족들간의 모임이 되도록 고쳐 나가고 상봉의 범위도 확대해 나간다면, 이것이 진정 통일로 가는 디딤돌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광복 55주년을 맞이 하면서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와 고통에 신음 하는 많은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볼수 있다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이 얼마나 지독 했고 식민통치의 뿌리가 얼마나 깊었나를 역설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일본은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국가중의 하나로써 연합국에 의해 철저히 파괴 되었다가 50년도 채 안돼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다시 우뚝 세계 무대에 서게 되었다. 일본은 21세기 새 시대를 맞아 그들 국가 진로에 관해 복고풍의 우익적 요소가 강한 쪽으로 기울어 지는 듯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도꾜시 중심부에 있는 "야스꾸니"(靖國)신사(神社)를 일본 정치인들이 방문 하는 것을 두고 인근 국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수상이던 "도죠 히데끼"등 전범들의 위패(慰牌)를 보관하고 있는 이곳은 우익적 애국심이 진하게 묻어 나는 일본 특유의 이기적 단결을 호소하는 상징적 장소 이기도 하다. 그들의 침략으로 희생된 수많은 인근 국가의 피해는 묻어 둔채 자신들의 피해적 요소를 부각 시키는 행사장 이기도 하다. 금년은 작년 보다 특이하다. 배우적 성격이 강한 "이시하라" 도꾜 도지사는 "왜 갈수 없단 말인가"하고 오히려 반문 하고 있는데 대해서는 할말을 잊게 된다. 그는 공적 자격이던 사적으로던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히스테리성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마침내 그는 공인으로써는 처음으로 이곳을 찾는 도꾜 도지사가 되는 기록을 갖게 되었다. 그뿐 아니다.많은 정치인들을 비롯한 과거 향수에 젖은 우익 인사들이 일장기를 흔들고 기미가요를 불렀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내년에는 수상이 공식적으로 참석할 것이라는 보도에 주위 국가들이 우려의 눈길을 주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일본은 과거의 추악했던 군국주의 시절에 저지른 죄악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을뿐 아니라 인정도 하지 않으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원자탄으로 피폭 당한 최초의 국가가 된 것을 전쟁의 피해자 인양 오히려 피해 의식에 젖어 있는 것 같다. 뼈아픈 과거 반성이나 자기 성찰 없이 그들은 또다시 군사 대국에의 길로 들어 서고 있는 중이다. 2차대전후 일본을 조정 할수 있었던 미국은 50년이 지난 아직도 일본에게 영향을 줄수 있는 유일한 초강국이지만 가변적일수 밖에 없는 국제 관계는 이러한 입지에 변화를 초래할수 있다는 가상이 필요하다. 일본이 교전권을 부인한 헌법의 개정은 이미 시간문제 일뿐 아니라 비핵3원칙을 고수 한다고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보유할수 있는 기술적, 경제적 잠재력을 유지하고 있다.그들이 군사,정치대국으로 가는 필수의 코스인 셈이다. 일본이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유지 하는데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미국, 유럽과의 파트너쉽에 손상을 주면서까지 그들의 군사,정치적 팽창을 할것인가 하는 시각이 5년전만 하더라도 미국의 일각에서 보는 시각이었다. 경제력에 걸맞는 지구적 문명강국이 될것을 세계가 원해 왔었다. 그러나 새천년이 시작 되는 21세기에 들어 와서는 미국자체에서 일본이 10년안에 핵무장을 할것으로 보고 있다는 전망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시하라"와 같은 과거 지향의 국수주의자가 도꾜도 지사에 당선되는 정치풍토는 일본내에 있는 수많은 지식인과 과거를 반성하는 일본의 양심을 짓밟는데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못 하는듯하다. 핵을 가지게 될 경제,정치,군사 대국으로의 국가적 목표를 수립하고 그길로 총매진하는 인상을 주는데 거리낌이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뼈를 깎는 반성과 보상도 없이, 미래에 대한 평화와 공존공영의 비젼 제시도 없이,일본은 또다시 집단적이고도 공격적인, 그러면서도 이기적이고도 편협한 과거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는 오늘이다.
중국은 이미 세계5대 핵강국 중의 하나인 정치,군사 대국이다. 지금은 미국도 경계하는 경제 대국을 향해 총 매진중이다. "현재 대로 경제 성장을 계속 한다면" 이란 단서가 붙긴 했지만 2020년 경에는 미국의 GNP를 능가할 것이라고 미국은 예상 하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미국은 새로운 세기의 잠재적인 제1의 주적으로 중국을 지목하고있다. 이점은 일본과도 공통의 분모를 보이는 대목이다. 중국은 과거 한때 동북아의 패권을 두고 우리 한민족과 다투어 온 고대 역사를 갖고 있다. 만주 즉 지금의 중국 동북3성인 요령과 길림,흑룡강성 지역을 두고 중국의 한족과 우리는 치열한 전쟁을 벌여 왔던 역사를 갖고 있다.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를 굴복 시킨 고구려 시대와 발해 때만 하더라도 그곳은 당당한 우리의 영토 였지만 중국의 천년에 걸친 끈질긴 전략은 우리를 한반도 안으로 밀어 넣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저 넓은 만주에 살던 거란,여진,말갈의 소수 민족들을 모두 동화해 버린 또다른 천년이 지난 오늘, 중국은 동북아의 명실상부한 승자가 되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한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만주는 그만큼 중요한 지역이라는 것이 한중간의 역사를 보는 포괄적인 견해의 핵심이 아닌가 한다.
