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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가 우리 불교계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사찰이라면 선암사는 조계종 다음으로 큰 교세를 가진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선암사라는 사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절 서쪽에 높이가 10여장(丈)이나 되고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옛 선인(仙人)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며, 이 때문에 선암이라는 절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선암사는 "산사"의 모범답안같이 청정하고 아름답다. 건축과 경관이 절대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어떤 구석의 장면은 흔한 시골마을의 돌담길을 걷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승방 앞에서는 심심 산골의 퇴락한 이름없는 암자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선암사는 통일신라 말기(헌강왕 5, 875) 도선이 호남을 비보하는 3대사찰인 3암의 하나로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세운 비로암을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도선이 재건하였다는 두 가지 창건 설화가 전해온다. 신라에 한창 불법을 전하던 아도화상이 어느새 이웃 나라인 백제까지 와서 절을 지어주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통일신라 말기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엄연히 실재하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통일신라 말에 도선이 창건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선암사는 선종 9년(1092)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크게 중창된다. 선암사를 중창할 때 의천은 대각암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종이 의천에게 하사한 금란가사, 대각국사 영정, 의천의 부도로 전하는 대각암 부도가 전해오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고려 중기 선암사의 모습은 적막한 산골 속에 자리한 엄숙한 예배처였다.
"적적한 산골 속 절이요, 쓸쓸한 숲 아래의 중일세. 마음속 티끌은 온통 씻어 떨어뜨렸고, 지혜의 물은 맑고 용하기도 하네"
라고 읊은 김극기(金克己: 고려 명종 때의 문신)의 시구처럼,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선암사는 이러한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선암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은 불교개혁의 산실이 된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송광사에서 보조국사 지눌이 기존의 타락한 불교계를 비판하며 정혜쌍수를 내세우는 개혁 불교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이웃한 선암사가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지는 관련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송광사가 사세를 떨침에 따라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리학을 정치.교육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 왕조가 억불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조선 전기는 사찰들이 대단히 어려웠던 시기로 선암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후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왜군의 방화로 사찰이 거의 불타고, 1철불 2보탑, 3부도와 목조건물로는 문수전, 뒷간, 조계문만 살아 남았다고 한다.
그 후 본격적인 복구가 시작된 것은 1690년에 들어서다. 복구사업은 두 가지 방면으로 활발하였는데, 1691년 선암사에서는 대대적인 화엄대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수많은 불교계의 지성들이 운집하였고, 사회적으로도 집중적인 주목을 받아 선암사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선암사는 참선도량으로서 뿐만 아니라 화엄교학의 명문 강원으로 전통을 확립하게 된다. 사찰의 본격적 복구는 護岩大師 若休(1664∼1738)를 기다려야 했다. 12세에 선암사로 출가한 그는 스승인 枕肱 懸辯(1616-1684) 선사로부터 선암사를 보호하라는 의미의 호암이라는 당호를 지어 받을 정도로 가람 수호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약관 35세에 벌써 丁字閣형태의 원통전을 짓고 관음 성상을 목조로 조성 봉안하니 이것이 숙종 24년(1698)년과 25년의 일이었다. 이어 숙종 27년부터 30년에 걸치는 사이 불조전을 짓고 과거 53불을 비롯한 60여 구의 목조불상을 조성 봉안하고 대웅전을 대대적으로 개수한다. 그리고 법형인 桂陰 浩然 대사에게 부탁하여 사적기를 정비하며 이를 바탕으로 당세 문장인 부제학 蔡彭胤(1669-1731)에게 <전남 순천군 조계산 선암사 중수비병서>를 짓게 하여 명필인 예문관 직제학 李震休(1657-1710)의 글씨를 받아 사적비를 해 세운다. 이 비석은 지금 無憂殿 뒤 전나무 숲 속에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선암사 입구 계곡을 가로지르는 석조 무지개다리인 승선교를 축조하였는데, 이 다리의 축조 후에 그 기술이 알려져서 벌교 홍교도 2년뒤에 그가 놓았다 한다.
