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엔 광주 김대중 컨벤센터에 가서
입장객 만원사례에 입장을 못했으나 마음은 흐뭇했다. 고향이란것이 아적까지도 정들고 참말로 맘 편하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낯선 것이라고 해도 계속 접촉하고 오랫동안 같이 있으면 드디어 낯이 익고 그것을 우리는 정(情)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고향친구가 그리운것도 국민학교6년 중학교3년이란 세월이 거리낌이 없을만큼 가까워졌기에 정겹당께..
그래서 많은 친구중에 고향친구가 더 깊은맛이 있고 부담없이 조탕께...... 이번에 고향에 내려간참에 친구들에게 아련한 추억을 되살려보고자 잉~
꼬추 드러내고 놀던 아주 어린시절 우리 깨복쟁이 시절말이시.... 시방은 생가나지 않지만 우리 동내 여자들 알몸도 다 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구먼.
우리 어릴때만 해도 부모님들은 일년내내 일에 시달려 하루도 쉴 날 없이 세상을 살았는디..... 그랑께 그거시 여름밤이면 모기떼가 극성을 부려 연기로 모기를 쫓고, 더위를 쫓기 위해 마을앞 빨래터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목욕하며 지냈던 꿈같은 이야기 같다.
모내기 전에 탈곡기에 보리타작을 하고 늦게 들어와 밀가루로 저녁이면 칼국수, 수제비 만들어 먹을때 생각나는가? 학교 다녀와서 먹은 개떡은 얼마나 맛있었는가? 왜 개떡이라 했을꼬?
여름에 밥은 밥 넣는 바구니에 넣고 시원한 선반에 걸어 놓아
시원한 찬물에 말아서 된장에 고추,
오이 찍어 먹던 맛이 입에 쩍쩍 꿀꺽꿀꺽 잘도 넘어갔다.
그러나 기분나쁜건 어떻게든 바구니에 기어들어간 들어간 포리넘들... 또 된장 먹다보면 나오는 구더기 그걸 약된다며
젓가락으로 찝어서 태연하게 버린 부모님덜 우왝! 김치는 다라에 물 넣어 시지 안도록 보관해도 어찌나 시던지
아마 난 그래서 신 김치는 지금도 먹지 않는다. 겨울에 밥은 검은 솥에 물 부어 놓고 밥통 둥둥 뛰어 놨었지. 일명 지금 많이 사용하는 가마솥 보온 밥솥이다.
참 기억나지 않지만 00간장에 밥 비벼 먹으면 그도 일품이였지 않나. 학교 다녀오는 길에 야참은 지천에 널려있었으니... 야식으로는 밭에서 무시를 뽑아 무시는 먹고
무시잎은 다시 그 자리에 심어 두는 기본적인 양심도 있었고 유체, 고구마, 밤, 감, 포리똥, 진달래,
아카시아 칡캐어 먹으면 입이 물들어 얼룩져 있고
배고픔을 채우고 자연 속에서 영양보충을 했다. 그 중에 논둑에 삐비 생각나는가? 지금 롯데껌이니 덴트롤이니 하는것 보단 치야보호 미백 작용은 없어도
암튼 질기게 씹었지? 단물 나왔나? 쫌 나온것도........ 아니 모르겠다 단물하면 삭카린 학교에서 보리베기 동원 나가면
들통에다 삭카린 타서 주는 집이 있었지 않는가? 쫌 부자는 아이스깨끼 아님 뽀빠이..... 맛있는거 주지 않으면 보리베다 안꼬 넣는다는거 생각나나! 지금도 가끔 어린 시절의 향수에 젖어 있다 보면 그 때 생활은 어렵지만 자연의 혜택을 많이 누리고 살았다
사월쯤 모내기 못자리을 만들어 가꾸었다가 육월쯤 모내기를 하면 모나르는 모쟁이와 줄잡기도 하고 새참도 먹었다. 단연 말걸리 심부름이 최고다 막걸리 심부름 하면서 보릿대 모가지 빼가지고 두개 정도 연결해서 주전자 주둥이에 넣고 서서 가면서 쪽오옥~ 빨아먹은 다음 우물을 채우곤 했는데 이것이 바로 요즘 우리 아이들 사용하는 빨대인 즉
왜 그대 내가 특허를 생각하지 못했을꼬 원통하고 분하지만 그때 막걸리 훔처먹은 죄로 참아야지 모가 자라면 김매기를 몇번 해주는데 야외에서
점심밥을 가져오면 얼마나 맛있었나....... 특히 갈치 한토막에 호박 넣고 끌인 찌개 맛! 거기다 갈치 한토막 건지면 그날은 운수대통 성공한 것이다. 동네 앞에는 옆 사장나무가 있었는데
한여름 더울때 한나절 쉬어 낮잠을 즐기던 곳이다. 참말로 시원했는데...........
