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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창녕조씨 족보> |
삼국사기에서는 김용수와 김용춘을 혼동하기도 한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용수는 서기575년경 출생이며 김춘추가 어릴 때 동생 김용춘에게 부탁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사기에서는 일찍 죽은 것이 아니라 최소한 서기634년까지(약60세) 살아 있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김용춘은 서기647년에 70세로 사망한 것으로 화랑세기에서 적고 있다. 그래서 김용수는 최소한 서기634년까지 산 것으로 되고 김춘추를 동생 김용춘에게 넘긴 것이 아니라 김춘추는 김용춘과 천명공주의 아들인 것으로 된다. 화랑세기의 혼인관계 기록을 본다면 김춘추가 친아버지를 몰랐을 리 없다. 김춘추는 왕이된 후 아버지 김용춘을 문흥대왕으로 추봉한다. 만약 친아버지가 김용수라면 김용춘을 굳이 갈문왕으로 추봉할 이유가 없다. 김용춘은 서기578년생이고 천명공주는 서기582년경 출생이며, 서기596년에 김용춘이 화랑풍월주가 되었을 때 이미 두사람은 혼인한 사이가 되며 이때 천명공주가 화랑의 주인인 화주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기603년에 태어나는 김춘추는 김용춘의 아들이 확실하게 된다. 김용수가 김용춘보다 일찍 사망한 것은 사실이 된다.
만약 삼국사기에서 적은 서기622년 이후의 김용수가 김용춘이라면, 서기596년 이전이나 최대한 603년 이전에는 김용수가 사망한 것이 된다. 김용수는 김용춘보다 2~3년 빨리 출생한 것이 될 것이므로 서기575년경에 출생한 것이 되고 약22세 또는 29세에 사망한 것이 된다.
답글쓰기이상으로 김춘추는 천명공주와 김용춘의 아들이 되며, 김용수는 처음 천명과 혼인하였으나 서기596년이전에 사망한 것이 되거나, 서기596년에 천명공주를 화랑풍월주인 동생 김용춘에게 양보한 것이 된다. 이리하여 서기603년에 태어난 김춘추는 김용춘의 아들이 된다.
이는 당시 혼인관계로보아 김춘추가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를 이유가 없다는 전제하에서 내린 결론이다.
사부님 오늘은 뒷산에 벼락이 살고 있습니다.
답글쓰기만약 김춘추가 친부가 김용수인 것을 알면서 새로이 아버지가 된 김용춘을 즉위시에 갈문왕으로 봉한 것이라면 김춘추는 효도에 밝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화랑세기필사본에 김용수를 갈문왕으로 기록하고도 있는데 그 연유나 봉해진 경위는 밝혀져 있지 아니한데,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봉해진 것이라 볼 때에는 진평왕이 봉한 것이 되므로 사위를 갈문왕으로 봉한 것이 된다. 하지만 삼국사기 등 어느 기록에서도 김용수를 사위로서 갈문왕으로 봉한 기록이 있지 아니하다. 화랑세기필사본에서만 나타나는데, 이는 사위로서 즉 김용수가 천명공주의 정식남편으로서 갈문왕이라고 호칭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선덕여왕이 즉위하고서 김용춘을 남편으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나 갈문왕으로 봉한 사실이 없음을 볼 때 정식남편이 아니라 정치적 비서로 삼았다라고 보인다. 만약 김용수가 천명공주의 남편으로서 갈문왕이라면, 동시에 김용춘이 덕만공주의 남편이 된 적이 있으므로 당연히 갈문왕이 되었다라고 보아야 하나 나중에 김춘추에 의하여 봉해지므로 정식남편이 아니었다는 것이 된다.
여러기록으로 볼 때 덕만공주의 남편 또는 선덕여왕의 남편으로서의 갈문왕은 음갈문왕이다. 그외의 소위 삼서제에 의한 김용춘, 흠반, 을제는 음갈문왕이 아닌 것이 된다. 그리고 선덕여왕 즉위 후의 소위 삼서제의 삼서인 김용춘, 흠반, 을제는 가문왕일 수 없다. 왜냐하면 선덕여왕은 이미 50이 넘어 아들을 낳기 위하여 남편으로 삼았다라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정치적 비서였다라고는 할 수 있겠다.