이후에도 선암사는 크고 작은 화재를 만나 여러 차례 중창되었다. 영조 35년(1759) 봄 또다시 화재를 당해 계특대사가 중창불사를 하였는데 화재 발생이 산강수약(山强水弱)한 선암사의 지세 때문이라 하여 화재 예방을 위해 영조 37년(1761)에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으로, 절이름을 해천사(海泉寺)로 바꾸었다. 그런데도 순조 23년(1823)에 다시 화재가 일어나자 해붕, 눌암, 익종 스님이 지휘하여 대대적으로 중창 불사를 하였으며, 이후 옛 모습을 되찾아 산 이름과 절 이름을 조계산과 선암사로 원위치 하였다. 현존하는 선암사의 건물 대부분은 이때 지어진 건으로 당시에는 전각 60여 동이 있었다고 한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발표된 <寺刹令> 및 <사찰령 시행규칙>에 따라 30본사가 정해질 때 선암사 또한 30본사 중의 하나가 되어 승주군과 여수시.여천군의 말사를 통섭하였다. 일제 때까지도 어느 정도 寺格을 유지하던 선암사는 1948년 여순 사건과 1950년 한국전쟁의 피해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고 지금은 20여 동만이 남아있다.
부도밭
선암사로 가는 길은 조계산 전체에 고루 드리운 짙은 나무 그늘로 인해 늘 상쾌하다. 마음속 먼지까지 깨끗이 씻어내 줄 듯 맑게 흐르는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숲길은 숲을 이루는 나무들이 다채로울 뿐 아니라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어서 더욱 좋다.
절앞의 여관촌에서부터 이 기분 좋은 숲길을 따라 약 15분 가량 오르면 오른편 길섶으로 하늘을 찌를 듯 장대한 측백나무로 둘러싸인 부도밭이 나온다. 부도 11기와 비석 8기가 줄지어 있는데, 부도는 대부분 팔각원당형이다. 그중에는 사사자가 삼층석탑을 지고 있는 이형부도 한 기도 있다. 이 부도는 부도밭에 함께 있는 벽파대선사비(높이 3.75m)와 같은 시기인 1928년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화산대사 부도(높이 4.1m)로, 사자 네 마리가 비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전남 구례 화엄사의 四獅子三層石塔(국보 38호, 8세기 중엽)이나 충북 제천 빈신사지4사자석탑(보물 94호, 1022년)을 닮았다.
선암사 장승
부도밭을 지나 계속 가면 길가에 장승 한 쌍이 서 있는데 특이하게도 남녀상이 아니라 모두 남자상이다. 빼어난 조형미를 갖춘 甲辰年(1904) 선암사 나무장승 이후 丁卯年(1987)에 새롭게 세워진 나무장승이다. 갑진년 나무장승은 1907년 이래 7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킨 국내 최고의 나무장승이었다. 보통 나무 장승은 10년 정도 지나면 썩어버리는데, 이 장승은 조직이 치밀한 밤나무로 만들어져 쉽게 썩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경내의 설선당으로 옮겨져 보호되고 있다.
정묘년 장승 역시 밤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전체적으로 갑진년 나무장승을 모방했다. 몸통은 붉은 색으로 칠해졌고, 호법선신(護法善神), 방생정계(放生淨界)라는 글씨가 씌어있다(갑진년 장승과는 장승의 좌우와 명문이 서로 반대다). 방생정계 장승은 세 갈래의 수염을 몸통까지 늘어뜨리고, 호법선신 장승은 세 갈래의 수염을 동그랗게 꼬았다. 눈꼬리를 치켜든 채 근엄하면서도 정겨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조각솜씨나 들인 공은 갑진년 나무장승에 미치지 못한다. 때문에 정묘년 장승은 갑진년 장승에 견주어 세인들의 관심밖에 놓여 있는 형편이다. 본래 나무 장승은 세월이 지나면 교체되게 마련인데도, 갑진년 나무장승의 명성이 너무 높아 정묘년 나무 장승이 모조품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승선교(昇仙橋)
장승을 지나 계속 큰길로 걸어 올라가면 왼편에 계곡을 가로지르는 작은 무지개다리가 나타난다. 이 다리를 건너 모퉁이 길을 따라 돌편 반원형의 큰 무지개 다리가 나오고, 이 다리를 밟고 건너면 길은 강선루(降仙樓)로 향한다. 두 무지개다리 중 큰 무지개다리가 보물 제400호로 지정된 승선교이다.
