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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역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오늘도 너무나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어제처럼 손자의 첫 승차역(연신내) 까지 갔다.
기다리는 시간의 지루함을 해결하고 안심도 되고.
우리(손자와 나)는 종로3가역에서 천안행 1호선으로 환승,서울둘레길
5코스의 시종점인 석수역으로 갔다.
귀가하던 어제의 역 코스다.
3일째인 오늘 아침에도 어김 없이 나온 어린 손자의 즐거운 표정.
그러나, 12.7km인 이 코스에서는 산을 3번이나 오르내리기 때문에 적
잖게 힘들어 할 손자에게 무엇이 상응하는 응답이 될까.
단지, 조.손이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것 만으로는
오랜 시간을 한결 같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볍지 않은 숙제를 안고 출발한 시각은 어제와 비슷한 10시 반쯤.
서울둘레길이지만 5코스의 시종점(들.날머리)인 석수역(위)이 안양시(만안구 석수동)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경기도 땅을 잠시 밟게 된다.
석수역은 광역철도(전철) 1호선(경부선)의 역들 중에서 인기 있는 역에 속한다.
건강 걷기 등산객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삼성산 덕이다.
예전에는 삼성산을 관악산의 한 봉우리로 분류했는데 어느 때 부턴가 독립을 선언했다.
석수역과 관악역을 들.날머리로 하는 등산객들이 버거운 관악산의 중간 정도 되는 삼성
산을 즐겨 오르면서 관악산이라 하기 민망하기 때문에 독립시킨 것이 아닌지.
그 이름이 관악산 못지 않게 오래 되었지만.
금천구(서울) 시흥동과 만안구(안양) 석수동의 경계 따라 마을을 지나서 있는 스탬프대
(아래 1) 앞에서 호압산(삼성산) 오름과 둘레길 관악산 오름이 시작된다(아래 2).
수도권 산길의 바람직 하지 않은 특징은 샛길이 많다는 점이다.
이용 인구가 워낙 많기 때문인데 대승적이지 못하고 작은(이기적인) 편의 추구의 결과다.
곳곳에서 서울둘레길을 안내하는 리본과 마커를 따르면 잘못 들 염려는 없지만 놀라운 통찰력을
가진 어린 손자의 걱정에 늙은 할아버지의 답변이 궁색하다고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산이 아프겠다"는 걱정은 인체에 비유하면 몸의 여러 곳을 마구 짓밟혀 상처가 심하다는 뜻인데
자연의 놀라운 복원력을 들어서 자연 치유 운운 하였으니 동문서답 아닌가.
그에게 사람에 대한 호된 비판의 소리를 들려주기가 저어해서 그랬지만.
건성으로 보지 않는 손자의 눈에 연리지(連理枝)가 잡혔다(아래)
인위적으로 접목하지 않았는데도 서로 다른 두 나무 또는 그 가지가 절로 붙어서 하나의 몸 또는
가지를 이룬 상태를 연리목 또는 연리지라 하지만 실은 기형이다.
부부간의 금슬 또는 연인의 애정이 깊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며 한국을 비롯해 동양권에서는
자주 눈에 띄는데 서양에서는 아직 보지 못했다.
촘촘히 심기 때문에 서로 부딪혀 마침내 일체라는 기형이 되는데 반해 서양에서는 수간 거리를
충분히 벌려 식수하고 꾸준히 간벌과 정치를 하므로 기형수가 없는 것 아닐까.
"내가 만일 10년쯤 후에도 살아 있다면 너 한테도 연리지를 기대할 수 있겠지?"
무슨 뜻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가 부연 설명을 들은 손자.
"그 때까지 충분히 사실꺼예요"
산에서도 몸 가짐을 살피라는 배려?
거울에 비친 조.손(위)
호암산과 서울둘레길이 갈린다(아래 3)
긴 잣나무숲길(산림욕장)이다(위)
5코스에서도 이미 많은, 불필요한 방부목 길을 걸어왔지만 여기는 대단위다.
더구나 산림욕과 방부목은 궁합이 전혀 맞지 않건만.
호압사 경내다(아래)
산의 형세가 호랑이가 걸어가는 것 같고 범의 형상인 바위가 있다 하여 호암산(虎巖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산.