북한 핵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는 요즘이다. 미국이 동북아의 안정을 내세워 북한의 핵보유에 초미의 관심을 쏟고 있으며 일본의 자국보호 측면에서 북한의 핵보유를 필사적으로 거부 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민족이 핵을 보유하는 것이 당연 하다고 보는 시각이 주위 어느 곳에서도 보이진 않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외침을 받은 한민족으로써는 생존과 직결된 자주방위를 위한 핵을 갖는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인지 아닌지는 연구해볼 과제가 아닌가 한다. 구라파의 영국과 프랑스가 같은 정치체제이면서도 나란히 핵을 갖고 있으며 미국과 쏘련이 다른 정치 체제이면서 핵으로 냉전속의 평화를 유지했던 사실을 유념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핵은 어느 누구의 독점물이 아니라고 해서 누구나 가질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한반도의 역사성은 핵보유로 인한 전쟁 억지의 논거를 제공 하는데 필요 조건을 성립 시키는 것이 아니냐 하는 점에 유의 하고자 한다. 주위의 정세는 당장에 핵을 갖지는 못할 지라도 일본과 같은 수준의 언제라도 필요하면 가능한 기술력과 경제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엿보이게 한다. 또다른 피지배, 분단, 비무장지대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라도.
非武裝 地帶(DMZ)를 解剖한다.(17)
1910년도에 있었던 한일합방을 두고 일본 정치인들은 곧잘 "만약 그때 일본이 하지 않았더라면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열강에 의해 병합 되었을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의 이면에는 "한반도를 러시아 혹은 청나라의 지배를 받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느냐"라는 뜻이 내포 되어 있다. 또는 "우리 일본에 의해 지배 받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 않느냐 " 하는 뜻의 뉴앙스도 엿보인다. 그렇다면 한일 합방 이전의 을사보호조약이나 일노 전쟁, 일청전쟁 모두가 한반도를 타 세력에 결코 내줄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해석 할 수 있다. 한반도와 거기에 사는 한민족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도록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일본이 대신 보호해준, 한민족에 대한 일종의 갸륵한 마음씨의 발로로 해석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뜻이 숨어 있다. 그렇지만 불행 하게도 이상의 모든 가설은 성립 되지 않는다. "메이지"(明治) 유신이 시작되고 8년 만인 1876년 인천 앞바다에 함포를 조준한 채 조선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고 제일 먼저 군화발의 위력을 실험 한곳이 한반도이다. 그리고 제일 먼저 희생양으로 삼은 대상이 한민족이다. 그것은 그들의 오랜 숙원인 정한론(征韓論)의 논리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인 가운데는 한반도의 모습을 "일본열도의 복부를 찌르는 흉기"로 표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피해의식의 발로가 아닐수 없다. 어쩌면 일본인 영혼 저 멀리 깊은 심부(深部)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피해의식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한반도가 일본의 적대적인 세력에 의하여 점령되면 일본의 자위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군사적 물리력을 사용 하여야 한다는 한반도 침략 론을 정당화 하기 위한 작위(作僞)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물론 가상이지만 앞으로도 한반도에 또다시 100여년전과 같은 상황이 일어난다면 그 원칙(?)은 유효하다는 뜻으로도 들린다. 이러한 생각은 일본의 정치인뿐만 아니라 학자나 군인,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우익적 사고를 가진 모두에게 골고루 인식되고 있는 일본의 대한반도 관(對韓半島觀)이라고 해도 과장은 아닐 성 싶다. 아마도 이것은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서로를 예민하게 대응하는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두 나라의 고대사에서는 반목과 타협, 전쟁과 평화, 정복과 굴복, 망명과 새 출발이 서로 교차되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역사를 공유하던 700여년동안 이러한 상황들이 빚어내는 배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 결국은 일본열도로 갈라서게 되는, 새로운 두 민족이 되는 숙명을 만든 원인인지도 모른다.
흔히들 가야왕국을 사라진 왕국이라 부른다. 잃어버린 역사라고도 지적하는 경향이 있지만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니호쇼끼"(日本書記)는그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찾아내주고 있다. 그리고 사라진 왕국이 일본서기에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부실했던 백제의 역사까지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일본서기에 기록되고 있는 천황가의 연대표등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는 것을 일본 전문가들도 지적하고 있지만 고치지는 않고 있다. 불확실한 점들을 인정 하면서도 당시의 고대사는 신화나 설화시대라고 주장하면서 역사의 정정이 불가능하다는 쪽으로 기울어 왔다. 일본의 역사가 한민족 역사의 일부라는 것은 천손(天孫)의 나라, 신(神)의 나라라는 국수적 황국사관이 수용하기 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일본의 고대사는 우리의 가야 사(伽倻史)이며 또한 백제 사(百濟史)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시원은 가야가 건국하고 백제가 경영하였기 때문이다.
