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쓰여지고 있는 약280여 성씨중 삼국시대부터 유래된 성씨(姓氏)는 그리 흔치 않다는 것이 여러 문헌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체로 고려와 조선시대부터 성씨와 관향(貫鄕)이 정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강씨(姜氏)성은 이미 6세기초부터 성씨로 쓰여졌고 이 시기에 크게 활약하였던 역사적 인물(人物)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있으니 강씨야 말로 고대국가(古代國家)시대부터 쓰여온 오랜전통을 갖은 성(姓)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시조는 수(隋)나라 30만대군의 침략군을 무찔러 승전한 민족의 영웅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장군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강씨 족보에 등재된 원수공의 기록은 서기 1685년(조선 숙종 12) 간행한 강씨 남한보에 시조로 모신 기록이 보첩에 오른 기록으로서는 최초의 기록일 뿐 아니라 활자기록으로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다음 기록은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선생이 굴절된 조선의 상고사를 바로 밝혀야 한다는 신념으로 1910년대 중국등지에서 상고사의 진실규명을 위해 문헌을 찾고 유물과 유적의 탐사를 통해 소중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때 시조님 사적이 수록된 대동운해, 서곽잡록이 발견되었고
1931년 동아일보에 조선상고사가 실리는 쾌거가 있었다.
단재에 의해 시조님의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기는 하였으나 정사(正史)로 채택되지 못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고구려의 남수북진(南守北進)과 임유관(臨유關)전쟁(戰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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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신라, 고구려, 백제는 같은 민족국가 이면서도 삼분천하(三分天下)의 체제를 형성하고 제각기 내나라 중심의 민족통일을 지향하면서 치열한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서북(西北)의 이른 바 중원(中原)대륙에서는 양견(楊堅)의 수나라가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통일의 위업을 달성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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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력을 빌어 주변의 다른 민족국가에 대해서도 조공(朝貢)을 바치고 신복(臣服)이 되기를 강요하게 되어 드디어 597년 고구려 제26대 영양왕( 陽王) 8년 수문제가 고구려를 침략할 야욕으로 국서(國書. 외교문서)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이란 것이 " 료수가 장강에 비교하면 어떠하다고 생각하며 고구려의 인구가 진나라에 비하여 어느쪽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가? " 라고 하면서 진나라를 멸망시킨 수나라의 강대성을 내세우는 매우 모욕적이고 위협과 야유적인 것이었다.
수나라의 이러한 모욕적인 국서를 받은 고구려 조정에서는 수나라에 조공(朝貢)을 하고 청화(請和)하여 태평성대를 누리자는 주장이 있을 때 중군(中軍)벼슬에 있던 강이식이 국왕이 있는자리에서 비굴한 태도를 취하여 구차한 안일이나 탐내지 말고 「 오만 불손한 글발에 대해서는 글로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서 회답함이 마땅 」하다고 주장하였다.
영양왕은 나라의 주권을 수호하기위해 대수 (對隋)항전을 결심하고 강이식을 병마원수(兵馬元帥)에 임명 정병 5만을 임유관으로 향하게 하고 말갈병 1만을 요서로 보내 수병을 유인하여 거란병 수천으로 바다를 건너 산동을 치게하니 이에 고구려와 수나라간의 제1전이 개시되었다.
서기 598년 6월(영양왕 9) 요하서쪽과 산해관(山海關)서쪽인 임유관에서 전투를 전개해 천시(天時)와 지리(地理)를 잘 이용한 고구려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의 이름이 보이지 않은것은 이는 수서(隋書)만을 초록(秒錄)하였기 때문이다.
요서(遼西)일대의 큰전쟁을 소개하면서 고구려로 보아서는 적의 문헌에 불과한「 수서(隋書) 」를 그대로 옮겨, 수군(隋軍)이 마치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에 불리하였기 때문인 것 처럼 기술해 놓은것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대동운해(大東韻海) 서곽잡록(西郭雜錄)을 통해 강이식장군 활동상 밝혀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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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선생은 독립운동중 1910년 중국에 망명 청도(靑島)를 거쳐 고구려의 구토(옛땅)인 러시아땅 연해주(沿海州)와 흑룡강(黑龍江)일대에 우리민족과 관련된 문헌과 유적(遺跡)등을 삿삿히 찾아 그 자료를 기초로 조선상고사를 집필 1925년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의 원고가 고국으로 보내져 동아일보에 실리게( 1. 3 ~ 10. 16)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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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가 인용한 대동운해에는 강이식을 살수전쟁의 병마도원수라 하고,
서곽잡록에는 강이식을 임유관 전쟁의 병마원수라 하였는데
살수전쟁에는 "왕제(王弟) 건무(建武)가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육지를 맡았으니 어찌 병마도원수 강이식이 있었으랴" 그러므로 서곽잡록을 쫒는다고 하였다.
