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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배기크리스천#3 경건한 그리스도인(1) 야고보서 1장 19-22절
바다에는 가끔씩 태풍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태풍이 바다 속에 깔려있는 모든 찌꺼기들을 휘저어 정화하는 기능을 한다고 하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어려운 시련들은 대개 우리 안에 어느새 쌓여버린 죄의 찌꺼기들을 제거하고 정화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러한 어려운 시기를 보내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면 역시.. 우리의 입술을 지켜내는 일입니다.. 원망이나 불평이 터져나오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19)”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해야할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더디게 말하고 더디게 화내라고 되어 있는데 무슨 뜻일까요?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요? 더디해서 뭐 되는 거 보신 적 있습니까?
충청도 부자의 그 유명한 예화를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산에서 일을 했습니다.. 아들이 일하고 있는데 발을 짚었던 큰 돌이 굴러떨어지는 거죠.. 아버지 돌굴러가유~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버지가 이미 그 돌을 머리에 맞으신거 아닙니까? 그래서 아버지가 말씀하시죠.. 야! 제발 말좀 빨리해.. 돌굴러 가는건 얼른 얼른 말해야지~ 그래서 아들이 대답합니다.. 알었슈~ 그리고 다음에 또 일을 하는데.. 돌이 또 굴러떨어지는 거죠.. 그래서 아들이 얼른 이야기 합니다. 아버지 돌굴러가유!! 어 그래!! 하고 아버지가 피했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버지가 또 돌을 머리에 맞으신 것 아닙니까? 그때 아들이 뭐라고 해요? 두 갠디~
여러분,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며.. 여러분, 천천히 나중에 더듬더듬 하라는 표현일까요? 혹시 천천히 화내실 수 있으신 분 계십니까? 이 표현은요.. 아예 입을 다물고 꾹 참으라는 표현으로 보시면 정확합니다.. 그 상황에서는 말이 도움이 안되고, 성냄은 오히려 최악이라는 말씀이거든요..
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무엇을 속히 들으라는 겁니까? 이 사람이 해주는 충고, 저 사람이 해주는 교훈, 그 사람이 겪었던 경험담 같은 것들입니까? 아닙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은.. 성전에 올라가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대적이라고까지 표현하는데.. 대적 브닌나가 그렇게 마음을 격동케하고 번민케할 때 한나가 했던 행동이 뭐였지요? 엘가나의 갑절의 위로를 기다리고 원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 그 심정을 통하는 기도를 했던 것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일입니다.. 속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갈 수 없을 때에는 친구들을 불러서 업혀서라도 가야됩니다.. 교회가 잠겨있으면 지붕을 뚫고서라도 들어가야 됩니다.. 그곳에서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그곳에서 살아계셔서 오늘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확인하고 돌아오셔야 됩니다.. 그래야, 그 시험이 내게 유익이요, 감사와 찬송의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 그러면 어떨까요? 십중팔구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게 되어 있습니다.. 실수로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되어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불신앙의 고백을 하게 되어 있는 것ㅇ비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다.. 생각을 하시면 안됩니다.. 이때만큼은 정말.. 반사적으로 교회로 움직이셔야 합니다.. 앞으로 살아갈 것을 걱정하거나 내 힘으로 그 어려움을 해결해 보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무조건..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으로 알고 사무엘처럼 달려가서 여쭤야 합니다. “부르셨습니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그때, 인생의 꼬인 실타래가 풀려지기 시작합니다. 하늘이 열립니다. 사닥다리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하게 되는 겁니다..
특별히, 그 순간 화를 내시면 안됩니다. 왜요? 어렵고 힘들 때, 그 고난의 시간에 터져나온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야말로.. 그 사람이 보이는 진정한 신앙고백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향나무가 도끼에 찍힐 때 도낏날에 향을 묻히느냐.. 아니면 도낏날을 상하게 하느냐.. 진짜 향나무를 구별하는 잣대인 것을 아시잖습니까?
성경에도 기록합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20).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일날입니다. 성도님들이 다 식사하기 위해 교회에 계신데, 갑자기 예주가 엄마한테 막 소리도 지르고 화도내고 그럽니다. 왜 이렇게 해놨냐교! 저리가!! 짜증나!! 문을 쾅 닫고 그랬다고 해보시자구요. 이런 녀석한테 제 아내와 제가 쩔쩔매고 있다.. 애는 막 소리 지르고 화내고.. 부모는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있다.. 여러분이라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애 참 잘 키웠다.. 그러시겠습니까?? 그걸 보면서.. 아하~ 목사님 사모님은 사랑이 참 많으셔~ 뭐 이런 귀한 깨달음을 얻으시겠습니까? 자기 애도 저렇게밖에 못 키우는데, 우리는 여기서 양육을 받아봐야 소용없겠다. 밥은 무슨 밥이냐.. 집에 가.. 집에 가..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화내고 성질부리시면요, 사람들이 뭐라고 해요? 뭐 애를 저따위로 키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 아버지가 졸지에 못난 아비가 되는 것입니다. 성질내고 화내는 아이를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부모의 얼굴이 빨개지듯이.. 여러분이 화내고 신경질부리시면요..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얼굴이 빨개지신다니까요? 어떻게 말하고 싶어져요? 제가 이 녀석 부모 아니거든요?? 저는 그냥 삼촌이예요~ 동네 누나예요. 그러고 싶어진다니까요.. 느낌이 오시죠?