도꾜대(東京大)의 인구 학자에 의하면 AD700년경의 일본 죠몬(繩文)계와 이주(移住)계의 인구비가 원주민 3.,8%로써 206,046명이고, 이주계가96.2%로써 5,193,754명으로 발표된바 있다. 죠몬계란 "죠몬"시대로 구분되는 기원전 3,500년 내지는 5,000년전부터 열도에서 바닷가의 수렵채취로 살아온 "아이누"족이라 불리 우는 원주민과 남방계 도서 원시 족을 말하는데, 이점만 보더라도 한반도로부터 이주한 사람의 인구가 월등한 것이다. 1992년 일본의 역사학자 "이시와따리 신이치로"(石渡信一朗)의 연구에 의하면 기원전후 수세기 동안 한반도에서 이주민이 현대 일본인의 조상이라고 전제, 고대 일본어는 한국어이고 천황가도 한반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 시대 때에는 일본에 이주한 숫자에 대하여 아주 무시할 수 있는 소수라는 학설이 일반론이었다고 한다. 2차대전후 황국사관의 잠에서 깨어난 뒤부터는 솔직한 학설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인류학자 "하니하라"(埴原和朗)같은 사람은 위의 연구가 과학적 논거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는 추측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주민이 훨씬 많더라도 그 사람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한반도를 경유한 아시아 대륙 혹은 동북아의 다른 이주민들이라는 옹색한 논리를 펴고 있다. 이와같이 일본은 한국으로부터의 문화전수를 시인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또한 한국으로부터의 도래인 임을 인정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인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역사서에는 신라와 백제, 고구려인들이 음식과 의복이 같을 뿐만 아니라 같은 제례와 풍속을 갖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다만 백제인은 왜와 가까워 얼굴에 문신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남자의 얼굴에 있는 문신의 크기와 문신의 위치가 얼굴 좌우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존비(尊卑) 차이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아직도 동남아 오지에 남아 있는 미개인들의 얼굴 문신들을 연상해 보면 쉽게 이해되리라 믿는다. 원주민의 하나인 남방계의 도서 원시 족과 교유한 일부 백제인 들의 기호행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왜 열도를 정복하고 경영한 백제인 들의 현지 문화에 대한 기민한 적응성을 엿보는 같아 흥미롭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현대의 일본인은 한국인과 같은 뿌리임을 시인하기를 어려워 한다. 일제시대 때는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동조(同祖)와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의식를 강요 했으면서도 말이다. 한마디로 유리한 경우에는 한 뿌리 역사가 적용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 반대이다. 그것이 일본이 가지는 대한민족 관(對韓民族觀)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주한 한민족이 원주민을 제치고 급속도로 일본의 지배계급으로 성장한 것이 일본인에게 그렇게도 굴욕적인 것이라고 보는지, 일본 민족의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만드는데 고대역사의 한 뿌리가 그렇게도 걸림돌이 된다는 말인가. 한민족과 일본민족은 이제 아무 장애 없이 그들 각자의 정체성(正體性)을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수도 없다.다만 正論과 正筆, 그리고 正史가 역사의 본질이기에 이를 왜곡한다면 역사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혹시 일본의 일부 세력이 한반도의 백제 멸망이후 한반도의 영토를 빼앗겼다는 역사인식 위에 고대사에 대한 역사관이 긍정과 부정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아닐까.
非武裝 地帶(DMZ)를 解剖한다.(18)
퉁구스, 몽골, 터키 3족을 알타이족이라고 부른다. 우리민족의 발상지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알타이 산맥의 서쪽이라고 한다. 아마도 기원전 3~4천년 경부터 터키는 산맥 서쪽으로, 몽고와 퉁구스는 알타이 산맥 동쪽으로 민족의 대이동을 시작 한 것으로 추정한다. 몽고는 현재의 몽고 지방에 안착하며 퉁구스만이 해뜨는 동쪽을 향해 고비사막을 지나고 험준한 흥안령 산맥을 넘어 만주 벌판에 머물면서 고조선의 모체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Tungus가 중국식의발음으로 Tungi가 되었다가 이것이 우리민족을 지칭하는 동이(東夷)족으로 굳었다는 학설이 신빙성을 더해주기도 한다. 고조선은 처음에 부족국가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광대한 만주 지역에서 부족국가의 연합체를 형성하고 나아가 성읍(城邑)국가, 고대국가의 형태로 발전되어 갔다. 한편 중국 대륙에서는 기원전 8세기 중엽부터 5백여 년간 춘추전국시대의 전란기와 진시황의 중국통일, 그리고 또다시 분열과 漢武帝의 등장 등 일련의 격동과 전란의 과정은 동쪽에 있던 고조선 왕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철기시대의 등장과 함께 농업의 생산과 무기의 급변은 전쟁의 양상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실력자들이 자신의 영역을 새로이 만들고 지키는 과정에서 분열을 시도 하는 유혹을 주기에 충분 하였다. 고조선도 3개의 조선으로 갈라져 馬韓, 辰韓, 弁韓으로 불려지면서 만주 지역에 잔류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전란을 피해 혹은 좀더 평화롭고 따뜻한 지역을 찾아 한반도로 이동, 三韓시대를 열었다는 것이 고구려, 신라 백제로 대표되는 삼국시대 이전까지의 대체적인 우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수로 왕은 변한 지역인 낙동강 하류 지금의 김해 지방에 가야 왕국을 세우고 158년이 지난AD199년에 사망 했다고 한다. 수로 왕이 158년간 왕위에 있었다고는 믿지 못한다. 아마도 수로 왕으로 대변되는 9대의 왕들을 통칭한 것이 아닌가 한다. 여하튼 수로 왕이 죽은 다음해부터 신라에 화평을 제의하고, 이어 212년에는 왕자를 신라에 인질로 보냈다는 기록을 끝으로 가야에 관한 이야기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가 거의 300년간의 침묵이 있은 후인 490년경에 대가야(지금의 고령지역)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가야국은 낙동강 상류에서 하류에 이르기까지 주로 서쪽 강안(江岸)에서, 통상 6가야라고 불리는 6개의 성읍국가 내지는 부족국가로 형성 되었지만 보통 금관가야(김해지방)와 대가야(고령지역, 任那, 彌摩那, 彌烏耶馬國)로 대별된다.