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이 일본 유학 당시 조선의 정세는 격랑의 소용돌이에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내외 정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먼저 국내적으로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권력 교체기의 혼란을 살펴봅니다.
1864년 고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라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실시되었는데, 실제는 부친 흥선대원군이 전권을 행사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600개가 넘는 서원들을 철폐하여 47개의 서원만 남겨두었으며, 양반에게도 군포(軍布)를 징수케 하는 등 구습을 타파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는 곧 왕실의 권위를 위한 것이었으며 경복궁 중건(重建)의 역사(役事)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왕실을 위한 무리한 토목공사에 백성들의 원성은 높았습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에서 보인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도 결국은 왕실의 권위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대원군의 권력의지는 1866년 대왕대비가 철렴(撤簾: 수렴청정을 끝냄)을 선언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1870년 고종이 만20세가 되면서 조금씩 친정(親政)을 시도하였습니다. 마침 최익현이 대원군의 실정(失政)에 대한 맹렬한 상소를 시작하여 정국에 파란이 일었습니다. 고종과 왕후 민씨는 이를 계기로 친정을 공식화합니다. 고종 10년 1873년 고종은 대원군의 신료들을 교체하였습니다. 이제 권력은 왕후 민씨 일가가 채웠습니다. 양 오라버니 민승호와 사촌 동생 민규호를 필두로 요직은 척족이 차지하였습니다. 대원군과 사이가 나쁜 친형 이최응을 좌의정 그리고 이어서 영의정에 입각시켰습니다. 안동 김씨와도 새롭게 제휴하였고, 대왕대비(조대비)의 조카이자 대원군 반대파였던 조영하도 중용하였습니다.
고종은 개화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왕후 중심의 민씨 세도정치가 부활하고 국고낭비와 부정부패가 횡행하였습니다. 민심은 이반하고, 위정척사 운동이 전개되고, 대원군을 다시 찾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특히 영남 유생들은 대원군의 봉환을 열렬하게 주청하였습니다. 서원 철폐 등 양반들의 기득권을 타격하였던 대원군에 영남 유생들이 지지를 보낸 것이 이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영남은 남인 세력의 근거지였고, 대원군은 노론의 세도정치를 청산하면서 영남 남인들을 중용하였던 것입니다(김종학, 흥선대원군 평전, 선인, 2021, 148쪽). 또한 위정척사라는 유생들의 명분 또한 대원군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정국의 갈등은 대원군과 왕후 민씨와의 원한 관계에 의해 증폭되었습니다. 왕후는 1866년 왕비로 간택되었는데, 고종은 왕비를 맞이하기 전에 이미 궁녀 영보당 이씨와 관계를 맺어 1868년 이선(李墡)을 출산하였습니다. 섭정을 하던 대원군은 왕자의 출생을 기뻐하고 총애하였다고 합니다. 소외감을 느끼던 왕후 민씨도 1871년 왕자를 출산했지만, 항문이 막혀 변을 보지 못하고 5일만에 사망합니다. 당시 대원군은 치료약으로 산삼을 쓰게 하였는데, 왕후 민씨는 그것이 오히려 사망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1873년에는 공주를 출산하였는데, 공주 역시 돐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왕후의 초조감은 더해갔고, 대원군은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할 기미를 보였습니다(김종학, 대원군 평전, 124쪽). 마침내 1874년 왕후는 또 다른 왕자 척(坧; 후에 순종)을 출산하였습니다. 왕자 척은 1년 후 바로 세자로 책봉됩니다. 그리고 영보당 이씨와 그 아들 선은 궁밖으로 나가 살게 되었고, 1876년 아들 선은 완화군(完和君)으로 봉해졌으나, 1880년 12세에 열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왕후 민씨의 핍박의 결과였다는 풍문이 돌았습니다.
왕후 민씨의 존재 근거는 바로 세자 척이었으나, 세자는 어려부터 천연두를 앓는 등 병치레가 많았습니다. 왕후는 아들의 건강을 위해 온갖 치성을 다 바쳤고, 그로 인해 국고가 바닥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아래 재야 문인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의 기술입니다.
“원자(元子)가 탄생한 이후 궁중의 기양(祈禳: 제사)는 절도가 없어 그 행사가 팔도의 명산까지 미치고, 고종도 마음대로 연회를 즐겨 상(賞)을 줄 경비가 모자랐다. 왕과 왕비가 하루에 천금을 소모하여 내수사에 있는 물량으로는 지탱할 수 없으므로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 대동세의 출납을 관장하던 기구로서 조선 후기 최대 재정기구였음)의 공금을 공공연히 가져다 썼으나 재정을 관장하는 사람이 감히 거절을 할 수 없어, 1년도 안되어 대원군이 10년 동안 저축해 둔 미곡이 다 동이 났다. 이로부터 매관매직의 폐단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김종학, 앞의 책, 124쪽에서 재인용).