그 자락에 자리한 사찰이라면 호암사가 당연한 이름일 텐데 왜 호압사(虎壓寺)일까.
어이없는 미스프린트(misprint/誤植)일 것이라는 생각이 어이없게도 미스였다.
풍수가들의 주장으로 범바위 북쪽에 절을 세우고 호갑사(虎岬寺)라 했단다.
이씨조선의 태조가 서울로 천도한 후 궁궐을 짓는 중에 괴물의 훼방을 받아 진척이 되지 않을 때 무학
대사의 조언으로 범 꼬리에 해당하는 이 곳에 절을 세워 범의 기세를 제압하였다 하여 '호압사'라나.
결국 2개의 전설에서 나온 이름에 호암사(虎巖寺)를 포함하여 3개의 이름을 가진 조계사의 말사다.
한데, 경내의 안내판 2개가 사찰의 유래를 각기 달리 알리고 있으니 어느 쪽을 믿어야 하나?(아래 4.5)
이에 더하여 서울둘레길 측은 "1407년(태종 7) 왕명으로 창건되었다"고 말한다.
"당시 삼성산의 산세가 호랑이 형국을 하고 있어서 과천과 햔양에 호환이 많다는 점술가의 말을 듣고
산세를 누르기 위해 창건하였다"고.
연대까지 말하면서도 출처를 밝히지 않고.
절 입구에 들어서면 시흥동에서 올라오는 찻길의 사찰 초입에 장애인 전용 주차장이 있다.(아래 2)
대웅전(사찰) 가까이에는 일반 차량의 주차장이다.(아래 3)
주차장에 차를 세운 장애인은 절까지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일반인은 차량으로 올라가고.
이 절이 왜 이 늙은이로 하여금 계속해서 어이없게 할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한 승려에게 물었다.
금천구청에서 한 일이라 모른단다.
구청에서 산속의 크지 않은 절 주차장까지 지정해 주는가.
산에서는 거의 먹지 않지만 손자를 위해 간식거리로 떡을 가지고 왔는데도 정오가 되기 전부터 점심으로
먹을 메뉴를 열거하던 손자가 정색을 하고 시장기를 호소해 왔다.
관악산 입구의 식당까지는 1시간 반쯤 걸릴 텐데 걱정이 되도록.
식사 때에는 절에서 공양 받을 수 있음을 상기하며 사찰 안을 기웃거렸다.(위)
점심식사가 시작되는 정오가 되었으므로.
그러나 이런.....
단수로 인하여 오늘은 점심을 제공할 수 없다는 안내문(아래)이 야외 임시식당에 붙어있으니.
무슨 사정인지 단수 조치를 한 금천구청을 비난하는 플래카드(placard)도 걸려 있다.
떡이 있지만 간식거리에 불과하고 원하는 점심 식사를 하려면 1시간 반을 참아야 하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어린 손자도 알고 있다.
긴 시간에 익숙하지 않은 그에게 1시간 반은 엄청 긴 시간이지만 잘 참았을 뿐 아니라 사찰 뒤의
삼성산 능선 너머 10분쯤 거리에 자리한 천주교 삼성산 성지(위 1.2)도 다녀서 갔다.
신라의 삼성(三聖)이라는 원효, 의상, 윤필 등 세 고승이 수도에 정진하기 위하여 지었다는 암자
(삼막사)가 있는 산이라 해서 삼성산(三聖山) 이라 했다는 산.
7c의 일인데 19c의 사건으로 인해 20c에 다시 그 이름(三聖山)을 거론하게 된 셈이다.
각종 종교의 전교 과정에는 박해와 순교가 의전처럼 따른다.
기독교 신약 복음서(요한12:24)에서 순교의 의미를 말하고 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그러나 이씨조선 후말기의 사옥(邪獄)이라는 이름의 기독교 박해사는 사교의 척결이라는 명분을
당쟁의 도구로 사용한 치욕스런 역사다.
