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0월 16일 교황청에서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슬라브인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새 교황은 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 폴란드의 공업도시 크라쿠프의 대주교인 카롤 보이티와(Karol Josef Wojtyła) 추기경이었다.
폴란드가 독립한 이태 뒤인 1920년 5월 18일, 바도비체에서 태어난 카롤 보이티와는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퇴역 장교인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나, 크라쿠프의 야겔로니카 대학교에서 폴란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그는 솔베이 화학공장의 노무자로 간신히 일자리를 구하였다. 채석장에서 돌을 깨고 운반하며 발파작업을 하였고, 수질 정화부로서 힘겨운 노동을 했다. 나치 점령 기간 중 카롤은 지하대학에 등록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저녁에는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194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 시신 앞에서 열두 시간을 꿇어 있다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지하 신학교에서 비밀리에 사제 수업을 쌓으며, 유다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탈출을 돕는 등 저항 운동에 가담하여 게슈타포의 요시찰 명부에도 올라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카롤 보이티와는 1946년 사제가 되어 로마에 유학, 안젤리쿰 대학에서 윤리신학을 연구하였다. 그곳에서 가톨릭 노동청년회(J.O.C.)를 지도하는 마르셀 신부를 만나, 노동운동을 익히기도 하였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다시 소련군에 점령당한 폴란드에 공산정권이 세워졌다. 교회는 탄압을 받아 700여 명의 성직자가 체포된 상황이었지만 보이티와 신부는 귀국을 결심하였다. 귀국 후 야겔로니카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시골성당에 파견되었다가 크라쿠프로 불려와 대학생 지도를 맡았으며, 루블린 대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58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주교가 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여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으며, 1964년 크라쿠프의 대주교가 되었고, 1968년에는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서거 이후 일부에서는 교회 내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염려하면서 자칫하면 16세기의 종교분열과 같은 상황이 재연될 것을 걱정하였지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황의 직무를 수행할 역량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랜 세월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단호히 신앙을 지키며 자유와 정의, 인권의 존중을 외쳐온 확신으로 사람들의 감동과 공명의 박수를 받았으며, 다른 한편 교회 기강의 해이에 대한 걱정을 불식시켰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냉철한 결단력을 가진 분이다. 세속주의를 거슬러 근본 교리의 가치를 고수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풍조와 물질주의를 질타하는 강경한 어조는 언제나 자신에 차 있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부터 20년 동안 계속되어 온 교회법 개정 작업을 마무리하고, 방대한 법전 조항을 직접 면밀히 검토하여 1983년 1월 25일 공포(1983년 11월 27일 발효)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흔히 “순례하는 회칙”이라고 부른다. 교황에 선출된 다음날부터 그는 교황청의 울안에 머무르기를 마다하였다. 이탈리아를 벗어난 해외순방만 하더라도 1979년 1월 25일-2월 1일 멕시코와 바하마 제도 방문부터 2004년 10월 2-4일 크로아티아 방문까지 무려 84회에 이른다. 그중 21회(1984년 5월 2-12)와 44회(1989년 10월 6-10일) 해외 순방 여정에는 우리 대한민국이 들어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식을 거행함으로써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순교정신과 신앙을 전세계 그리스도인의 귀감으로 삼았다. 또 1989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방한하였을 때에는 우리 나라의 분단 상황을 가슴 아파하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기원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유럽의 개방과 민주화에 극적인 기여를 하였다. 1979년 6월 2-10일 그의 조국 폴란드를 방문하였을 때 폴란드 국민들은 기나긴 민족수난을 견디어온 신앙의 긍지를 되살리며 ‘심리적인 지진’으로 자유화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숱한 정치적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교황의 두 번째 조국 방문(1983년 6월 16-23일)은 그간 3년의 혼란 속에서 지쳐버린 국민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자유의 열망과 신앙의 긍지를 북돋아 주었다. 마침내 폴란드 공산 정권의 교체가 기폭제로 작용하여 동유럽에서 철의 장막이 걷혔다.
폴란드 1차 방문과 2차 방문 사이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5월 13일 베드로 광장에서 한 이슬람교도 청년의저격을 받았다. 그러나 교황은 병상 메시지에서 “나를 저격한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한다. 그리스도인은 증오와 폭력을 반대한다. 용서와 화해는 평화를 건설하는 진리의 첫걸음이다. 자녀들에게 평화와 화해를 가르치라.”고 당부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저격 사건 뒤 두 번의 대수술을 받았지만 강인한 정신력으로 건강을 회복하여 고령에 이른 지금도 힘찬 사목 순방을 거듭하고 있다. 2004년 10월 크로아티아를 방문한 것 외에도 2004년 1월 21-26일 쿠바를 방문하여 피델 카스트로 대통령을 만났고, 3월과 6월에는 각각 나이지리아와 오스트리아를 방문하여 시복식을 거행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8년부터 오늘날까지 15개의 주교대의원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가운데 6회(1980, 1983, 1987, 1990, 1994, 2001)의 정기총회와 1회의 임시총회(1985)와 8회의 특별총회(1980, 1991, 1994, 1995, 1997, 1998[2], 1999)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4개의 회칙, 15개의 교황 권고, 11개의 교황령과 45개의 교황 교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교황은 개인 저서로 "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 (1994년 10월),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이하여 은총과 신비(Gift and Mystery)를 1996년 11월에, 시집 "Roman Triptych - Meditations"(2003년 3월), "Rise, Let Us Be On Our Way" (2004년 5월)과 "Memory and Identity"(2005년 봄)를 발표하였다. |
첫댓글 하느님! 감사합니다!!! 훌륭하신 글 잘 보고 갑니다.2013년에 이루고자 하시는 일
다 이루실 겁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생활 속에서 기쁨 감사가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