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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 수도암에 모셔진 높이 2.51m의 통일신라시대 석조불상으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민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작지만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네모나며 풍만하고, 긴 눈·작은 입·평평한 콧잔등에서 위엄있는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옷주름은 느슨하고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으며 단정하고 강인한 느낌을 준다. 거구의 불상이면서도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특이한 손모양과 함께 당시 시대양식의 반영인 것 같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래쪽은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8각형을 이루고 있다. 맨 위에는 반원형에 가까운 연꽃이 2줄로 교차되어 있고, 앞면에 3마리의 사자상과 용머리 같은 것이 새겨져 있어 독특하다. 전체적으로 정제되고 균형잡힌 모습을 나타내는데, 위축되고 긴장감이 감소하며 탄력이 줄어든 점으로 볼 때 신라말에 만든 작품으로 추정된다. |
대적광전(大寂光殿)에는 통일신라(統一新羅) 하대(下代)에 제작된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이 봉안되어 있다. 이 비로자나불좌상은 위엄찬 얼굴, 당당한 어깨, 거대(巨大)한 체구 등으로 당대의 거작불상(巨作佛像)을 대표하고 있다. 광배는 없어지고 대좌(臺座)는 남아 있는데, 8각대좌로 상대(上臺)는 앙련(仰蓮), 중대(中臺)는 안상(眼象), 하대(下臺)는 복판복련(複瓣覆蓮)을 새겼는데 상대의 앙련 전면에는 연판(蓮瓣)대신 귀면을 장식하였다. 이상의 여러 가지 특징으로 미루어 보아 이 불상는 통일신라 말기(末期)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청암사수도암삼층석탑(靑巖寺修道庵三層石塔)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쪽에 서 있는 쌍탑으로, 신라 헌안왕 3년(859)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전해온다. 앞 뜰이 좁아서 탑과 법당과의 거리가 가깝다.
동탑은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얕게 새겼다. 탑신부에서는 1층 몸돌이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각 면에는 4각형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두고 그 안에 여래좌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2·3층의 몸돌에는 각 모서리 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받침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크게 줄었으나 3층 몸돌은 2층과 비슷하다. 1층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기둥만 새겨져 있고, 그 사이에 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동탑보다 얇고 넓으며 밑받침은 5단이다.
두 탑은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곳곳에서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동탑은 1층 몸돌의 위가 좁고 감실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고 서탑은 지붕돌 밑의 간격과 지붕돌이 넓다는 것이 특징이다.
김천 수도암 선원“한번 눈길 주면 떠날 수 없는 수행처” |
김천 수도암(修道庵)은 직지사 말사인 청암사(靑巖寺) 부속암자이지만 가야산 능선과 연결돼 있어 해인사와 인연이 깊다. 지권인(智拳印)을 한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가다보면 가야산 꼭대기와 마주한다. 수도암에서는 그곳을 연화봉이라고 부른다. 해인사 강원 학인들은 해마다 이른 봄 고려대장경 정대불사(경전 목판을 머리에 이고 경내를 도는 법회)를 마치고 나면 가야산에서 수도암이 있는 불령산(佛靈山)까지 등산을 한다. 비구니 스님들의 수도처인 청암사에서 점심을 먹고 수도암을 참배한 뒤 다시 해인사로 돌아가는 하루 여정은 법회 준비에 지친 스님들을 위로하는 ‘소풍’인 셈이다. <사진설명: 신라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근대 경허스님이 중창한 수도암. 