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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머무는 곳 마음 닿은 듯 그림처럼 날 오라 손짓하네 오산으로 가는 길은 구례군 문척교를 건너 문척면 죽마리 각금마을에 접어들면 등산로 표지판이 나온다. 죽마리 각연 마을에서 시작해 산길을 이리저리 타고 걸어 오르는 등산길도 있고 마을 쪽으로 조금 더 나아가면 차로 올라가는 길 두 가지가 있다. 길이 좁은 오르막 경사와 급경사 내리막길 이므로 일반 승용차로 오르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다. 각연 수퍼 앞 주차장에서 사찰(061-781-5463)에 연락을 하고 기다리면 사성암에서 운행하는 승합차를 이용할 수 있다. 승합차로 10여분 정도면 암자 마당까지 도착할 수 있어 매우 편리하다. 사성암은 서기 582년 연기조사가 인도에서 모친과 함께 연을 타고 남악에 온 뒤 처음으로 수도를 한 곳이라고 하니 천년고찰로써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원래는 오산암이라 불렸다가 연기 조사, 원효대사, 도선 국사, 진각선사가 수도를 하였다 해서 '사성암'이라고 부른다. 사성암에는 대웅전은 없고 지장전을 본전으로 삼고 있으며 마애불을 모신 약사전과 산신각, 선방 등이 있으며 크고 작은 35불이 봉안돼있다. 눈에 담기는 것은 절경이요 마음에 담는 것은 선경이라. 당대의 고승들이 이곳을 수도처로 삼았는지 그 답이 절로 나온다. 사성암은 영험 있는 기도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암자에서 기원하고자 찾아오는 이들의 모습과 매우 다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눈에는 염원의 빛으로 빛난다. 사람들의 소망과 기도가 담긴 기왓장들이 즐비한 담장을 따라 계단을 오르니 약사전이 있다. 우뚝 솟은 절벽에 세워진 약사전의 아름다움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약사전 중간 벼랑에 음각된 마애여래입상(일설에는 원효대사가 원력의 무궁한 힘으로 손톱으로 긁어서 그렸다고 함)은 약사전 안에 모셔져 있다. 약사전은 5년 전에 새로 지은 법당이다. 중앙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데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하다 도력이 경지에 이르렀을 때 바위에 손톱으로 음각한 불상이라고 전해지며 지금도 선의 윤곽이 매우 힘차고 선명하다. 약사전 건물 뒤편 조그만 틈새로 나있는 절벽 틈으로 몸을 끼워 넣고 살피면 절벽에 새겨진 실체의 약사발을 든 마애불의 미소를 볼 수 있다. 약사불이란 정식 명칭으로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라고 번역하는데, 보통 약사여래 또는 약사불이라고 부른다. 중생을 모든 병고에서 구하고 무명의 고질까지도 치유해 깨달음으로 인도한다는 부처로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손에 약 그릇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약사전 앞쪽 난간에 서자 아래로 섬진강 물줄기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보였다. 방금 헉헉 거리면서 올라온 길도 그대로 하나의 선이었다. 법당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많다. 어떤 간절한 소원을 비는지 인기척도 못 느낀다. 마애불상의 자애로운 눈은 평화로운 섬진강과 남악의 준봉을 굽어보고 있다. 경상도가 따로 없고 전라도가 따로 없이 오직 하나다. 약사전을 내려와 절벽 뒤편으로 가면 지장전, 소원바위, 우번(선)대, 좌번(선)대, 도선굴, 산신각으로 가는 길이다. 108 계단을 오르면서
돌계단은 모두 108 계단이다. 왜 하필 108계단일까?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인생길은 질고의 길이라고 한다. 무려 108가지의 고통과 번민을 스스로 짊어지고 나아가는 고행의 연속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이 계단을 오르면서 속세의 번민을 떨쳐버리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오르면서 세상사 108가지 고뇌를 버릴 수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 아니겠는가? 스님들이 108개의 목환자를 꿰어 만든 108수주(數珠:염주)를 만들어 돌리면서 삼보(三寶)를 생각하면서 108가지 번뇌를 없애고 수승(隨乘)한 과(果)를 얻는다고 해 널리 신행(信行)되고 있는 것도 다 이런 이유일 것이다. 참으로 깊은 의미를 부여한 이 길을 일심수행의 마음으로 터벅터벅 오른다. 백팔번뇌가 끊기는 마음이 들어 심신이 상쾌하다. 지장전 오르는 108 돌계단 중간지점에 좌우로 암반을 뚫고 자란 거대한 두 그루의 귀목가 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심었다는 이 나무는 수령이 800-1000년에 달한다고 하며 나무뿌리에 박혀있는 두개의 암반은 뜀틀바위(소원바위)에 얽힌 애달픈 전설의 주인공 두 부부의 혼이 바위로 변해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산신각 뒤에는 조그만 자연동굴이 뚫려 있다. 여자의 음곡을 뚫고 들어가는 묘한 기분이다. 굴을 관통해 나가면 섬진강과 지리산, 구례마을 전경이, 그리고 지리산이 장엄하게 솟아있다. 필설로 담아내기 어려울 만큼 경이롭다. 목숨을 담보로 삼고서야 비로소 바라보는 풍경이다. 발아래는 아찔한 낭떠러지가 있고 좌선대, 우선대로 나뉜 뜀틀바위(소원바위)에 올라 밑으로 벌어진 벼랑을 바라보면 두려움에 발목 힘이 빠지고 만다. 일 년에 세 번 이곳을 찾아 이 바위 사이를 세 번 뛰어 넘으면 일 년 내내 재수가 좋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래서 이름도 뜀틀바위다. 우선대는 원효 스님과 도선 스님이 앉아 좌선하던 곳이라 한다. 이곳에서 도선 국사는 천하대세의 척지를 그렸다. 사성암을 중심으로 좌선대, 우선대 그리고 신선이 베를 짠 씨줄 날줄의 흔적이 바위에 그어져 있다는 신선대, 연기선사가 아미타불 마애불로 되었다는 관음대, 화엄사를 향해 절하는 곳이라는 배석 대, 향불을 피워 놓는 곳이라는 향로대, 쉬어가기 좋은 쉬열대, 바람이 매서운 곳이라는 풍월대, 붉은 색칠로 된 괘불대, 낙조 풍경의 조망대인 낙조대, 바위벽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병풍대,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앙천대 등 12비경을 볼 수 있다. 사성암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산사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찾아가는길 구례읍-861번 지방도-문척교 건너 구름재 넘기 전에 우회전-죽마리 주변 볼거리 초록세상 간전면 용지동 계곡 간전면 소재지에서 오른편 길로 꺾어 5분쯤 가다보면 지리산 자락과 백운산 자락이 맞닿은 계곡 깊숙한 곳에 건강과 초록의 길지에 터를 잡은 '효곡 마을'이 있다. 