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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주목한그리스도인(3) 자기를 부인한 용기의 사람 (요1:19-23)
오늘 본문 20-22절을 다시 한번 보실텐데요,
어떤 단어가 반복이 되고 있는 지 주의해서 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요1:20-22)
읽으신 본문에서 유난히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냐?”와 “아니라”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찾아와 세례요한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요한은 “나는 그가 아니라”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주목하게 되는 그리스도인, 그는 괄목상대해야하는 사람입니다. “쟤는 내가 너무 잘 알아! 그 사람? 내 손바닥 안이야, 그 사람 사는 거 빤해~” 이렇게 사람들에게 평가받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 괄목상대하게 되요? 자신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되어가고 후패하여가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날로 우리 주님을 닮기 위해 목숨을 걸고 변화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몽의 말을 소개해드렸지요? 사별삼일, 즉갱괄목상대, 선비도 사흘 만에 다시 만나면 눈을 비비고 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관운장이 패배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한 주 동안 많이 달라지셨습니까? 관운장을 이길 계책을 마련하셨습니까?
세례요한에 대해서 말씀드렸지요? 오늘 그를 찾아온 사람은 세례요한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같은 사독계열 제사장 가문의 집안 사람들, 그리고 성전에서 같이 일해온 레위인들과 그 가문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찾아와서 세상이 주목하고 있는 그의 변화에 대해서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내가 알던 너가 아니다.” 라며 세상이 찾아와서 그의 변화에 대해서 직접 증언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변화를 저와 여러분이 보여주실 수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이 주목한 그리스도인, 변질이 아닌 변화를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특징이 오늘 그를 주목할 만한 매력을 지닌 존재로, 어쩌면 오늘 이 특징이 오늘 그를 변질이 아닌 변화가 되도록 이끌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이 특징을 저와 여러분도 가질 수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자, 그 특징, 세상이 주목한, 변화를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내게 어울리지 않는 칭호와 감투, 그리고 별스런 수식어들이 붙여질 때, 내 것이 아닌 것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오늘 세례요한에게는 바로 그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호칭과 감투, 그 수식어들을 내게 붙이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아무도 붙여주지 않는데, 자기가 그것을 붙이기 위해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사하고 선물을 사주고 밥을 사주면서 그 호칭을 얻어내고자 합니다. 그것을 붙이기 위해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려고 가랑이 찢어지게 다니는 것입니다.
엊그제 여러분도 읽으셨지요? 독도의 유일한 주민 김성도씨가 별세하고 이장 자리가 비었답니다. 맨날 일본에서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저 아름다운 섬을 유인도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울릉군에서 하고 있는데, 그곳에 살아보지도 않은 이 육지의 사람들 가운데 용케 그 정보를 알고 그 공석이 된 이장 자리를 지원한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독도는 동도, 서도, 두 개의 섬, 그리고 그 주변의 89개의 부속도서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모든 건물의 신축이 허가가 나지 않는 곳이고, 단 한 곳 주민숙소에 현재 그의 부인 김신열씨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평생을 그곳에서 물질하면서 섬을 사랑해온 김신열씨라든지, 그 섬 하나하나를 하루가 멀다하고 방문하여 가꿔온 김성도씨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이장을 해야할텐데, 이건 뭐, 앞뒤 따져보지 않고 애국심 하나로 이장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부터, 그 자리를 통해서 내가 높임받고 존경받고 그로 말미암아 주어질 지원금과 특권들에만 눈이 멀어서 앞 다투어 그렇게 이장자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여러 사람들이 논평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로 독도이장”,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 타이틀이 가져다줄 새로운 세상을 누려보겠노라고 너도 나도 일단 지원부터 했다는 것이지요? 이 일로 골머리를 앓게 된 울릉군청이 이장 기준을 새롭게 선정한다고 했던 기사까지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가 더 생각났습니다. 제가 복무하던 고성의 통일전망대에는, 제가 복무하던 당시 봉헌된 통일전망대교회가 있습니다. 십자가 탑만 없으면 커다란 물탱크처럼 보여서 교회 안다니는 병사들은 물탱크교회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교회는 여러 사정들로 인해 세워지는 데도 오랜 기간이 걸렸고, 봉헌하기까지도 오래 걸렸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는 제 선임 군목 목사님이 매 주일 가셔서 예배를 드려오셨고, 제가 부임해서는 제가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좋은 후원자를 만나 완공 및 봉헌이 되었고, 군선교회에서 파송된 한 분 목사님께서 오셔서 담임이 되시고, 그분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상한 명함을 하나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 이름으로 전국 교회에 발송된 공문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냐면? 군선교회에서 임명하지 않은 한 사람이, 목사인지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명함을 만들었습니다. 통일전망대교회 담임목사 아무개, 그래 놓고는 전국 교회에 공문을 만들어서 보낸 것입니다. 자기가 통일전망대 교회 목사인데, 유지보수를 위해서 이런 저런 그런 지원이 필요하다. 여기 오지에서 복무하는 군인들이 일주일에 한 번 여기 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너무 환경도 열악하고 좋은 간식을 주고 싶고, 그들에게 필요한 성경 찬송 찬양집, 좋지는 않아도 테잎이나 씨디를 틀 수 있는 작은 카세트, 그리고 뭐 이것저것 잘도 적었습디다. 생필품부터 해서 핫팩과 커피 등, 있으면 좋겠다고 필요하다고 사주고 싶다고, 도와달라 마음을 전해달라 그러면서 계좌번호를 적어서 공문을 보낸 것이지요?
