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명시(光明市)에 특이한 도로가 있습니다. ‘오리로(路)’입니다. 처음 보는 분들은 동물인 오리(Duck)를 연상할 수 있겠지만 한자로는 오동나무 오(梧), 마을 리(里) 자를 씁니다. ‘오리’라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인물의 호(號)입니다. 바로 이원익(李元翼ㆍ1547~1634)대감을 말합니다. TV드라마 ‘징비록’을 본 분들은 ‘이원익’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도체찰사로 평양 수복의 전위(前衛)에서 고군분투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오리 대감’을 한국사에서 희귀하다고 한 것은 다음 같은 네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그는 선조-광해군-인조 등 세 명의 임금을 모셨습니다. 둘째, 그 기간 그는 한국사의 운명을 가른 세 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국난(國難) 극복에 앞장섰습니다. 임진왜란-정유재란-정묘호란이었지요. 그가 죽은 지 2년 후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청(淸)나라 군사들 앞에서 청 황제를 향해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 절하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을 당했습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합니다. 만일 그가 살아있었어도 우리가 청에 그런 수모를 당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勢)가 외로울 때 우리는 충신을 생각한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당시 인조는 선조처럼 유성룡-이원익 같은 문신도, 이순신-권율 같은 무신도 없이 간신들 틈에서 역사에 남을 치욕을 당했지요. 셋째, 그는 64년의 공직생활을 하면서 6번씩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지냈습니다. 영의정은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며 도체찰사는 전시(戰時) 총사령관에 비견되는 직책입니다. 넷째, 그는 조선시대 통틀어 3대 청백리(淸白吏)로 꼽힌 인물입니다. 3대 청백리는 세종 때 황희(黃喜), 숙종 때 허목(許穆)입니다.
‘오리 대감’을 한국사에서 희귀하다고 한 것은 다음 같은 네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그는 선조-광해군-인조 등 세 명의 임금을 모셨습니다. 둘째, 그 기간 그는 한국사의 운명을 가른 세 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국난(國難) 극복에 앞장섰습니다. 임진왜란-정유재란-정묘호란이었지요. 그가 죽은 지 2년 후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청(淸)나라 군사들 앞에서 청 황제를 향해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 절하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을 당했습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합니다. 만일 그가 살아있었어도 우리가 청에 그런 수모를 당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勢)가 외로울 때 우리는 충신을 생각한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당시 인조는 선조처럼 유성룡-이원익 같은 문신도, 이순신-권율 같은 무신도 없이 간신들 틈에서 역사에 남을 치욕을 당했지요. 셋째, 그는 64년의 공직생활을 하면서 6번씩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지냈습니다. 영의정은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며 도체찰사는 전시(戰時) 총사령관에 비견되는 직책입니다. 넷째, 그는 조선시대 통틀어 3대 청백리(淸白吏)로 꼽힌 인물입니다. 3대 청백리는 세종 때 황희(黃喜), 숙종 때 허목(許穆)입니다.
- 오리 이원익의 관감당 입구. 안으로 관감당 건물이 보인다.
“(오리 이원익은) 매우 심하게 야위었고 쇠약해져서 눕거나 일어날 때 반드시 남의 손이 필요합니다. 그의 집은 초가집 두서너 칸뿐이며 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입니다. 한 뙈기의 땅도, 노비도 없으며 단지 녹봉으로 입에 풀칠한다고 합니다.” 이 보고를 접한 인조는 감동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40년 정승을 지낸 사람의 집이라는 것이, 두서너 칸의 바람도 못 막는 초가집이로구나. 그의 청렴함은 옛날에도 없다. 내가 평생 그를 존경하는 까닭은 그의 공로와 덕행만이 아니다. 그의 청렴을 모두가 본받는다면 무엇 때문에 백성의 근심이 있겠는가?” 군왕이 내린 최고의 찬사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살던 누옥(陋屋)에 새집을 짓기로 했는데 안타깝게도 이원익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은 지 2년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 그의 집은 불타버리고 맙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관감당은 전쟁이 끝난 후 지은 것인데, 관감당이란 당호(堂號)에도 사연이 있습니다. 관감당은 임금이 이원익의 충심을 보고 느껴, 그것을 모든 사람도 똑같이 느끼라는 뜻에서 지어진 것입니다. 새집을 하사하기로 한데 이어 인조는 이원익에게 베 이불과 흰 요를 선물했습니다. 임금은 왜 비단 이불과 비단 요를 보내지 않았을까요? 그게 오히려 그의 청렴함을 찬양하는 것이란 걸 안 것입니다.
- 관감당은 크지는 않지만 청백리다운 기개가 보이는 건물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임금이 이런 집을 하사한 이는 세명밖에 안된다.
“역대 재상 중 임금께 집을 하사받은 사람은 셋뿐이었다. 이 새사람이야말로 임금의 ‘관감’을 얻은 진정 영예로운 청백리 정승이었다.”
관감당과 종가 뒤로 이원익의 사당인 오리영우(梧里影宇), 충현서원(忠賢書院-현재는 터만 남아있습니다), ‘바람에 목욕을 한다’는 뜻의 정자 풍욕대(風浴坮), 이원익이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모두 역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삼상대(三相臺)와 그가 거문고를 탔다는 탄금암(彈琴岩)이 보존돼 있습니다.
- 이원익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오리영우. 영정을 모신 집이라는 뜻이다.
제가 가기 1주일 전에 꽃이 졌는데 아시다시피 모란은 자식들의 융성(隆盛)을 뜻한다고 하니 그 역시 배려에 의한 식재(植)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특이한 이력을 지닌 오리 이원익은 어떤 집안에서 어떻게 자라난 것일까요?
- 이원익 선생을 모신 충현박물관을 뒷뜰에서 내려다본 광경이다. 4000평 규모의 박물관이 잘 보존돼있다.
단, 대군(大君)에게서 태어난 자손은 4대까지, 군(君) 소생의 자손은 3대까지 종친으로 인정해 작위(爵位)를 잇게하고 그 뒤부터는 과거를 통해 일반인과 똑같이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했지요.
- 계단 윗쪽이 이원익의 각종 유물을 전시한 충현관이다. 계단 양쪽에 가지런히 놓인 다듬이는 종부가 평생 수집한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선조 때 역모 혐의로 죽는 시산정 이정숙은 세종대왕의 증손자였지만 관직은 정3품 당하관이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각설하고, 이원익에게 ‘종친’은 명예로웠지만 한편으로는 굴레로 작용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증조부 이정은은 술을 지나치게 마시다 3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고 이원익의 아버지 함천군 이억재가 거문고의 달인이 된 것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분노를 달래려다 얻은 재주이니 큰 자랑이 되진 못하겠지요. <中편에계속>
Photo By 이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