효곡 마을로 들어와 왼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야 한다. 오른쪽으로 열린 길은 하금장과 뫼재로 가는 길이다. 시골 정취 물씬 나는 효곡마을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을 보듬고 행정적으로는 구례군이지만 광양 백운산 줄기의 형제봉과 속초봉과 맞대고 있으며 곡저평야를 이루고 있다. 마을길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도열해있다. . 돌담도 보이고 사람의 단절과 경계를 표하는 그 흔한 울타리도 보이지 않는다. 적당한 휴식과 사람의 정이 그리운 분들을 열린 마음으로 환영하는 듯 효곡 저수지를 지나면 야영장이 보이고 마을 끝 지점 수풀 림에 숨어있는 계곡의 힘찬 물소리가 들려온다. 용지동의 명물, 용지천에 용소가 있고 비류직하하는 용소폭포가 위용을 드러낸다. 주민들은 이 폭포를 뀌뚝(굴뚝)폭포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까닭은 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모양을 하고 있다는데서 얻어진 별명이다. 찾아가는길 구례읍-하동방면 861번 지방도로-간전면 소재지에서 우회전-865번 지방도로 -금산마을-용지동 별미여행 산나물 한식당의 산채정식
식객을 가족처럼 따뜻이 맞이하는 김종연, 이미숙 주인 내외의 다정함과 포근함이 무척 인상적이다. 심산유곡 지리산 일대에서 채취한 무공해 자연산 나물을 주재료로 한 산채 요리로 유명하다. 두릅과 죽순, 더덕, 취나물, 도라지, 싸리버섯, 고사리 등 각종 나물과 송이와 표고, 지리산 자락에서 생산된 산채들은 그 하나하나가 지리산 맛을 대변한다. 된장국 맛은 예술적이라 할만 하며 대표 음식인 버섯재첩의 순수한 국물맛, 싸리버섯 요리, 그림 꽃 화려한 산채정식의 밥상을 대하면 마음조차 상명함에 지리산과 섬진강의 풍경이 마음속에 담긴다. 문의-061-782-1356 사진/ 1.2 약사전 중간 벼랑에 음각으로 새겨진 마애여래입상. 속세의 인간들이 겪는 모든 병고를 치료해주려는 듯 자애로운 모습이다. 3.산신각 뒤 편 조그만 자연동굴에도 불당이 차려져 있다. 4.5.6.약사전 오르는 길과 바위 위에 세워진 사성암. 7.사성암에서 내려다 본 섬진강. 아스라한 한 폭의 그림이다. 8.산나물 식당에서 차려준 먹음직한 밥상.
유서깊은 역사와 문화의 고장 광어·전복·김 등 해산물도 풍부 완도군은 한반도의 끝자락이며,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2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빼어난 풍광의 고장이며 전국 제1의 청정해역이다. 전국에서 가장 맛좋고 질 좋은 광어, 전복, 김, 톳, 다시마 등 각종 해산물이 풍부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건설했으며 충무공과 고산 윤선도 선생이 활동했던 유서 깊은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기도 하다. 국제 슬로우 시티로 선정된 청산도. 발목을 붙드는 풍경 따라 세월의 나이테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남도의 소중한 역사를 찾아보며 그 생각 더 야물게 채워 보자. 청산도- 청산 여수(靑山麗水) 로세! 일명 선산(仙山), 선원(仙源)이라 불릴 만큼 이름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넉넉히 알 수 있다. 5개의 유인도와 9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섬 지역으로 본도를 비롯해 여서도, 대모도, 소모도, 장도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여서도는 해안선이 급하고 기복이 심한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곳곳에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보통 날씨에도 7~8m의 수심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맑고 바다 속은 해식 작용으로 만들어진 계곡의 절경이 유명하며 스킨스쿠버 장소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물 맑고 산 푸른 청산도는 완도항에서 약 19.2km로 40 여분 배를 타면 닿는다. 청산도의 참 멋은 황톳길, 그리고 돌담과 돌담을 비비고 파고 오르는 담쟁이 넝쿨이다. 선창에서 15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한국의 영화사상 처음으로 1백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서편제'를 촬영한 '당리'가 있다. 자연석을 촘촘히 쌓아 만든 양편의 담벼락 사이로 좁게 뚫린 황토길 위에서 소리꾼 유봉과 송화·봉호 남매가 진도 아리랑에 맞춰 춤사위를 표현하며 내려오는 명장면. 당리 마을에는 세트로 지었던 초가가 있으며 밀랍인형도 만들어 놓아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재현 해 놓았다. 구불구불한 황톳길을 밟고 오르면 구들장 논에 파란 보리, 그리고 향토색 물씬한 돌담길, 그 사이로 거대한 당산 나무 한 그루가 늠름하게 버티고 있다. 젊은이들의 건강한 사랑을 그린 '봄의 왈츠'를 촬영했던 유럽풍의 세트장이 그대로 남아 10만여 평의 보리밭과 함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노오란 유채꽃 장관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잠시 읍리 쪽으로 방향을 돌려 가보자. 이곳엔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물로서 고대 원시인들이 터를 잡았던 청산도의 오랜 역사를 읽을 수 있다. 한쪽에는 아주 특이한 하마비가 있다. 보통 하마비에는 말을 오르고 내릴 때 사용하는 일종의 디딤돌 역할을 하는 것인데 이곳에 있는 하마비는 조금 다르다. 하마비에 마애불상이 음각 돼있다. 권덕리 보적산에 올라서면 가파른 능선에 범 한 마리가 웅크리고 적을 노려 보는듯한 모습의 바위가 있다. 범 바위다. 시야가 다 드러나는 곳에 앉아 모진 풍파 맞아가며 오늘날까지 청산도를 지켜내고 있는 청산도의 수호신이 아니겠는가. "청산에 가서 글자랑 마라"는 말이 있다. 귤은 김류(橘隱 金瀏,1814~1887)선생의 영향이다. 선생은 조선말기 문신으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하다 여천군 삼산면 거문도에서 귀양살이을 갔다. 1838년(현종4년)귀양이 풀리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산세가 수려하고 인심이 순후한 청산도 풍광에 매료되어 이곳에 머물러 서당을 세우고 후세들의 교육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부흥리에는 선생의 사당인 숭모사가 있다. 청산도의 교육열을 나타내는 말로 "친척 버선까지 팔아 자식 가르치다"는 말도 있다. 청산도는 초분 풍습이 남아 있는 일부의 섬 가운데 하나이다. 