문 헌 |
시 기 |
저 자 |
내 용 |
참 고 |
주간 한국 |
1973. 2. 4 |
이선근 (李瑄根) 박사 사학자 영남대학교 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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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긍지 : 통일을 위한 민족의 혈전 제하의 연재물(9회) 제목 : 강이식장군의 승전(勝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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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隋帝)의 강요와 위협에 고구려 무신 강이식은 영양왕에게 "큰 수제국이라해도 글로써 보다 칼로써 회답하자"고 진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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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강장군을 발탁, 대수(對隋)항전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해 싸우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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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고구려의 항전과 기습, 반격은 언급없이 불공(不攻) 자파(自破)하고 철수한 것처럼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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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의 삼국사기등 대부분의 사서(史書)는 강장군 성명과 승전보 밝히지 않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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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로 보아 적성(敵性)문헌인 수서(隋書)만 보고 수의 패인(敗因)을 두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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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한국 22페이지 전면계재 |
동아 일보 |
1975. 7. 21 |
유현종 (劉賢鐘) 소설가 |
○ |
연개소문(淵蓋蘇文)제하의 연재물 (166회) 노예시장의 소제목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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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에서는 국서를 보내면 위세에 눌려 조공, 진사 사절을 보내고 무릎을 꿇을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요하를 건너 그 서쪽지방을 먼저 공취하니 수의 문제는 대노했다. 문제는 출병을 하고 한왕(漢王) 양(諒)을 행군원수로 삼아 육군 20만을 주어 요서지방 탈환케하고 주라후(周羅喉)를 수군총관으로 삼아 수군 10만을 주어 평양성을 향하게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수군의 참패로 돌아갔다. 고구려의 정병 5만과 말갈병 1만을 거느린 고구려의 장군 강이식은 임유관(지금의 상해관 근처)을 빠져나온 수(隋)의 대군을 끌어내어 일시에 덮쳐 맹타를 가했던 것이다. 20만 육군이 일격에 절반을 잃고 퇴각하였다. | |
동아일보 5면하단 |
고등 학교 역사 부도 |
2001. 3. 1 |
최완기 외 5명 |
○ |
고대의 정치적 발전 - 4 ① 고구려와 수의전쟁(598 ~ 6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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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30만군이 양량의 인솔로 고구려 침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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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5만명이 강아시로 하여금 대전 ※ 강이식을 강아시로 오기한 듯. | |
1995. 9. 30. 교육부 검정 (주)교학사 16페이지 |
국군의방송 |
1975. 8. 25 8.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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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이식 장군 KBS 제1방송(70KHZ) 783 - 788회에서 기간중 18:55 ~ 19:00까지 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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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이 수군 30만을 임유도(지금의 산해관)에서 대파한 전공 내용임. | |
5분극 「횃불」 |
한민족전쟁사총론 |
1988. 12. 29 |
이재(李宰) 외 5명 |
○ |
제2편 한국전쟁의 분석 - 제1차 여.수 전쟁 - 임유관(臨關)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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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간 : 598년 전투장소 : 임유관 병력 : 수 군 :30만명 고구려군 : 미 상 지 휘 관 : 수 군 : 문제(양량. 주라후) 고구려군 : 강이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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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개황 : |
598년 고구려는 요서(遼西)를 침공하였다. 수(隋)는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沖)을 통해서 교전토록 하였다. 고구려는 접전도중, 임유관쪽으로 급히 후퇴하였다. 이에 문제는 30만 대군을 동원, 행군대총관(行軍大總官) 양량(楊諒)을 임유관으로 파견하고, 수군총관(水軍總官) 주라후(周羅喉)를 육로를 통해 평양으로 공격토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주라후는 양선(糧船)을 영솔하여 요해(遼海)를 통해 양량에게 군량을 공급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강이식(姜以式)은 이를 간파하고 수군으로 주라후를 공격토록 하면서, 육군은 출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바야흐로 수군진영은 군량이 고갈되어 갔고, 마침 6월이 되어 장마가 닥쳤다. 이에 수군은 기아와 질병으로 전투력이 상실되었고, 결국 퇴군을 결정하였다. 그러한 상황을 주시하던 강이식은, 이를 유수(楡水)상에서 격퇴하여 전군을 거의 섬멸하였다.