지난 7일 찾은 선원은 산철이지만 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가야산과 불령산을 잇는 길을 따라 많은 스님들이 오갔다. 수도암에 선원을 처음 개설한 경허스님이 그러했고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암자를 본사 못지 않은 대찰로 일으켜 세운 현 법전종정예하 역시 그 길을 따라 오갔다. 주지 원만(圓滿)스님을 비롯한 여러 대중들 또한 해인사 스님들이 많다. 큰 절 격인 청암사와 본사인 직지사 역시 관할 소유 따지지 않고 좋은 공부 분위기를 만드는데 돕고 있어 좌우로 포근히 감싼 생김새에 덧붙혀 저절로 마음이 포근해지는 수도처다. 지난 7일 새벽부터 서둘러 길을 나섰는데 선원 뒤편에 걸린 해가 기울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 20여리에 걸친 계곡을 따라선 길은 선경(仙境)을 연출했다. 마지막 마을을 지나 수도암 입구에 들어서자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위에서부터 대적광전 약광전과 석탑 두기가 서있고 오른편에는 이 절의 핵심구역인 선원이 위풍당당한 자태를 드러낸다. 넓은 경내 왼쪽으로 청룡등이 길고 힘차게 뻗어 감싸 돌고 우측으로는 백호등이 웅장하게 내려와 선방 앞에 묘한 봉우리를 만들어 지켜주는데 정면에는 가야산 연화봉이 마치 물속에서 연꽃이 피어오르는 듯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연화봉 앞에는 한일자(一) 모양 가로로 길게 뻗은 일자봉이 받치고 있는다. 원만스님은 이를 “연화봉은 공덕을 일자봉은 평등한 이치를 나타내어 지혜와 덕이 수도암에서 현출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인지 수도암은 공부하는 수좌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정진처이며 신도들에게는 더없는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선원 사립문을 열고 들어섰다. 정면9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형태의 수도선원은 20명이 방부를 들이는 큰 규모다. 주지스님 옆에서 농담을 주고 받으며 해맑게 웃던 스님이 보이지 않는다. 방안에는 방금 앉아 있다가 간 듯, 사람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좌복도 그대로다. 주지스님은 “기자가 온다니까 조금전 까지 앉아있던 스님들이 모두 나갔다”고 말했다. 큰 죄를 지은 듯 얼굴이 화끈거리고 무안한 마음을 감출 길 없어 사진 몇장을 찍고는 서둘러 나왔다. 결제가 끝난 산철이지만 스님들은 여전히 가부좌를 풀지 않고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신라 헌안왕 3년(859) 도선국사가 이 절을 창건하고 후세에 공부인이 많이 나올 도량이라며 7일 동안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수도암에 선원을 개설한 분은 경허스님이다. 현대 한국 간화선풍을 일으킨 경허스님은 1899년 봄부터 해인사에 머물다 수도암을 찾았다. 경허스님은 ‘청암사 수도암에 오르다’(上靑岩寺 修道庵)라는 칠언율시를 남기는데 이 때부터 수도암 선원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경허스님이 그 때 쓴 ‘수도암’ 현판이 주지스님 방에 걸려있다. 당시 51세의 경허스님은 26세의 젊은 한암스님을 수도암에서 처음 만났다. 경허스님이 한암스님에게 〈금강경〉 사구게를 설하자, 한암스님의 안광이 홀연히 열리면서 9세 때부터 가졌던 ‘반고씨 이전의 인물’에 대한 회의가 풀렸다. 이어 대중들 앞에서 깨달음을 인정받았다. 경허스님이 한암스님에게 물었다. “남산에 구름이 이니 북산에 비가 온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소리냐.” “창문을 열고 앉으니 기와를 입힌 담이 앞에 있습니다.” 경허스님이 다음날 여러 청중에게 말했다. “중원(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을 넘어섰다.” 물 속에서 연꽃 피어오르는 듯 한 연화봉 신비 도선국사 창건 “후세 공부인 많이 나올 것” 예견 경허-한암-구산스님 등 고승 발길 끊이지 않아 수도암을 찾는 고승들의 발길은 그 뒤로도 끊이지 않았다. 1924년 고암(古庵).전강(田岡).월송(月松) 스님이 정각에서 동안거를 지냈으며 1936년 전강스님이 조실로 지내며 후학들을 제접했다. 1943년 구산스님은 수도암 정각에서 ‘무자화두’를 들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구산스님은 이곳에서 인근 동리에서 영민하다고 소문난 아이를 상좌로 맞는데 바로 현 조계총림 방장 보성스님이다. 보성스님은 지금도 이곳을 자주 찾는다. 편안한 승용차 대신 늘 선원납자들에게 줄 과일 등 먹거리를 가득 실은 승합차를 타고 온다. 승용차는 작아서 많이 실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다. 스님은 며칠 전에도 승합차에 과일 등을 가득 싣고 다녀갔다. 