21대 정조15년의 박해(1791년辛亥邪獄), 22대 순조 때(1801년辛酉邪獄)에 이어 23대 헌종5년의
순교의 뜻도 모르는 어린 손자, 당장의 관심은 오직 맛 있는 점심식사 뿐인 그에게 들려주고 싶지
내리막 길인 것이 다행.
5코스의 2번째 스탬프를 찍은 후(위)
관악산공원 정문(아래)를 통과한 후 인근 식당에서 오겹살 구이 점심으로 포식했다..
곧 서울대학교 정문을 통과했다.(위)
1991년 이후 4반세기가 넘었으니 변화가 상전벽해라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1987년 한 해의 수업일에는 거의 매일 아침에 낙성대쪽 문으로 들어가서 정문으로 나왔는데 정문 옆에
간이식당 버스 1대가 있을 뿐 일대가 허허벌판에 다름 아니었건만.
이쪽 코스로 관악산에 오르려면 봉천동 버스 종점부터 걸어야 했다
고개를 넘으면 골프장 관악 컨츄리 클럽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우회할 때마다 볼멘소리가 절로 나왔다.
더구나 골프장 소유자가 백범 살해범 A모와 형제간으로 알려진 후로는 더욱 그랬다.
이산가족 처럼 분산되어 있던 서울대학교가 1970년대 중반부터 이전을 시작하여 한 집 살림을 이뤘다.
87학번이 된 아들로 인해 아사하지는 주장이 나왔다.
우이동 ~ 캠퍼스 간의 등교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었는데 이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1년간 출근길에
관악산 자락을 거쳐갔던 것이다.
그 이야기와 함께 서을대학교 배지의 뜻을 손자에게 들려 주었다.
라틴어 "Veritas Lux Mea"(베리따스 럭스 메아)는 진리는 나의 빛(The truth is my light)이라고.
(외국에서 몇년 살다 온 손자라 영어는 잘 하므로 금방 통했다)
"정문의 열쇠처럼 생긴 조형물은 국립 서울 대학교의 첫 글자 ㄱ,ㅅ,ㄷ의 형상을 본 떴으며 이 대학교를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조형물이라는데 6년 후에 매일 볼 수 있도록 마음 다지지 않을래?"
"그러고는 싶지만 실력이 되겠어요?"
반문식으로 부정적인 손자에게 한 고사(故事)도 말했다.
중국 당나라의 가장 유명한 두 시인 중 하나인 이백이 너 같은 소년일 때 집 떠나 먼 곳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배우는 일이 힘들고 싫증이 나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길가에서 도끼를 열심히 갈고 있는 한 할머니에게 까닭을 물었다.
"바늘을 만들려고 갈고 있는 중이다"
어처구니 없는 할머니라고 생각하면서 걷던 소년 이백에게 문득 한 깨달음이 왔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끊임 없이 엸심히 하면 기필코 이뤄지겠구나.
소년은 즉시 되돌아가 꾸준히 공부해서 그 나라의 으뜸 시인이 되었으며 마부위침(갈磨, 도끼斧, 핳爲,
바늘針)이라는 고사가 나오게 되었단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히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 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흘 높다 하돗다"
이씨조선 11대 임금 중종 때 사람인 양사언의 시조도 풀어서 들려 주었다.
너도 열심히 노력하면 6년 후에는 매일 이 길을 걷게 될 텐데....
손자의 소극적인 반응에 약간 아쉽지만 내가 손자의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6년 후의 우리나라의 대학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이 시대의 반세기는 굉장히 긴 세월인데도
이같은 보편적 바람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서울둘레길은 관악로를 따라 남부순환로로 넘어가는 고개 직전, 관악서울대학교치과병원 앞을 지나서
우측 산길로 오른다.
관악산 자락이 도로(관악로) 개설로 잘린 현장이 아직도 그대로다.
처음에는 잘리지 않은 상대에서 넘어 다녔고, 다음에는 조금 잘렸고 그 다음에는 넓게, 다시 아주 넓게
그리고 깊이 잘려나감으로서 제법 높던 고개도 낮아졌다.
산길로 한 블럭을 지나면 낙성대공원 앞 낙성대로에 내려선다.
낙성대로에서 손자에게 또 물었다.
네 출생의 발원지(부모의 결혼식장)를 보고 싶지 않으냐고.
