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신록으로 찬란한 수림(樹林)의 바다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가물거리는 먼산 끝까지 펼쳐진 신록의 파도는 정말 장관입니다. 산바람이 일 적마다 윤기가 주루룩 기름방울로 흘러내릴 것 같습니다.
이름 모를 산새며, 꿩이며, 뻐꾸기소리는 연신 하늘 가득히 쏟아지고 있습니다.
건너편 숲 속에서 약초며 산나물을 캐는 아낙들의 구성진 콧노래 소리가 바람을 타고 간간이 나뭇잎새에 와 부딪칩니다.
대구에서 동북 내륙쪽으로 4백 리, 해발 1천 2백 미터의 이 일월산 기슭에 신록이 우거지면 나는 견딜 수 없는 감동으로 산야를 배회해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직장 따라 이 산골에 왔다가 얻은 나의 즐거운 난치병일지도 모릅니다.
P형, 산골은 감옥이 아니면 낙원이라 했더이다. 3년 전 이곳으로 왔을 때, 사람들은 이 영양땅을 가리켜 산수가 빼어나게 맑고 아름다운 고장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도시생활에의 취향과 인간관계의 얽힘 때문인지 자연 경관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산골살이는 황량하고 적막할 뿐이었습니다. 첩첩이 높은 산은 어쩌면 감옥의 성벽 같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즐거운 난치병을 앓아 오는 동안, 산골살이에도 나름대로 정이며 흥이며 멋이 있고 때로는 낭만과 철학도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그려.
산골에는 계절따라 바뀌는 섭리의 자국이 뚜렷합니다. 기름이 흐르는 신록, 석천(石泉)의 물고기맛, 불타오르는 단풍, 송림의 눈꽃…. 이러한 자연의 변화에 애정으로 심취하다 보면 어느덧 마음의 뜨락에 또 하나의 자연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나 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숲에 가면 한 그루 나무일 수 있고, 강변에 가면 한 개 조약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P형, 나는 시방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가 용화동(龍化洞) 앞을 흐르는 개울에 다다랐습니다. 두어 발짝 앞에는 사방으로 바위에 둘러싸인 작은 폭포가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물이 괴었다 흐르는 이 폭포를 선녀탕(仙女湯)이라 부르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육신을 잠그기에는 죄스러울 만큼 맑고 깨끗한 물. 두 손으로 물을 떠 마셔 봅니다. 신선한 이 물맛. 어쩌면 산정(山情)을 마시는 것이외다.
맨발로 카랑한 개울물을 거닐어 봅니다. 물은 쉴새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P형, 여래의 마음처럼 끝없이 흘러가는 여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이옵니까.
이윽고 맨발로 밭두렁으로 올라와 흙을 밟아 봅니다. 모정만큼 따스한 대지의 촉감. 잃어버린 동심과의 해후 같은 것을 느낍니다.
P형,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슬픔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오니까. '언어는 있으되 대화는 없고, 지식은 많으나 지혜는 적으며, 경악은 있으되 감동은 없으며, 증오할 줄을 알아도 감사할 줄은 모르는.' 이렇게 병들어 가는 심혼은 이곳에 와서 자연의 목소리를 빈 마음으로 들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문득 지난 여름의 낭만이 생각납니다. 부산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일파(一波) 화백이 이곳에 들러, 우리는 왕피천(王避川) 상류로 천렵을 나갔더랬습니다. 왕피천은 태백산맥의 깊은 계곡을 따라 돌고 돌다가, 울진 성류굴 앞을 지나 동해로 흐르는 강이옵니다.
우리는 반백의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강물을 쏘다니다가 물장구도 치고 멱도 감고, 드디어 천렵으로 얻은 물고기를 회쳐서 불쇠주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우정과 낭만이 가득 담긴 술잔을 들이키며 소년 시절의 노래도 마음껏 불러 봤습니다. 그런데 즐거운 옛노래를 부르는 일파 화백의 두 볼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질 않겠습니까.
우람한 산세, 울창한 숲, 맑은 공기와 깨끗한 강물, 산새소리며 강물소리, 거기다 옛친구 만나 술잔을 기울이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자꾸만 흐르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순수하고 인간적인 독백입니까.
'소는 물을 마셔 우유를 만들어 내고 뱀은 같은 물을 마셔도 독을 만들어 낸다(牛飮水生乳 蛇飮水生毒)'는 옛말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그려.
P형, 여름이 가면 산골 사람들의 일손은 한결 바빠집니다. 거둬 들일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월동준비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산골의 겨울은 길고도 춥습니다. 불타오르는 단풍을 조용히 완상할 틈도 없이 초겨울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휘날리는 낙엽을 보고 저마다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산골에는 일년 사철 계절따라 바뀌는 자연의 빛깔이 있습니다. 봄의 빛깔이 파스텔화라면 여름은 유화, 가을은 수채화, 겨울은 묵화일지도 모릅니다.
자연의 목소리를 듣는 데도 철따라 다를 것입니다. 빗물처럼 창에와 부딪혀 쏟아지는 뻐꾸기소리는 눈으로 듣고, 사방을 요란하게 뒤흔드는 매미소리는 귀로 듣고, 가을의 뭇 풀벌레소리는 피부로 듣고, 겨울의 문풍지소리는 마음으로 들어야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P형, 자연의 빛깔이며 목소리에는 무한한 의미의 언어가 있다고 하더이다. 이 언어의 깊은 뜻을 불가에서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로 나타내는 유정설법(有情說法)에는 흔히 거짓과 과장이 있을 수 있어도 무정설법에는 오직 진실이 있을 뿐이라 하더이다.
산골살이의 참재미는 이 무정설법을 듣는 데 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에게는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슬기로운 귀가 없습니다. 이젠 지혜로운 마음의 귀를 갖기 위해서라도 좀더 바보가 되는 공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P형, 저녁놀이 노송가지 끝에 나부끼고 있습니다. 깊은 산중에도 흥망이 있음인지, 사원은 흔적도 없는데 낡은 석탑 한 기(基)만 산기슭에 버려져 있습니다. 무심한 산골 아이들이 돌탑 둘레에서 놀다가 이제 집으로 돌아갈 모양입니다.
나도 땅거미가 깔리기 전에 돌아가렵니다. 금년 겨울에도 이웃집 외양간의 소 요령소리에 여러 밤을 지새우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p형 만나고 싶당...ㅋ ㅋ 후딱 읽었어요. 지금 바빠서....좀 있다 다시 들어 올려고......고마워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