수도선원 왼편 위 정각(正覺)은 장기 결사(結社)에 들어간 스님들이 머무는 정진처다. 현재 2명의 수좌가 3년 결사 중이다. 수도암 주지를 지냈던 원인스님과 도희스님은 하루 한끼 먹는 일종식에 3시간만 자는 고행 중이다. 반찬을 가지러 두달에 한번 한 스님이 걸망을 지고 암자로 내려오는 것 외에 좁은 정각에서 지낸다. 나무도 직접해 불을 지핀다. 96년 5명의 납자가 가행정진에 들어간 이래 99년 4명 그리고 올 봄에 원인스님과 도희스님이 이들을 이어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수도암은 함부로 갈 곳이 못된다. 한번 눈길을 주면 떠날 수가 없다. 주지스님은 수도암이 좋아 17년 째 그곳에 머물고 있으며 스님의 사형인 원자스님은 20년간 원주 한번 안 살고 참선만 하고 있다. 기도하러 왔다가 주저앉은 ‘거사’도 있다. 기자도 빗발치는 전화 덕분(?)에 가까스로 내려왔다. 김천=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ㆍ주지 원만스님… 주지스님은 은사인 법전 종정예하를 무척 좋아한다. 스승 좋아하지 않는 제자 없겠지만 주지스님은 특별하다. 그렇다고해서 은사스님에게서 다정한 말을 듣거나 위로를 받은 것도 아니다. 해인사에 출가해 행자생활이 끝나가는데도 나이 많은 사제 두기 싫다는 스님들 때문에 유일하게 은사를 정하지 못하고 있던 차 기도를 올렸다. ‘은사스님 구해달라’고. 그러자 그전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주지스님이 계속 보였다. 이번에는 주지스님 제자가 돼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스님은 할당된 두명을 모두 채워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번에는 직접 찾아 뵙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사제의 연을 맺었다. 은사스님을 따라 수도암에 들어와 원주를 보았다. 정말 열심히 했다. 은사스님의 ‘고생한다’는 한마디면 더 잘할 수있을텐데 하는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인사드리면 ‘나가 봐’가 전부다. 속으로 원망이 쌓여갈 무렵 은사스님이 원주실에 들렀다. 수좌들 많은 결제 때 되면 제일 행복… 호롱불 두개가 있었다. 은사스님은 개인돈으로 산 호롱불은 위에 놓고 사중돈으로 산 것은 아래에 놓아야한다고 했다. 개인호롱불에 기름 넣다 넘치면 공용 호롱불로 흘러가지만 개인 것이 아래 있으면 사중돈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종정예하는 “선방에 앉아야만 공부가 아니다. 이것도 공부다”라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원만스님은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 외호 소임의 자세”라고 말했다. 지난 하안거 때는 방 온도를 조정하는 장치가 고장났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아 해제 후에야 알게 됐다. “주지에게 부담주지 말자고 했다는데 그건 너무 심했어”라며 주지 스님은 웃었다. 주지스님은 “수좌들 많이 있는 결제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다. [불교신문 2264호/ 9월23일자] |
1937년 경북 고령에서 났다. 25살 때인 1961년 김천 청암사 수도암 법희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관응스님으로부터 ‘기신론’을, 고봉스님으로부터 ‘금강경’을, 혼해스님으로부터 ‘원각경’을 배웠다. 봉암사 묘관음사 축서사 금영사 용주사 각화사 등 선원에서 정진했다. 1968년 문경 봉암사 선원을 재건해 종립특별선원의 기틀을 다졌다. 1980년 10·27법난 수습을 위해 수좌회의 결의로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맡았다. 전국선원수좌회 공동 대표, 각화사 태백선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 |
설화가 깃든 산사기행 수도산(修道山) 수도암(修道庵)
도선 국사가 내다본 천년 만년의 시공 글· 김명환 |
예로부터 김제 벽골제 아래의 호남, 제천 의림지 서쪽의 호서, 문경 새재(鳥嶺) 남쪽의 영남, 이 삼남(三南)에 풍년이 들면 팔도가 굶주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말은 나라를 영위함에 있어 안정된 식량공급의 기반이었던 삼남의 중요성을 이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까닭인지 삼남의 풍년이 오늘날 시름으로 비쳐지고 있다. 수백 수천 년 지어온 쌀농사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빈 들판 허허로운 바람으로 지나고 있다. 오늘날 전라, 충청, 경상의 삼남이 한 곳에 모이는 꼭지점은 백두대간의 삼도봉(1174m)이다. 삼도봉을 지난 백두대간은 곧 덕유(1614m)를 일으켜 비로소 호남과 영남을 아득하게 갈라놓는다.
