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담리(石潭里)[돌수, 석담] 본래 김제군 공동면의 지역으로서 이 곳에 있는 우물이 모두 돌 사이에서 나오므로 돌수 또는 석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모리, 상모리, 중모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석담리라 해서 백구면에 편입됨. 이곳은 필자의 출생지이다. 마을의 유래를 살펴보면 전주 이씨 집성촌 마을이다. 조선국의 세종대왕의 4자이신 임영대군 정간공 諱 구 할아버지를 파시조로하는 임영대군파의 후손들이다. 필자는 19대손이다. 원래 생거지는 지금의 서초동 법원단지, 구 삼풍아파트 자리가 제실이었다. 임진왜란때 할머니가 아드님과 함께 전라도 나주 친정을 다녀오시다가 란을 만나서 피하러 들어가신 곳이 석담리 였다고 한다. 임영대군 할아버지는 서초(장안말)에서 계시다 조정하고 조금 멀리 떠난 곳이 의왕 백운호수에 자리를 잡고 매일 왕이 계신 곳에 나라가 잘되기를 기원하며 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광교산맥의 자락인 모락산의 명칭이 慕洛에서 따와 명명 되었다고 한다. 60년대 말 강남개발을 할때 토지보상금이 나와 가구당 1만원씩 나누어 가졌다. 조상님 잘두어 돈받기는 처음 이었다. 13대째 석담리에서 사는 분들이 지금도 70가구는 족히 된다. 많을 때는 120가구가 될 정도로 타성이 없었다. 서울 서초에 계시던 필자의 6대조 할아버지를 이곳 뒷멀 제실 뒤로 이장하여 후손들이 돌보고 있다. 매년 1월1일과 4월 한식날 종중회의가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왕손의 후손이라는 긍지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마을을 풍수적인 측면으로 살펴보면은 형국론으로 먼저 보면은 문자형으로 많을 '多'자의 형국이다. 이 형국의 혈처는 '夕'자의 가운데 부분이라 하겠다. 두군데 있으므로 한곳은 백구초교 자리이고 한곳은 앞말에 있다. 자리가 온화하고 포근한 느낌으로 받아 드리나 좌청룡이 허약하다. 우백호는 감싸돌았으나 이는 남자보다는 여자의 기운이 왕성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말하면 여자 자손은 잘풀리나 남자는 조금 늦은 편이다고 볼 수 있다.
물이 빠져 나가는 수구가 너무 활짝 열려 있다. 앞멀 올라가는 도로변에 나무가 심어져 있어 비보 숲 역할을 한지가 몇년 안 되었다. 앞멀도 정자나무 한 그루 서있는 부분이 이 마을의 수구인데 예전(60년대초)에 정자나무에서 100m 거리로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이것이 옛 선조들의 지혜인 비보숲을 조성하였는데 후대에 잘 전달이 안되어 보존이 안되어 잘라서 불쏘시개로 사용하여 버렸다. 지금은 이 부분이 군산에서 전주간 산업도로가 4차선으로 만들어져 앞말 마을을 형편없게 만들어 버렸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악의가 없으며 대부분이 온순하고 착한편이다.
돌수 출신 39회는 이욱, 이대식, 이유식, 이후곤, 이준기, 이태열등이 수도권에서 살고 있으며, 고향에는 이기문, 이문호, 기명서, 김태웅, 이동희가 있으며,이명렬, 이준구, 이이순등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동네지명]
감정골 : 앞돌수 남쪽에 있는 마을
당거리봉 : 감정골 동남쪽에 있는 산
뒷돌수 : 뒷멀
앞돌수 : 앞멀
장대봉 : 감정골 남쪽에 있는 산
접시방죽[접자제] : 감정골 동남쪽에 있는 못
천산수 : 천산수가 있는 골짜기. 앞 멀 서남쪽에 있는 샘
정자밑 : 앞멀 동쪽에 있는 괴목
구릉재 : 뒤멀에서 앞멀로 넘어오는 고개
앉은뱅이 : 앞멀 동남 쪽에 있는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