남해안 도서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장례 문화의 하나로 부모에 대한 효성과 뭍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초분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나 관을 땅 위에 올려놓은 뒤 짚이나 풀 등으로 엮은 이엉을 덮어 두는 풀 무덤이다. 초분을 하는 이유는 상주가 고기잡이를 나간 사이에 갑자기 상을 당하거나 죽은 즉시 묻는 게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될 때, 또는 뼈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민간신앙 등의 이유로 행해졌다. 전염병으로 죽거나 객지에서 죽었을 때, 익사자의 경우 시신의 물을 빼기 위해, 집안이 가난해서 장지를 구하지 못하거나 어려서 죽었을 경우, 또 공달(윤달)이 든 달에 죽으면 전염병이 돈다 해서 땅속에 묻지 않고 초분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청산도 관광안내(061-550-5608) 교통안내 1)완도→ 청산도/ 청산농협(061-552-9389) 청산 페리호(061-552-0116) 제1부두에서 하루 4회(8:20, 11:20, 14:30, 17:45) 출항. 약 45분소요 2) 청산도→ 완도/ 도청 항에서 하루 4회(06:30, 9:50 13:00 16:10) 출항 주변 볼거리 신지도 명사십리 완만한 굴곡과 해안선이 남해 제일의 해수욕장이다. 북쪽 해안은 간석지가 풍부해 농어와 돔 등 어패류가 풍부하여 보는 맛과 먹는 맛의 두 가지의 즐거움이 있다. 해수욕장 입구 도로변에 있는 명사십리 수석원은 수석 500여 점과 각종 고서화들이 전시 되어 있고 해수욕장 전망대 뒤편에는 절구통(도구통) 전시장도 있다. 마을 동쪽에 숨어있듯 바다를 향해 누워있는 동고리 해수욕장이 있으며 애국, 애족의 표상으로 항일 투사들의 얼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항일운동 기념탑이 있다. 또 하나의 명물은 바위에 구멍이 뚫려 기괴한 형상을 한 혈도이다.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 음력 설 전날 밤 머리에 바구니를 쓰고 이 섬을 향하여 두 번 절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정도리 구계등(명승 3호) 활처럼 굽어 휘어진 해안에 완만한 경사를 이룬 자갈밭이 약 800m까지 널려 있다. 약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해안 바닷물이 다시 올라오면서 바닷 속에 잠겨 있던 갯돌(靑丸石<청환석>)도 함께 밀려오면서 5종의 자연 청환석 밭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억겁 세월의 파도에 씻겨 동글동글한 갯돌로 이루어진 해변이 9홉 계단을 이루어 바다 속까지 이어져 있어 구계등이라고 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해안 갯돌 밭이 3~4계단 정도 형성되었으니 바닷 속에는 약 750m까지 뻗어 있는 물속에 잠긴 5~6계단 층으로 쌓여있는 갯돌들이 가득 하다는 얘기가 된다. 완도 제 1회 세계슬로시티축제 아시아 최초로 지정된 전남지역 4개 슬로우시티 가운데 하나인 완도에서 제1회 세계슬로우 시티 축제가 오는 18-19일 이틀 동안 신지 명사십리 해수욕장과 청산도 일대에서 열린다. 첫날은 은빛 모래와 출렁이는 파란 파도를 끼고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따라 걷고 유채꽃 반말한 해변공원에서 불꽃쇼와 축하공연들을 즐길 수 있다. 다음날엔 배를 타고 청산도로 이동 서편제 돌담길을 따라 걷고 2009년 남도 슬로우푸드명품관과 안단테 기약식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청산도 행사는 선박 편을 이용해야하므로 홈페이지를 통하여 사전 신청이 필요하다. 문의 061-550-5750 5760 홈페이지 www.SLOWCITYWANDO.com 별미 여행- 자연산 회전문 동백횟집
우럭 지리와 매운탕 솜씨가 좋은 동백 횟집의 여주인 김복덕 여사는 늘 입가에 웃음을 달고 있어 마음부터 포근하게 만들어 준다. 김복덕(51세) 여사의 수줍은 듯 싹싹한 상냥함을 필두로 하여 종업원들의 친절한 서비스가 남도의 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분 좋은 집이다. 남편이 직접 고기잡이를 하고 있기 때문에 봄 .여름은 농어 우럭 갑오징어, 가을은 삼치, 겨울은 장어구이 등을 사계절 내내 다른 집보다 훨씬 저렴하고 푸짐하게 맛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청청 해에서 나는 자연산 전복구이, 우럭회, 소라구이, 전복회 농어회 모자반, 성게장 완도 청정바다 해산물은 모두 모여 있는 자연산 회 전문집이다,
산자수명한 산,바다, 강, 평야 연이어 실학의 대가 위백규 선생 등 명사 많아 장흥은 예로부터 문림 의향의 고을로 불린다. 조상의 숨결이 곳곳에 배어있는 역사와 전통의 고장이며 산과 바다와 강과 평야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산자수려한 천관산 도립공원을 비롯해 제암산, 수인산, 천연계곡, 자연휴양림, 보림사와 천혜의 청정해역인 탐진강까지 미래를 위해 아껴놓은 무공해 청정 고을이며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실학정신 살아있는 방촌 전통 마을 관산읍에서 대덕읍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나면 방촌리 전통마을이 나온다. 마을입구에는 장승이 세워져 있다. 서편 쪽에 세워진 장승은 진서대장군, 벅수라 하고 동쪽 편에 세워진 장승은 미륵, 돌부처, 여장승이라 부른다. 고려 때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와 원나라 두 연합군이 출정하면서 무운장구를 빌기 위해 이 장승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회주성의 서쪽이 약해 기를 보강하고자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방촌리 내동마을 입구, '벅수 골'이라 부르는 소나무 숲속에 94기의 고인돌이 밀집돼있으며 이곳에서 무문토기 편과 석촉 등이 출토됐다. 이와 같이 선사시대부터 다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 있으며 별신제, 산신제, 시회(詩會)등 강한 유가적 세시풍속과 민속이 전해오고 있는 문화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 마을이다. 마을 안쪽 숲길로 들어서면 또 하나의 놀라운 고인돌이 있는데 성조동이라고 한다. 성인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거대한 고인돌은 신령이 깃든 듯하다. 암질은 매우 매끄럽다. 표면에는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흐릿하지만 거북이와 뱀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무슨 이유인지 그 해답을 찾아내기란 매우 어렵다. 단지 고대에 제사장이 이곳에 제단을 가꾸고 천신께 제를 올리던 곳이었는지, 성인의 무덤돌이라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일본의 한 저명한 학자가 이곳의 고인돌은 거의 1만여년 전의 것이라는 해석을 내린 바 있다. 