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시간
그 날도 무기력하게 보내던 하루였다.
4월쯤, 요즈음 비슷한 때였다.
온 대지에는 푸르름이, 산천 초목에는 희망이 무르익고 젊은 가슴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숨가빠할 화창한 봄 날씨이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나른하기만 했던 축 늘어진 그런 날이었을 것이다.
교대에서는 오르간 연습을 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음악을 지도해야 하기 때문에 오르간 연주는 필수과목이고, 애국가까지 연주할 수 있어야 학점을 주고 졸업을 시킨다.
일락산 밑에 자리 잡은 음악관 오르간 실은 운동장을 돌아가는 언덕길을 지나야 갈 수 있다.
오르간 부스마다 꽉차게 들어 앉아 연습에 열심이다. 소리도 요란하다
할 일이 없으니까, 하기는 해야 하니까, 어쩌다 한번 가보긴 하지만 운지법 연습 몇 번에 싫증이 나서 되돌아 나오는 길이다.
언덕 위에서 먼 산을 쳐다보며 뭘 해야 할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희망 없던 그 시절, 모든 걸 다 팽개치고 싶었다
사람은 음식이 없이는 40일, 물이 없으면 4일, 공기가 없이도 4분을 살 수 있지만 희망이 없으면 4초도 못 산다고 했는데......
“야, 너 거기있어 봐.”
운동장 저 쪽에서 누군가 소리지르며 뛰어 온다.
‘날 불렀나 ? 아는 사람이 없는데.....’
덩치도 크고 우락부락한 한 사내가 내 앞에 섰다.
“ 너 1학년이지 ? 운동 잘하게 생겼다. 핸드볼 부 하자”
눈이 부리부리하니 살짝 겁이 났다.
교대 부속 쪽 운동장 한쪽에서 공을 주고 받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핸드볼부였던 것이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운동 잘하게 생겼다’는 말 한마디가 가슴을 콕 찌른다.
운동치, 몸치라서 운동 잘하는 친구가 그렇게 부러웠는데 말이다
젊은 남자치고 운동 잘하고 싶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예”
멋모르고 대답한 그 한마디가 내 일생을 바꿀지는 그 때는 정말 몰랐다.
나에게 운명을 바꿀 시간을 제공한 정하철, 그 형은 내 은인이었다.
나는 어려서 무척 약했고 병을 붙들고 살았다 한다.
나보다 1년 먼저 태어났지만 돌이 안돼 세상을 떠난 형이 있었다.
그 형이 살았다면 나는 세상 바람 온 몸으로 맞으며 고생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세상살이를 하면서 힘들 때마다 머리에 떠올렸던 생각이다.
둘도 없는 손자요. 첫 자식은 여섯 살까지 젖을 먹었다.
그래서 터울이 긴 동생을 두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첫 손자인 나를 유난히 귀여워 하셨다.
내가 세살 때, 밭 1400평을 내 이름으로 등기이전까지 해주셨을 정도다.
그런 손자가 거의 매일 아파서 끙끙대니 1년 전 먼저 보낸 핏덩이 생각도 나실 테고 걱정이 더 크셨을 거다.
할아버지께서는 해가 넘어가면 열로 펄펄 끓는 나를 등에 업고 천안까지 이십리를 뛰셨다. 천안에 몇 없는 의원 집 문을 두드려 치료를 받고 집을 향해 올 때면 먼동이 훤했다는 이야기는 함께 다닌 어머니의 이야기다.
이틀이 멀다 이랬다 하니, 내 그 은혜를 어찌 갚을까 ?
항상을 앓다시피 컸으니 몸은 오죽했을까 ?
언제 죽을지 몰라 호적 올리는 것도 미뤘단다.
비리비리하고, 비쩍 마른 왜소한 아이는 그래도 명은 이어 갔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비밀은 고모님의 입을 통해서였다.
우리 막내 고모님, 지금 79세, 지금도 기분파이시고 조금은 덜렁거리신다.
