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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이 보고싶다.]
내나이 31세가 되던해는 1979년이다. 그 당시 내 몸무게는 43kg. 키는 165cm인데 아픈데 없고 컨디션은 가벼웠다.바람이 불면 전진이 어려웠다.그래도 그당시 잘나갔던 수출업체 생산 과장으로있었다.
1979년 1월1일 일본에 거주하시는 삼촌께서 고향 방문을 하였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일면식이 없었던 삼촌께서 본국인 한국을 오시면서 서울에 살고있는 우리들을 찾은 것이다.
그당시 형님께서는 원효로 용산 경찰서 옆에서 살고 있었고 나는 누님과 함께 봉천 1동 천주교 앞에 살고 있었다.
삼촌은 나를 보더니 너 어디 아프냐고 했다.
아픈데가 없다고하니 믿지를 안았다.
삼촌은 고향에 내려가 고향선산을 정리하고 각자 묘지앞에 설치할 상석을 주문 해놓고 다음해에 와서 놓기로 했다.
이 일정을 형님과 같이했다.
삼촌은 일본으로 돌아가시면서 일본에 도착하자 마자 초청장을 보낼테니 바로 들어 오라고 했다.
아픈데 없이 그렇게 마를 수가 없다는것이다.
회사옆 병원에는 고향후배 아가씨가 간호사로 있어 자주 들려 진찰을 받았는데도 항상 이상무였다고 말씀을 해드렸는데도 믿지를 않아다.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초청장을 보내 왔다.
그당시는 군대와 예비군 휸련를 마치지 않고 외국으로 나가기는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나는 뇌성마비 장애자로서 군 미필을 받은 터라 그부분은 문제가 없으서 반공훈련만 받고 바로 여권과 비자를 받았다.
출국 날짜는 그 해 3.2 일,
삼촌한테 연락을 하고 회사에 사직서를 내었다.
사직서는 수리가 되지 않았다.
회사에서 수주한 오다가 11월달까지 풀로 돌려도 납기 맞추기가 어려울것으로 보는데 관리자 교체가 있으면 생산에 차질이 있을수 밖에 없으니 지금 당장가지 말고 비수기인 12월 한달 가서 구경하고 오라고 하면서 사직 처리를 미루었다.
나도 할수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4년간 이회사 생산 책임자로 근무를 하여 나름데로 애정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날씨가 무더워지니 힘들어지기 시작했다.마음이 들뜨 있어서 그렇다고 하였지만 사실 나는 힘들었다. 할수 없이 약속을 번복하고 6.2날 출국을 하게 되었다.
=하늘을 날아 보다.=
내짐은 간단해다.
누님이 챙겨주는 인삼가루와 그리고 김.종업원들이 거두어서 준비해준 소설책 김두한전집 그리고 일본에가서 공부할려고 일본어 전집과 카세트테이프를 준비했다.
공항에는 누님과 회사 사장이 나왔습니다.
누님은 내가 다니던 회사 구내 식당을 하고 있었고 매형의 고종사촌형의 아들이었다. 조카인 셈이었다.
처음타보는 비행기라 긴장이 될줄알았는데 아무감각이 없었다.오사카 국제 공항에 내리는데 마음이 안정이 되면서 고향에 온것같은 늦낌 같은걸 느꼈다.
검색대를 통과하고 나오니 삼촌과 또 한분이 같이 대기 하고 있었다. 이름이 기시가와상이라고 했다.
삼촌은 집으로 바로 가는게 아니라 오사카 시립 병원으로 직행했다. 지금생각하니 삼촌이 내 건강이 매우 심각하다고 보고있은것 아닌가싶었다. 눈물이 나네요. 병원가니 대기 하고 있는 의사가 가 있었다. 바로 사진 촬영 실로 들어 갔습니다. 단번에 20장 가까이 촬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인사하고 집으로 바로 왔습니다.
숙모님은 일본 여성이고 여동생하나와 남동생 한명이 있었으며 이름은 지혜꼬와 다짱 이었습니다. 호적이 숙모앞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저녁식사로 공기밥 하나와 단무지 한접시 주먹만한 소고기 덩어리가 들어있는 국물, 이렇게 단조로워 습니다.
삼촌은 일본에서는 이렇게 먹는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다음은 주문식 식당을 이용했습니다.
삼촌께서는 구두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쁘다보니 내가 알아서 잘 지내기를 바랬습니다.