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서 "실제로 나라를 세운 군왕"이란 뜻의 조국군왕(御肇國君王)으로 표시하고 있는 11대 천황인 "스진"(崇神)천황의 본명은 미마키(御間城)라고 불렸으며 가락국중의 하나인 미오야마국(彌摩那國, 큰 의미에서의 가야왕국)에서 건너간 가야인이며 왜 열도에서 최초의 국가라 할 수 있는 야마타이 국을 건국한 일본 천황가의 시조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더욱 정확한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사항이지만 한일 두 나라의 집중적이고도 적극적인 연구가 뒤따른다면 훨씬 쉽게 해결 될수 있는 문제라고 보여 진다. 일본의 사학자 "에가미"(江上波夫)씨가 근년에 주창한 일본 민족의 이른바 "기마 민족설"에서는 이 "스진" 왕이 "미마나"의 땅에서 일본열도로 진공하여 처음으로 정복왕조를 세운 왕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일본의 天孫降臨神話가 수로왕 강림신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여기서 참고로 하여둘 것은 임나(任那)의 일본식 발음은 미마나(彌摩那)로 읽으며 미마(彌摩)의 뜻은 왕을 가리키고 나(那)는 터, 땅을 의미 한다고 한다. 경북 고령지역에 있던 미오야마국(彌烏耶馬國)이 줄여져 미마나와 같은 뜻으로 해석되고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타이 국(耶馬台, 야마터) 그리고 5세기 초에 나타나는 야마토(大和)로 변천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의 언어와 글의 변천이 이두식 표기법을 포함해서 수백년 세월이 흐르고, 다른 문화적 지리적 배경에서는 이와 같은 정도의 변화와 해석이 전혀 근거 없다고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본다. 현대의 정보화 사회에서도 남북이 불과 50년 정도 떨어져 살았지만 언어의 이질화를 걱정하고 있는 형편임을 감안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영어와 미국영어, 호주어가 조금씩 다르듯이 문화의 진보 속도를 감안하면 고대와 근대의 차이는 100년과 10년으로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만 "야마토"가 大和와 동일하게 사용된 점을 다음에 설명 하고자 하며 이에 대한 한일 양국의 전문적인 언어학자들의 연구가 좀더 필요하다는 점을 첨언한다.
일본서기에 "야마타이"(야마뙤, Yamadae, 耶馬台)국이 3세기 초에 나타나는 것과 삼국사기에서 가야에 관한 기록이 212년에 끊어지는 것과는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의 사서에도 "2세기 말, 왜국에 큰 병란이 일어나다."라고 기술할 정도로 왜 열도에 존재한 수많은 부족 국가들끼리의 패권다툼이 있었던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AD1세기경에 저술된 중국의 역사서 한서(漢書)에 "왜(倭)의 100余 國" 이라고 언급 하였을 정도로 왜의 열도에는 많은 부족 국가들이 그들의 영역을 만들고 국가의 통치형태를 갖추었던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가야를 포함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4국 시절 훨씬 이전부터 한반도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갔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이를 증명하는 유물들이 발견 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 유물로 추정되는 칠초 동검(漆肖銅劍)이 경남 창원군 차호리의 1호 고분에서 발견 되었는데, 이는 일본 서부 지역의 "사가"(佐賀懸)의 "요시노가 사토"(吉野理)의 유적과 意匠面 혹은 제조 기술면에서 똑 같은 것으로 판명 되었다. 또한 철편 혹은 청동 조각들이 일본 열도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드러난 것은 한반도에서 오랜 세월동안 주거하다가 어떤 동기가 주어져 자의 혹은 타의로 일본열도로 새 삶을 찾아 건너간 것으로 풀이하기에 충분하다. 일본의 어느 사학자의 주장처럼 아시아대륙 혹은 동북아 어디에서 일본열도라는 지점을 염두에 두고 또 목표로 정해서 한반도를 경유했다고는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三韓시절의 한반도에도 마한, 변한, 진한 지역에 수십 개의 부족내지는 성읍국가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각각의 정체성을 가지고 일본 열도에 건너감으로써 거기에도 마찬가지의 국가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기원전 2~3세기 중국에서 시작된 철기문화는 한반도의 여러 부족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농경의 수단과 결과가 획기적으로 달라지고 무기의 발전은 전쟁의 양상을 다르게 만드는데 충분하였을 것이다. 절대적인 권력자가 생기고 농경지의 독점과 노예가 생기는 등 빈부의 격차가 있었다고 유추 할수 있다. 소외된 계층은 새로운 농토를 찾아 또는 새로운 삶을 찾아 왜 열도로 옮겨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날씨가 쾌청한 날 부산과 경남 해안 지방에서 우리는 대마도를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렵지 않다. 이주한 한반도인들이 미지의 땅에서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단결하여 부족을 이루고 국가의 형태를 만들어 갔다는 사실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해석이다. 이러한 시기에 강력한 철기를 다루는 가야국의 미오야마 세력이 이들을 정복하고 통합하여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때가 AD212년 가야가 한반도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일본의 역사서에서 야마타이 국으로 등장하는 시기와 동일함이 위의 여러 가지 사실들이 말해주고 있다. 더우기 중국의 사서 魏誌에 "왜국에 큰 병란이 일어나고 이 전란을 통해. AD3세기 전반에 나타난 "야마타이 국(耶馬台國)이 倭의 28개국을 복속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때 가야의 주력이 일본 열도에 건너가 왜의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가야의 지배층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고서야 망하지도 않은 왕국이 200년 가까이 한반도 남쪽에서 국가를 영위하다가 갑자기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질 리가 없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는 이 사라진 왕국을 前期加耶라고 부른다.