여러분, 이것을 개 교회가 일선의 군목이나, 군선교회에 확인을 해보기가 쉽지 않겠지요? 그리고 그냥 사진 몇 장 첨부하면 사실인 줄 알겠지요. 그래 그 사기꾼과 전화통화만 하고 계좌번호 불러주면, 그렇게 후원금이 입금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전국에서 보내오는 성도들이 기도하며 보내오는 군선교 후원금을 가로채려했던, 그런 사기꾼이 있었습니다. 재빠르게 보고가 되었고, 한국군선교회에서 교단장들에게 통보하고 공문을 보내고, 또 그 사람을 이내 잡아서 그 피해가 그리 크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보세요. 그렇게도, 저 민통선 안에 있는 교회를 팔아서 사기를 쳐먹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전혀 아닌데? “기다!” 라고 한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이 땅에 사는 죄된 사람들은 “나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적임자고 내가 해야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나’ 아니면 안된다고 ‘저 사람은 소용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속이고 사람들을 속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오늘 세례요한이, 세례요한 만큼은 “나는 아니다”를 외쳤던 것입니다. 내가 아니고 ‘저’다 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3:16-17)
보십시오. 아무도 안 알아주는데도, ‘나다!’ 라고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인정하고 알아주는데도, ‘나는 아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오늘 세상은 더욱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물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오실 그 선지자입니까?”
당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그가 선포하는 말씀들, 그가 베푸는 세례와 그 앞에서 새롭게 결단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혹시 메시야가 아닐까, 엘리야가 아닐까, 혹은 그 선지자가 아닐까? 오늘 그를 통해서 이 험악한 세상 속에서 살아갈 생명을,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자유할 수 있는 참 구원을 얻을 수 있지는 않을까?” 하며 그렇게 찾아왔던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렇게 인정을 하고, 그렇게 높여주고, 그렇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대단한 사람이 아닌 이상, 슬슬 사람에게는 착각이, 그리고 유혹이 찾아옵니다. 그리곤 넘어집니다.
“정말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아니 “그런 사람인척 조금만 더 노력을 해볼까?” 하고 말이지요. 아닌게 아니라 주변에 아첨꾼 한두 사람만 있으면, 당장에 그 사람은 교만해지고 우쭐해지기가 쉽습니다. “당신 정말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당신 정말 대단합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정말 우리의 지도자면 우린 모두 행복할텐데..” 이 이야기에 속아서 정치에 입문합니다. 국회위원에 대통령에 출마합니다. 목사님들도 이 이야기에 착각을 하고 감독선거에 나오는 것입니다. 아니지요, 아무도 하라고 이야기 안하는데, 제발 하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내가 적임자라고, 내가 해야겠다고, 다른 사람 하지 말라고 막으면서 돈쓰면서 주변사람들 죽여가면서 기어코 나오는 것입니다. 당선 되어보니, 뭐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오히려 실망만 시키고 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부터는 그 자리 얻으려고 그동안 들인 돈이나 회수하겠노라고 챙겨나갈 것만 생각합니다. 잿밥에만 관심이 쏠려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사람들의 칭찬과 추종에 속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그들의 평가에 흔들리게 내어두질 않습니다. 자신이 메시야도, 엘리야도, 그 선지자도 아니라는 것을 언제나 분명히 했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끊임없이 부던히도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악당이 됩니다. 그 이야기를 백설공주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백설공주의 계모(繼母)는 매일 거울 앞에 서서 묻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거울은 매일 아침, 저 계모가 나에게 돌이라도 던질까 무서웠지만, 죽으면 죽으리라, 깨어지면 깨어지리라, 내 진실을 말하고 산산히 부서지리라 각오하고는, 늘 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왕비님은 진짜 아름다우십니다. 그런데, 백설공주가 쪼금 더 이쁩니다.”
