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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도버에 상륙하는 순간 시작되었다.
독일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라인 강을 건너는 순간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알레시아를 함락시키는 순간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로마의 최고 통치자가 되는 순간 시작되었다.
서유럽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위기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순간 시작되었다.
《갈리아 전기》의 ‘독자로서’ 카이사르를 평가해보라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카이사르라는 위인을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그에게 닥쳤던 위기였다”라고…….
뜻밖에도 카이사르라는 사내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대문호 셰익스피어에서 코미디 영화감독 알랭 샤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작품에 소재가 되었고, 또한 전쟁이나 쿠데타와 같은 격변의 현장에서는 종종 ‘그의 명언들’이 인용되었음에도 그러하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혹은 씨이~~쩌!)가 철저히 망가진 모습으로 등장하는 영화다.
하긴 위대한 인물일수록 패러디 용으로는 그만큼 훌륭하다. 왜냐하면 높은 데면 높은 데 일수록, 그곳에서 서있다가 굴러떨어지는 모습은 그것을 보는 관중들에게 더 많은 웃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이 영화의 감독은 갈리 인의 자손이다. ㅋㅋㅋ-*^^;
비록 ‘마리우스’라는 걸출한 장군이자 정치가를 낸 집안의 자제였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로마 시내의 젊은 처자들에게 편지를 쓰며 낭비했던 그였다.
로마 최고의 권력자가 된 술라가 라이벌 마리우스의 집안 출신의 젊은이인 그에게 복종을 명령하자 일언지하에 ‘싫소!’라고 답하며 도망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정치적 지조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누군가가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이 싫어서’라는 젊은이다운 마음 때문에 그랬던 것일 뿐이었다.
자신을 납치한 해적들을 상대로 배짱을 뽐내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그 해적들을 모조리 토벌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해서 경찰관들과 함께 조직폭력배들을 잡는데 협력한 것’ 정도로 보는 것이 정확한 평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른을 넘기고 나서의 어느 날, 마침 신전을 참배하고 나오던 도중 그 신전 안 한구석에 모셔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초상을 본 것이 그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서른도 되기 전에 세계를 제패한 대왕이 되었는데, 지금의 나는 서른을 넘겼음에도 이 꼴이라니……”라는 그 유명한 한탄이 바로 그것이다.
나이가 서른이 넘도록 한량이던 그도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초의 위기의식을 가졌던 카이사르는 분발하여 급기야 당대 로마의 유명인사였던 폼페이우스 장군 및 대재벌 크라수스와 3두 정치체제를 출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3두 정치체제에서의 두 동맹자들의 지원을 받은 카이사르는 오늘날의 이탈리아 북부, 즉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자리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첫번째 위기를 맞게 된다.
그 당시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에는 아리오비스투스라는 게르마니아(오늘날의 독일)인이 무리를 이끌고 들어와 한 지역을 점거한 다음, 수많은 갈리 인들을 가혹하게 다루고 있었다. 이에 갈리 인들은 카이사르에게 그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피난지를 얻기 위해 ‘어디론가 이동할 수밖에 없다’며 카이사르를 위협해 온 것이다.
만약 아리오비스투스라는 자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이탈리아 반도로의 갈리 인들의 대이동이 개시될 터이니 이탈리아 북부지역의 총독인 카이사르로서는 강건너 불구경 하듯 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전쟁을 시작하려던 순간 게르마니 인들의 전투력이 얼마나 상당한지를 ‘소문으로만’ 전해들은 병사들이 기겁하여 싸우기를 주저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급박한 위기상황에서 병사들까지 겁을 먹고 전투를 할 의지를 상실하자 이에 카이사르는 동요하지 않고 병사들을 질타한 다음, 아리오비스투스와의 전투를 개시했다.