대원군은 정권에 등을 돌린 민심을 등에 없고 왕후와 민씨 정권에 대한 복수에 나섭니다. 먼저 1874년 1월 경복궁에 큰 불이 납니다. 대원군 측의 소행으로 간주되었습니다. 1874년 11월에는 민비의 양 오라버니이자 집안 척족의 실세인 민승호가 선물 상자를 열어보다가 폭사하는 사건도 발생합니다. 민승호, 민승호의 아들, 민승호의 모친이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습니다(앞서 보았듯이 이렇게 민비 집안의 대가 끊기면서 민영익을 양자로 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조직적인 반란이 일어납니다. 먼저 1881년 ‘이재선 역모 사건’이 발생합니다. 위정척사 운동이 거세게 휘몰아치면서 일부 세력이 고종의 이복형인 이재선을 추대하고 고종을 폐위하여 대원군을 복권시키는 모반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들은 경기도 과거 시험장에서 ‘대원군 대감이 위정척사를 위해 분기하셨다’고 외치면서 유생들을 격발시키고, 일본인을 살해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구상을 하였습니다(김종학, 앞의 책, 174쪽).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어설프고 무모하였습니다. 대원군도 회의적이어서 거사를 철회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반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정부에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고종과 민씨 정권은 대원군 세력을 박멸하고자 하였고, 결국 13명을 처형하고 3명을 유배하였으며, 이재선도 유배 중에 사약을 받았습니다.
이어서 마침내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였습니다. 군제개편에서 소외된 군인들이 정권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분노하여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결국 고종과 민씨 정권은 전복되고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차지합니다.
임오군란의 과정을 약술해 봅니다. 1882년 6월 이전 훈련도감의 군인들은 14개월 밀린 녹봉에서 겨우 1개월 치를 받았는데 쌀겨와 모래 등이 섞여 있었습니다. 분개한 군인들은 창고에 몰려가 창고지기를 구타하였는데, 녹봉미의 책임자 선혜청의 민겸호는 도리어 주동자4인을 체포하여 고문을 하고 2인을 사형토록 하였습니다. 소문이 퍼지고 통문이 돌면서 군졸들이 많이 거주하던 왕십리 민심이 들끓었습니다. 성난 군인들은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갔습니다. 민겸호를 찾지 못한 난군들은 집의 가재도구를 부서뜨리고, 무장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대원군이 있는 운현궁을 찾아갔습니다. 이후 난군들의 행동은 모반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제1대는 포도청, 의금부, 민씨 세도가 등을 습격하고, 갇혀 있던 4명을 구해냈습니다. 아울러 의금부에서 처벌을 기다리던 위정척사 인사들을 석방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제2대는 별기군 훈련소 하도감에 쳐들어가 별기군 교관 일본인 호리모토 레이조(掘本禮造)를 살해했습니다. 제3대는 또 한 명의 선혜청 당상이면서 부정축재의 대명사였던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을 처단하기 위하여 경기감영을 쳐들어가고, 이어서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습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공사관 직원들은 서울에서 철수하였고, 일본인 여러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제4대는 왕후 민씨가 치성을 드리는 서울 근요 절과 무당집을 부수고 대원군의 형이지만, 대원군의 반대편에서 영의정을 하였던 이최응을 살해하고 마침내 궁궐로 돌입하였습니다. 이들은 궁궐에 피신해 있던 민겸호와 김보현을 찾아 살해하고 왕후 민씨를 해치려 하였습니다. 고종은 서울의 대부분의 군졸들과 민중들이 합세한 반란을 무마할 수도 진압할 수도 없었습니다. 난군들은 학정의 원흉으로 왕후를 지목하고 왕후를 찾아 헤매 대궐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후는 요행히 궁을 탈출하여 충북 충주에 은신하였습니다.
결국 고종은 대원군에게 전권을 이양한다는 조칙을 내렸습니다. 이후 청나라가 개입하기 전까지 한 달 동안은 다시 대원군이 통치하였습니다. 대원군은 고종이 실시한 개화 조치들을 모두 없앴습니다. 별기군을 없애고, 이전이 군제를 회복하였으며, 통리기무아문도 폐지하였습니다. 그리고 행방불명된 왕후 민씨의 사망을 기정사실화하고 국장(國葬)을 선포하였습니다(이상 임오군란에 대한 설명은 우리역사넷, 임오군란,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3200&code=kc_age_40을 주로 참조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