도착한 그 다음날 오전에 삼촌집 근처에 있는 병원에 갔습니다.그병원에 가보니 오사까시립병원에서 나를 진찰하신분이 계셔습니다. 알고보니 개인병원을 하면서 시립 병원에 나가고 있었습니다.
사진 판독 결과는 결핵이었습니다.
공황에 같이나온 기시가와상은 삼촌 손아래 동서이고 직업은 약사였습니다. 처방전에 따라 기시가와상이 가지고 온 약을 먹고 오전에는 병원가서 주사맞고 했습니다.
삼촌께서는 틈만나면 나를데리고 인사를 다녀습니다. 형님 아들이라고 소개를 하였습니다. 반응을 보니 아버지께서 일본 있었을때 인기가 대단 했던것 같았습니다.용돈들도 덤북 주었습니다. 그리고 삼촌 께서도 하루에 2천엥씩 주었습니다.
그당시 환율로 따지면 우리나라 돈으로15.000원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당시 우리나라 하루 일당정도가 된었다고 봅니다.
저는 그돈으로 주문식 식당에서 아침 점심 저녁 세끼에 500엔 목욕 100엔 빨래 200엔 쓰고 나머지는 구설 빠찡고 하면서 지냈습니다,
빨래는 대중탕에 세탁기가 설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목욕들어 갈때 세탁기에 넣고 100엔을 카운터에 맡기면 건조해서 바구니에 넣어서 번호판 붙여서 놓았다. 목욕하고 나와서 그옷입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이란 삼촌께서 얻어준 원룸인데 그기서 시간 나는되로 가지고간 책 김두한 전집도 읽었 습니다. 일본어도 공부를 했습니다. 한달쯤되니 컨디션이 많이 좋았습니다.
내가 결핵에 걸린 이유…
내가 결핵에 걸린 이유를 짐작해 보겠습니다.
저는 누님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토요일이나 들어 가곤 했습니다. 이유는 총각이니까 회사 기숙사에서 잠을 자면서 근무를 했습니다.
누님이 구내 식당을 하니 챙겨서 주는 밥도 견찬구요.
그런데 공장내부에서 잠을 자다보면 저녁늦게 아가씨들이 울면서 기숙사 방문을 두드려요.
열어 보면 누구가 코에서 피를 많이 흘리는데 멈추지를 않는다고 하면, 제가 올라가서 머리에 물수건 올려 주고 피가 멈출때까지 닦아주고 했습니다.
야간을 많이 하다 보니 피로해서 그런중 알았지요. 그런 일로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간 아가씨들은 돌아 오지 않았어요. 나중에 들려 오는 소리로는 죽었다고 했으요. 그당시 난 왜 죽었지 이런 생각만 했지 결핵으로 죽은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오사카에서 생각 해보니 고개가 끄덕이는 겁니다. 아~~~ 내가 그일로 결핵에 걸렸구나 하구요….
몸무게 회복….
오사카로 출발할때 나의 몸무게는 43키로 한달 치료 받고 나니 46키로로 완전 회복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당시 비좌는 2개월이었습니다.
삼촌께서 저를 되리고 대사관으로 갔습니다.
내 조카인데 한국에 아무도 없다. 이상태로 한국으로 보내면 일본으로 데리고 온 보람이 없다고 사정이야기를 하니
4개월 연장을 해 주었습니다.
2개월이 지나고 한달 더 지나 4개월이 되니 내몸은 48 키로로 늘어났습니다. 그다음부터는 놀려 다니기 시작 했습니다. 혼자서 지하철 타보기도 하고 영화도 보고 그리고 삼촌 따라 납품도 가고 수금도 하고 따라 다니다 보니 20개 도시를 방문 했습니다.
삼촌께서 직원 20명정도 데리고 일본에서 구두 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백화점 28군대에 납품을 하고 있었습니다.
1797년 12월 초인것 같습니다. 야구 제펜시리즈를 오사카 구장에서 하는 겁니다.(고등학교 야구인것 같음) 전 야구에 관심이 없다 하니 한국에 돌아가면 오기 쉽지 않으니 기시가와상과 같이 가서 구경하고 오라는 겁니다.
기시가와상은 제약회사 다녔고 그 부인인 처제는 약사였습니다. 베푸는 친절을 거절하기가 그래서 따라갔습니다.