덕유산을 앞두고 대간을 따라 호남으로 들어서려던 발걸음이 수도산(1317m), 가야산(1430)으로 이어지는 영남의 듬직한 산줄기로 향한다. 수도산(修道山) 수도암(修道庵, 054-437-0700)의 명성이 발걸음을 돌려세운 것이다.
이름 속에 그 지나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면 수도산의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직설적이다. 이름 그대로 수도(修道)하는, 수행자의 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름이야 먼 옛날부터 이 산 정수리에 앉아 있는 수도암에 의해 붙여지고 불려진 것이겠지만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그래서 인정하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날 이처럼 확연한 이름으로 다가올 수 있었겠는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언제나 저 산은 수도산인 것이다.
수도암은 지난번 참배했던 비봉산 봉곡사 가는 길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하기야 봉곡사 역시 도선 국사와 인연 깊으니 청암사, 수도암과의 관련성 또한 생각해볼 일이다.
수도암 창건 연대는 따로 전하는 것이 없는데 청암사 사적비에 신라 헌안왕 3년(859) 쌍계사, 청암사와 함께 도선 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초기에는 쌍계사의 산내 암자였다고 하는데 쌍계사 터가 지금도 증산면에 남아 있다. 향토지 등에는 이후 수도암의 내력으로 조선 인조 27년(1649) 벽암 각성(碧巖覺性)의 중창과 광무 4년(1893) 포응 선사의 중창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김천을 지나 대덕에서 가래재를 넘은 발길이 자연 마을에서 가까운 청암사부터 찾는다. 맑은 물과 계곡을 따라 소나무와 전나무 울창한 불령동천(佛靈洞天)을 지나 청암사에 들어선다.
미리 연락을 드렸던 서기(사중안내와 신도 관리) 소임을 맡은 스님께 인사를 드린다. 허나 어른스님께 말씀드린 청암사 취재 건에 대해 아직 대중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단다. 100여 명이 넘는 대중스님들의 합의에 따라 절살림을 꾸려 가는 강원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위안 삼아 대웅전 부처님을 참배하고 발길을 돌려 수도암으로 향한다.
그 옛날 청암사에서 수도암을 가려면 극락전 앞을 지나 족히 두세 시간을 올라가야 했다. 지금은 수도암 아랫마을인 수도리에서 계곡을 따라 시멘트 길이 잘 나 있다.
얼마나 올랐을까, 아름드리 소나무와 전나무 숲 군데군데 일주일 전 내린 눈이 두툼하게 남아있다. 해발 1050m의 고지대로 여름에도 모기가 없고 아랫마을과 한달 가까운 계절 차이가 난다는 말이 실감난다.
수도암 선원 옆을 조용히 걸어올라 대적광전의 부처님을 뵙는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거대한 비로자나 부처님(보물 제307호)이시다. 언뜻 석굴암 부처님이 연상되는데 그보다는 작은 반면 투박하다고 해야 할까 남성답다고 해야 할까. 네모진 듯 풍만한 얼굴이며, 긴 눈, 작은 입, 허리를 곧추세운 듯 몸에 바싹 안긴 가부좌가 인상적이다.