이미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일본의 天孫降臨과 가야의 天降卵生 신화가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은 일본 천황의 시발을 가야 수로왕의 설화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고 믿는 학자들이 많다. 설화에 의하면 수로 왕과 天孫 "니니기" 둘다 하늘에서 내려왔고 보자기에 싸여 있었으며 수로왕은 구지봉(龜旨峯)에, 니니기는 "구지후루"에 내려왔다. "후루"란 일본어로 "내린다"는 뜻이다. 가야 사를 연구 하였던 故 천관우씨에 의하면 구지후루의 일명인 "소호리"는 古語인 "소부리"ㅡ"서벌"ㅡ"서울"을 뜻한다고 하였고, 수로왕의 10남2녀 중의 한 아들인 거칠군(거칠君)의 "漆'자를 천손강림 설화에서 "소호리"라고 읽는다고 했다. 또한 일본의 天孫 "니니기"가 하늘에서 하강할때 天神"아마테라스"가 딸 셋을 내려보내 길잡이를 시켰다는 일본의 건국神話가 있다. 현해탄에는 대마도에서 일본 열도 쪽으로 오키섬(沖島)이 있고 그 남쪽에 오오 섬(大島), 그리고 그 남쪽 후꾸오까 해안에 무나카다(宗像)의 세곳에 宗像三社라 불리는 신사에는 이 세 여신에 대한 제사가 오늘날에도 치러진다고 한다. 이 신화는 한반도 남쪽 해안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대마도를 거쳐 큐슈로 가는 징검다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앞으로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 하겠지만 가야왕국과 일본의 건국 설화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지금까지 밝혀진 사료들만으로도 일본의 건국에 가야왕국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일본은 가야가 건국한
非武裝 地帶(DMZ)를 解剖한다.(19)
일본의 첫째 천황인 "진무"(神武)왕으로부터 33대 "스이꼬"(推古,AD592~628)천황까지 1,260년간을 일본 학자들은 상고 왕조사라고 하지만 진무왕대가 일반적으로 600년 이상을 소급 기술하여 가공적으로 조작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황국사관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해 33대 스이꼬 천황대의 년력은 정확하게 하고 위로 갈수록 갑자력(甲子曆, 1周甲=60년)을 늘려 길게 잡는 방법이다. 그러다 보니까 9대왕까지의 재임 기간이 총 630년이나 되어 1대 진무 왕과 7대 "고래이"(孝靈)왕은 각각 75년간, 6대 "고오안"(孝安)왕은 무려 100년간 재임하는 웃지못할 년 대표가 되었다. 초대 진무왕은 10주갑 이상 즉 600년 이상을 소급하고, 10대의 "스진"(崇神)천황은 5주갑 300년 이상을 소급 늘려 잡았다. 스진 왕의 즉위 년도를 기원전 97년이라고 일본서기에서는 기록하고 있지만 5주갑 300년을 감안하면 3세기 초반이 된다. 15대 "오우진"(應神) 천황은 2주갑 즉 120년을 소급하여 년 대표를 만든 것이다. "오우진"(應神)천황의 즉위년도는 AD270년으로 일본서기에서는 기록되고 있지만 응신왕은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으로써 390년에 즉위 하였다. 그리고 391년에 즉위한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과 수차례 전쟁을 치루었고 396년에는 결국 왜(倭)열도로 망명한 바로 그분이다. 비류(沸流)백제가 한반도에서 사라진 해이기도 하다. 초대 진무 왕으로부터 9대 "가이까"(開化)천황까지는 설화 차원의 가공인물인 것으로 보이지만 가야왕국의 수로 왕 이후, AD212년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질 때까지 9대왕의 역사를 모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前回에 다룬 바와 같이 천손강림 설화라던가 10대 "스진"(崇神) 천황이 왜 열도에서 야마타이(耶馬台) 조정을 세운 배경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가야 왕국의 지배층인 주력이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옮겨가자,
가야의 영토와 주민은 세력의 불안정 속에서 결국은 그 당시에 한반도 남부에서 강성한 왕조를 유지하던 백제의 영향 하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신라는 경주일대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동남쪽 즉 조령(鳥嶺) 이남과 낙동강 동부지역에 국한된, 백제와 고구려에 비하면 빈약한 국력의 소국이었다. 신라가 한반도 남부에 강자로 등장한 시기는 6세기 초 진흥 왕 등장 이후이다. 그 이전까지는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고구려와 백제의 끝없는 전쟁 속에서 어부지리의 평화를 누렸다고나 할까, 때로는 고구려와 연합을, 때로는 백제와 동맹을 맺으며 명맥을 유지 하였다. 고구려의 공격이 있을 때는 백제와 동맹을 맺어 대항 했고, 백제의 팽창에는 고구려의 도움을 요청 하였다. 여하튼 前期가야 이후는 백제가 낙동강 상하 류의 서부지역과 경남의 남해안 일대를 전부 장악하다 보니까 자연히 가야가 왜 열도를 다루며 걸어갔던 길을 뒤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백제의 왕족등 지배층이 왜 열도에 대하여 가지는 관심이다. 물론 왜 열도에는 신라계, 가야계 그리고 백제계와 고구려계의 사람들이 건너가 그들만의 공동체라 불릴 수 있는 부족국가를 일구어 서로의 견제와 각축 속에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지배층 즉 왕족이 관심을 갖고 왜를 경영한 나라는 가야와 백제였다. 이후 백제는 왜 열도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두고 이미 건너가 부족국가의 형태를 만든 범백제계의 단합을 위한 경영,즉 왜 백제(倭百濟)의 형성을 이룩하는 단계로 발전 시켜 나갔다. 백제계는 모국인 한반도에 강력한 나라를 가진 배경을 두었지만 가야는 이미 세력이 약화되어 백제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에서 왜에 진출한 범가야계는 기가 죽을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가야계의 마지막 천황인 14대 "츄아이"(仲哀)왕의 황후로 믿어지는 "진꾸고오꼬"(神功王后)가 남편이 이루지 못한 "구마소"(熊本) 정복을 삼한(三韓) 정벌로 왜곡 또눈 침소봉대한 사실은 역사 왜곡이 어디까지 갈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말할 수 있다. 