야구를 한참 보고 있는데 레시브를 끼고 야구구경을 하던 기시가와상이 나를 부르드니 나가자고 하였습니다.
중간에 왜 나가자고 하느냐고 하니 나가보면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따라 나왔습니다. 나와보니 보이는것이 호외였습니다. 한국에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급히 알리는 호외가 벽에 붙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호외를 보고 한없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기시가와상이 달래도 한없이 울었습니다. 멋모르고 울음이 나오는겁니다. 지금 생각해도 뚜렷한 이유가 없이 울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홍사덕씨의 눈물을 기사로 보고 그때 심정이 이랬나 했습니다. (https://www.dailian.co.kr/news/view/13783?utm_source=chatgpt.com)
30분도 더 우니 기시카와 상이 물꺼럼이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기시가와상은 나를 달래면 오사카 로엘호텔로 데리고 갔습니다. 아주고급 소고기를 사주었습니다. 먹는둥 마는둥 하다가 집으로 왔습니다.
기시가와상은 삼촌에게 뭐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소릴 들은 삼촌이 나를 불렀습니다. 가보니 일본에서는 먹는음식은 임금이나 서민이나 다를게 없다 그런데 어디서 먹는 걸로 평가를 한다.
네가 우는것 보고 애국자로 보였다고 하면서 로엘호텔로 데리고 가서 소고기를 사주었다고 한다. 최고의 대접으로 생각 하고 다음에 한국에 놀려 갔을때 너도 그렇게 알고 대접하기 바란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머리숙여 감사 하다 하고 물러나 숙소로 돌아와 한국 뉴스를 계속 들었습니다.1979년 12월30일날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되었있었는데 비행기 시간이 맞지 않아서 1980년도 1월 1일 돌아 왔습니다.
제기 돌아 간다고 하니 삼촌의 친구들이 선물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두개 가방에 가득 담아 왔습니다. 전자 시계. 가스 라이터. 비누. 향수. 라디오. 카셋트. 박하 만년필.청바지.등등
전자제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항에 와서 친구들에게 선물 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습니다.
더디어 입국할 1980년1월2일이었습니다.
만반에 미소를 머금고 삼촌과 함께 귀국 했습니다.
공항에는 누나와 생질 나왔습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아프다가 견찬 겠지 했는데 점점 아프기 시작 했습니다.
집에 도착 하자 말자 집근처 병원으로 달려 갔습니다.. 진찰 결과 맹장이었다. 바로 수술하고 일주일간 입원하게 되었다. 삼촌은 일본에서도 아파났고 물었보았다. 혹시 미안해서 말을 못하고 참은것 아닌가 싶어 했다. 그게 절대 아니라고 오해 하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삼촌은 고향에가서 전전에 귀국했서 준비해 놓은 상석을 묘소에 설치 해야 했는데 그 일로 형님과 같이 바로 고향으로 가시고 나는 일주일후 퇴원했습니다. 퇴원을 하고 보니 가방안에 들어 있엇던 선물은 하나도 없이 살아젔습니다.
누님은 사직동 원불교 신자였는데 동생 귀국 하면서 가지고온 뭐 없어 하니까 가방 전체 가져다가 풀어 버린것 갔아습니다. 그당시 는 외국다가 오면 뭐 사가지고 오는게 법인양 되어 있는것 같은 시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는 일본으로 가기 일주일 전에 회사 동료 아주머니로 부터 소개을 받은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 아가씨 줄 선물까지 없어 졌으니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누님의 작은딸 (생질.조카)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쓴다고 챙긴것입니다. 가죽케이스로 포장된 소니 카셌트 라디오 그리고 향수 비누 이었습니다.
조카를 설득해서 다시 받았습니다. 나는 영등포 어느 다방에서 그 아가씨를 만나 습니다.(김포에 살았습니다.)개봉은 되었지만 설득하고 주었더니 좋아 했습니다. 그리고 결혼 이야기가 나와서 부모님과 상견례 하기로 했습니다.
아가씨쪽은 양부모님과 언니 그리고 아가씨 본인과 네명이 나왔습니다. 우리쪽에서는 누님과 큰딸 그리고 저하고 3명이 나깠습니다. 역시 또 영등포 다방이었습니다.