강이식(姜以式 : 6세기) 598년 수나라는 고구려에 협박조의 국서를 보내왔다. 이때 강이식은 "무례한 국서에는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할 일이다."고 하며 개전을 주장하였다. 강이식은 병마도원수가 되어 5만의 정병과 1만의 말갈병으로 요서의 요충지인 임유관을 장악하였다. 수문제는 30만 대군을 동원 공격하였다. 수군(隋軍)은 군량수송을 위해서 해군을 동원 평양공격으로 거짓 수송작전을 폈다. 이를 간파한 강이식은 해군을 해상에서 먼저 격침시켜 수군은 군량미가 떨어져서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고구려 군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수군을 공격하여 죽은 자가 10에 8, 9 라는 대타격을 입혔다. 이후로 수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는 침공치 못하였다. 612년 수 양제의 침공시에도 병마도원수가 되어 왕의 동생으로 후에 영류왕이된 건무(建武)에게는 해상을 맡기고, 을지문덕 장군에게는 육지를 맡겨서 수군을 격퇴시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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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 연구사 76,335 페이지 |
고구려 왕조 실록 |
1997. 6. 25 |
박영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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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수나라의 침입과 고구려의 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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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침입 강이식의 대활약과 수나라 30만 대군의 전멸 (※ 강이식을 강이석으로 오기, 2001. 1. 20 중앙종회에서 오기 정정요구 공문 발송) | |
단재의 조선 상고사 인용 |
고구려사 |
1997. 8. 20 |
손영종 |
○ |
제2절 598년 수나라의 제1차 침공의 격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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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조선상고사 필사본 제19편 인용 | |
백산 자료원 |
을지 문덕 |
2000. 5. 1 |
서찬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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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수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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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영양왕은 수나라가 침략할 것에 대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략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강이식장군을 총대장으로 삼아 수나라의 대군을 물리치도록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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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의 명을 받은 강이식 장군은 그때가 장마철이라는 점을 이용해 수나라 군대를 치기로 작전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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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식 장군은 요하강에 진을치고 싸움을 질질 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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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되자 고구려군은 작전상 싸울 의욕이 없는 것처럼 싸움터에서 슬며시 물러나기 시작했다. 수나라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구려군을 쫓아왔다. 이때를 맞춰 강이식 장군은 숨겨놓은 정예부대를 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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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식 장군의 명석한 전략으로 수나라를 물리친 것이다. | |
삼성출판사에서 어린이위인전씨리즈로 엮어냄 |
사단법인 강이식 장군 숭모회 발족 - 봉산사 재건도 동시에 이루워져 - |
1976년 6월 16일 국내 저명한 인사들이 뜻을 모아 민족의 영웅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의 빛나는 공적과 그 충용(忠勇)을 길어 선양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사단법인 강이식장군 숭모회(崇慕會)를 문공부장관의 허가를 얻어 발족하였는데 숭모회장에는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 민족문화 협회장)박사가 추대 되었으며, 이선근(李宣根 : 동국대학교 총장), 이종찬(李鐘贊 : 전 국방부장관), 안춘생(安椿生 : 국회의원), 최영희(崔永禧 : 국사편찬 위원장)씨등 각계 각층의 국가 지도급 인사들이 이사로 참여하였다.
이보다 앞서 5. 26 고구려시대 수병 30만을 무찌른 민족의 영웅 강이식장군을 모신 봉산사를 중건(950년 사당건립, 1570년 중건(선조 3년), 1714년 2차중건, 1911년 3차 중건)기공식을 갖고 정부차원에서 고구려 역사의 현장으로 유일한 고구려 역사관을 건립한다는 원대한 계획하에 기공식을 갖고 사우 봉산사를 건립.
1983. 12. 20 준공식을 거행 영정봉안식(影幀奉安式)을 가졌다.
시조님의 기록, 문헌으로 서서히 세상에 퍼져나가 |
후손들 입장에서는 1685년 발간된 남한보를 통해 시조님께서 고구려 병마도원수라는 사실외에는 사적(史的)기록을 대할 방법이 없었다고 해도 과히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후 1920년대 단재선생의 각고의 노력으로 찾아낸 조선상고사를 통해서 강씨 내부기록의 범위를 벗어난 획기적이고 객관적인 시조님 사적을 접하는 눈물겨운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정사(正史)에 올리는 뜻을 이루지 못해 후손들의 안타까움은 여전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위에서 밝힌 바와같이 비록 단재의 조선상고사를 인용하는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여러권의 역사책과 한민족 전쟁사, 방송과 신문이란 언론매체와 검인정 교과서에서 시조님의 투철하신 우국충정에 입각한 지략가로서 중원을 통일한 제국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내용이 속속 기록되어 사학도들의 관심이 제고되는 한편 관련서적을 보는 국민들과 초.중등학생들이 고대 강성대국 고구려의 강이식장군을 인식하고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시조님의 사적이 정사에 기록되는 날이 결코 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후손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한편, 희망과 기대감을 모으고 흥분시키는 것은 신진 사학자들이 우리의 상고사를 새로운 방향에서 조명할 필요성이 있다는 화두를 던지는등 한민족 전쟁사 연구에 무게를 두는 패기있는 사학들의 연구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시조님 사적을 올바르게 밝혀보겠다는 신념있는 후학들이 중국현지 학자들을 접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하니 자뭇 기대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시조님 사적 찾는 일이라면 130만 후손 모두가 관심을 갖어야 하는 책무이기도 하다. 시조님에 대한 기록이 담긴 서적이 두어권이 더 있으나 미쳐 확인치못해 이번에 발표하지 못한점 매우 안타깝게 여기면서 우리모두 시조님 기록 찾기에 높은 관심이 모아 진다면 기필코 진주강씨의 염원이 이룩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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