답글쓰기화랑세기필사본에서 천명공주의 남편으로서 김용수가 갈문왕으로 봉하여 졌다라면, 진평왕의 사위가 되는 조계룡도 공주의 남편인 사위로서 갈문왕으로 봉해질 수 있다는 결론이 된다. 그래서 음(飮)갈문왕의 飮이 더더욱 조(曺)와 같은 소리를 가진 말임이 분명해진다. 즉 선덕여왕의 남편인 飮갈문왕은 곧 曺갈문왕으로서 조계룡임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답글쓰기[진평왕~태종무열왕 사이 왕과 갈문왕]<삼국사기,삼국유사,창녕조씨족보,화랑세기필사본>
진평왕
진안갈문왕 : 진평왕의 살아있는 동생
진정갈문왕 : 진평왕의 살아있는 동생
용수갈문왕 : 진평왕의 사위로서 천명공주의 남편으로서 살아있을 때 봉해진 것이 됨.
飮갈문왕 : 진평왕의 사위로서 공주의 남편으로서 살아 있을 때 봉해진 것이 됨 => 조계룡(부마도위,창성부원군)?김용수(천명공주의 남편으로서 갈문왕)?김용춘(정식남편이 아님)?
-덕만공주 : 김용춘->김용수-> 선덕여왕 : 김용춘->흠반, 을제 (소위 삼서제) => 사신(私臣)이 와전되어 기록된 것으로 봄<정식남편이 아닌 것이 됨>
-천명공주 : 첫남편은 김용수이며 김용수가 임종시에 천명공주와 아들 김춘추를 김용춘에게 부탁하였다 함. 즉 둘째 남편이 김용춘이 됨. 김용춘이 적자가 없어 김춘추를 아들로 삼았다라고 함. 타당성이 있다고 보임.
-선화공주 : 백제무왕(서동) (공주인지 옹주인지 불명인데 통상 공주로 불림)
-양명공주 : 모종, 보종 => 갈문왕이 아님 (옹주에 해당)
-우야공주 : 20대 화랑풍월주 예원 => 갈문왕이 아님 (옹주에 해당)
*정비의 딸을 공주라 하고 후비나 후궁의 딸은 옹주가 된다. 공주의 남편은 부마로서 도위(都尉)에 오를 수 있고, 옹주의 남편은 부마로서 위(尉)에 머문다.
선덕여왕 : 음갈문왕(김인평)
진덕여왕 : 김기안. 갈문왕에 봉해진 사실을 알 수 없음.
태종무열왕
문흥대왕(갈문왕) : 김춘추가 계부 김용춘을 추봉한 것임. 갈문왕의 의미가 확대되어 대왕이라고까지 불리게 됨.
마야부인은 정비가 되고, 승만부인은 마야부인이 사망한 후 들인 후비가 된다.
그외 여자들은 모두 후궁이 된다.
천명공주와 덕만공주는 마야부인 김씨의 딸이 되어 성골이 되고, 승만부인 손씨의 아들은 진골이 되는데 대를 잇게 하여 하였으나 요절하였다 한다.
소위 화랑세기 필사본의 기록에 의하면,
[진평왕] (567~632) <579~632>
1. 마야부인 김씨 : 정비
-천명공주 + 1.김용수 2.김용춘
子 김춘추
-선덕공주(덕만) + 1.김용춘 2.김용수 (선덕여왕) 3.김용춘 4.흠반 5..을제
2. 승만부인 : 후비 (마야부인 사망후)
-자 : 요절
3. 보명(寶明)
-양명(良明)공주(583~?) + 1.보종(寶宗)2.모종(毛宗)(588~?)
모종子 양도(良圖)(610~670)
4. 만룡(萬龍)
-우야(雨若)공주(613?~?) + 예원(禮元)(606~673)
子 오기 孫 김대문
5. 미실(美室)궁주(550?~?)
-보화(寶華)공주 (588?~?)
子 선품(善品) : 예원공보다 2살 적다(608~?).
