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야그 3탄
('68 사학. 홍광택)
호미회 나그네가 드리는 세 번재 야그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도무지
알 수없는 한가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수 없는 한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유행가 가사 치고는 너무 아름다운 노래말입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하던 나도 또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던 그 시절에
유행하던 노래말인데 요즘 이런 아름다운 노래 있나요
온통 돈이요 SEX요 환장한 사람들 뿐인 것을
미국에 있는 최교수는 마른 침을 삼켜 가면서 명작이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고
뉴질랜드에 사는 용권이는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숨가쁘게 읽어 내려 갔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며칠 전 호미회 OB모임에는 선배님 후배님들이 상당수
많이 참석 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재익형은 다서 여섯번 읽었다면서
추억을 반추하는 것은 즐거운 일만은 아닌 것이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는 것 아닙니까
졸지에 고문 기술자가 된 것같아 송구스러웠습니다
이런 많은 선후배들의 열렬한 성원과 질타와 수요 차원의 많은 접속 덕분에
세번째 야그를 공급하게 되었습니다
69학번쯤으로 기억되는데 이호종이라는 화실 멤버가 있었습니다
그림도 잘 그리고 아주 재미있는 친구였는데 화실에는 그다지 자주 나오지 않았으나
일명경인이라고 한번 나오면 사람들을 재미있게 하고 뭔가 사연이 있는
그런 회원이었는데 자주 안나오니 깊게 사귀지는 못했고 영천의 추억의
사진에서 요즘은 볼 뿐입니다
그림도 독특하게 그리는 것이 점묘파들이 그리는 것처럼 모자이크 스타일로
개성이 아주 강한 친구였습니다
80년대쯤에 들리는 소식에는 도자기 제작도 하고 나의 사무실도 합정동에
있었는데 호종이도 그 부근이라 하여 만나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최근 소식에는 국제적인 수도사가 되었다는 풍문만 들었는데
꼭 한 번 만나고 싶군요 그 사연 많은 보따리를 풀어 야그도 듣고 싶고
"이사람아 이제는 그 무거운 바랑을 내려놓고 잠시 쉬게나"
이런말도 해가면서 옛날 얘기도 하고 싶군요
목소리가 그윽하여 모임이 있을때는 항상 사회를 보시던 변정민 학형
내 기억 속에는 항상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얗고 사회에 나와서는
나와 거의 비슷한 비즈니스의 길을 걸어 도를 같이 닦는 도반같이
느껴졌던 흥중이 형
군 복무중에 공군복을 입고 본관 4층에 와서 처음 보게 된
불문과 정윤섭 형 지금은 부산에서 교수로 재직한단 말만 들었습니다
내가 서화회 활동을 활발하게 할때 서실에서 많은 도움을 줬던
사업가로서 성공한 강진환 김성복. 성복이는 나의 고등학교 후배로서 조담이와 같이
삼총사를 이뤘는데 웃는 모습이 일품인 연태규
싱가폴에서 비행기 타고 호미회에 참석할 정도로 열성적인 오진원
엊그제 보고싶어 E-MAIL을 날려 봤으나 주소가 틀렸는지 접속에 실패 했으니
이글 만약 읽는다면 주소를 보내 주게나
내가 가락동 근무할 때 사무실이 가까워 가끔 연락하고 보기도 했던 권동재
똑똑한 회장님으로 오랫동안 각인되어있고 내 근무처에서 박문기와 셋이서
점심을 먹었던 일도 꽤 오래 전 일이 되어 버렸네
회장으로서 활동도 눈부셨으며 사업적인 수완도 굉장해 서화회 발전에
차원이 다른 발전을 가져왔으며 서화회 마이카 1호로 기억되는 권순모
엊그제 전화로 호미회 참석하라고 오랫만에 통화도 하고 내가 대림동에서
근무 할 때는 전철간에서도 가끔 만나고 나에게 서화회 소식도 자주 전해주던 황건이
내가 결혼 할 때 서화회 대표로 금색 탁상시계-거기에는 프라스틱 조각에