소위 "삼한 정벌설" 의 실상은 큐슈 지역에 할거하던 수많은 신라 계와 백제계 부족들 몇개를 복속 시켰다는 의미로 정리 할 수 있다. 한반도에 있는 삼한이 아니라 왜에 있던 우리의 이민 부족들이었다. 오히려 왜 열도에서도 한반도의 삼국 내지는 4국이 규모만 작을 뿐 그들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존재 시키면서 한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로가 대립과 견제를 했다는 증거가 아닐수없다. 적어도 15대 "오우진"(應神) 천황 이전까지는 혼슈와 큐슈 지역에 할거하던 여러 부족 국가들 간의 세력 확장사라고 불릴 정도로 서로간의 패권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에게는 패했지만 강력한 백제의 군사력을 갖고 갑자기 왜열도에 등장한 본국의 응신왕에 대하여, 범백제계는 물론 다른 부족의 실력자들도 그의 눈치를 살피며 숨을 죽였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좀더 넓고 통치하기에 용이한 지금의 "나라"(奈良)지역으로 가서 도읍하고 국명을 큰왜(大倭ㅡ다이와ㅡ大和ㅡ야마토)로 명명하며 스스로 천황으로 즉위하며 실질적인 왜 열도의 경영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때까지 큐슈 에서의 왕권이 혼슈로 옮겨지면서 소위 "나라백제"가 시작 되었는데 8세기에 들어와 "쇼엥"(莊園) 중심의 무사제도가 생기면서, 새로운 변혁의 "헤이안"(平安, 지금의 "교토") 시대가 시작되는 AD784년까지 계속 되었다. 여하튼 오우진 천황은 온조 백제와 교류하며 한반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가야지역에도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여 진다. 자신의 倭 열도로의 이주 이후 수많은 추종자들과 이민 희망자들이 줄을 잇고 있는 여건 하에서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역이 한반도와 倭를 잇는 교두보로써 매우 중요 했으리라 보여 진다. 기록에도 120현민 3만 여명이 왜 열도로의 이주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AD475년 고구려 장수대왕의 침공을 받은 백제는 어이없게도 개로 왕이 피살될 정도의 패배를 당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왜 열도의 나라백제는 1000여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대결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를 계기로 온조 백제는 수도를 부여로 옮기는 등 국력이 급격히 쇠약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백제의 지배를 받던 가야세력, 특히 고령 지역의 대가야가 그들의 독립성을 나타내고 이웃 신라의 지지를 요구까지 하는 정세로 변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전기 가야가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진지 거의 300년이 지난 AD490년대에 다시 가야의 이야기가 우리 역사에 나타난 원인 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후기(後期)가야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후기가야는 날로 국력이 강대해지는 신라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AD562년에 멸망하게 되면서 우리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해를 일본서기에서는 소위 "임나 일본 부"(任那 日本府)의 종말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임나일본부의 정체이다. 중요한 점은 후기가야의 멸망과 함께 소위 임나일본부라 하는 곳도 소멸 되었다는점이다. 왜 열도의 "나라백제"와 한반도의 "온조 백제"간의 긴밀한 유대관계 때문에, 한반도와 왜 열도를 연결해주는 연결 고리 라고나 할까. 서로가 왕래 하면서 배를 기다리며 머물던 곳, 숙박시설과 물자와 물동량이 기다리던 곳, 신라가 국력이 약했던지 어쨋던 간에, 두 백제간의 교류를 묵인한 지역쯤으로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개연성을 갖고 있다. 일본서기가 쓰여 진 년도가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지 60년이 지난 720년 이라고 한다. 일본이라는 국명으로 바꾼 년도는 백제멸망 수년 후이니까 후기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던 때는 임나 일본부란 단어자체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일본은 임나 일본 부가 있었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는 일본의 파견정부로까지 채색,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의 문화와 생성 발전에 있어 원천적인 보고가 한반도에서 유래됨을 가르치기 보다는 삼한 정벌설이니 임나 일본부니 하는 왜곡된 역사 교육을 1억 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스스럼없이 받고 있고 일본인의 정신과 신앙이 된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한일 두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나 두 나라의 관계 발전을 위해서도 올바른 길이라고 할 수 없다. 더우기 이러한 왜곡된 역사가 세계인들에게 여과 없이 소개되고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심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넌센스"라 함이 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럼 이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것이 문제다.
