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감상문
문과대학 사회학과 2020130557 홍단비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본래 <십계>라는 이름의 텔레비전용 10부작 영화 중 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를 재편집한 작품으로, 현대적 시각에서 십계명을 해석하고자 하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는 ‘시선’으로, 영화는 시점의 전환을 통해 극을 이끌어간다. 남자가 여자를 ‘훔쳐보고’ 이후 남자는 여자와 ‘마주보고’싶어 그녀에게 직접 다가간다(최은희, 1995). 하지만 두 인물이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는 상이했고, 이에 남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뒤 입원하게 된다. 그렇게 사라진 그를 이제는 반대로 그녀가 시선의 주체가 되어 그를, 그리고 그의 시점으로 자신의 아파트를 ‘들여다본다’. 그렇게 그의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그녀의 시점으로 영화는 마무리 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진정한 사랑에 대한 사유를 시선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표현했다는 점이다. 본 영화를 감상한 이라면 누구든 떠오를 듯한 하나의 질문이 있다. ‘과연 코멕의 시선을 사랑이라 할 수 있는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지만, 영화 내내 그의 시선을 좇고 나면 그것이 관음보다는 사랑이라 느껴진다. 그렇다면 범죄로 여겨질 수 있는 행위임에도 사랑이라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그 시선의 동기를 고민해볼 때 비로소 나타난다. 그는 그녀를 에로틱한 시선만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 그가 그녀를 ‘훔쳐보는 것’을 시작한 시점에는 그의 욕망이 투영된 시선이었지만, 영화 후반부에 나타나듯 이후에 그는 자신의 욕망을 바탕으로 그녀를 소유하려 하기보다는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고, 존중하며 그녀의 존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그녀를 알아가고 싶어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보였다. 그는 그녀를 성적으로, 혹은 관계적으로 소유하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를 ‘사랑’한다. 그는 자신이 사랑을 ‘받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그녀를 위한 사랑을 ‘주는’ 것에 몰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를 해석해본다면, 에리히 프롬이 자신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설명한 ‘적극적 사랑’의 개념을 적용해볼 수 있다. 적극적 사랑이란 ‘관심’, ‘책임’, ‘지식(이해)’, ‘존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개념을 토멕에게 적용해본다면, 처음, 그는 그녀의 삶에 ‘관심’을 갖는다. 그녀가 가는 우체국, 그녀가 마시는 우유, 그녀가 그리는 그림에 관심을 갖는다. 그는 그녀가 경험하는 고통에 깊게 공감하며 이에 ‘책임’을 느끼고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그녀를 더 깊게 ‘이해’한다. 결국 그는 그녀를 ‘존중’하였기에 그녀를 통제하려 하지 않으며 그녀가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 아니라 칭함에도 그녀의 삶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그녀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을 내뱉는다. 이처럼 처음엔 비록 단순한 호기심과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토멕의 감정은 뒤틀린 행위를 통해 표출되었으나,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은 요소들을 점차 갖춰 나가며 적극적 사랑으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분명 토멕의 행위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위임에도, 그것을 사랑이라는 형태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수없이 많은 예술 작품이 사랑을 논하고, 우리는 거기에 깊이 공감하지만 정작 ‘사랑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우리는 사랑을 느끼지만,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디부터 사랑이고, 어디까지 사랑인 것일까? 감독은 문제적으로 보이는 행위를 통해 역설적으로 순수한 사랑을 그려내며 우리가 상정하는 사랑의 경계를 유유히 넘나든다. 그 모호한 지점을 계속해서 자극하고, 그 혼란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다시금 사유해볼 수 있도록 해주는 매우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참고문헌>
최은희. (1995). 영화 -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제7계명에 대한 현대적 해석. 새가정,, 134-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