축하 한다던 명패가 붙어 있었지요-를 가지고 불원철리 참석해 줬던
임인규 엊그제 호미회 참석때문에 전화 했더니 제주도에 와 있다는 말하고
보지를 못했군요
본관 4층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말은 군대가 말년쯤인지 사회생활을 할땐지 기억은
불분명하나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내가 깜짝 놀랜 것은 그 화실에서 잠을 잔 날이 열손가락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시체를 5-6 M 측방에 두고 같이 잤다는 애긴데 소름이 끼치더군요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가 쓴 '에밀리의 장미'가 생각나는군요
오래 전에 읽은거라 기억은 희미하나 에밀리는 너무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자기를 떠나는 남자를 가만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너무 사랑했기에
독살해 버렸습니다 과감하게 그리고는 시체를 옆에 두고 식사도 하고
잠도 자고 사랑도 했는지는 알 수 없군요 그러다 한참 후 에밀리도
죽었습니다 혼자사는 에밀리가 죽었기 때문에 장례를 위해 동네 사람들이
에밀리의 집에 들어와서 뜻밖의 광경을 보게됩니다
그 남자의 백골 위에 에밀리의 길고 긴 머리카락이 여러 가락 보이면서 동네 사람들은
저간의 사정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너무 사랑한 그 여자의 심정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군요
요즘엔 이런 순도가 높은 사랑을 볼 수 없어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차 마시고 술 마시고 춤 추고 스포츠가 한바탕 있은 후에 헤어지는 드라이한
박제된 사랑이 있을 뿐 인가요
고등학교 동창회건 대학교 동창회건 써클 동창회건 남학생 여학생
가리지 않고 동창회 풍경은 대동 소이합니다
친구들이 몇 년만에 몇 십년만에 만나면 포옹하고 그런 광경은
별로 보기 힘듭니다 무조건 다짜고짜 면접 고문 부터 하기 시작합니다
어디 사느냐 직위가 뭐냐 얼마나 성공했느냐 그 사람이 얼마나 성실히 살았느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자로 말하면 어떤 부정한 짓을 했어도 무조건 돈만 많이 벌면 성공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학교에서는 선진국과는 달리
답을 구하는 과정은 전혀 중요 하지 않습니다 답만 맞다면 해답을 보고라도
그래서 그런지 자기 기준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동창회다 뭐다
모임에 아예 안나와 버립니다 불법 취업자같이 행방불명이 되어버립니다
박완서씨의 '꼴찌에게 보내는 박수'라는 글이 생각 나는군요
요즘 TV 에 보면 한때 권부에서 떵떵거리는 사람들이 포승줄에 묶여
은팔찌 차고 나오는 것을 볼 때 착잡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성공이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성공한 사람과 자기가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상심하는 우리의 이웃을
위해 조그만 야그를 해드리지요
"이사"라는 사람을 아시나요 이사는 원래 중국 초나라에서 태어나
요새 말로 하면 지방 면에 말단 관리로 있다가 어느날 배설을 위해
해우소에 갔다가 운명적인 전기를 맞게 됩니다
화장실 밑바닥에 쥐가 배설물을 먹다가 이사의 갑작스런 폭격에
놀라 도망가는 것을 보고 이사는 부처님의 버금가는 득도를 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다"우레카" 정부 양곡 창고에 사는 쥐는 사람이 와도
놀라지 않고 제 것처럼 먹어 치우는데 반해 화장실 같이 비루한 곳에
사는 쥐는 보잘 것 없는 것을 먹으면서도 깜짝깜짝 놀라니
사람도 이와 같다 환경의 문제이고 도둑놈 심뽀를 갖지않고는...
