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릉
(高陵)
고려(高麗) 제34대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 1389 ~ 1392)과 왕비 순비(順妃)의 능이다. 공양왕은 재위 4년만에 고려가 망하면서 폐위되어 원주(原州)에 추방되어 공양군(恭讓君)으로 봉(封)하여졌고 삼척(三陟)에 옮겨져 그곳에서 태조(太祖)3년 춘추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태종 16년 공양왕 으로 추봉(追封)되어 봉릉(封陵)이라 하였다. 능은 왕과 왕비의 쌍능형식으로 되었고 능앞의 석무로는 비석 1좌씩과 석상(石床)이 놓였고 장명등(長明燈)이 1좌 양쪽에 석인이 2쌍 석호(石虎) 1필이 있다. 비석은 봉릉 당초의 것으로보이며 왕릉 중간에 조선 고종(朝鮮高宗)때 세운 것으로 보이는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는 비가 서있다.
공양왕 (恭讓王)
이름은 요(瑤). 신종(神宗)의 7대손. 아버지는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이고, 어머니는 국대비왕씨(國大妃王氏)이다. 비는 창성군(昌成君) 진()의 딸 순비노씨(順妃盧氏)이다. 1389년 이성계(李成桂)·심덕부(沈德符) 등에 의해 창왕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이성계 일파의 압력으로 우왕과 창왕을 죽였다. 사회 전반에 걸친 제도 개편을 단행했으나, 이는 신진사대부들이 자기들의 세력기반 확립을 위한 개혁이었다. 1391년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한 뒤,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은 관제를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 등의 6조로 개편하고, 첨설직을 폐지했다.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유학 교수관을 두었으며, 과거시험에 무과를 신설했다. 배불숭유론에 의해 주자가례를 시행하고, 오교양종(五敎兩宗)을 없애 군사에 보충하고, 절의 재산을 몰수하여 각 관사에 분속시켰다. 경제면에서는 1391년 광흥창(廣興倉)·풍저창(豊儲倉)을 서강(西江)에 세워 조운의 곡식을 비축하게 했으며, 개성 오부에는 의창(義倉)을 설치했다. 신흥세력의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했으며, 인물추고도감(人物推考都! 監)을 두어 노비결송법을 정했다. 남은(南誾)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1392년에 폐위되었다. 1392년 공양군으로 강등되었고, 1394년 삼척부(三陟府)에서 살해되었다. 능은 고릉(高陵)이다.
왕비순비(順妃)
순비 노씨(順妃盧氏, ? ~394년) 창성군 노진의 딸로 공양왕의 왕비이다. 소생은 세자 왕석과 숙녕, 정신, 경화궁주가 있다. 그녀는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고 공양왕과 함께 사약을 받았다고도 하고, 물에 투신자살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삽살개
공양왕과 왕비가 귀여워하던 삽살개만이 골짜기의 작은연못속을향해 계속 짖고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연못을 자세히보니 사람의 형상이 보였고 연못의 물을 모두퍼내자 그 안에 왕과 왕비가 편안한자세로 죽어 있었다. 이를본사람들이 두분의 시신을 정성들여 모셔 연못뒤 양지바른곳에 장례를 치루고 능을 지키기 위해 능아에 삽살개 모양의 석물을 세워 지키게 하였다.
전설이담긴연못
어느날 공양왕과 왕비가 보이지않아 스님들과 왕씨 일행이 온산을 뒤지며 왕을 찿았으나 모두허사였다. 다만 공양왕과 왕비가 귀여워하던 삽살개만이 골짜기의 작은연못속을향해 계속 짖고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연못을 자세히보니 사람의 형상이 보였고 연못의 물을 모두퍼내자 그 안에 왕과 왕비가 편안한자세로 죽어 있었다. 이를본사람들이 두분의 시신을 정성들여 모셔 연못뒤 양지바른곳에 장례를 치루고 능을 지키기 위해 능아에 삽살개 모양의 석물을 세워 지키게 하였다. 이러한 전설로 인해 인근에 식사동 뿐만아니라 어침이,대궐고개,왕릉골등 여러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고려사나 왕조실록과 같은 정서에는 공양왕이 강원도 삼처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고양사람들의 공양왕에 대한 애절함이 이와같은 전설을 만든것으로 보인다. 이에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을 길이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고양시에서 공양왕릉 정비사업을 하면서 연못을 좀더깊고 넓게 보수하였다.
식사동 (食寺洞)
고려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조선태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도성인 개성에서 도망쳐 이곳 견달산 아래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두어졌다. 두려움과 배고품으로 지쳐있는 왕의 일행에게 건너편 골짜기에서 한가닥 불빛이 보여 찿아가 보니마침 작은절이 있어 하룻밤을 묵고자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미 불교의나라 고려는 멸망되고 새로운 유교의 나라 조선이 창건되었으니 절에서 머물기는 어렵게 되었고 인근의 대궐고개 다락골 누각에 피신하게 되었다. 이후 남몰레 스님들이 밥을날라 왕에게 드렸는데 이러한 이유로 이 마을 이름이 밥 절 즉 식사동(食寺洞)이라 불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