어른들은 모두 들에 나가시고, 자연히 내 보육 담당이셨단다.
첫 조카를 굉장히 귀여워 하셨던 우리 고모님은 매일 나를 등에 업은채 “아이구 이뻐라 우리 근표”하면서 업는 채 위로 추석이셨단다.
그러면 나는 포대기에서 몸이 쑥 빠져나와 고모님 머리를 넘어 땅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어떤 때는 도랑의 시궁창에 쑤셔 박히는 게 일상사였단다.
어린아이는 누구에게나 귀여운 법, 내가 고모님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나를 업고서 친구 집에 놀러갈 때가 많았는데 나를 내려놓고 정신없이 놀다보면 나 혼자 기어 다니다가 마루 밑으로 쿵, 또, 이층 누각처럼 높은 마루가 있던 친구 집에 놀러가서도 이층에서 뚝 떨어지곤 했단다.
그러면 고모님은 겁이나서 얼른 집으로 돌아와 물로 닦고, 포령환 먹이고 아닌척 했단다. 그런 날은 내가 열이 나고 ,그래서.....
숱하게 그러했다고 고백하셨다. 그래서 몸이 더 약했을 거라고......
어쨌든 병을 끓이고 살게 했던 원인 중에 하나를 제공하셨던 고모님이시지만 나는 정 많은 우리 고모님을 굉장히 좋아한다.
어려서 기억은 아팠던 것, 약했던 것, 그것뿐이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날은 할머니께서 쫓아오셨다.
귀한 달걀을 삶고, 찬합에 도시락을 싸들고 손자 응원을 오셨다.
달리기가 가장 관심사다.
내 차례가 되면 우리 할머니 고래고래 큰 소리로 응원을 하신다.
“우리 손자 이겨라. 근표 잘 뛰어라”
그런데,
이 손자는 언제나 꼴찌다. 그것도 운동장 반 바퀴는 떨어져서.....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운동장 반 바퀴를 떨어져서 뛰면서 ‘빨리 뛰어야지’, ‘쫓아가야지’.같은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창피한 줄도 몰랐다. 내 뒤에는 아무도 없는데, 힐끔힐끔 뒤를 쳐다 보면서 실실 웃어가며 뛰던 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정말 무기력했던 내 어린시절 이었고, 운동과는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었다.
몸이 약하면 마음도 약해지는 법, ‘몸 튼튼 마음 튼튼’이 헛말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무언가 하고 싶었던 일도 없었고 잘하려는 마음도 없었다.
친구들과 딱지치기를 해서 따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따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데 나를 보고 ‘운동을 잘하게 생겼다’라는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반갑지 않겠는가 ?
그 때부터 핸드볼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달리기, 패스하기, 슛하기 등 생전 보도, 듣도 못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운동을 죽어라 하다 보면 욱하고 내장에 있던 똥물까지 역류한다.
몸치, 운동치, 핸드볼부를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더 있었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도태되었을 것이다. 정말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다.
우선 달리기 실력이 가장 뒤다. 선착순은 매일 꼴찌요. 순발력, 민첩성, 유연성, 교치성 등등 모든 게 남달리 뛰어나게 부족하니 한 마디로 열등아다,
그러나 한 가지 미련하게 참을성, 무식하게 지구력 하나는 있었다.
그거 하나로 내쳐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 하나 그 당시 내가 정을 줄 수 있었던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 그 어떤 것에도 재미를 붙일 수 없었다는 것이 나를 핸드볼부에서 지탱하게 해 주었던 것 같다. 운동 시간에는 징그럽게 힘들어도 끝났을 때의 날아갈 듯 개운함도 한 역할을 했을 것이고, 온 몸을 둘러싼 불만과 세상살이와의 갈등, 무엇과라도 부딪히고 싶은 저항감을 억눌러야만 하는 정신적 고통을 잊기 위해 육체에 가하는 일종의 자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카타르시스였다.
몸이 고단해서 쉬고 싶어도 빠질 수도 없었다.