도선 국사가 이 부처님을 조성할 때의 일이다. 수도암 터에 어울리는 탑과 모든 것을 조성했으나 석불을 만들 만한 석재가 없었다. 산 너머 거창 땅 부처골에서 큰 돌을 발견하고 다듬기 시작했다. 드디어 칠 척이 넘는 거대한 부처님을 조성했으나 수도암까지 옮길 일이 막막했다. 이에 모든 대중들이 지극정성으로 7일 기도를 올리는데 마지막 날 수염이 하얀 노스님이 나타나 부처님을 옮겨준다며 큰 석불을 등에 업고 나는 듯이 산을 오르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마침내 수도암 근처 지금의 아홉 살이에 이르렀는데 그만 칡덩굴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이다. 이에 노스님은 수도산 산신을 불러 놓고 “부처님을 모시고 오는데 칡덩굴에 걸려 그만 부처님께 큰 죄를 지을 뻔하였다. 앞으로 다시는 이 절 주위에 칡이 자라지 못하게 하라.”고 호통을 치고는 부처님을 수도암에 모셔놓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때문인지 이곳 수도암 주위에서는 지금까지 칡덩굴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수도암 약광전에는 또 보물 296호로 지정된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는데 역시 도선 국사가 직접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광배까지 훌륭히 갖춘 부처님이신데 보관과 이목구비가 천년 세월에 깎여 두루뭉실하다. 영험한 약사여래인지라 수많은 중생들의 눈과 입을 열어주시느라 그 애절한 손길과 기도에 감응하여 이렇듯 남아 계신 것이리라. 흐릿한 얼굴에 머금고 있는 인자한 미소에는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 부처님의 자비가 여전하다.
직지사 삼성암, 금오산 약사암에 있는 약사여래와 함께 10세기 초에 조성된 삼형제불이라고도 전해오는데 세 곳의 부처님이 동시에 방광한 이적 등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고 있기도 하다. 수도암 나한님과 관음전 법기보살님의 영험담 또한 간직된 성보만큼이나 보물급 이야기들로써 수도암의 뛰어난 수행력과 영험함을 짐작케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이른 아침, 대적광전 앞마당에 올라선다. 정면 일자봉 너머 가야산이 왕관인 듯 연꽃 봉우리인 듯 그림처럼 솟아 있다.
대적광전과 약광전 앞의 3층 석탑은 수도암 터가 옥녀가 베틀에 앉아 옷을 짜는 형국이라 하여 도선 국사가 법당 좌우에 베틀의 기둥을 상징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관음전 앞에는 본래 작은 연못이 있었으니 이것 또한 베틀에 필요한 물을 상징했던 것이라고. 지금은 메워져 마당이 되었다. 대신 석조에 넘치는 물이 있고, 저 멀리 가야산 연꽃을 피워올리는 연지가 수도암에 항상하니 이제 따로 연못은 필요치 않으리라.
절 왼쪽 청룡등을 따라 눈 쌓인 수도산을 오른다. 청룡등이 잘 생기면 지혜를 이루기 쉽고 백호 능선이 잘생기면 복이 많다던가. 경허 스님, 한암 스님 등 수도암에 드리운 근세 선지식의 자취 또한 뚜렷하니 도선 국사가 내다본 천년의 시공이 사뭇 장엄하다.
수도산 정상, 절 안에서는 그 높이를 전혀 느낄 수 없었는데 산정에 올라보니 앞뒤 사방이 첩첩산중이다. 도선 국사가 청암사에 터를 닦고는 이듬해 수도산을 오르며 그 자신 수도할 곳을 찾던 중 지금의 수도암 터를 발견하고 기쁨에 겨워 7일 동안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곳. 다시금 수도암 터의 복됨을 사무쳐 깨닫는다. 청량한 새벽 수도암의 우렁찬 목탁소리가 수도산에 쟁쟁하다.