전체적인 형상은 날개달린 거북이가 날아오를 듯 힘찬 기세다. 아래에는 아기 거북 형상의 돌도 특이하다. 수수께끼 같은 미로의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방촌 전통마을은 600년간 장흥 위 씨가 살아 온 집성촌으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말기에는 장흥의 고을 터 자리가 있던 곳이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장흥 위 씨가 입촌하면서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지배적인 성씨인 위 씨를 비롯해 그의 인척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재지기, 동각지기, 하인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후에 하층인 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를 했다. 이 대목에서 많은 의구심이 일어난다. 구습과 악습을 폐단 하고자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조선 4대 실학파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실학의 대가인 존재 위백규 선생은 “옛날의 인(仁)은 사랑이었는데, 오늘날의 인은 겉치레며, 옛날의 예는 공경이었는데, 오늘날의 예는 가식이다"고 했다. 이 글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으며 왕도정치의 재현과 국부민안(國富民安)에 목표를 두고 살았던 선생이 아니던가. 마을에 거주했던 천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를 시켰다는 점에서 진정한 실학의 개혁 정신과 모순되는 것 같아 아이러니하다. 양반이던 천민이건 그들 모두에게 진정한 공평과 자유가 실현 되도록 외쳐야 하는 게 실학사상의 근본이었음에도 말이다. 마을의 동계로는 대동계, 무기계, 매귀계 등이 있는데 대동계는 마을 사람들의 친목 도모와 단합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그 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무기계는 위 씨 일가의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설립돼 천관산 제를 주관하며 매귀계는 마을의 매귀굿을 담당한다. 천관산제는 2월 초순 여드레 안에 무기계를 치르고 천관산에 있는 큰 바위에서 제를 지낸다. 별신 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토지 신에게 마을의 평안과 제액초복을 기원하기 위해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해 지낸다. 방촌리 계춘동에 존재(存齋) 위백규(1727-1798)선생의 생가가 있으며 서재에는 ‘존재’(存齋)와 ‘영이재’(詠而齋)라는 그와 그 부친의 당호가 남아 있다. 위백규 생가에 300년 수령이 넘은 회목(檜木)이 있다. 방촌리 신목(귀목)이다. 이 나무는 능천 군수로 재직하던 위백규 선생의 조부가 일본에서 처음 들여와 당시 생가에 심었다. 1993년 문화관광부가 전통마을로 지정하였다. 실학의 진정한 호남의 뿌리 존재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계춘동)에서 태어난 위백규 선생은 지방 지식인으로 경제적으로도 그리 넉넉하지 못한 자작농이었다. 2세 때 글을 해독하고 9세 때 천관산에 올라 시를 읊어 세상 사람을 놀라게 한 신동이었다. 천문, 지리, 율력, 복서, 병도, 산수로 부터 백공기예(百工技藝)에 이르기까지 모두 익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생의 도력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진다. 방촌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글 읽는 소리가 집집마다 들렸. 봄철이면 수많은 종달새들이 날아와 시끄럽게 지저귀는 바람에 공부에 집착을 못하자 선생이 부적을 만들어 큰 나무에 붙여 놓은 후부터 종달새들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는 관산읍은 예부터 선비들이 모여 사는 고을인지라 냇가에서 노는 메기가 수염을 달고 있음을 보고 하찮은 미물이 버르장머리 없다고 여기어 수염을 달고 나오지 못하도록 도술을 부렸다고 한다. 그래 관산에는 수염 달린 메기가 없다는 우스우면서도 신통한 일화도 전해온다. 마을 앞 천관산의 장천동 계곡에는 선생이 공부했다는 장천재가 있으며 상잠산 죽교리에는 그를 기리는 죽천사가 있다. 지방 출신 실학자로 평생을 지방 유사로 머물렀던 선생은 진정한 호남인이다. 장천재 입구 청뢰문 앞에는 조선 태종 때부터 자라고 있는 850년된 기이한 형태의 소나무가 있다. 놀라운 사실은 길게 뻗어 내린 가지 하나에 또 다른 나무가 당당히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바람에 날아온 씨앗이 싹을 티워 이처럼 무성히 자랐다고 한다. 이 나무 바로 앞에는 정취가 물씬 풍기는 목도화교(木桃花橋)라는 다리가 있다. 주변 정경이 빼어난 계곡을 배경으로 세워진 장천재는 장천 암이라는 암자 터였다. 조선 중종 때 강릉참봉이었던 위보현이 어머니 평산 신 씨를 위해 장천동에 묘각을 짓고 승려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한 것이 그 유래다. 그 후 암자를 헐어내고 지은 위 씨 문중사우로, 존재 선생을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수학한 곳이다. 이곳에서 천관산의 모양과 유래, 이름 등을 세세히 밝힌 인문지리서 라고 할 수 있는 "지제지(支提誌)'를 기술했다. '지제지'에 따르면 장천재 위로는 청풍벽, 세이담, 추월담, 병풍암 등 장천 8경의 비경이 있고 4월이면 장천재를 포함한 연대봉까지 이어지는 구간이 온통 진달래꽃으로 뒤덮이는 환상의 꽃 세계가 펼쳐진다. 교통안내(승용차 편) 장흥읍-(23번국도)―관산읍-방촌마을-(우회전)―천관산 등산로 입구-장천재 별미음식을 찾아서 향토음식명가 머루랑 다래랑
이 집의 별미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임춘근 여사가 자체개발한 표고산적과 생약초 비빔밥이다. 한우표고산적은 천관산 저지대에서 무공해 표고를 주재료로 한우와 생약초, 현미가루와 우리 밀반죽으로 다져 달걀을 입힌 후 두툼한 표고 양쪽에 얹어 전처럼 지져낸다. 장흥의 표고버섯은 조선시대부터 진상품으로 알려진 장흥군이 자랑하는 특산품중 하나이다. 장흥 산 표고버섯은 톱밥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원목에서 키우기 때문에 독특한 향과 맛이 배어있다. 묵은 김치와 솔잎 동동주를 곁들어 먹으면 입안에는 행복감이 깃든다. 생약초 비빔밥은 천관산 아래 자리 잡아 집주위에 텃밭과 야생에서 자생하는 취나물, 고사리, 민들레, 당귀, 야생녹차, 더덕, 콩나물, 취나물, 무순, 생채, 싱싱한 야채 등을 곁들어 고추장에 비벼 먹는 맛과 어머니가 직접 담근 녹차 김치, 재래식 된장을 뚝배기에 끓여 나오니 분위기와 어울려 일석이조의 맛이다.