6. 보량(寶良)
-보로(寶路)공주
7. 화명(花明)
8. 옥명(玉明)
화랑세기필사본에서 김용수를 갈문왕으로 적고 있는데, 천명부인의 정식남편으로서 봉해진 것이 된다. 그래서 다른 공주들은 후궁의 딸들로서 그 남편들은 갈문왕이 되지 아니하는 것이 된다. 김용춘은 덕만공주의 남편이 되었다 하나 갈문왕이 되지 못하였고 김춘추가 갈문왕으로 추봉하였다 하고, 또 선덕여왕의 남편으로 되었다 하나 갈문왕이 아니므로 정식 남편이 아니라 그냥 사신(私臣)이 된다.
김용수가 갈문왕으로 기록되는 것은 사위가 갈문왕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국유사에서 선덕여왕의 남편이 음갈문왕으로 기록되는 것으로 보면 남편은 사위로서 진평왕 시대에 봉해진 것으로 된다. 김용춘과 김용수와 흠반과 을제는 음갈문왕이 아닌 것이 된다. 제3의 인물이 정식남편이 된다는 것이다.
진평왕의 후궁들의 딸들은 모두 화랑이나 풍월주의 부인이 되거나 하고 그 아들들도 화랑이나 풍월주가 되었다.
천명공주의 아들인 김춘추는 진골로서 화랑이었다가 풍월주가 되었으며, 진골의 첫 왕이 되었다.
덕만공주의 아들은 ?
마야부인과 승만부인 외에는 경주김씨선원세보에 올라있지 않다. 마야부인은 정비이고 승만부인은 후비(계비)가 된다.
경주김씨선원세보에 진평왕의 딸로서 1. 선덕왕, 2. 천명부인, 3. 女 조계룡 이라고만 적혀 있다. 여기서 女는 女壻 즉 사위자리를 가리킨다. 다른 후궁의 딸들의 남편은 사위로 올라있지 않다.
그러므로 조계룡은 진평왕의 정비 마야부인 김씨에게서 난 딸의 남편이 된다는 것이 틀림없다. 덕만공주, 천명공주외에 선화공주가 삼국유사 서동요를 통하여 알려져 있는데, 그 외에 또 마야부인 김씨의 딸이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적어도 조계룡의 부인인 진평왕의 딸은 정식남편이 하나인 것으로 된다! 정식남편이 하나인 공주가 천명부인 말고 누구일까? 선화공주는 제외하고! 덕만공주 외에 또 마야부인의 딸 인 공주가 더 있을까?
일단 조계룡의 부인은 후궁의 딸이 아닌 것이 틀림없다. 마야부인과 승만부인의 딸이 된다. 승만부인은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이 요절하였다 하는데, 딸이 있었는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승만부인은 마야부인이 사망한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조계룡이 서기571년경에 탄생한 것을 고려하면 승만부인의 딸은 아닌 것이 된다. 즉 마야부인 김씨의 딸이 된다는 결론이 된다.
답글쓰기경주김씨선원세보에서 마야부인 김씨의 딸로는 선덕여왕과 천명부인과 그외 조계룡의 부인이 되는데, 만약 선화공주가 마야부인 김씨나 승만부인의 딸이라면 삼국사기등에서 정식으로 기록될 수도 있는데, 서동요에서만 나타나고 또한 당시 백제는 적국에 해당하므로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문제이다. 마야부인의 딸이 덕만, 천명, 선화라고 한다면, 선화는 백제무왕의 비로 기록되지 아니한 것이 되고, 천명부인은 김용춘의 부인으로서 김춘추의 어머니이다. 덕만공주는 선덕여왕이 되었는데, 그 남편으로 김인평이라 적고 있으나 삼국유사에서는 음갈문왕이라고 적고 있어 김인평이 음갈문왕인지 불명이다. 사위로 적고 있는 조계룡은 김인평과는 다른 인물인지 동일인물인지 불명이다. 그런데, 음갈문왕의 음자와 조계룡의 조라는 글자의 소리가 함께 "마실"로서 이두식 표기로 보면 같은 인물이 된다. 그리하여 김인평과 조계룡이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음갈문왕=조계룡=김인평이 성립되게 된다. 그러나 김인평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불명이다.