불령산(佛靈山) 수도암(修道庵) | |||||||||||
조명래ㅣ법왕사보 편집위원 | |||||||||||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 해발 1,317미터 불령산(佛靈山), 일명 수도산 정상부근 1,080미터에 위치한 수도암(修道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로 해발 1,244미터에 자리한 설악산 봉정암과 해발 880미터에 자리한 지리산 칠불암과 더불어 예로부터 이름난 수행처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신라 헌안왕 3년(서기 859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수도 도량으로 수도암(修道庵)을 창건하였다고 전할 뿐, 고려시대의 사적(寺蹟)은 전해오는 것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인조 27년(서기 1649년)에 벽암각성(碧巖覺性)이 중창했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 암자의 일부가 소실된 것을 광무 3년(서기 1899년)에 포응이 재건했다 한다. 그 뒤 6·25전쟁 당시 빨치산 소탕 작전으로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 소실되어 1960년대까지 대적광전, 약사전, 정각암, 요사채 등 4동의 건물에서 3, 4명의 스님이 수행하고 있었을 뿐인데 1969년부터 15여 년 동안 현재 조계종 종정이신 법전(法傳)스님께서 주지로 계시면서 크게 중수하여 현재의 대가람으로 변모하였다. 도선국사께서 수도암을 창건한 뒤 ‘앞으로 무수한 수행자가 여기서 나올 것’이라며 예언하신 탓인지 수도암은 지리산 칠불암과 백양사 운문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대선원으로 손꼽힐 만큼 이름난 수행처였다. 고려, 조선시대에 이에 관해 전하는 기록은 없지만 근세 및 현대 한국불교를 이끄셨던 여러 큰스님들이 수행 정진하셨으며, 특히 한국불교의 중흥조이신 경허스님, 조계종 종정을 지내셨고 상원사에서 좌탈입망(座脫入亡)하신 한암스님, 송광사 조계총림 방장을 지내셨던 보성스님,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고 직지사 조실로 계셨던 관응스님, 현재 조계종 종정이신 법전스님 등 여러 큰스님께서 수도암에서 수행 정진하셨다. 한암스님(1876~1951년)은 23세 때 수도암에서 경허스님이 일러주신 금강경(金剛經)의 ‘무릇 모양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니 모양을 모양 아닌 것으로 보게 되면 바로 진리를 볼 것이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이란 사구게로 인해 개오(開悟)하셨다고 하며, 또한 송광사 조계총림 방장이신 구산스님(1901 ~1983)께서도 이곳에서 일주일간 선채로 용맹정진하신 후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며, 현재 송광사 조계총림 방장이신 보성스님께서는 이곳 수도암에서 행자생활을 하셨다고 하니 실로 불연(佛緣)이 있는 사찰임이 분명하다. 수도암 하면 현재 조계종 종정으로 계시는 법전(法傳)스님을 빼 놓을 수 없다. 1969년부터 15여년간 주지로 계시면서 수행하시는 한편으로 중창불사를 통해 동학혁명과 6·25전쟁 중에 소실된 사찰의 당우를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는 한편 선원을 열어 후학을 제접하신 법전스님은 성철큰스님의 법제자로 성철스님, 청담스님, 향곡스님, 자운스님 등과 ‘부처님 법대로 살자’며 한국 불교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평가받는 ‘봉암사 결사’에 참여하신 당대의 선지식이다.
수도암의 중심전각인 대적광전(大寂光殿)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지난 1969년에 지었진 전각이다. 대적광전 안에는 창건 당시 조성되어 보물 제307호로 봉안된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하였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9세기경에 경남 거창군 가북면 북석리에서 제작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이 불상의 운반에 고심하고 있을 때 한 노승이 나타나 불상을 등에 업고 이 절까지 운반했는데, 절에 다 와서 칡덩굴에 걸려 넘어지자 산신령을 불러 크게 꾸짖고 칡덩굴을 모두 없애게 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이 절 근처에는 칡덩굴이 없다는 설화가 전한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높이 251㎝의 통일신라시대 석조불상으로 1963년 보물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위엄 있는 상호, 당당한 어깨 그리고 거대한 체구 등은 통일신라시대 하대의 거작불상(巨作佛像) 양식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근래에는 노천에 모셔진 석불좌상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수도암처럼 전각(殿閣) 안에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시고 있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경우이다. 