非武裝 地帶(DMZ)를 解剖한다.(20)
왜(倭)열도에는 "조몬"(繩文)시대의 기원전 수세기 전부터 한반도로부터건너간 삼한(三韓)의 선조들이 세운 부족 단위의 국가들이 존재 했었다. 마치 고리(環ㅡ"와")와 같이 수많은 소국가가 나름대로의 정통성을 유지하며 각자의 독립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한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로가 패권다툼을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적대관계가 왜 열도에서도 재현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건국신화와는 달리 일본의 건국 설화는 한결같이 칼과 무력, 전쟁과 정복 얘기로 점철되고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세력의 통합을꿈꾸는 정복자는 수많은 "와"(環)의 小國(부족국가)들을 하나로 엮어 묶는 것이 통일을 이루는데 필수 과정이었다. 성읍국가의 단계를 거쳐 통일국가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원만한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리 국가들의 화(和ㅡ일본발음은 "와")가 매우 중요 하였다. 화해가 되지 않을 때는 무력으로 정복 하게 되지만 정복 후에도 화해는 역시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말하자면 和의 의미는 일본이라는 통일국가를 만들어 가는데 중요한 통치이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큰와(大環-다이와ㅡ大倭)가 되고 "다이와"가 다시 大和(다이와ㅡ야마또)로 글자 변화 하면서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룩한 천황의 통치를 의미하는 "야마또" 정권을 나타내는 뜻으로 굳어진 것이다. 즉 화해의 중심에 천황이 있고 천황은 화해의 상징인 셈이다. 일본의 "和"는 이렇게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서로의 융화 혹은 조화쯤으로 보는 것이 아닌, 천황을 중심으로 한 화해 또는 이에 거역할 경우를 생각할수 없는 조화를 의미한다. 제국주의 시절 그들은 곧잘 "야마또 다마시이"(大和魂)라는 단어를 사용 하였다. 요즘도 극우인사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천황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화해하자는 극히 배타적인 일본정신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수 있다.
일본 최초의 성읍국가라 불리는 "오쿠니누시 노미코도"(大國主命)의 이즈모(出雲國,지금의 혼슈 서북부 지역)를 정복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라 불리는 태양신의 후손들은 "이즈모"를 넘겨 받는다고 표현한다. 일본에는 옛날부터 국가 양도의 신화(國讓神話)라는 전통이 미화되어 전해 오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 최고 최대의 목조건물로 꼽히고 있는 이즈모 타이샤"(出雲大社)에는 "오쿠니누시 노미코도"(大國主命)의 영혼을 모시고 있다. 정복자가 아닌 피정복자를 기리는 곳이다. 이것이 일본이 말하는 和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도꾸가와" 막부 말기에 천황의 비밀지령을 뜻하는 "討幕의 密則" 혹은 "사쓰마"와 "죠슈"번(藩)이 주창한 武力討幕을 제쳐두고 "도사"번의 "사까모또 료마"(坂本龍馬)가 주창한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택하는 것도 국가위기의 상황에서 국가 양도의 신화 혹은 和의 원칙이 적용된 전통적 사례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 바로 위의 "사까모토 료마"라고 한다. 和의 발생 원인 중에 재앙에 대한 공포를 꼽을수 있다. 재앙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人災던 天災던 어느 것이던지 그 공포를 혼자 감당하기에는 어렵다. 그래서 和의 정신이 더욱 필요 했는지도 모른다. 똘똘 뭉쳐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최초의 헌법이라 불리는 "쇼토꾸"(成德)태자의 17조항 중에서 그 1조에 和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으며 마지막 17조에는 중요한 일은 혼자 결정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일본 특유의 집단주의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쇼토꾸"태자는 율령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7세기 초의 백제계 사람이다.