답글쓰기음갈문왕이 조계룡이라면 선덕여왕의 남편인 조계룡이 선덕여왕의 란에 기록되지 아니하고 사위로 기록된 것을 보면 진평왕이 왕으로 재위할 때 즉 덕만공주의 남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조계룡이 진평왕 후에 선덕여왕이 왕이 된 후에 혼인하여 남편이 된 것이 아니라 공주일 때 즉 진평왕이 왕일 때 혼인한 것이 되는 것이다.
조계룡은 진평왕의 사위로서 덕만공주의 남편이 됨을 나타내고, 선덕여왕의 남편은 김인평이라 하면서 김인평을 갈문왕이라 적지 않고 있는데, 조계룡을 창성부원군이라 기록하여 간접적으로 갈문왕임을 나타내고 있다. 다만, 후세에 족보를 보완한 것으로서 미흡한 점은 잇다.
한편 천명부인도 문흥왕비라 하여 왕의 계열에 적고 있는데, 진평왕의 자식으로서 왕의 계열에 속하는 선덕여왕, 천명부인, 사위 조계룡만을 경주김씨선원세보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선원세보는 왕실의 족보를 가리킨다. 선화공주 외의 다른 공주나 사위들은 기록이 없어 등재하지 아니한 것인지, 아니면 정비 김씨나 후비 손씨의 자식이 아니므로 올리지 아니한 것인지 불명이다.
답글쓰기삼국유사에서 적고있는 덕만공주인 선덕여왕의 배필은 飮갈문왕으로서, 경주김씨 선원세보에서 적고 있는 김인평인지 진평왕의 사위로 적고 있는 조계룡과 동일인인지 명확한 기록이 없어 단지 추정은 하나 단정은 할 수 없는 상태이다.
답글쓰기[덕만공주 선덕여왕과 조계룡과의 연관성]
1. 음갈문왕
선덕여왕의 배필로 삼국유사에서 음(飮)갈문왕이라고 적고 있는데, 조계룡의 성씨인 曺가 마실 조라는 글자인데, 음갈문왕의 飮자가 마실 음자이다.
2. 당서에서는 정관21년인 서기647년에 선덕여왕이 卒하였다고 하는데, 통감에서는 정관25년인 서기651년에 졸하였다 하는 바, 조계룡의 사망연도가 서기651년이라 한다.
3. 조계룡은 진평왕의 사위로서 부마도위 창성부원군이라 족보에 기록되는데, 통상 부마도위는 정비의 딸인 공주의 남편이 오를 수 있는 자리이고, 부원군이라는 명칭은 공신(功臣)이나 측근 인척에게 주는 작위인 바, 신라시대에는 부원군이라는 명칭이 이에 해당하는 자리로서 갈문왕이 있고, 덕만공주는 마야부인 김씨의 딸로서 정비의 딸이고, 남편이 갈문왕이다.
4. 덕만공주는 천명공주와의 나이 차이로 볼 때 서기580년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조계룡은 서기571년에 출생하였다고 하는 바, 혼인상대로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5. 경주김씨선원세보는 왕실의 족보로서 진평왕의 부인으로는 정비 마야부인 김씨와 후비 승만부인 손씨만 적으며, 자식으로는 선덕여왕, 천명부인, 여서 조계룡만 적고 있고 그외 딸이나 사위는 적고 있지 않은데 기록이 부실하기 때문인지 후궁의 핏줄이기 때문인지 불명하다.
[진평왕 시대] 서기567~632년 <579~632>
서기571년 : 비사벌가야(창녕) 왕손 옥결과 경주이씨 이례향 사이에 조계룡 탄생
서기575년? : 진평왕의 장자 김용수 출생
서기578년 : 진지왕 차자 김용춘 출생
서기580년? : 진평왕 장녀 덕만공주 출생
서기582년? : 진평왕 차녀 천명공주 출생
서기595년 : 김서현과 만명부인 사이에 김유신 출생
서기596년~603년 : 김용춘이 풍월주가 됨. 화주는 천명공주
서기598년? : 덕만공주 혼인 <약19세>
서기600년? : 천명공주 김용수와 혼인 <약19세> (*선화공주도 이때경 서동과 혼인하여 백제로 갔음.)