두 무지개 다리는 대소의 차이가 있을 뿐 축조방법이나 겉모습에는 차이가 없다. 큰 무지개다리는 길이 14m 높이 7m 너비 3.5m로, 길게 다듬은 30여 개의 장대석을 연결하여 홍예석을 드리우고 홍예석 양쪽에 잡석을 쌓아 계곡 양쪽 기슭의 흙길에 연결시켰으며, 위쪽에는 흙을 덮어 길을 만들었다. 기단부는 자연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여 홍수에 쓸릴 염려가 없도록 하였으며, 홍예석 중간에는 이무기돌을 돌출시켜 장식적인 효과와 함께 재해를 막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승선교는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축조했으며, 순조 25년(1825) 해붕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 영조 5년(1729)에 놓은 보성 벌교의 홍예교(보물 304호)도 선암사 스님들의 솜씨라고 전해온다. 신영훈씨는 승선교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승선교는 단풍 속에서 바라다보아야 더욱 좋다. 이가 시리도록 찬 냉기가 선뜩한 속에 붉게 물든 단풍이 산석(山石)에 붉은 기를 수놓았다. 푸른 이끼 가득한 홍예 다리가 설빔한 아이처럼 홍의녹상(紅衣綠裳)한 채로 다소곳이 거기에 서 있다. 바람 소리 물 소리 속에 단풍으로 단장한 여인처럼 거기에 그렇게 서있다."
작은 무지개다리에서 큰 무지개다리로 이어져 강선루에 이르는 길은 강선루로 직접 통하는 큰 길이 생기기 전 선암사에 이르던 옛길이다. 이 길로 들어서야 비로서 반원형의 승선교가 물에 비치어 완전한 원형을 이루며, 강선루가 이 원 안에 들어앉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강선루(降仙樓)
강선루는 누하 정면 1칸 측면 1칸이지만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 2층 팔작지붕집이다. 초창 연대는 알 수 없으며 1930년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측면 기둥 중의 하나가 계곡에 빠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강선루에서 뒤를 돌아보면 굽어 흐르는 계곡물 사이로 두 다리가 크고 작게 잇달아 있어 더 운치 있다. 강선루에 올라 둘러보는 경치가 더 멋지지만 오르지 못하도록 문이 잠겨있는 경우가 많이 아쉽다. 강선루의 안과 밖에 "降仙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안쪽은 尹用求의 글씨, 밖의 것은 金敦熙의 글씨이다.
삼인당(三印塘)
강선루에서 한 모롱이를 돌면 오른쪽 길섶으로 비껴나 있는 연못을 만난다. 경내 못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일주문 못미쳐 왼쪽으로 작은 폭포를 이루며 경내 밖으로 나와 인공 수로를 타고 이곳으로 흘러든다. 길다란 타원형의 못 가운데에 알 모양의 섬이 있는 특이한 모습의 삼인당이다. 연못의 독특한 모습은 멋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형태 안에 심오한 불교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한편 이에 대해 풍수지리적인 설명을 하는 경우도 있다. 즉 삼인당은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축조했으며, 그 유래는 뒷산의 龜峰이 거북이 형상이므로 거북이에게 필요한 물을 주기 위해서 연못을 조성하고 그 가운데에 거북의 알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거북에게는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알이 없을 경우 자손이 끊기는 것을 의미하게 되며 이에 따라 거북에게 자손을 이을 수 있는 조치를 마련해 주기 위해 섬을 만들어 비보하였다고 한다.