꽃피는 춘삼월 매화향기 취해 환상의 파노라마 끝이 없어 '따스하게 빛나는 햇살' 이라는 뜻의 광양시. 세계적인 포스코 광양제철소와 최첨단 계획형 신항만인 광양컨테이너부두, 그리고 광양만권 경제자유구역 기반으로 우리나라의 산업 경제를 이끌어가는 대동맥 일뿐만 아니라 백운산과 청정수역 섬진강, 매화마을 등 풍성한 관광명소를 지닌 3복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고장이다. 백운산은 골이 깊고 산 또한 높아 신령스러운 모습으로 호남정맥의 최고봉답게 장대한 준봉들이 당당하다. 위로는 구름바다에 잠겨 자락마다 너울너울 물결이 춤추듯 오묘한 능선과 계곡에 자락을 깔고있는 백운산에서는 2월 중순부터 3월 하순까지 고로쇠수액 채취로 분주해진다. 아래로는 오백 리 섬진강 물길을 거느려 하나의 수채화를 그려낸다. '태산압후천무북' ‘대해당전지실남' 백운산의 참 모습이다. 자연생태계의 보고인 백운산은 천혜의 계곡인 봉강, 동곡, 어치, 금천을 거느리고 있다. 백운산은 3개의 정기를 품고 있다고 한다. 봉황, 여우, 돼지다. 조선조 중종 때의 대학자인 신재 최산두는 봉황의 정기를, 몽고국 왕비가 된 월애 부인은 여우의 정기를 타고났다고 한다. 돼지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광양땅 을 부흥케 할 사람이라고 하는데 아마 돼지의 정기는 광양제철, 광양항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광양 사람들에게 생활의 젖줄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타지로 시집 간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가 되면 백운산의 정기를 받으려고 친정인 광양에 와서 출산을 한다는 속설도 전해진다. 백운산 정기의 예찬이다. 섬진강은 전북 진안의 은수사 마이산신단 바로 아래에 있는 데미샘에서 발원해 장장 225km를 달려 광양의 망덕포구에서 바다로 흐른다. 시인들이 앞을 다투어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섬진강의 단군 조선 때 이름은 모래내 또는 모래가람이었다. 그 이후에도 모래가 자꾸 쌓여 다사강(多沙江)이라고 했다. 지금도 하동 부근에는 모래가 많다. 강변 모래밭을 '금당' 이라 하고 모래밭 안에 있는 호수를 '동정호' 라고 한다. 다압면 '섬진(蟾津)'마을은 1451년에 펴낸 국가 주요 문헌인 고려사지리지 제57권에'有蟾津(유섬진)'이라 기록돼 전하는데 이 지역이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주요 교통로가 되어 왔다. 섬진강의 섬 자는 ‘두꺼비 섬(蟾)’자를 쓴다. 고려 우왕 11년(1385년)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수십만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자 불길함을 느낀 왜구가 광양만 쪽으로 피해갔다는 전설에 기인한다. 고려 초 두치강(豆恥江)이라 부르다가 고려 말인1385년 섬진강(蟾津江)으로 고쳤다. 섬진나루에는 섬진강 이름의 유래비와 두꺼비 상 4기가 있어 섬진강의 전설을 담고 있으며 수군 별장들의 공적비 등이 남아있어 임진왜란 때의 전적지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매화마을- 섬진강에 꽃비 내리는 풍경 꽃 피는 춘삼월이면 꽃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곳이 섬진강변에 자리한 광양시 다압면. 1960∼1980년대는 '밤산마을'로 밤이 유명하고 아울러 매화의 명성으로 '매화마을'이란 이름이 더 친숙해진 고장이다. 다압마을 이름 유래는 당시 제일 큰 마을이었던 다사촌(多士村-선비가 많이 나는 고을)과 압척촌(鴨尺村-오리가 많은 고을)의 첫 글자를 따서 '다압면)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다사 이름의 옛 지명이 다사천소(多沙川所)임을 고려하면 '모래와 오리가 많은 고을'이라는 뜻을 생각할 때 역시 섬진강과 황금빛 모래밭도 많은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매화마을은 전체 70여 가구의 농가 중 60여 가구가 매화 농사를 짓는다. 수십 년 동안 주민들이 땀으로 개간한 30여만 평의 산비탈에는 수만 그루의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 마을에 매화의 역사가 열린 것은 (고)김오천씨. 가 1930년대부터 이 일대에 밤나무와 매화나무를 심은 데서 시작한다. 그의 며느리 홍쌍리 여사가 뒤를 이어 오늘날의 매화마을을 탄생시켰다. 황무지에 보물 꽃을 피운 것이다. 매실 명인 홍쌍리 여사가 운영하는 청매실농원 뿐만 아니라 온 마을이 가득하다.
올해는 예년보다 날씨가 따뜻해 일찍 매화가 만개했지만 매화가 절정을 이루는 3월 중순경에는 함박눈이 내린 것처럼 온 마을이 새하얗다 . 빼곡한 꽃송이보다 더 황홀한 것은 간간히 불어오는 강바람에 함박눈처럼 우수수 떨어져 흩날리는 매화의 꽃잎과 바람에 묻어오는 매화의 향기다. 도로나 강가에서 바라보는 경치도 아름답지만 산 중턱에 올라 섬진강 수면에 반사된 햇볕을 받아 더 많은 꽃을 피운 산등성이 양지바른 곳의 매화나무를 옥색 섬진강을 배경으로 내려다보는 풍경은 무릉도원이다. 청매실 농원 산자락에서 바라보면 강 건너가 바로 하동 악양 땅이다. 악양은 중국의 악양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중국에 있는 지명을 따와서 악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 중에 소상팔경이 있는데 이는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가득 담긴 고즈넉한 풍경이 압권이기도 하며 삼 점의 먕당터에 안긴 천혜의 고을이다. 이곳에서 가장 높게 보이는 봉우리가 '구제봉'이다. 마치 거북형상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3봉(점) 즉 명당인 미점,먹점, 동점이 있는 곳이라 해 명 지관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천하지기의 아름다움을 격찬했던 곳이었다. 동점은 꼬리부분에 해당되는 지점이며 구제봉 뒤편으로 있는 먹점은 등 부위의 지점이며 특히 미점은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점이라고 한다. 과연 그랬다. 미점 지점에는 평화로운 마을들이 앞으로는 섬진강 줄기와 뒤로는 아름답고 웅장한 지리산 자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눈으로, 가슴으로, 마음으로 아름다움을 주워 담아 봐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환상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순수한 아름다움 그 자체다. 망덕 포구에 이르면 배알도 라는 작은 섬이 보인다. 배알도 앞쪽으로 솟아있는 천왕산(225m)을 향해 신하가 왕에게 배알하고 있는 모습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로 앞에 떠있고 5백리를 달려온 물길이지만 청청함이 살아있어 재첩 백합 조개 전어 붕장어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봄철이면 망덕포구에서는 강굴 채취가 한창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민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섬진강 하류 일원에서만 유일하게 자생한다는 강굴은 크기가 어른 얼굴만큼이나 크다. 첫째 크기에 놀라고, 둘째 구울 때 타탁 불똥 벼락 치는 소리에 놀라고 셋째 담백한 맛에 놀란다. 어른 손바닥 만 한 크기의 강굴이 벚꽃이 피는 시기에 가장 많이 잡히고 가장 맛있어 최근 벚굴로도 부른다. 별미집을 찾아서 광양숯불구이 명가-금목서회관
남도음식명가로 지정된 이 식당은 맛과 정성이 금목서의 향과 함께 어우러진 최고 맛집 멋집이다. 여쥔장 서순영 여사는 서울 장안까지 가서라도 뒤져내어 싱싱하고 질 좋은 순수 한우만을 구하려고 애쓰는 노력파다. 일반인들은 듣기에도 생소한 토시, 이 부위는 소고기 부위 중 한주먹 정도나 나오는데 이 맛있고 귀중한 부의까지 챙겨오는 이러한 정성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만큼 요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며 열정을 다하며 겸손함으로 노력하는 모습에서 참으로 기분 좋은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일까? 이런 정성과 싹싹한 성품으로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진 음식 맛은 감동에 가깝다고나할까? 백운산에서 자생하는 참나무 숯을 이용하여 조선간장, 설탕, 참기름, 깨, 소금, 파. 마늘 등 갖은 양념으로 즉석에서 무친 선홍색의 살코기를 먹기 직전에 양념을 해서 내오는 게 바로 전통 광양식 숯불구이다. 참으로 부드러우면서 은근한 양념의 감칠맛 나는데 이 맛은 먹어본 사람만이 논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직접 빚은 매실주와 석류주도 손님께 내어 놓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고객을 위한 온갖 정성이 가득함을 채워져 있다.