서기603년 천명공주의 아들 김춘추 출생
서기620년? : 마야부인 卒 <덕만 약40세>
서기621년? : 승만부인 아들 출생 <덕만 약41세>
서기623년? : 김춘추와 김유신의 둘째 동생 문희와 혼인 < 김춘추 약21세, 덕만공주 약44세)
서기629년? : 승만부인 아들 요절 <덕만공주 약50세)
서기629년 : 김용춘 고구려 출정 <52세>
서기630년? : 김용수 卒 <약55세>
서기631년 : 조계룡 탄생(사성) <61세> (건복48년) *부마도위로서 (마실)갈문왕에 봉해짐?
서기632년 : 진평왕 붕 <약68세>
[선덕여왕] <서기632년~647년>
서기632년 : 대신 을제 국지총람 <선덕여왕 약53세>
서기634년 : 연호 인평(仁平) 개원
서기647년 : 선덕여왕(덕만) 붕 1월 8일 <약68세> (정관21년)
서기647년 : 김용춘 卒 <70세>
[진덕여왕]
서기651년 : 조계룡 卒 <81세> (정관25년)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용춘의 형 김용수는 화랑세기필사본의 선덕여왕 즉위이전인 서기630년경이 아니라 김용춘보다 약2~3년이전이 서기644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됨.
국지총람이 아니라 총지국정(摠持國政=국정총람國政摠覽)임!
대신 을제가 선덕여왕의 총지국정의 명을 빋았는 바, 정치를 대신한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섭정에 해당하여 최측근으로서 아마도 음갈문왕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데, 만약 음갈문왕이라면 대신 을제는 김인평으로서 곧 조계룡이 된다.
이찬, 각간 등의 직을 거론하지 않고 단지, 대신(大臣)이라 하여 명백히 나타내고 있지 아니한데, 신하중에서 최고의 신하는 갈문왕이 될 것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 갈문왕을 대신으로 기록한 것이라면, 을제가 곧 음갈문왕이 되고 조계룡이 되며 김인평이 된다. 김부식이 남존여비 사상에 짓눌려 일부러 선덕여왕에게 남편이 있음을 나타내지 아니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를 지은 김일연 선생은 불도로서 남존여비 사상에 어느정도 해방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불교를 숭배한 선덕여왕에 대하여 유교식보다 더 정확히 기록한 것이 된다.
진덕여왕이 서기647년부터 8년째 서기654년까지 왕위에 있었는데, 아마도 나이가 많았던 모양이다. 진덕여왕은 이름이 승만이며,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의 딸로서 성골이다. 선덕여왕과 약10여세 차이가 난다고 가정하면 진덕여왕은 서기590년경 출생이며 약65세로 붕한 것이 된다.
답글쓰기조계룡의 자녀로는 5남2녀가 있었다 한다. 약3년차이로 보면 약20년 정도 걸린다. 조계룡은 서기571년생으로 서기600년경에 혼인한 것으로 보면 서기620년까지가 된다. 30여세에서 50여세가 되는 셈이다. 81세를 살았으니 충분히 가능한 것이 된다. 덕만공주가 조계룡의 부인이라면, 서기600년에는 약21세가 되며 서기620년이면 40세정도 되어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 된다. 서기620년경 이후 덕만공주는 왕위를 잇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한 것이 된다. 이때 김춘추는 18세가 되고, 김유신은 26세가 된다. 김유신은 부장군으로서 서기629년 35세경부터 본격적으로 전쟁에 출정하는 등 활동하게 된다.
답글쓰기덕만공주가 진평왕의 장녀로서 진평왕이 즉위하던 서기579년에서 얼마 안되던 해에 출생한 것이 되고 진평왕이 53년간 왕위에 있어 덕만공주가 여왕이 된 때에는 최소한 50여세 가 넘는 바, 폐경기가 지난 선덕여왕이 자식을 두기 위하여 신하들이 만든 삼서제로 김용춘, 흠반, 을제를 남편으로 삼았다라는 화랑세기 필사본의 기록은 사신(私臣)제도를 와전한 기록이 된다. 사신은 벼슬이름이며, 내궁(內宮)의 책임을 맡은 직책이다. 정치적으로 개인비서를 사신(私臣)이라 할 수 있다. 서기전1122년경 기자에게는 사사(私師) 왕수긍이 있었는데, 사사는 개인이 비밀스럽게 둔 스승이라는 말로 신라시대의 사신(私臣)과 통하는 말이 된다. 즉 사(私)는 내(內), 비(秘)의 뜻이 있는 것이다.