삼인당에서 일주문으로 오르는 모롱이에는 짙은 녹음과 어울린 야생 차밭이 펼쳐져 있으며, 중간 중간 어느 부도비의 잔재인 듯한 조각들을 볼 수 있다. 측백나무, 전나무와 갈은 키 큰 나무들 아래 나직하게 자리잡은 이 차밭 말고도 경내 뒤편에는 더 큰 차밭이 있는데, 선암사의 차는 다인들 사이에서 맛과 향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선암사 경내
선암사의 지형변화는 다른 산지가람에 비해 비교적 완만한 느낌이 든다. 이것은 택지의 탁월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일주문에서 응진전에 이르는 부지 경사가 약 9%의 경사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암사지는 자연파괴를 심하게 하지 않고 8단의 기단을 축조하여 각 단들 위에 건축물을 입지하도록 함으로써 지형변화를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선암사에서는 많은 기단을 축조해서 건축물을 입지시키고 있으나, 한 기단에 5-6개의 계단만을 두어 인간적 척도를 이용하고 있다.
선암사의 밀도 있는 가람배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주축 외에 여러 개의 축을 두어 각 영역 군을 형성하였다는 점이다. 주축을 이루는 대웅전 영역 뒤쪽으로 원통전 영역, 응진각 영역, 각황전 영역이 있으며, 이들 영역을 이루는 여러 전각들은 조금씩 비껴나 있으면서도 이가 물린 듯 줄짓고 있다. 전각과 전각 사이에는 작은 화단이 마련되어 갖가지 꽃나무가 사시사철 피고 지며 경내를 치장한다. 뿐만 아니라 전각들 대부분이 전면 증축되거나 개축되지 않고 보수가 필요한 부분들만 조금씩 손보아지며 가꾸어진 덕택에 선암사에서는 남다른 격조와 고풍스러움이 풍겨난다.
범종루.만세루
일주문에서 계단을 오르면 곧장 범종루로 이어진다. 일주문과 종루 사이의 공간이 좁기 때문일까? 흔히 일주문과 종루 사이에 배치되는 천왕문.금강문.인왕문 등이 없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인 범종루 밑으로 난 계단을 올라서면, 정면에 "육조고사(六朝古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지붕집인 누(樓)가 길게 모습을 드러낸다 단청없이 나무기둥 사이에 흰벽을 두었는데, 퍽 단아해 보인다. 이곳은 강당으로 쓰이는 만세루이다.
"육조고사"라는 현판을 이곳 선암사에 붙인 것은 중국의 선승 육조 혜능이 조계산에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암사가 조계산에 위치한 인연을 기리기 위해서인데, 六祖를 뜻하는 한자가 六朝로 달리 표현된 것으로 추측된다. 글씨는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1614∼1597)이 썼다고 전해진다.
동·서 삼층석탑
만세루를 옆으로 돌아들면 대웅전과 설선당, 심검당이 만세루와 함께 안마당을 이루고 있는 대웅전 영역이다. 이곳에서는 앞마당에 서 있는 동서 삼층석탑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외관상 크기와 양식이 비슷한 두기의 삼층석탑은 높이 4.7m이며 보물 395호이다.
우선 서삼층석탑을 살펴보면 정방형의 지대석 위에 날렵해뵈는 기단부가 올라서 있다. 기단부를 이루는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은 여러 개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주와 탱주가 각각 1개씩 표현되어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매씩인데 몸돌에는 우주가 모각돼 있고, 지붕돌은 층급받침이 4단이며 지붕돌 위에는 독특하게도 호형(弧形)과 각형(角形) 두 단으로 이루어진 몸돌받침이 있다. 대부분의 신라 석탑은 이 부분이 각형으로, 한 단 또는 두 단이다. 지붕돌은 반전이 심하여 날카로운 인상을 가지며 모서리에는 풍경을 달았던 듯 구멍이 한 모서리에 8개씩 뚫려 있다. 좀더 살펴보면 초층 몸돌은 윗면이 아랫면보다 2cm 정도 좁다. 3층 몸돌 역시 윗면이 0.5cm 좁다. 이는 탑이 높아 보이게 하는 일반적인 수법이다. 상륜부는 노반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는데 원래의 부재는 아니다.
동삼층석탑은 외관상 서탑과 거의 동일하나 일부 부재가 본래의 것이 아니다. 건립연대는 9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1986년 해체 복원 때는 초층 몸돌에서 사리장신구가 발견되었다.