물 맑은 골골샅샅 전설도 가득 그림같이 아름다운 동네 정겨워 통명산, 밝음이 상통하니 봄기운 싹트듯 정기 듬뿍 받으세요! 초악산 지네머리 대명산 금반리 먹잇감 노리고 통명산 금계리 금닭은 이를 지키네! 호남 땅 56개 음택 명당 중 곡성군에만 3 곳이 있다. 말 그대로 산골짜기의 전원고장이요, 도처마다 명혈들이 산재해 있으니 축복받은 고장이다. 공기마저 상쾌한 산골짝 마을 금반마을과 금계마을의 풍경을 따라 나선다. 봄기운이 완연하고 바람도 상명하다. 진수옥반 그득한 금반형지(金盤形地) 금반(金盤)리 괴티재 오른쪽으로 금반리 벌판을 봉황의 날개깃으로 접고 에워싸듯 버티고 선 통명산. 금반형지의 지세를 안고 산자락에 둥지를 잡아 집을 짓고 살면 부귀영화를 누리며 36명의 대장군과 정승이 난다는 말이 전해지는 지세다. 지명을 보아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고 여겨진다. 풍문으로 들은 얘기이지만 풍수비결에 의하면 "원적족립 앵무삼라(圓寂簇立 鸚鵡森羅) 풍변찰거래 택리관향배(風邊察去來 澤裡觀向背)"라고 해 이 글귀를 해득할 수 있는 사람은 금반형지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해서 풍수가는 물론 사학자들 사이에서 세간에 화제가 됐다. 풍수의 대가인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소개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마을의 형세가 이와 같이 풍요가 넘쳐 금으로 산해진미 반상을 차렸으니 지네가 잔뜩 웅크리고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건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지네에게는 닭이 천적이다. 통명산 금계(金溪)리는 금닭이 지키고 있기에 공격의 엄두를 못 내고 있는 대신 몸을 반대로 돌려 금반마을의 풍요로움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형상이다.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금계마을. 금계는 천계(天鷄)를 뜻하기도 하는데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다. 닭이 알을 품으면 수십 마리의 병아리를 부화시키므로 다산과 물질의 풍산을 상징한다. 닭이 울면 새벽이 열리니 이는 곧 광명이요 희망을 의미한다. 자손의 번창을 의미하기에 상길(上吉)로 여긴다. 대개 닭 모양으로 생긴 산이나 고개에 많이 붙는데 우리나라 전역에도 닭과 관련된 지형과 지명이 많이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옥토,요 금수강산이다. 그중 전남이 전체의 24%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담양군 창평면 오강리, 전북 장수군 계내면 삼봉리, 광주시 광산구 서봉동, 무안군 해제면 대사리, 신안군 흑산면 예리 등이 그 예다. 통명산 자락에 포근히 안긴 금계 마을을 향해 가다보면 먼저 아랫마을인 정자촌의 용계마을을 만난다. 기상서린 소나무군 들이 빼곡히 들어차있으며 산자락에 마을들이 오밀조밀 들어서있다. 마을 초입에는 나그네 쉬어가라고 만들어진 멋진 정자와 고목의 어울림이 한 폭의 그림이다. 이 마을 삼거리 갈림길에서 위쪽 통명사 가는 방향으로 5분여 정도 걸으면 금계마을이 나온다. 마을의 안녕을 지키는 당산나무(성황단)도 있다. 질병․ 재해․ 호환 등을 막아주고 토지와 마을을 수호하는 신격화한 존재다. 지방에 따라 '성황당', '할미당', '천왕단' 등 여러 가지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마을의 입구나 고개 마루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돌무더기와 신목(神木), 당집 등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마을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무당을 불러 서낭굿이 열린다. 헝겊이나 짚신 조각을 걸어둔 것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서낭당에 부정한 일이나 금기를 어기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신벌(神罰)을 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존재이기도 하다. 밑동에는 검은 이끼를 돋아 내고 있어 더욱 신령스럽다. 그 앞에 세워진 방사탑은 사악함을 경계하는 수문장이다. '장승', '솟대'와 같은 맥락으로 행운을 빌며 악을 방어한다. 지금도 시골에는 이런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옛 민간신앙의 정신적 안위와 존귀성을 잘 지켜내고 있는 증표다. 금계 마을은 많은 가구들이 모여살고 있지 않지만 모두 7차례나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되는 영광도 안았다. 동네 사람들끼리 신뢰의 온정을 나누고 인심의 터전으로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모습들이 봄바람처럼 훈훈하다. 금계 포란 형의 지세에는 당연히 금계가 있어야 하는 법. 과연 그러하다. 마을 중간부분 논에 커다란 알을 품고 있는듯한 금계 바위가 머리를 꼿꼿이 치켜세우고 마을을 수호하고 있으니 악이 새어 들어올 틈이 없다. 또한 이 마을은 고지대로 청정한 공기와 물 맛 좋기로 유명하다는 이장님의 자랑이 덧 붙여진다. 금계마을에서 바라보는 통명산이 그림같이 아름답다. 봉황 날개깃 헤치고 오르는 통명산(765m) 기운을 담아가자.
