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을 앞둔 감사이야기에서 제가 6번의 죽을 고비를 하나님이 살려주신 은혜의 이야기를 했고, 그후 “간증후기”에서는 5회의 몸 수술에서도 그때마다 좋은 것으로 주시어 오늘에 이르게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제 저는 한평생 학교문도 못밟고 서당에서 글 읽고 나무하면서 생을 마감할 뻔한 저를 최고학부 최고 과정까지 맞치시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간증합니다.
저는 11살까지 서당에서 글 읽었데 이는 제가 태중 별세하신 근동에서 이름난 한학자셨던 할아버지의 유언(손자를 유명한 한학자로 키우라는…)때문이였습니다.
친구들은 학교 가는데 나만 글읽고 나무 하다어느날 문뜩 이러다간 평생을 이렇게 마감하겠다는 생각에서 6km즘 떨어진 초등학교를 맨발로 찾아갔습니다. 나도 학교에 다니고 싶어 왔다 했습니다. 선생님이 너는 나이도 많고 지금은 입학기가 아니니 안된다 했습니다. 며칠 후 다시 갈때는 친구의 책을 빌려가서 그 선생님께 책을 펴놓고 이를 다 읽을수 있고 구구단도 외운다 했습니다. 신기했던지 저를 그 선생님이 교장실로 데려가 교장선생님이 묻는 것을 다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교장선생님이 저를 2학년으로 넣으라 하셨습니다.
1학기가 끝나고 방학 하던날 담임선생님이 저를 교장실로 데려가더니 교장선생임이 너는 공부도 잘 하고 나이도 많으니 2학기부터는 3학년에 가라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국 11세에 3학년으로 처음 학교문을 밟은 것입니다.
저의 간증에서 집에서 반대하는 대전중학을 가출하여 갔다 했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6.25전란중에도 근동의 유지셨던 아버님이 금강물 홍수범람으로 청야군 제일의 곡창지 넓은 평야가 일시에 침수되어농산물이 폐허가 되는 것을 방지하는 제방공사를 정부에 수 없이 진정하니 어느날 그 타당성조사 차 출장온 도청직원이 저의 집에서 약 1주간 유숙했습니다. 저는 대전중학 가고싶은 생각에서 그 분들을 극진히 모셨습니다(방에 군불도 때드리고 이불도 펴드리고 세수물도 따뜻히 해드리고 ….). 저를 신통히 여긴 그분들은 제가 대전중학 가고싶다는 말에 도청으로 찾아오라며 명함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전중학시험에 응시할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교회가 있는 대전으로 저를 인도하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집 떠나 너무나 외로워서 우는 저를 눈물 닦아주시며 영접케 하신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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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윤 총장이 평소 주위 지인들에게 풍기는 이미지는 매사에 순종하고 그 상황마다에 인정하고 수긍하는 패턴의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서당으로부터의 탈출기, 대전중학교를 가기 위한 약빠른 처세술에 대한 내용을 보니 윤 총장의 속깊은 곳에 그런 야심 덩어리가 어렸을 때부터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게되었구려. 그러한 야심이 있었기에 오늘의 윤 총장의 위상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파란만장한 삶과 신앙 생활에서 느낀 좋은 글 많이 올려주기 바랍니다.참! 11살에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니 팔순은 지난 것 같은데 도대체 공덕 도사들은 땡벌을 비롯하여 확실한 나이를 알 수 없어 헷갈리는구려.
팔순이 된 것을 신고도 않하고 확실한 나이도 숨기고 어물쩍 넘긴 죄는 엄히 다스릴 것을 백수 회원들은 다짐할 것이니 미리미리 나이속인 적폐 청산을 하기 바랍니다.
정말 지금 생각하면 11세에 맨발로 달려가 학교문을 두드린 것이 어찌 내가 한것이겠습니까. 6.25 전쟁 중임에도 교회가 있는 대전으로 나를 인도하셔서 믿음 주신 이가 그렇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