괘불지주
대웅전 앞마당에서 주목할 만한 또다른 문화재는 괘불지주이다. 괘불을 높이 내걸 수 있도록 괘불대를 세우는 데 필요한 돌기둥인 이 괘불지주의 주인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괘불의 하나로 꼽히는 선암사 괘불(6.82×12.15m)이라 할 수 있다. 선암사 괘불은 석가모니 한 분이 비단 한 면 가득 차게 그려진 그림으로, 대웅전 후불벽화 뒤쪽 나무함에 보관되어 있다. 1753년 제작된 이후 나라 안팎에 우환이 있을 때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 또는 안전을 빌 때 내걸렸다.
대웅전·지장전
단아하면서도 정중함이 절로 우러나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조선 중기 이후의 건물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순조 25년(1825)에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단은 막돌을 1m 정도 자연스럽게 쌓아올렸는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앞면에는 3단으로 굄을 둔 둥근 주춧돌을, 뒷면.옆면에는 덤벙주춧돌을 놓았다. 민흘림 기둥위에 昌枋과 平枋을 둘러 기본 가구를 형성하고 그 위에 내 4출목, 외 3출목인 공포를 올렸다. 정면의 창호는 모두 빗꽃살로 장식하였으나 마모가 심하며, 빛바랜 단청으로 고색이 넘친다. 그런 외부 표정과 달리 내부는 층단을 이룬 우물천장으로 장엄하게 단정되었으며, 단청도 비교적 선명하다.
본존불은 순조 23년 계미(1823) 늦봄에 불이 나서 대웅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각이 잿더미로 변하였던 것을 해붕, 익종, 용암 등이 나서 중창을 도모하였을 때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바 양식기법도 이에 부합되어 19세기 초반으로 보고 있다.
대웅전 현판은 영안부원군 金祖淳(1764-1831)의 글씨이다. 순조의 국구로서 안동김씨 척족세도를 연 걸물답게 장중한 명필을 구사하고 있다. 순조의 탄생과 관련있는 선암사에 대웅전 현판 글씨를 남긴 것도 그럼 직한 일이겠다.
대웅전 석가모니불 뒤에 걸린 탱화는 비단에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과 8대 보살, 10대 제자, 그리고 12명의 신장상을 그린 것이다. 가로 3.65m 세로6.5m나 되는 초대형 영산회상도로 영조 41년(1765)에 제작되었다. 거대한 화면을 압도하게끔 석가본존불을 초대형으로 중상단에 배치하고 다른 협시상들은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놓았다. 게다가 이 협시상들은 아래쪽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지고 있으며, 화면 전체에 걸쳐 녹색과 붉은색이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선암사가 소장한 문화재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불화라 할 정도로 절에는 눈여겨볼 만한 탱화가 곳곳에 많다. 대웅전을 비롯해 각 전각과 암자에 보관된 불화를 모두 합치면 100여 점이 된다고 한다.
대웅전 오른편에서 대웅전을 향해 서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촐한 맞배지붕집은 지장전이다. 명부의 10대왕이 모셔졌으며,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선암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조각상들이다. 대웅전 왼편에 대웅전을 등지고 서 있는 건물은 응향각으로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선방이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가정집을 보는 듯하다.
설선당·심검당
선암사의 또다른 가치는 6개의 승방들이 옛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완벽한 ㅁ자의 승방-설선당과 심검당, 무량수각과 해천당-이 4동이나 남아있는 곳은 여기 뿐이다. 이 승방들은 밖에서는 단층으로 보이지만, 안마당의 내부에는 2개층 혹은 반 3층으로 구성된 입체적인 구조를 가진다. 선암사의 승방처럼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요사채들은 부안 내소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나마 내소사 승방은 1동 뿐이고 현재는 안마당에 함석지붕을 씌워 변형했으니, 원 승방 공간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곳은 선암사가 유일하리라.