곡성의 제일봉인 통명산은 삼기면, 오곡면, 석곡면, 죽곡면을 능선으로 이어져있다. 산길은 아주 깨끗하고 고요하다. 마치 적막 세상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유독 유명한 산으로만 몰리는 인기에 소외 된 것은 아닌가? 천만의 말씀이다. 봉황의 날개깃에 머문 천하의 절경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드러내지 않고 숨어있듯 겸손함. 그 속엔 무언가 압권의 매력이 있다. 통명산하에는 제일승지로 손꼽히는 '장군대좌형' 이 자리를 틀고 있으며 음택 명당도 안고 있다. 통명산 최고의 명당은 약마부적(躍馬赴敵: 적진을 향하여 힘차게 달리는 말)형국이다. 통명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곡성출신 고려의 명장 신숭겸과 조선의 마천목 장군 등을 보고 알 수 있다. 이곳에 서서 심호흡을 하면서 서기가 깃든 정기를 받아들여보자. 올해는 기분 좋은 일이 싹틀지도 모를 일이다. 쉬엄쉬엄 올라도 50여분이면 정상에 도달한다. 정상에 서면 보성강 물줄기가 햇살에 투영되고 동악산, 봉두산 그리고 동쪽으로 섬진강 건너 지리산에서 뻗어 내린 천마산 산줄기와 화순군 경계에 모후산. 백아산 산맥이 장쾌하게 이어지는 호남정맥의 도도함이 꿈틀거린다. 등산 길라잡이 용계마을앞 3거리 주차장 - 용계마을 - 바람재 - 통명산 - 산불감시초소 - 임도 하산 - 통명사 - 금계마을-삼거리 주차장 주변 둘러볼 거리 아들소원바위 금계마을을 나와 국도변에서 석곡으로 가는 방면으로 나아가면 삼기면과 석곡면 경계 백천교 지점에 이르면 계곡(석곡천)과 암반들로 조화를 이루어 풍경의 아름다움도 만만치 않다. 이 지점에서 자식 없는 여자가 돌을 던져 바위 위에 얹히게 되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을 간직한 아들바위가 있다.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유산-원등마을 도대문의 고독 삼기면에서 남계, 금계마을과 통명산을 찾아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곡성군 삼기면 원등리 원등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예전부터 동네를 빙 돌아 동서남북으로 4개의 도대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1개의 문만 남아있다. 지붕 등 형태는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있다. 도대문은 盜(도둑도)자를 사용해 '도둑을 방지하는 문'으로 일컬어 진 듯하다. 이 도대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마을로 들어갈 수도 없고 나올 수도 없다. 오후 6시경에 문을 닫고 새벽에 다시 문을 열어 출입을 통제함으로써 도둑이나 외부인의 침입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삼기면 근촌리 명물-거북바위 기이한 소나무의 절묘함 근촌리 뒷산에 1시간정도 올라가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앞으로 나가고 있는 거북이와 똑같은 형상의 거북바위가 있다. 모양이 진귀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고대부터 인간은 거북이를 신령스런 동물로 여기어 왔으며 장수를 기원하며,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동경하며 소원을 빌었던 기도 상징물로 여겼다. 거북이가 무엇을 찾고자 바다를 떠나 이 산에 오른 것일까? 거북바위를 지나 10분정도 마을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두 바위 사이에 뿌리를 내린 기이한 푸른색을 둘러 감은 고송이 있다. 촘촘히 덮인 비늘모양과 거북등껍질처럼 굵게 갈라져있는 수피는 세월의 인고이며 하늘 향해 치켜 올라간 줄기는 마치 용이 꿈틀거리며 비상하듯 장엄하고 신령스럽다. 정확한 수령은 알 수 없지만 크기를 짐작컨대 약 200여년 정도로 추정된다. 별미여행 석쇠 양념돼지불고기
석곡의 토속음식인 돼지양념구이는 '석곡 흙 돼지'의 고장으로 더욱 널리 알려졌다. 돌실회관은 고향집 같은 느낌이 절로 드는 향토 음식점이다. 연탄불에 석쇠로 구워내는데 불의 속도에 따라 맛의 질이 좌우된다. 마늘과 생강, 양파 등을 넣고 만든 소스에 재어뒀던 고기를 천연 벌꿀에 넣어 고기 빛깔에 윤기가 흐르고 달콤함과 고소함이 입맛을 매료시킨다. 돼지구이라고 해서 다 맛있는 건 아니다. 전통방법만을 고집하고 있어 그 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지역민보다는 외지인들에게 그 맛의 정평이 널리 퍼져있다. 광주뿐만 아니라 순천일대에서 식객들이 맛 행렬을 이룰 정도라고 한다. 밑반찬도 향수에 젖은 가족밥상이다. 물김치, 계란찜, 젓갈류 등등 가지가지 풍성하다. 한상 가득 나오는 반찬에 어디에 젓가락을 대야할지 난감하다. 위치-금계마을-통명산-석곡-석곡면사무소 아래. (호남고속도로-석곡I. C-읍내(1분 거리)
동화와 환상의 생태여행 Go Go! 미륵 할매, 올해엔 복 많이 주세요 ◆아차동 미륵 할매 함평읍에서 대동면 사무소를 지나 조금 나아가니 물들어 가는 저녁노을에 황금빛을 발하는 거대한 황금박쥐 탑이 세워져 있다. 대동면이 황금 박쥐 서식지임을 알려주는 표지다. 가로 2.5m, 세로 8.4m의 청동 조형물로 맨 위에는 황동으로 만든 1.5m 높이의 황금박쥐가 얹혀 있다. 이 조형물이 있는 곳에서 샛길로 황금박쥐가 서식한다는 고산봉 등산로가 이어지고 1분 가량 더 가면 오른쪽으로 아차동 마을을 알리는 커다란 입석이 세워져 있다. 마을 이름이 무척 재미있다. 구전에 따르면 함평 고을에 소식을 전하기 위한 통신수단으로 지금의 함평 공원 자리에서 이 마을을 향해 나팔을 불면 그 나팔소리를 듣고 또 다른 마을에 그 뜻을 나팔로 전해주는 역할을 맡았던 곳이라 해서 '아차동(衙次洞)'이라 불렀다 한다. 마을 중앙에 제법 운치 있는 노목과 어우러진 정자가 있고 그 앞에는 돌 비석 머리에 하얀 보자기로 덮어놓은 바위가 보인다. 미륵당 안에 선돌인 돌미륵 할미를 안치해 지극정성으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빌었다.미륵바위 앞에는 삐죽이 나온 돌이 5개 있는데 이 또한 미륵 할미의 딸들 이라고 한다. 그 연유를 알아보자. 오랜 옛날 아차동 마을에 비 내리는 음산한 밤이면 마을 옆 대밭에서 소름끼치는 해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마을 사람들이 살펴보니 사람 모양으로 생긴 바위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일행 중 제일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가 이 바위 앞에 무릎을 꿇고 "미륵님, 우시는 연유를 말씀해 주시옵소서!"