이사는 중앙으로 진출하여 진시왕의 측근이 되고 중국 통일의 마스타 플랜은
모두 이사의 머리에서 나오게 되고 진나라의 이인자가 됩니다
호사 다마라 했던가 진시황이 죽자 왕위 계승 문제로 환관 조고와
알륵이 생겨 급기야는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기 직전입니다
이사가 한참 권력을 휘두를땐 이사의 생일날 이사집앞 시영 주차장에는
외제 고급거마 요즘말로 밴쓰같은 승용 차가 1000대가 넘게 주차 되었다고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죽기 전 이사는 그의 아들에게 우리가 저'도꾸:애견을 이르는 말 ;필자 주
를 데리고 지리산으로 사냥을 갈려고 했는데 이렇게 죽게 됬으니
나가리가 되었구나 슬피 울면서 자기 고향 화장실 밑의 쥐들을
부러워 했다는 유명한 사마천 사기의 압권을 얘기할 때 흔히 하는 얘기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서화회 선배 중에 s라는 분이 계시는데 내가 서화회 활동을 할 땐
이미 군 복무 중에 있었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 서화회에 사랑 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라 했던가요
그 리고 시간은 무심히 흘렀습니다 그 여자도 졸업을 해서 고향으로 갔습니다
아무도 이 슬픈 이루지 못할 카플에 관심 갖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무지무지 흘러 이 두분은 만나지 못하고 다른 하늘에 살았습니다
90년도 후반 나는 후배로부터 그 여인의 출현 정보를 입수 하게 되었네요
호미회 OB 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나는 모처럼 좋은 일을 해보기로 하고 평소에는 나오시지 않는 그 S 형을
꼭나오라고 포섭하고 그분과 가까운 친구 서화회원에게도 영문은 나만
알고 극구 강권을 했습니다
성수대교 넘어 유명한 한식 집이었는데 그날따라 일이 잘될려고
호미회원 들이 구름같이 몰려 왔습니다
그 안타까운 옛날의 연인들은 후배의 칭찬 받지도 못할 음모에 말려
먼발치의 조우를 하게 되었군요
식사는 아주 잘 나왔구요
임금님 애첩이 젓가락 댓다 뺨 맞았다는 밴뎅이 뭔가 하는 젓무침도 나오고...
그 모임이 끝나고 2차 노래방도 가고 했다는데 나는 웬지 죄를 진 것도 같고
그날 콘디숀도 안 좋아 도망 갈 결심을 하고 화장실에 오래 숨어 있다
차고에서 차를 빼서 다 노래방으로 이동한 줄 알고 나오는데
어떤 후배가 나를 기다렸는지 우연히 아직 안 가고 나를 한참 부른 기억이 납니다
그 후배가 이 글을 본다면 미안하고 그런저런 사연이 있었다고 변명하고 싶군요
그 당시의 막걸리집 풍경이란 고대앞 풍경도 상전 벽해라 해야 할까요
살벌하긴 했지만 요즘보다 인간적이란 말만 드리고 싶군요
석탑 다방 석탑 서점 요즘도 있나 모르겠군요
지금은 교문이 대운동장과 본관이 일직선 상으로 쎈타가 맞지만
그 당시엔 교문이 이공대학 즉 안암동 로타리 개운사 쪽으로 30도 정도
방향에 있었다는 사실을 요즘 후배들은 잘 모를거에요
그때 교문으로 들어서면 푸라타나스 작은 숲을 지나 본관으로 진입하는데
그 교양학부 옆에 판자집 일명 하꼬방 써클룸이 다닥다닥 합창부 역도부
유도부 뭐 이쎄트라 이쎄트라
우리 서화회만 본관에 자리 잡은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막걸리 집에 가면 요즘 친구들 노는 것하고는 시대하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요즘하고는 많이 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젼이 부족한 관계도 있고 요즘처럼 개인 플레이는 지양하고
나이트크럽을 간다거나 가라오케같은 것은 아예 생기지도 않았고
그 당시 서화회 놀이도 자연히 노동 집약적으로 이뤄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력한 카리스마의 오락 굿 리더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홍형이 가끔 졸업하고 후배들을 위해 방문 하시면 이것이 놀이의
전범이다 하시고 보여주는게 있습니다
뱀장사인데 그당시 별다른 놀이가 요즘처럼 풍부하지 않은 그때로선
대단한 인기 요즘말로 인기 켚이었습니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부터 하교길에 자주 보던 뱀장사를
수제자로서 본인이 전수 했습니다
"지리산 코뿌라와 인도산 코뿌라가 48 시간 교미끝에 나온 신종 코뿌라"라고 시작하는
중간 중간에 얘들은 가라 느네 아버지 나오시라고 해라
재미는 지금 부터다 하고 걸죽한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일세를 풍미했군요
우홍형은 서화회 커플1호 였기 때문에 그 당시엔 인기 캪인 것은 물론
그 노하우를 전수 받을려는 후배들로 문전성시였습니다
그 형수님을 우홍형 모친 작고 하셨을 때 오랜만에 뵌 적이 있네요
내가 3학년때인가 내가 아끼던 두꺼운 시집을 화실에 잠깐 놓아두었는데
금방 누가 쎄벼 갔습니다
박두진씨의 도봉이라는 시도 들어 있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삶은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뿐..