이처럼 입체적인 승방을 만들 수 있었던 원인은 승방의 복합적 기능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종합한 결과로 보인다. 승방은 승려들이 기거할 수 있는 작은 독방들, 조리와 난방을 담당하는 큰 부엌, 살림살이와 식료품을 보관하는 곡루와 창고, 그리고 대중들이 모여 함께 식사하고 강론할 수 있는 대방으로 이루어진다. 대방은 승려와 일반신도들이 함께 하는 법회도 열리기 때문에 공공적인 장소로 노출되어야 한다. 반면 승려 개실인 독방들은 매우 은밀하고 조용한 곳에 위치해야 한다. 그러나 이 상반된 공간들은 하나의 요사채 안에 동시에 수용되어야 한다. 선암사 대웅전 좌우의 심검당과 설선당의 경우와 같이 보통 대방은 주불전 마당의 동서면에 놓이기 때문에 대방의 향은 동서향이 될 수밖에 없다. 동서향은 생활공간으로는 불리하고, 공공적인 불전 마당에 독방들을 노출시킬 수 없다. 따라서 대방과는 직각으로 날개채를 붙이고 독방들을 배열한다. 모든 독방들은 요사채 안마당에 면하게 되어 프라이버시를 보장할 수 있고, 남북으로 놓이니 모든 방을 남향으로 할 수 있다. 보통의 요사채들이 ㄱ자, ㄷ자, ㅁ자형으로 꺾일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까닭이다.
부엌은 모든 생활의 중심지였다. 원주스님이 부엌의 살림을 책임지고, 공양주가 음식을 담당하며, 불목하니는 장작 마련과 아궁이를 담당한다. 호암자 약휴도 최말단 불목하니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하루 세때 식사를 마련해야 하고, 쉴새없이 아궁이를 돌봐야 하는 까닭에 부엌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요사채에는 별도의 출입구가 없다. 보통 부엌문을 출입구로 겸하게 되는데 늘 사람이 있어 일반인이 요사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통제하는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부엌의 위치는 건물이 꺾이는 모퉁이에 있기 마련이다. 그래야 양쪽으로 난방하기 쉽고 마당에서는 부엌의 번잡함이 감춰지기 때문이다.
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 왼쪽에 자리잡은 설선당은 외부에서는 단층으로 보이나 내부는 중층인 ㅁ자형의 건물이다. 1층은 스님들의 거처와 공양소이며, 위층은 수납 공간이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설선당과 마주한 심검당 역시 중앙에 조그만 마당을 둔 ㅁ자형 건물로, 설선당과 유사하다. 환기창에 수(水), 해(海) 처럼 물과 관련된 글자가 장식처럼 투각돼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선암사의 지세가 산강수약하여 전각들이 빈번하게 불타자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이와 같은 처방을 한 것이라고 한다.
불조전·팔상전·원통전·장경각
대웅전 영역을 벗어나 대웅전보다 한단 높은 축대의 계단을 오르면 불조전·팔상전·원통전·장경각이 배치된 원통전 영역에 들어선다. 불조전과 팔상전이 나란히 앞쪽에 자리해 있으며, 두 건물 사이로 독특한 형태의 원통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불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으로 과거 7불과 미래 1,000불의 불조인 53불을 함께 모시는 전각이다. 이들은 모두 7점의 탱화에 나뉘어 그려졌는데 숙종 28년(1702)에 제작되었다. 지금은 그중 5점 만이 남아 있다.
불조전과 나란히 서 있는 팔상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그린 팔상도를 모시고 있다. 정면 후벽에 화엄경변상도가 걸려 있는데, 이는 정조 4년(1780) 가로 2.47m 세로 2.68m 되는 비단에 [화엄경] 설법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복잡한 구도이지만 정연한 질서와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수작이라 하겠다 채색역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와 비슷하게 청색이 남용된다든가 홍색.녹색이 주조를 이루는 점 등은 같지만 붉은 색이 좀 탁해져 화면이 전반적으로 송광사의 화엄경변상도만큼 밝지 못한 느낌은 있다. 화엄경변상도는 우리나라에 세 폭이 있는데 나머지는 순천 송광사와 하동 쌍계사에 있다.
선암사 경내에서 가장 개성적인 건물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정방형을 이루는 몸체에 중앙 한 칸만 합각지붕을 내밀어 전체적으로 丁자형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내부도 특이하여 보가 없는 무량구조이며, 불단이 설치된 중앙 세 면에 벽을 두르고 문을 달아 마치 집 속에 또 하나의 집을 지어놓은 것 같다. 건물 정면 어칸의 창호는 화려한 꽃창호이며, 꽃창호 아래쪽 청판에는 계수나무 아래서 방아 찧고 있는 달나라 토끼 두 마리와 파랑새를 장식해 놓아 눈길을 끈다.
