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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충렬사는 앞으로는 기륭하(基隆河), 뒤로는 산을 하고 지은 건물로 1969년 북경 고궁의 태화전을 모방하여 만든 장엄한 건축물로 열사들의
인의와 충성을 기리는 곳이다.
중화민국성립 전의 혁명열사,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희생된 39만명의 장군, 명사들이 모셔져 있다.
충렬사 대문앞에 서 있는 헌병은 모두 엄격한 훈련을 받은 군인으로 한시간 마다 교대의식을 하는데 이는 많은 관광객들이 기다리다 사진을 찍는
관광명소인데 우리도 마침 교대시간에 도착하여 볼 수 있었다.
보초를 서 있는 군인들과 사진도 찍고 자연스럽다. 고요히 서서 나라의 안위를 위하여 희생한 분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고궁박물원
대만 타이베이에 위치한 대만 국립 고궁박물원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런던의 영국 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함께 세계 4대 박물관으로
불리는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관에는 69여만 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7천 년 전의 옥기. 3천 년 전의 청동기, 유럽인들의 극동 탐험을 부추겨 줬던
아름다운 도자기(차이나), 고궁의 최고 인기몰이 비취 배추, 수십 겹의 상아공, 왕희지의 글, 소동파가 들어 있는 올리브씨로 조각한 배 등, 당, 송, 원, 명,
청 5대에 걸친 서화, 동기, 자기, 칠기, 조각, 선본서적, 문헌등 수십만건에 이르고 매우 높은 예술적 가치와 역사 문화적 가치가 있는 최고의 예술품들이
이 곳에 있다. * 여기서 고궁은 원래 소장품을 보관하던 베이징의 자금성을 말한다.
대만 고궁박물원의 예술품들은 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장악해 가던 1948년 장제스(蔣介石)가 내전을 피해 베이징(北京)에서 난징(南京) 등을 거쳐서
타이베이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중국 본토에 있던 청(淸), 명(明)나라 시대에 황제가 직접 소장하던 소장품을 타이완으로 옮겼다. “나라를 잃고는 살 수
있지만, 문물을 잃고는 살 수 없다”고 말한 장제스는 당시 소장품들을 군인의 목숨과도 안 바꿀 정도로 강한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왜냐 하면 소장품
대부분이 중국의 국보급 유물로 그 값어치가 중국 대륙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큰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옮겨진 소장품들을 장제스(蔣介石) 총통 시절인 1965년, 타이베이의 북동쪽 약 8km 지점 스린취 와이상시의 산골짜기에 전통적인 중국 중세기
궁전 건축 양식에 비취색의 유리기와를 얹은 4층 전시관, 왼쪽에 행정집무 빌딩, 본관 오른쪽에는 중국 송대의 정원을 복원해 놓은 즈산웬(至善園)으로
단장하여 국립고궁박물원을 세우고 관리하고 있다.
박물관 실내는 바닥부터 천정까지 온통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다. 타이완 서북쪽 화련 지방의 석산에서 나는 대리석을 이용하였다고 하며 본관 뒷산
지하에는 온도와 습도를 완벽에게 조절할 수 있는 보관 창고를 지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총건평 5,378평, 본관은 4층으로 지어졌고, 1∼3층이 전시실에는 69여만 점의 소장품 가운데 약 2만 점이 전시되어 있다.
절세의 걸작으로 불리는 수백 점의 상설 전시 이외에는 3∼6개월 단위로 전시품이 바뀌고 계속 둘러본다면 8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단다.
4층에 중국식 찻집 '싼시탕인차스'에서는 차와 만두를 판다.
주요 전시물
원내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안내자가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할 4가지를 잘 설명하여 주어서 고궁박물원 홈페이지와 인터넷 자료를
참고하여 정리해 본다.
취옥백채(翠玉白菜-Fei-ts'ui jade cabbage,Jadeite Cabbage with Insects)
청왕조 (1644-1911)
크기 길이 18.7 cm, 폭9.1 cm, 두께 5.07 cm
취옥배추는 고궁박물원에서 꼭 보고 가야한다고 안내자는 강조한다.
옥 작품으로 천년에 하나 얻을까 말까하는 정교한 조각으로 옥재의 자연미와 정교하게 만들었다.