지금은 나무로 만든 불단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불상과 같은 재질의 돌로 만들었다. 연꽃을 엎어놓은 모양을 하고 있는 복련과 반원형에 가까운 연꽃이 두 줄로 교차되어 있는 앙련을 팔정도를 상징하는 팔각기둥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팔각기둥 전면에는 세 마리의 사자상과 용머리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적광전 오른편 기단부 앞에 보면 숫기와 5개로 연꽃모양을 만들어 놓은 것이 여느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특이한 모양새이다. 무엇을 하는 것일까? 궁금함을 풀기위해 물어보았더니 천숫물을 붓는 곳이란다. 천숫물이란 절에서 발우공양을 할 적에 밥과 반찬을 돌리기 전에 먼저 받아 놓는 맑은 물로 공양전후에 발우를 씻는데 사용한다. 공양이 끝나면 대중의 천숫물을 모두 모아 아귀에게 베푼다고 한다. 아귀란 귀신이 자꾸 사람을 잡아먹자 부처님께서 그 벌로 아귀의 목구멍은 바늘구멍만 하게 만들어 놓고 몸은 수미산만 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아귀는 항상 배고픔에 허덕이지만 무엇이든 먹기만 하면 모두 불로 변하여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고, 다만, 스님들이 공양하고 남은 천숫물만 받아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천숫물에는 고춧가루 하나, 밥 티끌 하나라도 들어가게 되면 아귀는 바늘구멍만 한 목에 걸려 굶어죽기 때문에 청산(靑山)과 백운(白雲)이 비치도록 맑아야 한다. 매년 크고 작은 사찰에서 열리는 수련법회에서 초심자들에게는 천숫물이 공포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조별로 천숫물을 모아 탁(濁)하면 그 물을 강제로 먹이는데 보통 고역이 아니다. 위생적으로 생각하면 불결하기 그지없으나 좀 더 크게 생각하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불구부정(不垢不淨)’이나 원효대사께서 말씀 하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가르침을 체득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보물 제297호로 지정된 수도암 삼층석탑은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東西)로 서 있는 쌍탑으로, 신라 헌강왕 3년(859년)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전해온다. 수도암은 마치 옥녀(玉女)가 베 짜는 형국을 하고 있는 명당 터로 베틀의 두 기둥을 상징하는 뜻으로 두 탑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는 대적광전 앞에 서탑이 서있고, 약광전(藥光殿) 앞에 동탑이 서있어 쌍탑으로 보기에는 너무 거리가 떨어져 있어 단탑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앞뜰이 좁아서 탑과 법당과의 거리가 가깝지만 탑의 위치가 높은 곳에 위치한 관계로 운무(雲霧)가 그득한 날에는 구름위에 탑이 서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난다. 동탑은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얕게 새겼다. 탑신부에서는 1층 탑신이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각 면에는 사각형의 감실(龕室)을 두고 그 안에 여래좌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2층과 3층의 탑신에는 각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우주(隅柱)를 새겨 놓았다. 옥개석은 얇고 넓으며, 받침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탑의 높이는 376㎝이다. 서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것을 볼 때 동탑보다 먼저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크게 줄었으나 3층은 2층과 비슷하다. 1층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기둥만 새겨져 있고, 그 사이에 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옥개석은 동탑보다 얇고 넓으며 밑받침은 5단이며 높이는 425㎝이다. 약광전은 대적광전과 함께 1963년에 건축된 전각이며 보물 제296호로 지정된 석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석불좌상은 도선국사가 조성했다고 전해오나 도식적으로 처리된 옷 주름, 형식적인 광배와 대좌의 표현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라 한다. 약광전 석불좌상은 금오산 약사사(藥師寺), 직지사 삼성암(三聖庵)에 있는 약사여래좌상과 함께 방광(放光)을 했다고 하여 삼형제 불상으로 부르며, 한 석불이 하품을 하면 다른 두 석불은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머리 부분에 금속으로 된 보관(寶冠)을 장식했던 흔적이 있는데 석불좌상에 금속으로 된 보관을 만들어 씌운 예는 아주 특이한 예라 할 수 있다. 