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한 암봉들 수두룩 도열한 산정
주홍 여명 맞고 싶어 어둠 헤쳐
미리 와있었다.
검정 도화지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한 폭 캔버스로 변한다.
거기엔 허다한 삶, 숱한 사연들이
물감 되고 붓질 되어
현란한 추상화를 그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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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대에서 본 자운봉. 화강암이 빚은 대형 예술품에 드리우는 일출이 자운봉이 뛰어난 걸작임을 각인시킨다.
북한산 국립공원은 우이령을 경계로 북한산과 도봉산으로 나뉘는데 서울과 경기도 도심에 둘러싸인 그야말로 도시 속의 섬이다. 그러하기에 반대로 그 도시의 녹색심장으로서 에너지 충전소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해낸다. 이 두 산은 지리적 요인 외에도 그 빼어난 풍광으로 말미암아 사시사철 탐방객이 끊이지 않는다. 북한산과 도봉산에 가까이 접해 그 자연혜택을 톡톡히 누릴 수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도봉산, 올 때마다 느끼지만 어쩌면 한 인물과 함께 일면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산이라 여겨진다. 어둠 속 들머리의 엄홍길 전시관, 엄홍길 그가 누구인가. 어린 시절, 도봉산을 앞마당처럼 누비더니 히말라야 14좌 등정에 머물지 않고 2007년 로체샤르를 오르며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를 완등한다. 그런 사람을 키워낸 산, 그런 사람의 기념관이 있는 곳. 그런 게 아니더라도 도봉산은 출중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 산이야말로 그 높이에 관계없이 기념비적 산이라는 생각이다.
늦가을 훌훌 치장 걷어낸 도봉산에서 골격 두드러진 암봉들의 웅지를 감상하는데 더해 일출의 여명을 맞는다는 건 그 축복의 하나이다. 더뎌지기 시작한 새벽녘이지만 도봉산은 멀리 북한산을 깨우더니 그 산세를 돋보이게 하려 황금 가운을 입힌다.
도봉산 선인봉에서 쏘아올린 폭죽이 북한산 백운대에서 터지는듯 하다.
조선시대 실학자 유득공은 도봉산과 북한산을 보더니 각각 붓통과 갓에 비유하였다.
"도봉산은 그 빼곡한 모습이 붓통에 꽂은 붓처럼 생겼다. 키 큰 사내가 마당놀이를 구경하는데 그의 턱 아래로 많은 이들의 갓이 모여선 모습을 한 게 북한산이다."
다시 둘러보니 늘어선 봉우리들마다 기복이 있고 굴곡이 있음으로 해서 가지런한 붓자루들보다 더 붓통답다. 불현듯 그 붓통에 담긴 실붓자루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슬그머니 붓통에 발을 들여놓는다. 산에 들어갔는데 그 장쾌한 산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랬다. 도봉산은 내가 끌어안은 붓이었다.
새벽을 맞이하는 자운봉과 신선대의 뒤태가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답다.
낙엽
도봉산 비스듬히 다락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길
서로를 보듬어 품은 채로 나란히 누운 낙엽들
뭇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푸르고 붉던 시절이야
한 점 아쉬움 없이 작별하고
초겨울 고운 연분홍 햇살 아래
저렇게 고요히 대지의 품에 안긴
너희들은 영락없는 성자聖者들이다.
-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많은 갓들을 턱 아래 거느린 키 큰 사내의 모습에 견주었지만 북한산은 산 아래 혹은 산정, 그 어디에서 보아도 담대하고 선 굵은 의연함을 갖추었다. 지리산만큼 기골장대한 거인은 아니지만, 설악산처럼 섹시한 미인은 아니지만 북한산은 가장 가까운 벗의 진솔한 우정을 느끼게 하고 가장 사랑하는 연인의 고운 사랑을 실감하게 한다. 정릉에서 올라 대성문을 통하거나, 시구문 지나 원효봉을 오르거나, 화계사에서 칼바위능선까지 땀 쏟아내며 오르거나 북한산은 다가서기만 해도 가슴 울렁이게 한다. 또 어느 길로 내려오더라도 자꾸만 고개 돌려 무언가 미진함을 남긴 것처럼 만든다. 이렇듯 북한산은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다.
개인적 견해일까. 북한산과 접한 강북의 우이동, 정릉, 삼양동 등지에 사는 사람들은 강남 어느 부촌의 거주자들보다 축복된 일상을 영유한다고 생각한다. 또 개인적 견해에 그칠런지 모르지만 북한산 접한 곳이 전혀 그렇지 않은 강남 3구에 비해 현저하게 처진 집값, 땅값은 머잖아 대등해지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인간이 급조한 문화는 자연에 의해 형성된 천혜의 환경에 그 가치를 내어주게끔 되어 있으니까. 그걸 철칙처럼 믿으니까.
북한산에 대한 애정이 지나쳤나보다. 강남에서 강북으로의 투기 전환을 부추기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조선 태조, 영조, 정조 등 군왕들이 북한산의 수려함에 매료되어 시를 지었고, 수많은 묵객, 시인들이 북한산을 찾아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긴 바 있다. 그때도 가을이었나 보다. 최고봉 백운대에 오른 다산茶山은 지난 세월의 아쉬움을 자연의 유유함으로 달래는듯 한 수 멋진 시를 지었다.
백운대에 올라 登 白雲臺
誰斲觚稜考 수착고능고 누군가 모난 돌 다듬어
超然有此臺 초연유차대 높이도 이 백운대 세웠네.
白雲橫海斷 백운횡해단 흰 구름은 바다 위에 깔렸는데
秋色滿天來 추색만천래 가을빛이 하늘에 가득하다.
六合團無缺 육합단무결 천지 동서남북은 부족함이 없으나
千年渀不回 천년분불회 천년 세월은 가고 오지 않누나.
臨風忽舒啸 임풍홀서소 바람 맞으며 돌연 휘파람 불어보니 覜仰一悠哉조앙일유제 천상 천하가 유유하구나.
- 다산 정약용 -
사모바위 지나 향로봉 이르도록 아직 해 저물지 않았건만
희뿌연 그믐달 놓칠세라 에메랄드 황혼빛 뒤쫓고
이른 초저녁별 물 양으로 산새 한 마리 높이 치솟더니
막 지나온 비봉능선 서둘러 어둠 뿌려 승가봉마저 지워버린다.
석양녘 해거름 음울하게 깔리거든
나 내려온 저 봉우리 그윽하게 바라보다
느긋한 술잔 주거니권커니 얼큰하게 기울이며
그리 빈한하지 않은 척 괜한 허세 부리지만
허기진 상처 살로 굳어질까 노을은 가슴으로 번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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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 2011년 늦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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