취옥은 주로 중국의 운남이나 미얀마 지역에서 나오는데 취옥배추의 재료는 휘옥류에 속하는 것
이라고 한다. 취옥백채는 위쪽에는 두 마리의 여치가 기어올라가고 있는데, 여치는 번식력이 좋은
곤충 중 하나로, 시경에도 여치가 다른 이들의 자손 번식을 축복한다는 시가 있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자손 번영을 상징한다. 또한 흰색은 신부의 순결을 뜻하는 의미가 있어서
신부혼수품중의 하나로 준비하기도 하였단다.
그래서 취옥백채는 경 고궁 내의 영화궁에 있던 보물로써, 청 말기 광서제의 왕비인
근비의 혼수용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육형석(肉形石)
육형석은 홍샤오로우, 혹은 동파육형석이라고도 불리는데, 홍샤오루우나 동파육은 모두
돼지고기로 만든 중국의 전통음식이다. 육형석은 천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일종의
불투명한 옥수인 마노석 위에 층층이 쌓인 무늬결들의 원형을 최대한 살려 장인들이 매우
정교하게 가공해 낸 것이다. 옥수 표면에는 아주 세밀한 구멍을 내어 실제 돼지의 피부와
같이 모공의 효과를 연출하고, 최상층 부분에는 갈색으로 색을 입혀 간장에 절인 돼지
껍질의 느낌을 한층 더 살려내었다.
육형석의 마노석이나 취옥백채의 옥과 같이 희귀한 돌들은 거 청나라
수도인 북경 근처에는 좋은 옥이나 희귀한 돌들만을 전문적으로 채굴
하는 황실 소유의 광산에서 채굴하여 진상되었다고 한다.
모공정(毛公鼎) 서주(서주, 1046-771BC) 말기
크기 높이 53.8cm, 배부분깊이 27.2cm, 입지름 47cm,
무게 34.7kg
이 정(鼎, 고대 물건을 이깋거나 삶는데 쓴 기물로 은
상시대와 주대에는 주로 제기로 쓰였으며 왕족과 귀족
들만 이를 주조하였음)은 구연부가 넓고 입 주변에는
고리 문양이 죽 둘러있으며 두 개의 귀와 다리 세 개가
달려있다. 명문은 7개의 단락으로 나뉘어 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周) 선왕(宣王)은 즉위한 직 후 조정을 바로잡기 위해
숙부인 모공으로 하여금 나라 안팎의 크고 작은 일을 돌
보도록 부탁하였다. 모공은 정사를 살피는데 힘쓰고 사사
로움이 없었기에 임금은 모공을 표창하고 많은 녹봉을
하사하였다.
이에 모공은 정(鼎)을 주조하여 후손들에게 전하여 가보로
영원히 보존하도록 한다.(출처 국립고궁박물원)
왕의 책명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새긴 서주 금문의 걸작
투채(鬪彩)계항배(鷄缸柸) 명(明), 성화연간(成化, 1465-1487)
크기 높이 4cm, 지름 8.3cm, 바닥지름 3.7cm
이 자기는 구연부가 넓고 벽은 약간 둥글려져 있으며 굽이 아주 낮다. 그릇 표면에는
어미 닭과 병아리 그림 두무리가 그려져 있다. 수탉과 암탉이 병아리를 이끌고 들에
나가 먹이를 먹이는 장면으로 어미 닭은 머리를 숙이고 벌레를 쪼려고 하고 있고
병아리는 날개를 벌리고 깡충깡충 뛰어 다니고 있다.
작디 작은 화면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귀엽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또한 그림 안에서 모란과 난초는 태호석(太湖石)과 어우러져 두 개의 화면을 나누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릇의 안쪽은 순백색으로 아무런 무늬가 없고 그릇 밑은 청화(靑花)안료로 “대명성화년제(大明成化年製)”
라고 해서체로 된 여섯글자가 있는데 이 낙관 둘레는 두겹의 넹모난 테두리가 둘러져 있다.