가을이면 쪼만한놈들은 소 뜯끼고 벼이삭이 필 때는 훠이 훠이
새 쫓던 일을 하지만 쫌 크면 독립해서 깔을베고 니어카 운전을 해야했었지. 니어카 한대운전은 1급보통 니어카 두대 붙여서 운전하면 대형면허다 니어카도 집집마도 있는것이 아니었지.... 참고로 내 주민등록증에는 1974년 니어카 대형면허 합격리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자연을 벗삼고 흙에 묻혀 생활하던 우리에게 변화가 있었다면, 문제는 그놈에 흑백 텔레비전 때문에.... 그때 "나시찬 전우" "타잔" 하면 소 몰래 묶어두고 전우보고 집에 들어가면
우라부지가 소 배 보고 알아부렀재. 소는 듬직한 일꾼 이였기에 가장 소중했던가 싶다. 가을 추수엔 일단 벼를 베어서 줄을 맞춰 볏단을 놓는다.. 일정 기간 마르면 지게로 옮겨와 녹둑에 쌓아 놓았다가
날씨가 화창할 때 홀테로 훓터 타작을 했다. 그 다음 엔 거시기 아롱 다롱으로 그담이 탈곡기로 변천했었던가? 암튼 마당에 앞 처마밑에 벼 임시 창고를 만들어 보관하고
봄에 개산 창고 앞에서 매상을 했었지 볕 집은 겨울이 되기 전 소먹이로 논끝에 쌓았다. 대나무로 엮은 뒤주에 감자 쌓아 놓고 저녁 소죽쓸때
당글개로 잿 더미파서 감재 몇게 넣어 구어
부지땅으로 꺼내 먹고 밤에는 생 감자로, 낮에는 쩌먹고 그놈 참 다양한 식량이었다... 또 볕 집은 일년에 한 번 지붕을 짚으로 엮어 씌우고 울타리도 해야 한다. 가을이 끝나면 쉬냐 그거시 아녀 겨울이 오기전에 겨울 땔감을 하러 도시락을 쌓아서 산에 나무하러 갔다. 아마 그때 삼림청 직원이 산 훼손된다고 단속하는 바람에 저녘 늦게 구루마,
아님 니어카로 끌고 왔지. 나무도 집안에 쌓아둘때 감추어둔 기억이 난다. 내가 국민학교 때까지 공일날 마을앞 청소를 했지않나 싶다. 지금 고등학교 봉사 활동하면 점수 주던것도 이제야 우리 따라하는 모양이다
옛 것이 좋은 것이어. 해가 길땐 냇가 잔디밭에서 팀을 나누어 주먹만한 공을 가지고
종일 공차고 비로푸대로 글러브 만들어 야구하고 했는데......... 지금에 와서 이 놈들이 잔디구장을 만들어 프로축구 프로야구를 하고
사용는것을 보니 우와 무지 열받는다............ 계절별 전천후 놀이로는 제기차기, 딱지치기, 나이먹기, 멱감기, 자치기,
비석 치기, 땅 따먹기, 씨름, 팔강 치기를 하며 시간가는 줄 모르게 놀았다. 한 겨울에는 논에 얼음이 얼면 썰매타기, 대나무 쪼개서 스케이트 타기도 했다. 아마 이것도 지금에 스키가 아닐까? 물에 빠지면 언덕에 불을 놓고 옷을 말리다 태우기도 했다.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께 꾸중도 듣고 몰래 부엌에 가서 옷을 말렸던 기억도 난다.
겨울밤이면 어머니는 가마니짜고 아버지는 명석, 소쿠리 만들기
새끼 꼬기 등 집안식구 옷과 농사준비를 하며 오직 일과 씨름하면서 한 평생을 보내셨다. 정원대보릅날 한 해의 건강을 기원하고 또 무엇때문인지 몰라도
농악 놀이와 술잔치가 벌어지고 집집마다 안주를 장만하고 돌아다니며 나누어 먹었다 보름날이면 불깡통을 만들어 초 저녘부터 겨울이면 모두 모여 작전을 짜고
마을과 마을사이에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싸우기도 했다.
청년들은 동네 안 까지 들어와 잡히면 얻어맞기도 하고 살벌했었다. 신나게 놀던 일들이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다
일년에 두 번 돌아오는 명절을 그렇게 기다려진다. 먹을 것도 마음껏 먹고 옷을 사준다. 새 옷을 입는 기분은 기분이 너무 좋았고 동네 앞 기계방에서 떡국뺄때 한잎 얻어먹기라도 한다면 크~지금도 난 뺀떡국을 제일 좋아한다. 능글능글한 뺀떡을 한손에 들고 한잎 먹으을라 치면 먹지 않아도 배가 포만해진다. 어린 시절이 고생했지만 그리움에 오늘 되새겨본다 이 모두가 아련한 기억이고 추억이다 이 글을 읽은 친구는 반드시...... 꼭 필히....한넘 & 한낭자도 빼지 말고 내가 못다한 추억거리나 잼있는 이야기를 꼬리말로 이어가자 잉~ 이세상에 꽁짜는 없을거시여~ 그라지라우 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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