답글쓰기착오에 의한 오기 : 기자의 사사 왕수긍은 사사(私師)가 아니라 사사(士師)로서 기자 개인의 스승이기도 하지만 벼슬이 사사라는 것이 됩니다.
덕만공주가 김용춘을 사신(私臣)으로 삼겠다라는 등의 취지는 자신의 측근으로서 정치적으로 심복으로 만들겠다라는 의도를 가진 말이 된다. 실제 덕만공주와 김용춘은 나이 차이가 그리 많지 않다. 김용춘은 서기578년생이며, 덕만공주도 서기580년경 출생으로 거의 비슷하다. 아무리 삼촌에 해당하는 항렬이지만 나이차이가 많지 아니하므로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는 덕만공주로서는 충분히 개인 신하 즉 사신(私신)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답글쓰기글소개-진평왕의 덕만공주 여왕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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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족보에 의하면,
조계룡의 어머니는 이례향이며 이례향의 아버지는 이광옥으로서 서기536년생이라 적고 있다. 진흥왕 대에 벼슬에 나섰다. 진흥왕은 서기540년부터 서기576년까지이니 이광옥은 약20세이던 서기556년경 등제한 것이 되고 계속하여 진평왕 시대에는 한림학사를 지낸 것이 된다. 이광옥이 서기536년생이니 딸 이례향은 약20세에 낳았다라고 하면 서기555년경이 되고 이례향이 약20세에 조계룡을 낳았다라면 서기574년경이 된다. 실제로 조계룡이 서기571년에 출생한 것이라면, 이례향이 약18세경에 조계룡을 낳고 이광옥은 이례향을 약19세경에 낳았다라고 된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래서 조계룡은 서기571년에 일단 출생한 것이 맞는 것이 된다.
한국의 나이 계산법은 태아도 나이에 포함시키므로 태어나자마자 한살이 된다. 서양에서는 태어난 때부터 만으로 나이를 계산한다. 한국은 태아도 이미 사람으로 보는 것이 된다. 즉 정자와 난자가 결합된 때부터 이미 사람으로 본다. 서기전239년에 북부여 시조가 되는 해모수는 공양태모지법를 폈다는데 이는 곧 태교법을 가리킨다. 한국나이 21세는 대략 서양 나이로 만20세가 된다. 현재 서양에서는 여자가 17세 즉 우리나이로 18세가 되면 성년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실제 우리 민법에서도 남녀18세이면 혼인적령기로 보고 있다. 남자여자 14세(만13세)이면 임신가능한 나이가 된다. 18세이면 충분하다!!! 진평왕이 서기565년생이 되는데 덕만공주가 서기580년에 출생한 것이라면 진평왕의 나이는 16세로 만15세가 된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의하면 진평왕이 서기583년에 후궁인 보명의 딸 양명공주가 태어난 것으로 계산된다.
답글쓰기화랑이나 풍월주는 왕이나 왕자가 아니라 기타 왕족이나 왕과 관련된 사람, 귀족의 자제가 되었다. 그래서 진평왕은 진흥왕 때 태어 났으나 진지왕 때 화랑이나 풍월주를 지내지 아니하였고, 진지왕도 진흥왕 때 화랑이나 풍월주를 지냈다는 기록이 없다. 그래서 왕자나 다름없는 덕만공주는 화랑이나 풍월주를 지내지 아니한 것이 되며, 천명공주는 김용춘이 풍월주일 때 화랑의 주인인 화주가 된 적은 있다. 즉 풍월주는 적녀 공주보다도 낮은 자리가 된다. 천명공주가 화주가 된 것은 김용춘이 풍월주로서 그 부인이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이미 천명공주는 궁을 나가 진골로 강등된 상태였다고 보인다. 김용춘이 풍월주가 된 때는 서기596년부터 서기603년 사이이다. 이때 천명공주는 김용춘의 부인이 되었다라고 보은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김춘추는 김용춘의 아들이 틀림없는 것이 된다. 서기596년에 천명공주가 약15세라 한다면 서기582년경에 출생한 것이 된다. 김용춘은 서기578년 출생이므로 서기596년 풍월주가 된 때는 이미 19세가 된다. 서기603년에는 김용춘은 26세가 되고 천명공주는 22세가 된다. 김춘추를 낳는 나이로는 충분하다.