가족간의 화목함과 즐거움을 전하는 어미 닭과 병아리 그림은 제완들의 사랑을 받아 문인들이 특히 선호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명대 말까지 ‘성화연간 구워낸 계항배(鷄缸杯)가 최고의 술잔이다’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명 신종(神宗) 만력(萬曆)황제의 탁자위의 성화 계항배는 ‘십만금의 가치를 지녔다’
라고 일컬어 졌으며, 그 명성은 라로 높아졌다.(출처 국립고궁박물원)
이보다 작은 계향배가 홍콩 경매시장에서 최근 350억원에 경매되었다니 값을 매길 수가 없는 진귀품이다.
총 12개중 9개가 이곳에 있단다.
상아투화운룡문투구(象牙透花雲龍紋套球)
크기가 11.7cm, 청 건륭제 시절 유물
코끼리 앞니를 둥그렇게 잘라 만든 노리개로 무려 3대에
걸쳐 완성된 이 유물은 상아를 섬세히 조각해 그 안에
겹겹이 구가 계속 되는 구조로 17개의 구가 들어있다.
구멍은 손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으며 놀라운 점은
잘라서 이어 붙임이 전혀 없고, 서로 떨어져 있어 모두
자유롭게 회전이 가능하다.
원형을 맞추면 모두 일직선이다.
노리개 용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현대의 기계를
사용한 최신기술로 제작해 보아도 14개까지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대만 고웅시 박물관도 가 보았지만 이곳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세계 어느 나라의 박물관 보다도 그 역사와 소박하다.
옥병풍과 자기 등 작품 하나하나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관심을 가진 자들은 며칠을 보아도 감동이 절로 나오는 진귀한 보고 들이다.
이제 저녁을 먹고 용산사와 야시장을 보러 갈 것이다.
몽골리안 바베큐
저녁은 몽골리안 바베큐로 하였다. 1990년 도꾜로 가는 비행기가 연착이 되어서 관광지를 돌아보면서 몽골리안 바베큐를 정말 신기하게 보고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20여가지 고기 종류와 향료, 그리고 양념이 풍성한 맛있는 바베큐였으나 오늘은 돼지고기와 소고기 뿐이다.
저녁을 먹고 용산사로 향한다.
용산사
국가2급 고적인 용산사는 불교, 도교, 유교의 중요한 신 100여존을 모시고 있는 종합사찰로 그중 가장 예불을 받는 것은 관세음보살이다.
중국식의 고전건축인 3진4합식의 궁전식 건축으로 벽면에는 생동적인 도상이 그려져 있고 석조 역시 매우 정밀하며 기둥과 처마의
경계부분에는 못을 쓰지 않는 전통양식으로 되어 있고 지붕의 사방에는 용, 봉황, 기린 등 길상을 상징하는 조형이 있으며 채색 유리와
기와로 장식되어 있다.(인터넷)
용무늬는 황제만의 특권으로 용발톱 5개는 황제를 상징하고 황제만이 사용하는 것이고, 4개는 왕급이란다.
경내를 둘러보면서 설명을 들었지만 인터넷에 보이 대만도교에 대한 좋은 설명이
있어서 그대로 게재하여 본다.
병고자 수명장수, 학업자 지혜명석, 사업자 재수형통, 미혼자 속득성혼….
중생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원이 담긴 축원내용들이다.
그런데 병자, 시험을 앞둔 자, 사업자, 짝이 없는 자에게 각자의 구체적인
소망을 들어줄 신이 직능별로 분화되어 있다면 어떨까. 대만은 불교국가
이기에 앞서 대부분의 국민이 도교를 믿고 있으며, 도교사원에는 이러한
신들이 포진해있다.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도교사원 용산사(龍山寺)에는 낮에는 물론 저녁에도
퇴근길의 타이베이 시민들로 북적인다. 하루를 간절한 기도로 마무리하는
그들이 이곳에서 만나는 신들은 저마다
범접하기 어려운 전문능력을 지녔다.
몸이 아픈 이들은 건강한 몸을 바라며 화타신선(華陀神仙)에게 기도하는데,
화타는 외과수술을 시도한 중국최초의 의사이다.
사람의 몸에 칼을 대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3세기 초에, 환자에게 마비산(麻沸散)이란 마취제를 먹여
통증 없이 수술을 마치는 기적을 이루었으니 병을 다스리는 신으로 좌정할
만하다.