나가 보니 아가씨 언니와 누님의 큰딸이 보드니 서로 부둥겨 안는겁니다. 알고 보니 화신 소니에서 같이 근무한 동료였습니다. 상견례 분위기는 처음부터 믿음이 가득했습니다. 누님의 딸은 화신쏘니 자재과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내가 다니던 회사 사장님의 부친이 화신 쏘니 전무로 근무를 했습니다.(일본 와세다 대학 나왔음) 아가씨는 장애가 있었습니다. 참 착하고 이쁘기는 했는데…
아가씨의 아버지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때 택시에 부딪히는 사고로 고관절 이 망가 지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그당시 의술이 요즘같이 않아 많이 절어습니다. 그때 받은 보상금으로 준비한 아파트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모두가 즐겁게 웃으면 헤어졌습니다.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누님이 이야기좀 하자기에 들어보니 결혼을 반대 한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너도 장애자인데 마누라까지 장애자이면 아기를 놓고 학교도 가고 여러가지가 문제인데 안된다고 했습니다.
너도 성한사람 만나고 그 아가씨도 너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가씨와 결혼 시키면 돌아 가신 부모님께 면목이 없지 싶다고 하였습니다.
누나는 그 아가씨 만나기 전에는 장애가 그렇게 심할줄은 몰랐던 겁니다. 그날저녁 곰곰이 생각 해 보니 누님말씀이 맞는것 같아 더이상 만나지 않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만나서 사실 이야기를 하니 술을 사 달라고 하였습니다.
생맥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대접을 했습니다. 나는 술을 일절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씨는 술을 많이 먹었습니다. 나까지 먹으면 누가 챙기나 싶어 한입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술 취한 끼가 있는 아가씨를 택시로 자기 언니 집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집에 와 있으니 전화가 왔습니다. (그당시는 전화는 부의 상징이었는데…) 아가씨 언니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사실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누님이 보시기에 그 아가씨는 너 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나야 된다고 하시면서 결혼을 반대 하셨다고 하니 알았습니다, 하고
좋은 아가씨 만나세요 하고 헤어졌습니다.(저는 장애가 있어도 아가씨들은 많이 딸아습니다. 내가 쑥맥이라서 그런것 아니었는가 싶네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고 딸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장성한 딸은 변호사이고 사위도 변호사 아들은 카이스트 석사 대기업에 근무함)
장조카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장소는 남산밑에 있는 성도 교회였습니다.
형수님이 성도교회 집사였습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와 있는데 조카 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작은아버지 이 권사님 아세요? “
“이 권사 누군데…”
“작은 아버지 일본 가기전에 중매 한 분 기억 못하세요?”
“아 기억하지…”
예식장에서 불러서 가보니 우리 식구를 가르키면서 누구냐고 물어 보았다고 했습니다. 삼촌이라고 했더니 이야기를 하면서 잘 될줄 알았다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당시 저는 종업원이 100명이 넘는 봉제공장 사장이었습니다.
전화 번호를 알려 달라니 알려 주었습니다.
직접 전화를 하니 며느리가 받았습니다. 어머님이 전화를 받지 않을려고 하시니 전화 안하시면 좋겠습니다.하였습니다.
저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아가씨가 잘되어 있기를 바라면 그 속식을 듣고 싶어 전화를 했는데 받지를 않았습니다. 지금도 궁금합니다.
“추신”
그리고 제가 다니던 회사는 제가 없는 6개월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봉제 공장 회사는 관리자가 망하게하고 돈도 벌게 해 주는것인데
내 후임으로 들어온 공장장은 바이어와 잘맞지를 않아 한스타일 작업 을 실수하여 수선하다보니 그뒤에 계획된 오다가 취소 되어 공장이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하 과장님 실력 떠나고 나서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자기 누님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이민갔습니다.
=일본 방문=
저는 몇일간 짬을 내어 일본방문을 했습니다. 누님과 같이 갔습니다. 연세를 더하다보니 숙모님은 돌아 가시고 삼촌이 하던 공장은 지혜고 남편(사위)가 하고 있었습니다.
사위는 제주도 사람인데 밀항자 신분이었습니다.
아들은 마약중독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기가 공장하는것 아버지(삼촌)이 물러 주어서 하는게 아니고 돈주고 샀다는겁니다. 아들 다짱이 돈을 다 받았갔습니다.고 영수증을 보여 주며 강조하는겁니다.
좀이상해 보였습니다. 하루는 삼촌과 같이 목욕탕에 갔습니다. 노쇠하다보니 옷을 제되로 벗지를 못했습니다.