화를 내시면, 원망과 불평을 하시면.. 하나님의 의가 이뤄지지 못합니다..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신 하나님의 뜻은.. 그 자녀들의 모습을 통해 저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시려는 구원의 계획은.. 온데 간데 없어집니다..
에휴~ 저런 걸 자식이라고 키우고 있으니.. 그 부모가 다 불쌍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에휴~ 저런걸 남편이라고, 저런걸 아내라고 데리고 사니.. 그 아내가 불쌍하다.. 그 남편이 불쌍하다.. 저런 부모랑 살고 있으니.. 저집 자식들이 불쌍하다.. 이렇게 된다니까요?? 그렇게 욕먹으며 무슨 의를 이룹니까..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21절)”
여러분, 고난과 어려운 시험이 찾아왔을 때, 바로 이때야말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악을 내어버릴 기회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집안에 있는 모든 누룩을 치우고 누룩없는 딱딱한 떡을 먹곤 했습니다.. 왜요? 내 안에 있는 모든 누룩들을 함께 치워버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 속에 쌓여있는 모든 더러운 악을 내어버리는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런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일 년에 한번은 그렇게 타성과 잘못된 습성들을 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부러라도 그렇게 하는데..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시험이 찾아올 때.. 늘 그렇게 더러운 것과 악한 것들을 내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정결해지는 저와 여러분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곤, 그 정결한 마음에.. 친히 심어주시는 하나님의 진리를 온유함으로 채우십시오.. 오늘날 우리의 율법은 돌에 새긴 차디차고 날카로운 법이 아닙니다. 마음에 새겨주셨기에 살아 있는, 그리고 언제나 내가 살아있는 한.. 내 가슴의 체온만큼은 늘 따스한 법입니다.. 돌에 새긴 율법이라면 들고 가서 때려주기라도 하겠건만.. 마음에 새긴 진리는.. 들고 가서 때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품어낼 뿐입니다.. 함께 울어줄 뿐입니다..
여러분의 법은.. 돌에 새긴 율법입니까? 마음에 심기운 진리입니까? 가서 때리지 마시고.. 함께 울어주시길 바랍니다.. 때려서 키운 아이보다.. 눈물로 키운 아이가 바르게 자라지 않더냐는 겁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22)”
오늘 성경은 무서운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속이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도를 듣기는 무지하게 많이 듣는데.. 행하질 않아서 엉터리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근데 어때요?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줄 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꿔말하면 뭐예요? 실제로는 신앙생활이 엉망인데.. 엄청나게 자기는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비슷한 예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서 금방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여러 수업을 들을 때, 그 시간에는 이해가 다 된 것 같고 내 실력이 된 것 같습니다. 학원에서 선생님이 수학문제를 풀어주시거나 영어 문장을 해석해 주실 때면 나도 저 문제를 풀 수 있을 것 같고, 저 정도 영어문장은 멋지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데 나중에 시험을 보면 어때요? 나중도 아니죠? 당장에 비슷한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면 어때요?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가 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리는 것 있습니다.. 골리앗은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언제고 때려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골리앗을 딱 보는 순간 돌맹이 다섯 개 승!! 이라고 견적이 나올 정도가 되려면.. 손바닥이 수십 번은 터져야 되고, 사자와 곰에서 양새끼들을 수십 번 구해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훈련이 있어야 우리는 실전에 승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내 믿음 정도면, 상황이 발생해서 진돗개 둘, 데프콘 쓰리가 발령이 되면.. 일주일정도는 언제라도 금식할 수 있고, 내 재산의 절반이라도 내놓을 수 있으실 것 같으시죠?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직접 돌을 던져본 적이 없으면, 직접 한 끼 두 끼, 하루, 사흘 금식해 보시지 않으시면,, 10분 20분 기도해보지 않으시면.. 연탄 한 장이라도 사줘본 적이 없으시면.. 아무리 급박하고 중차대한 일이 닥쳐도 그 앞에서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이.. 속상하지만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사도요한에게 두루마리를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받아먹으라. 입에서는 달지만 속에서는 쓸 것이다.”(계10:9-10) 무슨 뜻입니까? 진리를 배우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그대로 실천하려고 할 때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앉아서 예배드리고 말씀듣는 것으로 나는 엄청나게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시면 곤란하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본 중에 기본을 못해서.. 주일성수하셔야 합니다.. 십일조하셔야 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건, 초등학생들에게.. 아침마다 세수하셔야 합니다.. 팬티하고 양말은 하루에 한번은 갈아입으셔야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기본 중에 기본을 우리는 신앙생활 수십 년째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수는 뭐 일주일에 한번 해도 되고 침발라서 눈꼽떼고 구렛나루 가다듬고 팬티도 뭐 뒤집어 입고 돌려입고 뭐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우리 인생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번 뿐인 인생이요.