답글쓰기조계룡의 관직인 부마도위, 태사공, 창성부원군을 예로 들면, 부마는 진평왕의 사위라는 말이며 도위는 공주의 남편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자리이고, 태사공은 공작(公爵)이라는 봉작의 자리로서 왕실 자녀의 교육을 맡은 책임자이며, 부원군은 공(公)보다 높은 대군(大君)격의 자리로서, 신라시대로 말하면 갈문왕(葛文王)이 된다. 그외 대도독 등의 자리는 외직으로서 공(公), 군(君) 등 내직보다 높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람이름 뒤에 붙이는 공(公)은 존칭이 되고 벼슬로서의 공(公)은 제후봉작의 첫째자리인 공작을 의미한다. 대왕, 제>왕>대군>군>공주>공>후>백>자>남>대부>...
답글쓰기결론적으로 갈문왕은 비왕(裨王)의 뜻을 가진 말로서 경우에 따라 대신 정치를 하는 섭정왕이 될 수도 있다. 단군왕검의 태자 부루가 진한(眞韓)으로서 비왕(裨王)이며, 단군왕검을 대신하여 조선삼한(진한, 마한, 번한)을 다스렸다.
답글쓰기비왕(裨王)은 옆에서 돕는 왕으로서 보좌왕의 뜻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 섭정왕이 될 수도 있다. 본왕의 좌우에 두는 좌현왕 우현왕은 보좌왕이 되고, 대신 정치를 하는 왕은 섭정왕이 된다. 갈문왕은 일부 직접 정치를 하는 왕이기도 하였으며, 추봉되는 명예적인 왕이기도 하였다. 갈문(葛文)이라는 말은 아마도 갈믄(갊+은)이라는 말로서 "보완하는, 보좌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 된다. 즉 갈문왕은 "보좌왕", "비왕"이라는 말이 된다. 葛文은 "갈믄"의 이두표기인 것이다.
답글쓰기나중에는 이 갈문(葛文)이 일반명사가 되어 갈문왕은 의례 왕의 형제나 돌아가신 아버지나 사위나 남편에게 봉하는 자리가 된다. 그리고 심지어는 갈문왕을 대왕이라고 하여 왕과 같은 자리로 추봉하기도 하였다. 김춘추는 아버지 김용춘을 문흥대왕이라고 추봉하였다. 물론 문흥대왕은 문흥갈문왕으로서 문흥왕이라고도 한다.
답글쓰기진평왕이 서기565년부터 서기632년까지 68세를 살고, 덕만공주가 서기580년경부터 서기647년까지 약68세를 살고, 김용춘이 서기578년부터 서기647년까지 70세를 살고, 김춘추는 서기603년에 출생하여 서기661년에 비명횡사하여 59세를 살고, 김유신이 서기595년부터 서기673년까지 79세를 살았는데, 조계룡은 서기571년부터 서기651년까지 81세를 살아 김유신 말고는 10년이상 장수하였는 바, 보통사람이 아니며 도력이 있었던 분이 틀림없다.
답글쓰기금관가야 시조 김수로왕은 기록에 의하면 177세를 산 것이 되는데 보통 도력이 아니다. 김수로왕은 서기23년생이며 서기42년 20세의 나이에 금관가야 시조가 되었고 서기48년 26세에 16세이던 허황옥과 혼인하였으며, 거등왕자와 김알지, 허씨가 된 두아들을 비롯하여 모두 12자녀를 두었다. 초기 금관가야의 왕위연수에 연구할 점이 많다.
답글쓰기김수로왕 : 서기23년~199년 <177세> 서기162년 태자 거등이 섭정.
*만약 김알지가 김수로왕의 아들이라면, 김알지는 서기65년에 경주로 진출하였는데 이대 최소한 15세 정도는 되었다 보면, 서기50년경생이 된다.