나는 내가 도움을 받은 것처럼 정성을 다 했습니다.
단추를 풀어주고 때모 밀어 드렸습니다.
목욕을 끝내고 소파에 앉았을때 삼촌게 물어 보았습니다.
사위가 잘해 주시냐고…. 삼촌이 아무말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삼촌은 자기가 살던 아파트를 딸 지혜고 한데 물러 주고 작은 방 하나 얻어서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사항을 보니 눈물이 났습니다.지금 자기 처지가 이것 저것 따질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라고 하시는것 같았습니다.
= 삼촌의 유언=
삼촌은 고향을 그리워 하면 살았다고 했습니다. 삼촌은 역도산의 친구 이었습니다. 같이 다니다 보니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삼촌) 죽으면 한국에 있는 선산에 묻어 달라고 했습니다.
삼촌은 이상하게도 선산을 챙겨 습니다. 그 다음 방문시에는 상석을 놓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조상들 묘소 앞에는 상석이 다 놓여 있습니다.
=부도를 당하다=
제가 하는 회사는 상도 4동에 있었던 베뢰아어패럴이었습니다.
15년간 운영을 하고 접었습니다. 그 이유는 김영삼 정부때 불어 닥친 IMF 였습니다. 7억을 부도를 맞았습니다. 아파트 2채와 빌라 한채가 있었는데 순식간에 날아갔습니다. 그당시 상도동 빌라 가격은 1억9천만원 정도 되었습니다.
김대중정부에서 어음여신을 40일에서 6개월로 늘리면서 신용보증기금에 어음보험 제도를 만들고 활인하게 하였습니다. 보험료는 1%였습니다. 일억정도 보험에 들면 월10만원이 못되었습니다. 6개월어음이면 55만원 정도 이었습니다.
부도가 나니 그 금에서 70%를 보상 해 주었습니다. 나는 7억 곱하기 70% 하니 4억 9천만원이 보험에서 보상 처리 되었습니다.
그 어음이 다 은행에서 활인을 했으니 큰 날리 없이 조용했습니다.
그리고 아파트 한채 팔아서 종업원들 봉금과 퇴직금 지금하고 주위 외상값까지 다 해결 하여
습니다.
그런 와중에 일본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혜꽃 였습니다.
제주도가 자기 시가집이다 보니 고향을 올때마다
저희 집에서 몇일 지내다가 가곤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친근해 있었습니다.
“오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나는 한참 말을 못했습니다.
옆자리에 한국 사람 있냐고 물어 보니 어떤 아줌마를 바꾸어 주었습니다. 한국 사람이라 한국말을 잘 한다고 했습니다.
그 아줌마에게 부도 사실을 이야기 하고 삼촌을 화장해서 잘 모시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안정이 되면 모셔와 산소에 묻어 드릴 생각 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야속하게도 그일을 아직 까지 하게끔 하지 않고 있습니다.
부도를 수습한다고 12번의 법정 싸움을 하다보니
시간이 엄청 걸렸고 그러던중 저는 지치다 보니
삼촌을 잊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아들과 딸의 보필을 받다보니
사정이 그렇습니다.
=지혜꼬와 마지막 통화=
하루는 지혜꼬가 전화를 해 왔습니다.
울면서 였습니다. 한국말이 써투었서 옆집 아주마 가가 전화를 받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삼촌이 돌아가신 뒤에 사위놈이 제주도에 있는 본처를 데리고 왓다는 겁니다. 아들두놈과 함께….
지혜꼬도 아들이 둘이나 있었으니 한집에서 산다는게 말이 안되죠.
할수 없이 집을 나왔다고 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어찌 할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에 갔을때 영수증 내 놓고 공장을 샀다고 할때 알아봤는데….
그뒤 삼촌의자녀 사촌 동생과는 영영 이별이 되었습니다.
삼촌 유골이 어디 있는줄도 모릅니다.
삼촌 너무 미안 합니다.
=유언=
내가 죽거든 내 무덤은 삼촌의 유골을 일본에서 가져와 삼촌과 함장 해 주기 바란다. 만약 유골을 가지고 오지 못하면 삼촌의 이름만이라도 상석에 세계 주기 바란다.
아들이 이글을 읽으면 내 유언을 들어 줄지 모르겠네요….
끝입니다. 댓글로 평가 해 주세요.
2026.02.1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