시험을 앞둔 이들은 문창제군(文昌帝君)을 찾게 마련이다. 본래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 괴성(魁星)이던 것이 후대에 문창제군으로 신격화되어 학문의
신이자 수험의 신으로 떠올랐다.
과거제도가 성행한 명나라 때는 시험장 앞에 괴성인형을 팔았다니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마음은 같은가보다.
여러 신들 가운데 특히 도교의 성모인 마조(祖)에 대한 신앙이 깊어 대만인들은
모성에 기대듯 마조를 믿고 의지한다. 마조신화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관음보살
에게 우담바라를 하사받아 그것을 먹은 후에 마조를 가졌다고 한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신비한 영력을 발휘해 풍랑을 만난 오라버니들을 구해주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이에 특히 뱃사람들의 수호신으로
절대적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선 뒤 도교는 미신의 온상으로 탄압받아 소멸상태
에 있다가 1978년 개혁개방으로 종교억제정책이 완화되어 빠른 속도로 되살아
나고 있다.
그러나 노신(魯迅)이 도교를 일컬어 ‘중국의 뿌리’라 했듯이, 대륙에서 탄압받던
중에도 대만과 홍콩에서는 그들의 기층종교로서 도교가 광범위하게 뿌리내리며
신앙되어왔다. 오늘날 대만의 종교를 이야기할 때 도교ㆍ유교ㆍ불교는 함께
거론되게 마련이며, 아울러 이들 삼교(三敎)가 혼합된 민간신앙도 광범위하다.
윤소희 선생의 현지조사에 따르면, 싼샤三峽)에 있는 도교사원 조사묘(祖師廟)
에서 행하는 유불도(儒彿道) 합동제사에서는 가운데 노란 승복을 입은 불교
사제가 서고, 양 옆에 보라색ㆍ검은색 도복을 입은 도교와 유교 사제가 서서
의식을 행한다고 한다. 불교를 중심으로 서 있는 사제들의 위치는 대만에서
세 종교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대륙에서 섬으로 줄을 이었던 이주자들은 목숨 건 채 바다를 건너야 했고,
어부들은 무서운 풍랑에 휩쓸리기 일쑤였다. 가릴 곳 없는 태평양 한가운데서
태풍과 장마의 수난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열악한 현실 속에서 도교와 유교와
불교는 뿌리 깊은 삼교로 대만사람들의 삶과 희망을 지켜온 셈이다.
명나라 때 삼교합일(三敎合一)의 풍조가 만연했듯이, 서로 배척하지 않은 채
나란히 공존하는 종교문화야말로
대만의 저력이라 할 만하다.
[불교신문2995호/2014년3월22일자]
어디를 가나 규모차이는 있지만 관우, 장비등의 신상이 있고 복을 비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에도 많은 신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곳도 마찬가지다.
일본이나 여러나라들은 외부로 부터 들어온 종교를 자신들의 토속 신앙과 결부하여 받아들이고 믿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유교나 불교, 천주교,
기독교를 받아서 순수하게 그대로 믿고, 분쟁 없이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외국사람들이 특이하게 보고 우수한 민족이란 칭송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관우상을 뒤로 하고 이제 용산사 옆에 있는 야시장을 둘러보러 간다.
광저우졔 야시장(廣州街夜市場)
용산사를 나와서 우측 길로 들어서니 야시장이다. 한마디로 없는 것을 빼고는 다 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이렇게 야간에 나와서 더위도 식히면서 저녁을 해결하나 보다. 호두부는 꼭 먹어보라고 했는데.
별 호감이 가지 않는다. 돼지 족발 같은 음식도 많지만 너무 냄새가 심하다. 물밤을 사서 나누어 먹고 망고도 많이 샀다.
이곳에 있을 동안 망고를 실컷 먹고 가야지. 한국의 1/5 가격 정도는 된다. 애플 망고를 비롯하여 자이언트 망고등 종류도 다양하다.
이곳은 팥빙수를 비롯한 여러가지 빙과류 가게인데 사람들이 줄을 지어 몰려 있다. 1920년에 창업했다니 역사가 대단하다.
이렇게 하여 서울에서 이곳 대만 타이페이로 와서 첫날 일정이 모두 끝났다. 호텔로 이동하여 푹 쉬고 내일은 화련으로 이동하여
태로각 협곡 관광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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