예전에는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하면, 반드시 스승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사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요즘은 이것을 멘토링이라고 바꿔서 말합니다.. 스승은 절대로 제자들에게 지식이나 기술만을 전수하지 않습니다.. 제자의 정신 자세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왜요? 정신자세가 바르지 않은 제자는 그 기술과 지식만 모방해서 엉뚱한 짓거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스승을 오히려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로 하여금 사람이 먼저 되게 합니다.. 삶의 바른 태도를, 인생의 바른 길을 가르칩니다.. 결국, 스승과 똑같은 인격을 지닌 제자를 키워내는 겁니다.. 그러한 인품에.. 기술과 지식이 전해지는 겁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참 제자가 되어 스승의 뒤를 잇게 되는 거구요..
여러분, 스승의 집이 어딥니까?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먹고 자면서 배워도 시원찮을 판에, 우리는 주일성수도 힘들면 참 제자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인격을, 예수님의 마음을 온전히 지녀야할텐데.. 그것을 배우지 못했고, 조금도 갖지 못한 채.. 예수님 흉내만 내보려고 하니.. 오히려 반발이요, 오히려 조롱거리만 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 예수님을 오히려 욕되게만 하며 지내지 않습니까?
일전에 읽은 글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개합니다.
어느 해 추운 겨울, 북미 인디언의 안내에 따라 로키산맥을 지나던 한 여행자가 끝없이 펼쳐진 눈 위에 골짜기를 향해 지나간 외로운 여행객의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여행자는 눈이 가득한 겨울에 로키산맥을 혼자 여행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인디언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안내자는 여행객에게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본 하나의 발자국은 외로운 여행자의 발자국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제가 속해 있는 인디언 부족 용사 전체의 발자국입니다. 저희 부족은 적과 대항해 싸우러 나갈 때, 먼저 용감한 추장이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얼굴과 몸에 화려한 색칠을 하고 머리에는 독수리 깃털을 꽂고는 도끼와 화살을 들고 선두에 섭니다. 그러면 부족의 모든 용맹스런 병사들이 한줄로 서서 추장이 먼저 딛고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 정확하게 발을 내딛으면서 뒤를 따라갑니다. 그들의 이동은 빠르지는 않지만 정확합니다. 어느 누구도 앞서 난 발자국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 발자국은 하나일 뿐이지만 결코 외로운 발자국이 아닙니다. 오히려 승리를 가져다주는 부족 전체의 하나의 열망이며 열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승리합니다.”
한 사람도 그 길을 벗어나지 않고 발자국 하나만 남기며 걷는 길, 외로운 듯 보이나 결코 외롭지 않은 승리의 길,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모습이 이러해야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앞사람 뒤통수만 바라보고 서는 앞으로 나란히를 엄청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고개를 삐죽 내밀고 대열을 좀 이탈을 해줘야 직성이 풀리는,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고 있는 그런 양들인 것입니다. 군대가 훈련 간에 행군을 그렇게 자기 멋대로 하고 있으면 그 군대가 과연 승리할 수 있는 군대일까요? 평소의 걸음이 그러했다면, 전쟁의 상황 그 때는 갑작스레 무슨 철이 나서 지휘관의 말을 듣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을까요? 다 숨기 바쁘고 다 제각기 뿔뿔히 도망가고 말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하일교회 성도님들, 소개해드린 북미 인디언 부족처럼..
오늘부터 내 하나님이, 내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을, 대장되신 예수님이 앞서 가신 길을 한발 한발 똑같이 걸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빠르지 않아도 됩니다. 정확하게 그분의 발자국을 밟으며 가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발자국만 남기는 우리의 생애, 생각만 해도 근사하고 멋지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일흔 다섯에 움직이기 시작하더라구요. 모세가 80에 움직이기 시작하더라구요. 갈렙이 여든 다섯에 헤브론 산지를 점령하더라구요. 늦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부터 움직이시면 저분들보다 훨씬 빠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걸으신 걸음,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걸음, 닮으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생생한 베드로 사도의 기억과 고백을 읽어드리고 말씀 마치겠습니다. 못다한 말씀은 다음주에 이어서 드리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2:21-25)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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