낙성대로 따라서 우측으로 조금 가면 '호암교수회관 컨벤션센터'가 있다.
서울대학교는 이 시설 일부를 교직원과 그 자녀, 동문과 그 자녀 등의 결혼식장으로 제공하고 있는데
너의 아빠 엄마도 이 곳에서 결혼예식을 올렸다.(아래)
너도 그럴 의향이 있니?
요원한 일이지만 속내를 떠보려고 물었는데 오늘도 마감시간이 임박해 오기 때문인지 적극적인 반응이
없어서 마지막 길을 재촉했다.
낙성대공원(위 1.2)에 들어섰을 때 손자가 모처럼 질문을 해왔다.
"할아버지, 낙성대가 뭐예요?, 뭐 하는 곳이예요?"
청와대를 연상한 듯 관심이 있다는 뜻이라 반가웠다.
낙성대(落星垈)란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머무른 땅이라는 뜻으로 산모의 품에 안긴 이 별은 사내 아이로
환생했는데 고려의 문신이며 장군인 강감찬(948~1031)의 출생지를 말한다.
본래의 위치는 이 곳에서 약간 떨어진 봉천동 산48이란다.
강감찬(姜邯贊)은 고려의 제 3대 왕 경종 때 태어나 8대 현종 때까지 생존했으며 장군이 거란의 대군을
물리친 귀주대첩(龜州大捷)은 을지문덕(고구려)의 살수대첩과 이순신(이조)의 한산대첩과 함께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3대 대첩으로, 그 주인공들은 3대 영웅으로 꼽힌단다.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출생지 이름을 딴 공원을 세웠고 안국문 안에는 그의 사당이 있다.
하도 걸출한 인물이라 그런지 강감찬 장군에게는 전설이나 신화에 다름아닌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호환이 잦은데 화가 난 장군이 인왕산의 호랑이 두목에게 명하여 모두 멀리 귀양보낸 이야기,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전남 구례군)에는 무문(無蚊) 마을이 있는데 강감찬 장군이 한 밤을 머물 때
모기들이 극성을 부렸기 때문에 멀리 사라지라고 명한 후 모기가 없는 마을이 되었다나.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그 마을에는 한 여름에도 모기가 전혀 없다.
시간이 부족할 듯 하여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아래)
그러나 낙성대 ~ 관음사는 마감 시간에 임박하여 걷기는 무리가 있는 구간이다.
심하지는 않아도 오르내림이 잦기 때문이다.
해가 지는 시각에 관음사를 내려섰다.(아래 1.2)
어둑해지려는 시각에 우리는 사당역에 도착했다.
조.손 간이 낮 시간 종일 함께 했지만 지하철(4호선)에 오르는 순간에 다시
이산 가족이 되었다.
즉시 경로석에 앉은 나와 달리 역 몇 개를 지나서 자리에 앉자마자 손자의
스마트 폰 심취가 재개되었다.
쓰러질 듯 지쳐가던 이 아이의 어느 곳에 숨어있던 체력인가.
이미 말했듯이 소위 교통약자석은 어리석기 짝이 없이 잘못 된 제도다.
스마트 폰은 생산자에게는 희극이겠지만 사용자에게는 비극이다.
21c의 모르핀(morphine)이니까.
이 중독에서 벗어날 해독제가 하루 빨리 나오지 않으면 재앙이 될 것이다.
어두워지면서 기온이 급강하하는데 어린 손자만 보내고 편할 것 같지 않은
밤이다.
스마트 폰에 빠져 있다가 하차역을 벗어날까 걱정되는데다 손자는 아침에
나온 집이 아닌 딴 집으로 귀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낮에 아들네가 인근의 딴 집으로 이사를 했을 것이니까.
길 걷는 일 보다 더 마음 쓰이는 일들이 있을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내 집과 전혀 다른 방향인 아들의 집을 거쳐 오느라 내 귀가가 늦어지기는
했지만 마음은 어느 날 보다 편했다.
비록 언저리를 돌았을 뿐이지만 우리나라의 다섯 악산(岳山) 중 하나라는
관악산 구간을 탈 없이 마쳤으니까.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