선배들의 몽둥이가 춤을 춘다, 그게 무서워서 수업은 빼먹어도 운동은 죽어도 해야 한다,
하루 서너 시간을 뙤약볕에서 달리고 뛰다 보면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선배들은 툭하면 기합이다.
줄빳따라는 것도 있었다.
우리 1학년을 혼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은 공 바구니에 야구 배트를 챙겨 온다. 그 날은 죽는 날이다. 운동이 끝날 때쯤이면 사단이 난다.
“1학년 집합”
.‘죽었구나‘ 우리는 사색이 된다.
주장 형이 가운데 서고 나머지 형들이 뒤에 배열하여 무게를 보탠다.
주장 형이 일장 훈시를 하며 맞을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는 1학년 전체를 ‘엎드려 뻣쳐’ 시킨다.
우리가 모두 엎드리면 주장부터 야구 배트를 들고 다가 온다.
“눈 감고 이 악물어요. 피하다가는 허리 부러집니다.”
금산에서 어깨깨나 흔들었다는 형의 무게가 실린 목소리는 우리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자, 시작입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한 일이라면 안하면 되지. 누구 약올리나’
첫 번째 부터 엉덩이를 있는 힘을 다해 때리는 것이다.
‘딱’ 소리가 들리면 옆에 대기하는 내 눈도 저절로 질끈 감긴다
‘짹’ 소리가 함께 난다.
어려서 시골 냇가에서 개구리 뒷다리 뽑아 구어 먹으려고 회초리로 개구리를 힘껏 내려칠 때 개구리가 내는 소리와 똑같다.
이 때 개구리는 사지를 똑바로 쭉 편 채 바들바들 떨면서 정신을 잃는다.
그와 똑같은 현상이 사람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하나하나를 지나 내 차례다.
이를 악물고 온 몸으로 버틴다. 내려치는 낌새를 느끼는 순간, 눈에선지 엉덩이에서인지 불이 번쩍하고 눈 앞이 캄캄해진다. 아뜩한 순간이 지나면 정신이 들어오는데 그 때 내 모습은 사지를 뻗은 채 바들바들 떠는 개구리 모습 그대로였다. 거 참 신기했다.
주장 형이 한 차례 때리고 지나가면 그 다음 선배가 또 차례대로 두드린다.
그래도 한 둘은 살살 때릴테지 기대도 해보지만 무슨 사명감이라도 가지고 있는지 모두가 한결같이 야무지게 패댄다.
이렇게 다 맞고 나면 그대로 엎으러져 일어날 힘도, 정신도 쪽 빠져나간다. 그냥 땅바닥에서 널브러져 있다,
그 때 또 호령이다. “빨리 못 일어나. 너희들 덜 맞았구나”
정신없이 일어나지만 모두 흐물흐물하다.
엉덩이는 이미 찢어져 피가 흐른다.
주장 형은 우리가 왜 맞았는지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리고는 후문 앞 막걸리 집으로 데려 간다.
냉면 대접으로 막걸리를 가득 담아 숨도 쉬지말고 마시란다.
엉덩이가 찢어져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서 한 대접 들이키려니 ‘울려고 내가 왔나’ 노래가 저절로 떠오른다.
‘때리지를 말던지, 멕이지를 말던지....’
그날부터 한 동안은 비상이다.
엉덩이 까고 약 바른 채 엎드려 자야하고, 누가 건드릴까 저만큼 떨어져 생활해야 한다.
일명 줄빠따. 몇 차례 거쳐가야 1년이 지나더라.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뭔가 달라져 가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첫댓글 할머니 무릎에 앉아계신 애기 참 잘생겼어요.
열정을 가지고 교대에 묶여있을 수 있는 운동부 선배를 만난 것이 큰 인연이었네요.
꺾이지 않는 강한 의지력은 그 때부터 빛을 발하였나 보네요.
그 무서운 매도 잘 견디신 교장선생님 화이팅
흥미진진하네요ᆞ
줄빠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