물론 카이사르라고 해서 이 당시 겁을 먹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리라. 오히려 병사의 수가 크게 열세한 상황에서 ‘능력을 알 수 없는 적’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그 또한 막사 안에서 홀로 좌절감을 곱씹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에게는 ‘물러날 곳은 없고 나아갈 곳은 있었다.’
만약 그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게르마니 인과의 전쟁을 포기했더라면, 하루아침에 한량에서 총독이 된 그를 질투하던 자들은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는 사회적으로 영원히 매장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는 ― 그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 명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또한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적을 무찔렀다는 사실에 힘을 받는 용맹한 병사들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최초의 위기를 극복함으로서, 카이사르는 그 후 여러 갈리 인들, 브리타니 인들 그리고 게르마니 인들과의 전쟁에서의 잇따른 승리와 갈리아 전체의 복종, 거기 더하여 로마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카이사르는 그 전투의 진행과 결과에 대해 로마 시민들에게 보여줄 상세한 기록을 매해의 전쟁 때마다 남기기 시작함으로써 마침내 《갈리아 전기》라는 불후의 대작을 남긴 문사文士로서 이름을 빛낼 수 있었다.
로마 시대의 포룸 중 대표격인 "포룸 로마눔"의 모습.
오늘날의 그것에서 적절한 비교 매체를 찾는다면 인터넷 상의 토론장을 들 수 있겠다.
분명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전쟁을 하고 있던 8년 동안, 이곳 포룸 로마눔에 모인 민중들(공화정 로마의 투표권자들)은 카이사르의 위대함에 대해 논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그 전에는 로마 시내의 여인들을 노소추미유무부老小芻美有無夫를 가리지 않고 후리고 다니던 한량 정도로만 알고 있던) 그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는 자들도 많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카이사르에게 닥쳐온 위기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즉 그가 갈리아 전체에 대한 평정을 거의 완료했다고 생각했던 기원전 52년, 갈리 인들의 여러 부족장들 중 하나인 베르킹게토릭스가 갈리 인 전체를 로마와 카이사르로부터 해방시킬 것임을 명분으로 궐기하였던 것이다.
갈리 인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카이사르의 최대의 적, 베르킹게토릭스
이에 갈리 인 전체가 ― 심지어 그 동안 카이사르에게 계속 충성해오던 부족들까지 등을 돌려가며 ― 호응하면서 카이사르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때에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요충지였던 알레시아에 자신의 병력을 집결시킨 뒤, 그곳에 철통같은 방어선을 건설하여 베르킹게토릭스와 갈리 인들의 힘을 소진시키는데 성공했다.
(관련 참조 - 카이사르 최대의 위기이자 영광 - 알레시아 공방전)
그 결과 카이사르 스스로도 걸출한 인물로 인정했던 베르킹게토릭스는 오히려 좌절하여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고, 이로써 카이사르는 불멸의 명예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이후에도 카이사르에게는 그가 《내란기》라는 또 하나의 명작을 남기게 해준 또 다른 거대한 위기가 닥쳐오게 된다. 하지만 갈리아에서의 전쟁 과정에서 그의 생애의 최대 위기를 여러 차례에 걸쳐 넘겨내면서 생겨난 마음가짐은 그로 하여금 그러한 위기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라와 사회의 어수선함, 그리고 그에 따른 경제적 위기와 생활고로 수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이 예전에 비해 많이 위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악순환으로 인하여 위축된 젊은이들이 좌절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좌절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젊은이들 중에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선택까지 하게 되는데, 그 수 또한 점차 증가추세에 있다고 한다.
바로 이럴 때, 우리 젊은이들이 로마제국과 서유럽의 토대를 이룩한 이 한량의 위기극복과 성공의 이야기를 읽고서 “갈리아에서의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그곳을 정복했을 때의 카이사르보다 훨씬 젊은 우리가 과연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라는 생각으로 생활에 임한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모두 이겨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첫댓글 검투사 두목님 고생해서 만든 자료 잘 보고 선전하고 활용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내용도 아주 충실하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