원통전은 조선 현종 원년(1660)에 초창하여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중수하였으며, 순조 24년(1824)에 재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숙종때 호암대사가 선암사를 중창불사할 때의 일이다. 호암대사가 중창불사를 위해 대장군봉의 배바위에서 기도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바위 밑으로 투신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코끼리를 탄 여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보자기로 호암대사를 받아 대시 배바위 위에 올려놓으면서 "떨어지면 죽는 것인데, 어찌 무모한 짓을 하는가?"하고 사라졌다한다. 이 여인이 관세음보살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 호암대사는 친견한 관세음보살의 모습대로 불상을 조성하여 丁자각 형태의 원통전을 짓고 이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한편 후사가 없던 정조는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순조이다. 순조는 자신이 태어나게 된 데 보답한다는 뜻으로 선암사에 "큰 복의 밭"이라는 의미의 대복전(大福田)이라는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 현판은 지금도 원통전에 걸려 있다. 후에 다시 천(天)과 인(人)자를 한 자씩 더 써주었다고 하는데, 두 글자의 편액은 선암사에서 따로이 보관하고 있다.
원통전의 뒤켠에서 왼쪽으로 비켜난 곳에 각종 경전을 보관하는 장경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짜리 팔작지붕집인 장경각에서는 특히 돌계단 소맷돌 부분에 조각된 해태와 사자상이 눈여겨볼 만하다.
응진전·진영당·무우전·각황전
원통전 뒤켠 오른쪽으로는 응진전·달마전·진영당·미타전·산신각이 모여 있는 응진전 영역이 있다. 응진전 영역은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약간씩 밀려들어가면서 배열되어 있는데, 대문에서 볼 때는 가지런하게 보이는 것이 독특하다. 진영당에는 아도화상을 비롯하여 도선국사, 대각국사, 호암대사, 등 선암사에 주석했던 큰 스님들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응진전 옆은 선암사에서 가장 외진 곳으로 한적하기 그지없는 무우전 영역이다. 無憂殿은 얼마전까지 태고총림 방장실로 쓰였다. 무우전은 ㄷ자형의 승방으로,각황전을 둘러싸고 있다. 규모는 크지만 형태는 소박한 승방과 비록 단촐하지만 화려하고 날렵한 각황전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기타 경내 건물
그밖에 경내에는 창파당과 천불전 등의 전각이 있는데 대웅전 영역 왼편에 자리한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증설된 건물들이다. 창파당은 종무소와 강원으로 사용되는 ㅁ자형 건물로, 현대적 건축재료를 많이 쓰고 외벽을 유리창으로 마감한 것이 눈에 띈다.
무량수전이라고도 불리는 천불전은 교육원으로 이용되며, 역시 ㅁ자형이다. 중앙에 마당을 두었으며, 전체가 중층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높고 골격이 커서 웅장해 보이며 이국적인 느낌도 든다.
선암사에서 독특하게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대각암 가는 길의 해천당 옆에 자리잡은 뒷간이 그것이다. 입구에 "뒤" 이라고 쓰인 간판이 걸려 있다. 크고 깊은데다 깔끔하고 냄새도 없으면서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까지 겸비한 丁자형의 이 뒷간이야말로 선암사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건축가 故 김수근 선생이 "한국에서 가장 멋진 화장실"이라 극찬한 적이 있다. 정유재란의 戰火에서도 살아남은 건물이므로 선암사의 현존하는 最古의 목조건축의 하나이다. 바닥의 짜임도 우수하고 내부를 남녀 구분한 것이나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도록 2열로 배치한 점도 눈에 띈다. 가장 안쪽에 앉아 벽면을 보면, 바깥 숲속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벽의 아랫부분에 살창이 나 있기 때문이다. 이 살창은 환기구 역할도 한다. 허물어지기 직전의 건물을 최근 새로 짓다시피 보수하였는데, 본래 "뒤" 의 장점을 잘 살린 채로 보수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절집 화장실로 꼽히는 뒷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