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은 1909년 1월 7일 오후 3시 24분 이토히로부미와 함께 대구역에 하차했다.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날씨는 한겨울이라 추웠다. 만국기가 하늘에 펄럭였고 기병과 군악대가 대령하고 있었다.21발의 화포가 울리고 열차에서 내린 순종은 지붕이 없는 가마(일명 옥교:玉轎)를 탔고 정부 관리들은 말을 탔다. 나머지는 걸어서 나왔다.
대구군수 겸 경북관찰사 서리를 맡았던 박중양이 고개 숙여 환영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지방의 소란이 안정되지 않고 백성들의 곤란이 끝이 없으니 지방을 시찰하여 백성의 고통을 알아보겠다.'라 적혀 있고
대한매일신보도 비슷한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진짜 목적은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 보호권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을사늑약으로 악화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이 행차를 이토가 제안해서 성사되었다는 데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순종은 처음으로 도성을 벗어나 8시간이라는 긴 시간끝에 대구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이토 히로부미가 뒤를 따랐다.
순종은 1월 8일 대구를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했고 1월 10일 부산을 출발하여 마산에 도착하였고 12일에 마산을 출발하여 다시 대구에 도착하여 달성공원을 방문하게 된다. 달성공원에 있던 신사참배가 그 목적이다.
이 소식을 접한 박중양은 밤을 세워 어가길을 닦는다. 북성로를 통과하면 달성공원과 맞닿는데 아마 북성로가 채 정비되지 않았던지 아래 사진에서 보듯 우현서루 부근에서 우측으로 좁은 길(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을 내어 달성공원과 연결 한다. 그리고 달성공원에서 향나무 한 그루씩을 기념식수 한다.그해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의 회심의 총탄에 죽을 줄도 모르고.
안중근의사가 잡혀 검찰 심문을 받을 때 3년 전부터 이토를 죽이려고 준비했고, 순종과 함께 이토가 대구를 방문했을 때 실행할 생각은 없었는지를 물었을 때 당시 안중근은 갑산에 있었고 흉기를 준비하지 못했을뿐 아니라 호위병도 많았고 황제(순종)께서 일행에 계셨으니 실행하지 않았다는 답을 한다. 어쩌면 이토가 대구에서 암살당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구 최고의 친일파 박중양의 대구읍성 철거도 그의 친일 행각의 하나로 치부될뿐 아니라 그의 아들 박문웅도 청도와 상주군수를 역임하는 등 친일에 앞장섰다. 그는 항상 지팡이를 들고 다니며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사정없이 때렸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박작대기인 것이다.
<순종황제 어가길,붉은 색 표시는 1월 7일 대구역에서 경상감영으로 이동한 것을 가리키는 것같고, 파란색 표시는 12일 대구역에서 달성공원으로 이동한 경로를 나타내는 것 같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