이 이야기에 계모는 항상 열폭(劣暴)한 것이지요. 자신의 미모가 세계 제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계모였다면 백설공주에게 매일 치킨을 사주고 피자를 사주고 콜라와 초콜렛을 사주었을텐데, 계모는 백설공주를 없애고 죽이려고만 했던 것입니다.
왜 죽이려고 했지요? 자신의 미모가 세계 제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 새 왕비에게 부족했던 한 가지가 바로 겸손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하나 모자랐던 탓에 남보다 가진 것도 많고 지식도 풍부하고 열심도 있고 연기력도 뛰어났던 계모는 악당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 계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나요? 백설공주는 왕자와 잘 살았는데, 아무리 떠올려봐도 생각이 안나 찾아 읽어보니 이렇습니다. 백설공주가 죽었으니 이제는 내가 제일 예쁘다며 거울도 안보던 왕비가 어느 날, 아침에 뜬금없이 묻는 것이지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충격적인 소식을 듣지요? 백설공주가 이웃나라 왕자와 잘 살고 있고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왕비는 당장에 백설공주를 직접 죽이겠노라 요술빗자루를 타고 칼을 들고 가다가 그만, 갑작스런 벼락에 맞아 죽습니다. 이 동화는 번개가 벼락이 되는 원리까지 가르쳐주는 참 좋은 동화였던 것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여러분도 기회가 되시면 다시 한번 동화를 많이 많이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동화만 잘 읽어도 우리는 참 좋은 사람들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세례요한은 저 새 왕비에 비해 가진 것도 없습니다. 배움도 짧습니다. 능력도 출중하지 못합니다. 좋은 옷을 입은 것도 아니고, 좋은 것을 먹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에게는 구름떼와 같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추앙을 받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하늘과 땅의 지식을 가진 이였지만, 오늘 그는 자기를 부인할 줄 아는 사람, 많은 사람들의 추앙 앞에서도 끝까지 자기를 낮추며 자기를 부정할 줄 아는 용기를 지닌 사람, 세상의 그 어떠한 아첨과 유혹 앞에서도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군대에서 비누 줍는 이야기의 여러 버전을 알고 계시지요? 다른 선정적인 버전들은 다 잊으십시오. 원본은 이것입니다.
어느 목욕탕에서 키가 작은 한 남자가 눈을 감고 비누를 집으려다가 옆 사람의 비누를 집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뭐 안경을 벗었는지, 눈에 물이 들어갔는지 더듬거리다 집은 것이 옆 사람의 비누였지요. 그러자 그 건장한 청년 비누주인이 버럭 화를 내면서 욕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왜 남의 비누를 쓰냐고 눈은 뒀다 뭐하냐고 말이지요. 이 비누가 어떤 비눈데 당신 몸뚱이에 비비냐고 그 키가 작은 남자는 얼굴에 묻은 비눗물도 채 지우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사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눈을 뜨질 못해서 남의 비누인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제 그만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그 건장한 청년은 화를 풀지 않았습니다.
“뭐, 용서?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건장한 청년이 먼저 나가서 씩씩 거리며 옷을 입었는데, 육군 중위 계급장, 밥풀 두 개가 양쪽 어깨에서 빛났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 키가 작은 남자도 나와서 옷을 입었는데, 아시지요? 그는 육군 대령이었던 것입니다. 대나무 잎 27장씩 이 양쪽 어깨에 딱 있었던 것이지요. 그 다음은 뭐 상상하시기 나름입니다. 차려, 열중셔,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책상 위에 수류탄! 막 시작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거기에서 이랬으면 어땠을까요? “여기 혼자 오셨습니까? 제가 힘이 좀 있는데 등을 좀 밀어드릴까요?” 했더라면, 나와서 옷을 입었을 때, 자네 어느 부대 소속인가? 포상휴가라고 가지 않았겠습니까? 그 대령이 장군이 되면, 자기 부관이나 참모로 쓰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 늘 겸손한 것,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일인지요? 아마 그 왕비가 겸손했더라면, 거울은 왕비를 가장 아름답다고 이야기 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자리와 감투가, 그리고 내가 받고 있는 모든 칭찬과 명성이 내가 잘해서, 내가 수고해서, 내가 노력해서 다 이룬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이들의 눈물이 있고, 기도가 있고, 헌신이 있고, 수고가 있는 것을 우리는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이렇게 서 있을 수가 없는 것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 여기에 진정한 감동이 있고, 여기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어느 순간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렇게 나를 높이고 나를 드러내버리려고 하는 순간, 내가 한 것이 아닌, 내가 이룬 지위가 아닌 것으로, 나를 증명하고 보여내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아무런 매력이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은 오늘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아무도 듣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입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만 더 드리고 마칩니다. 오해 없이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아야즈라고 하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홉 명의 노예들과 함께 왕 앞에 불려갔습니다. 왕은 이들 중 한 사람을 자신의 시종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왕은 노예들에게 잔을 하나씩 나눠 준 뒤에 바닥에 던지라고 명령을 했고, 노예들은 그 명령에 따라 모두 잔을 바닥에 집어 던졌습니다. 그러자 왕이 한 사람씩 돌아가며 물었습니다.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
그러자 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 노예들은 하나같이 대답하였습니다. “폐하께오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아야즈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왕은 이 아야즈를 자신의 시종으로 삼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아야즈는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아 왕의 보물창고를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신분이 급상승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그를 시기해서 헐뜯고 터무니없는 말로 중상모략했습니다. 그 중에는 아야즈가 매일 창고에 들어가서 왕의 보물을 티 안나게 훔쳐간다는 소문까지 있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왕궁에서 훔쳐온 보물을 담아두는 금고도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아야즈가 그럴 리가 없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증거를 보여라.”