일본의 옛날에는 원령신앙(怨靈信仰)이란 것이 있었다. 원한으로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것쯤으로 해석해야 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현대 일본인의 정신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것은 확실하다고 보인다. 얼마나 사무 쳤기에 원한에 맺힌 영혼들을 위로 하는 마음이 신앙으로까지 발전 하였단 말인가. 일본의 고대 역사에서 원령신앙이 시작 되었다는 것은 당시 왜 열도의 사회상황과 한반도와의 관계가 무관하다고 볼수 없다. 일본으로 건너간 전기가야의 영토가 백제에 의해 점령되고 그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에 의하여 다시 일본열도로 쫓겨 가고 또한 멸망 되었다. 후기가야 또한 신라에 의하여 멸망 되었다. 무엇보다도 한반도와의 인연이 강제로 힘에 의해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직후 주한공사로 일하던 "하야시 겐조"는 "대한국책"(對韓國策) 2000년의 현안이 마침내 이루어 졌다"라고 감개무량하게 내 뱉았다. 그 뜻을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2000년이란 긴세월 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한반도에 대한 현안(懸案), 그것은 뼈에 사무친 원한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각할수 없는 문제다. AD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하고 마지막 왕인 의자 왕이 당나라로 끌려 갔을 때 일본의 "사이메이"(齊明) 천황은 복수의 결전을 명한다. 의자왕의 누님이기도 한 "사이메이" 천황은 군선을 건조하는 "나노쓰"(娜大津, 지금의 "후꾸오까")의 현장에서 전쟁 준비를 직접 진두지휘 하지만 그 이듬해인 AD661년 뜻을 이루지 못하고 68세를 일기로 서거하고 만다. 그러나 백제복국(百濟復國)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 2년후인AD663년, "야마또" 정권은 후임 천황의 즉위까지 뒤로 미룬 채 백제 복국을 위한 광복전쟁을 벌리지만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을 이기지는 못하였다. 군선 400척에 나눠 탄 27,000명의 원정군 모두가 장열하게 전사하는 결전을 끝으로 한반도에서 678년간 존재했던 백제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한반도와의 인연이 완전히 끊기는 시점이기도 했다. 이때의 상황을 일본서기는 "조상들의 혼령(魂靈)을 모신 사직이 짓밟히는 것을 어이할꼬"라고 기록 하고 있다.
백제가 멸망하고 100년도 훨씬 더 지난 50대 "간무"(桓武) 천(AD781~806)때 천황 가는 "일본이 삼한(三韓)과 동종(同種)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모든 책들을 불태워 버렸다. 중국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비견되는 역사 말살 행위가 아닐수 없다. 사서를 소각하고 한반도와의 인연을 밝히는 모든 기록들을 없에 버리려는 의도라고 볼 수있다. 치욕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를 왜곡하는 작업을 벌렸던 것이다. 그뒤 "헤이안"(평안)시대, 귀족에 대한 武士優位의 무사시대를 개막한 "가마꾸라"(謙倉), "무로마치"(室町)막부, 그리고 戰國시대를 지나 천하 통일한 "도요또미"(豊信秀吉) 시대에 들어와 또 한번의 역사의 왜곡 기록이 있었다고 학자들은 믿고 있다. 조선 정벌의 당위성을 찾기 위해서다. 고대의 삼한征伐이니 신라討伐이란 말은 중세에 들어 와서는 조선征伐로 바뀌더니 근세에 와서는 征韓論이 되었다. 그리고 현대사에서는 한일合邦을 이루고 한반도를 점령 하는데 성공한 셈이 되었다. 한마디로 숙원을 이룬 것이다. 메이지 유신 때는 백제 강을 "소가"강으로 고쳐 부르는 등 한국과 관련된 각종 명칭이 대부분 바뀌어 버렸다. 일본 문화의 찬란함을 자랑하는 "아스카" 문화의 발상지가 한반도와 불가분의 연관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닐까 한다. 일본의 자주성은 한국과의 유사성 내지 연관성을 내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고본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고찰은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악의의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들의 문화적 뿌리가, 국가의 시발이, 민족의 근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나를 바로 이해하고 선린의 자세를 취하지 못하는 이유가 없다고 믿는다. 두 나라 간의 올바른 역사인식의 바탕이 없는 한 진정한 우호 관계는 사실상 불가능 하다고 본다. 한일 양국 역사학자들의 헌신과 정치색을 배제한 양심적 견해의 교류와 일치를 촉구 해본다. 물론 우리도 우리 조상들의 문화이면서 일본인 조상들의 문화이기도 한 백제와 가야의 유적들을 발굴하고 손질 하여야 한다. 그들이 자유로이 그리고 편하게 찾아 그들 조상들의 유적들을 감상 한다면 우리에 대한 눈길도 한결 부드러워지리라 확신한다. 한일 두 민족의 공통분모를 더욱 키워 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과거 700년간 두 민족의 조상들은 같은 땅에서 같은 문화를 누리면서 살았던 같은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인식 한다면 서로의 가슴 깊숙이 흐르고 있는 증오의 감정은 저절로 없어 지지 않을까 한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한민족에게 국권말살의 피지배와 분단의 단초를 제공한 일본이 DMZ의 의미와 가치를 우리와 논의 하고 장래의 평화적 이용에 보탬이 되는 어떤 역할을 사심 없이 할 수 있다면, DMZ의 녹색은 더욱 싱그럽게 더욱 밝게 우리의 앞날을 인도 하여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