거등왕 : 장자라면 서기48년경생이 되는데 서기253년까지 살았으므로 206세를 산 것이 되므로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러나 태자가 꼭 장자가 아니라 김수로왕이 오래 살았기 때문에 여러 왕자 중에서 태자를 선택하여 태자수업을 받게 한 것으로 보면, 김수로왕이 약70세이던 서기90년경에 출생한 왕자일 가능성도 있는데, 이후 서기162년인 73세에 섭정을 한 것이 되고 서기199년 110세경에 왕이 되어 서기253년 174세를 산 것이 된다. 김수로왕이 177세를 산 것으로 보면 174세를 산다는 것은 일단 가능하다고 보인다. 이후 3대 마품왕부터는 일반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재위연도로 왕으로 지냈다.
허황옥은 서기33년생으로 16세이던 서기48년에 김수로왕과 혼인하여 12 아들을 낳았고, 두 아들에게는 허씨성을 따르게 하였으며, 서기189년 붕하여 157세를 살았다. 엄청난 도력을 가진 분이시다.
답글쓰기단군왕검이 130세를 살아 신선이라 부르는데, 김수로왕과 허황옥과 거등왕은 장수법을 알고 있던 도인임이 틀림없다. 요임금은 서기전2401년에서 서기전2284년까지 117세를 살았고, 순임금은 서기전2343년부터 서기전2224년까지 120세를 살았다. 물론 숨어서 살던 선인들은 더 오래 살았다고 보아야 한다. 기록에 의하면, 유위자 선인은 마한의 웅씨왕 시대인 서기전2333년 이전부터 서기전1727년까지 약600세를 산 것으로 된다. 최소한 서기전1891년에 국자랑의 스승이었으므로 적게 잡아 60세로 보면 서기전1950년생이니 서기전1727년까지 224년을 산 것이 된다. 유위자는 서기전1766년경 은나라 탕임금의 재상이 된 이윤의 스승이다. 순임금의 아버지는 단군왕검보다 100여세가 많은데 서기전2470년생에 되며 서기전2200년경까지 산 것이 되어 약270세를 산 것이 된다.
답글쓰기만약 순임금이 단군조선의 2대 부루단군의 사자 유호씨(순임금의 아버지)의 명에 따라 유상(유호씨의 둘째 아들. 순의 이복동생)의 군사와 우(禹)의 군사가 협공을 하지 않고 자연사 하였다면 아마도 120세 이상은 충분히 살았을 것임이 틀림없다. 태자부루도 오래 산 것이 되는데, 단군왕검이 서기2370년생이며, 서기2333년 38세에 조선을 건국하고 이후 태자부루에게 섭정을 맡겼는 바, 서기전2267년에 태자부루가 도산회의를 주관하였는데, 이때 단군왕검은 104세가 되며, 순임금은 77세가 되고, 태자부루는 아마도 60여세 되었을 것으로 보면, 서기전2240년에 단군이 되어 58년후인 서기전2183년에 돌아가셨으니 서기전2327년경부터 서기전2183년까지 약145세를 산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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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위자 선인 600여세 (또는 최소한 224세이상)
유호씨 270여세
김수로왕 177세
거등왕 약174세
허황옥 157세
배달나라 치우천왕(자오지한웅) 151세
배달나라 거야발 한웅 149세
부루단군 약145세
배달나라 거련한웅 140세
배달나라 양운한웅 139세
배달나라 우야고한웅 135세
단군왕검 130세
배달나라 모사라 한웅 129세
배달나라 갈고 한웅 125세
배달나라 주무신 한웅 123세
배달나라 시조 거발한 120세
순임금 120세
배달나라 치액특한웅 118세
요임금 117세
배달나라 태우의한웅 1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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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70세, 80세는 어린애에 불과하네요!!!
인간이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나이는 120세를 넘을 수 있다고 보면 되겠네요!!!
장수법을 수련하면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너무 고생하면 약80세정도 밖에 못삽니다!(예: 석가부처 80세, 예수 80세, 공자72세, 김유신 79세, 조계룡81세 ...)
도만 닦으면 120세는 무난 할 것입니다.
앞으로는 의술이 발달하여 120를 넘길 수 있다고 하는데, 역사는 돌고 도는 모양입니다. 의술이든 수련이든 같은 효과를 주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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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의
할아버지 아도공 124세
아버지 물품공 11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