라며 빌면서 절을 하니 이상하게도 울음소리는 뚝 그쳤다. 그 날 밤 그 할아버지 꿈에 한 할머니가 나타나서 "나는 너희 마을 지키는 미륵 할머니다. 너희에게 부탁이 있다. 나를 아늑한 자리에 집을 지어 안치 해주면 너희 마을은 모든 재액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음력 2월 1일에는 이 미륵 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낸다. “미륵 할매, 올해는 복 많이 앵겨주시와요” ◆산골짝 고산동 고산마을-황금박쥐 서식지 세계적 희귀종인 황금박쥐는 중국 남부와 일본 대마도 등지에서 10마리 미만의 채집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함평군 대동면 고산마을 고산봉에 1백여 마리가 집잔 서식하며 동면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비상한 관심을 끌면서 이 마을이 일약 유명해졌다. 고산봉은 고산마을 뒷산을 말한다. 이 산은 예로부터 산세가 매우 험하고 숲이 울창해 일반인들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때 이 산속에서 광산을 운영하다 폐광된 동굴이 30~40여 개에 이른다. 일반인들의 출입이 어려운 산세 덕분에 전혀 훼손되지 않은 자연 원시림이 그대로 보호되고 있던 곳이라 황금박쥐가 안전하게 서식을 할 수 있게 되었지 않나 하고 추측해본다. 황금박쥐와 생태학습장으로 연계하려면 나비 엑스포 공원일대와 황금박쥐 동굴체험을 해봐야 비로소 그 느낌을 알 수 있다. 엑스포공원은 겨울세계에 핀 봄이며 동화적인 환상의 세계가 열린다. 아름다운 '종합생태교육장'으로 만들어 동심의 세계와 동화의 세계를 연출한다. 숲속의 곤충마을, 세계 나비 생태원, 곤충 생태관, 야생화 학습장, 주제 영상관, 나비·곤충표본 전시관. 화석전시관 및 민물고기 과학관, 함평천 생태학습장, 민물고기 전시관, 식물원, 황금박쥐동굴 체험 등 다채로운 시설이 있다. 나비열차를 타고 엑스포 공원을 일주할 수 있으며 생태하천을 따라 산책하는 4인용 자전거 등을 즐길 수 있다. 계절별 테마에 따라 펼쳐지는 곤충의 사계 및 다양한 곤충의 세계와 함께할 수 있다. 눈과 마음으로 즐기고 배울 수 있는 자연의 공간으로 떠나보자. ◆모평현 모평마을 내친김에 옛 고을 모평현 모평 마을의 고즈넉한 운치도 담아가자. 해보면 상곡리 상곡마을과 모평 마을은 이름만 들어도 여진족들이 벌벌 떨었던 고려 명장 문숙공 윤관 장군(파평윤씨)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집성촌으로 함평군의 근간이 되는 마을이요, 전통문화 체험마을이다. 환경부가 선정한 자연생태복원 우수마을이기도 하다. 마을에 들어서면 한눈에 산세 수려한 풍광이 압권이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는 한옥 고가들이 많고 돌담장도 매우 말끔하게 복원해 놓았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조선 시대 마을에 들어선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다. 옛 동헌이 있었던 동헌터, 객사터, 내아터, 물레방아, 현감이 마셨다는 안 샘, 동호정, 영양재, 귀영재,죽로차밭, 윤관 장군을 배향하는 수벽사 등등. 마을 체험문의는 사무장(이명숙. 010-6614-0977)에게 문의하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놓치지 말아야할 주변 명소 ●사동마을의 백비- 하늘을 감동시킨 효행의 표상. 신광면 계천리 사동 마을 입구에는 효행의 표상을 상징하는 백비가 세워져 있다. 효행의 근본을 삼아 귀감이 되어 주고자 눈물 찡하게 만든 감동적인 효자 얘기를 소개 하고자 한다. 모친이 자기 자식을 삶아서 먹으면 낫겠다고 졸라대자 할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어린 아들을 펄펄 끓는 솥에 던져 넣고 말았다. 한 참후 솥뚜껑을 열어보니 아들은 간데없고 커다란 동자삼이 한 개 들어있었다. 하늘이 기적을 내려준 것이다. 부부는 감격해 하늘을 우러러 절을 올린 후 모친께 동자삼약을 드리니 거짓말처럼 병이 나았다고 한다. 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고 비를 내려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게 하였다. 백비를 내린 것은 어머니에 대한 효행은 갸륵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들의 목숨을 버리게 하려던 죄를 묵과 할 수 없어 백비를 내렸다고 한다. 비문은 오직 마음으로만 읽어 볼 수 있다. ●희귀조를 볼 수 있는 에코파크 동물원 세계적으로 희귀한 조류와 동물을 볼 수 있는 에코 동물원도 반드시 가보자. 강종대 동물원장은 진정한 자연 보호가 무엇인 줄 알고 바르게 실천하며 앞장 선 환경 자연 보호 생활 박사이기도하다. 지극 정성으로 30여 년 동안 동물사랑에 열정을 쏟아 자력으로 마련한 희귀 동물원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4마리만 보유하고 있다는 화식조, 호백한, 등 세계 희귀종의 새 조류 등 신비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다.(위치-자연생태 공원 내 ) ◆별미여행 나비랑 한우암소랑
함평 한우의 정직한 맛 "함평에 와서 선짓국 한우비빔밥과 생고기를 외면하면 아니 됩니다" 토요일에 오면 함평장날 풍물도 볼 수 있다. 한우 생고기와 선짓국이 같이 나오는 육회 비빔밥은 함평에서만 맛을 볼 수 있다. 먹을거리에 불신을 주는 요즘 세상이라지만 미식가들의 칭찬을 이어가는 '나비랑 한우암소랑'에서는 손톱만큼의 불신도 발견할 수가 없다. 3년 이상 된 명품 암소한우만 취급하고 숙성 시킨 고기는 절대 팔지 않는다는 것이 경영철학이다. 함평천지 한우 브랜드 'gold beef' 상표를 등록한 것도 고객을 위한 자신과의 철저한 약속이다. 정직에서 나오는 음식인지라 역시 차원이 다른 맛이다, 그래서 단골손님도 많고 미식가들의 칭찬을 이어가고 있다. 자유기고가
김옥 新 남도기행 -장성,문학풍경 여행과 곶감풍경 | |||||||||||||||||||||||||||||||||||||||||||||||||||||||||||
입력시간 : 2009. 01.13.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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