석불좌상도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형태의 대좌위에 봉안하였는데 나무로 만든 불단(佛壇)이 있기는 하지만 비켜서 보면 대좌(臺座)를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세상살이에 지쳐 가슴이 답답한 그대, 수도암으로 올라보라. 대적광전에 계신 비로자나부처님께 넙죽 엎드려 세상살이에 대한 온갖 푸념을 털어놓고 인간사 번뇌망상(煩惱妄想) 다 벗어 놓은 채로 신을 벗어놓은 댓돌로 나와 눈앞에서 펼쳐지는 산하의 상쾌함을 함께 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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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산-단지봉-좌일곡령-가야산종주 - 텍스트판 |
수도산 - 가야산 종주 그래픽 판 (사진. 지도. 화보 포함) 위치: 경남 거창군 가북면, 합천군 가야면 - 경북 김천시 증산면, 성주군 가천면, 성주군 수륜면 코스: 수도암 - 단지봉 - 좌일곡령 - 1124봉 - 목통령 - 분계령 - 두리봉 - 부박령 - 가야산 - 치인 집단시설지구 교통: 수원서 김천경유 거창-함양행버스 탑승(10500원. 토요일이라 김천까지 가는 열차는 모두 입석밖에 없어서)김천서 하차, 김천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증산행(하루 6회 요금 1020원)버스를 2시 20분에 탑승, 가랫재를 넘어 증산면소재지에서 하차. 수도암까지 1만원주고 갤로퍼탑승, 수도암 하차. 해인사에서 2400원하는 고령행 버스 탑승, 고령에서 고려여객(합천, 고령, 성주를 거쳐 고속도로를 운행한뒤 남부터미널에 도착하는 버스 9시 출발 요금 15200원)버스를 탑승. 숙박: 수도산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능선봉에서 야영, 가야산 국립공원 지정 야영장에서 야영. 치인리에 민박, 여관등 숙박시설이 많다. 수도암아래 수도리에 민박집 여러곳 있음. 문화재와 볼거리: 수도암 3층석탑(보물 297호), 석조비로자나불(보물 307호) |
산행:<> (8.28-8.30일 1999년)
가야산에 갈 일이 있으면 김천에서 대덕으로 나와 가랫재를 넘어 성주댐으로 접근한 뒤 가야산으로 가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는 나에게 수도산은 언제나 그 갈래가 많은 능선, 넓은 계곡, 풍성한 숲, 평범한 듯하면서도 반드시 그 높이만은 아닌 여러가지 이유로 비범해보이는 수도산을 언제 한번 오르나 하고 숙제를 끝내지 못한 학생처럼 찜찜한 느낌에 빠져들곤 했다. 수도산(1317m)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가랫재라는 고개 때문이다. 사진:가야산 정상 이번에 종주산행코스로 이름난 수도산-가야산종주를 결행하기 위해 떠난 것은 토요일 오전. 요즘 열차사정을 잘 모르는 필자에게 입수된 첫 정보는 당일 모든 열차편에 남은 표는 입석표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야영장비까지 지고 지하도를 건너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마침 김천을 거쳐 거창, 함양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이 버스는 김천다음에는 대덕을 거치게 되는데 사정을 잘 알았다면 김천시외버스에서 잘 오지않는 증산행을 타는 것 보다는 지나가는 버스편이 많은 대덕으로 일단 간 뒤 대덕에서 택시를 타고 청암사나 수도암으로 가는게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대덕은 무풍에서 오는 길, 거창으로 가는 길, 증산으로 가는 길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다. 대덕에서 고개만 넘으면 증산면이다. 청암사로 가려면 고개를 넘으면 나오는 첫번째 동네인 평촌리에서 들어가면 된다.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가는 길은 꽤 멀어 산자락을 따라 길게 돌아올라간다. 떠날 때부터 안그래도 긴 장정인데 첫부분에서 기운을 다소나마 세이브하는 방향으로 선택한 것이 산행깃점을 수도암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딴에는 머리를 굴려본 것인데 정작 증산에서 수도암까지 1만원을 주어야 한다는 얘기를 듣자 이런 식으로 산행을 해서는 안되는 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백화산에서처럼 땡볕에 걸어서라도 가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하는것 아닌가. 그런데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은 그때의 고생이 뇌리에 박혀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증산에서 수도암까지는 실제로 차로 가보니까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가기엔 너무 먼 11km정도는 된다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