호이 호이 불러 보나 구름은 흘러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고....."
내가 좋아하던 참담한 시도 들어 있었는데..
혹시 그 시집 갖고 가신 서화회원 연락한번 하세요
차나 한번 합시다
놀이중에 요즘같은 첨단장비가 전혀 없던 당시로는 터주대감이 갖고
다니던 휴대용 턴테이블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뮤직 박스이자 쥬크박스 판만 갈아 넣으면 부르스" 지르박"
트위스트 왈쓰 차차차 룸바 스케이팅 왈쓰 쏠 탱고 올터너티브록 퓨전 째즈
없는 것이 없이 연주 해주는 요술 방망이이자 최첨단 테크놀로지 였군요
그 당시엔 지금처럼 단과대학이 많지 않아 여학생들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습니다
서화회에 여학생이 많지 않으면 자연 남학생들도 꼬이지 않아 돌격대장들은 고심할 때가
많았는데요 재익형하고 나하고 이문제로 고심한 적이 있었죠
여학생 회관에 포스터를 부쳐 신입회원을 왕창 오도록 포스터를 붙이자고 마케팅 결론이 났씁니다
내가 바탕 그림을 그리고 재익형이 서실 붓으로 점잖게 호소하는
그런 포스터를 여러장 만들어 여학생회관을 도배하다 싶게 하여
효과를 본 적도 있고 우리과 여학생들에게 전도하여 영천의""
모두 식사하고 사진 한장에 나오는 우리과 여학생도 2명이나 있었는데
그 중 한 분은 대학원 나와 강사 하시다 고인이 되셨고 한 분은 경기여고 나오신
분인데 미국간 후로 소식 전혀 듣지 못했군요
내가 한참 직장 생활 할 때 두일이는 그 때 대학원에 다녔나
불분명 하지만 나 결혼 하라고 이쁜 여학생을 소개 해 줬다는 것 아닙니까
한참 그 여학생 하고 춘천에도 놀러가고 식사하고 영화보고 의암 땜에도 가고
그러다 그 여자분 나하고 결혼도 할 뻔 했는데 갑자기
지방으로 선생님 발령이 난 후 소원 해졌으나
나중에 안일이지만 서화회 유명한 회원의 친 누나 였습니다
그후 소식이 쭉 없다가 90년 중반엔가 우연히 몇 번 뵌 적이 있었군요
지금은 미국에 계신다는 소식만...
하여튼 두일에게는 굉장히 고맙기 짝이 없고
두일이는 대학원 졸업 후 자주 볼 수 없었으나
남해로 내려가 사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하여 여성 월간지 매체 전부를 꽉
매우고 지방의 유지가 되었다는 소식을 영천 두일 정섭으로 부터 자주 듣고 있지만
수 십년을 얼굴 못 보고 있으니 이 글 읽는다면 부디 소식 한번 주게나
이 글을 쓰면서 멀리 라디오에서 성악가의 애절한 가곡 소리가 들립니다
마치 아무도 없는 일요일 오후 본관 4층 서실에서 들리는 재익형의
애절한 "가려나" "저구름 흘러가는곳" "그리워" ㄷㅡㅇ
주옥같은 아리아가 나를 30여년 GO BACK 빠꾸시켜 슬프게 하는군요
영천이의 홈피 써버가 다운되는 바람에 영천과 약속한 시간에 글을 넣지 못하고
글쓰기 좋은 시간도 놓쳐 개발새발이 되었네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더운날 회원님들의 건강을 빌고 다음을 기약하며
2003.6.11 홍 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