날을 택하고 아야즈를 중상 모략하는 사람들은 왕과 함께 보물 창고가 보이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야즈가 왕의 보물 창고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 아야즈는 그 창고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도착한 아야즈는 자신의 금고부터 열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아야즈가 그 금고 안에 훔친 물건을 넣기를 기다렸습니다. 또 그 금고 안에서 무엇을 꺼내볼 지, 창고에서 훔친 물건이 무엇일 지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아야즈의 금고 안에는 아야즈가 노예시절에 입던 누더기 옷이 있었습니다. 아야즈는 그 옷에 입을 맞추고 그것을 입더니 거울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아야즈, 옛날의 네 모습을 잊지 마라. 보물 창고를 지키는 자리에 너를 앉힌 것도 왕이시고, 오늘의 너를 만든 것도 왕이시다. 네가 특별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아야즈는 누더기 옷을 다시 벗어 금고에 넣고는 다시 집을 나왔습니다. 그걸 본 왕은 아야즈에게로 달려가 그를 꼭 끌어안고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대는 지금 나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었네, 진정한 왕이신 그분 앞에 서면, 우리 모두는 그분의 종이 아니던가! 우리는 모두 그대에게 배워야하네, 사람들은 그대가 나의 보물을 훔쳐갔다고 말하지만, 오늘 나는 깨달았네, 그대가 훔친 것은 보물이 아닐세, 나의 마음일세.”
왕의 기대에, 왕의 신뢰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인 아야즈, 여러분,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에, 하나님의 신뢰에 저와 여러분은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계십니까? 그 모습은 늘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잊지 않는 모습입니다. 지금 내 모습을 이루신 분이, 그것을 주실 수도 있고 취하실 수도 있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옷을 입혀주셨든, 그것을 하나님께서 입혀주셨음을 알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당신 때문입니다.” 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탓하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죄송합니다.”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담이 하와가 하나님 앞에 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라고 했어야 합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나를 보호하기 위해, “뱀 때문입니다. 하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여자 때문입니다.” 라고 답을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대답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대답도, 듣고 싶으셨던 대답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대답,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서 듣고 싶으신 대답도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나를 부인하고 나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 것만 같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아주 덤탱이를 쓰고, 무가치하게 버려질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나를 부인할 때, 내 존재를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나를 부인할 때,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십니다. 40살, 힘있고 건강했고 똑똑했던 모세를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80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 이야기하는, 끝까지 자기를 부인하던 모세를 하나님은, 모세, 엘리야, 예수님, 변화산의 세 인물로 높이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을, 그분의 기대를, 그분의 신뢰를 기억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의 모함이 거짓임이 드러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리고 끝까지 우리를 향한 기대와 믿어주신 그 신뢰에 부합한 우리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은혜를 입고 사는 지, 오늘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가를 늘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인하고 그분을 높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분들이 되십시오.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훔치는 사람, “내 종 욥을 보았느냐?” 여러분, 이 선언을 들으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니라.” 여러분 이 선언을 들으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도바울은 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 위대한 노 사도가 고백한 고백을 읽어드리고 말씀 마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늘 나를 부인하실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실 수 있는,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훔치시는, 그렇게 늘 그분이 높여주시는 존귀함을 입으시는, 우리 하일교회 복된 성도들이 다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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