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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매일 기획특집
이재창 시인, 남도문학 현장을 가다 (29) - 최재환 시인
“산다는 건 풀린 매듭을 다시 맺는 일이다”
화려하지 않는 야생화처럼 大愚大賢의 매력지닌 시인
시적 메타포어나 알레고리 등 신선한 이미지 돋보여
누구에게나 친근한 닦이고 밀린 돌처럼 순수함이 특징
2004. 02.04(수) 00:00
최재환 시인은 남도의 선비, 목포에서는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 시인으로 통한다. 또한 목포가 항구라면, 그 목포에는 최재환 시인이 있다. 이렇듯 그는 70년대 목포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세월이 흘러가고 세상이 몇 번이나 변해갔지만 묵묵히 고향 목포를 지켜가는 시인, 중학교 분교장으로 명예퇴직하기까지 그가 홀로 키우고 키워내는 온갖 풀꽃들이 바로 이를 대변한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키우는 결코 화려하지 않는 야생화들은 바로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
그가 살고 있는 목포의 寓居를 찾아가게 되면 우선 풀꽃 향기가 은은한 속에서 마음껏 딩굴며 답답한 도회의 홍록을 떨쳐낼 수 있다. 때문에 바위덩어리처럼 무겁고 과묵함이 배여 있는 그의 성품을 느끼게 된다. 결코 기교를 허락하지 않는 그의 앞에 서면 耳順에 넘은 그의 풀꽃같고 천진스런 삶에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때묻은 시류에 영합하고 朝令暮改가 팽배한 문단풍토에서는 목소리가 높은 작자가 행세하며, 오히려 신인들이 한술 더 뜨는 한심한 풍조가 당연한 듯이 받아들여지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도 그는 결코 흔들리지 않고 자연에 의탁하며 산처럼 의연하게 산다.
문덕수 시인은 그에 대해서 “대우대현(大愚大賢)이라는 말이 있지만, 남도의 항도 출신인 최시인을 보면 그런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이 시인의 인간적인 매력인지도 모른다. 조금은 어리숙하면서도 너그러운 여백을 지니고 있고, 어떤 강인한 의지의 바위가 안으로 도사려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고 했다.
이런 시인인지라 그는 자신을 말하기를 “내가 남보다 별나지 못한 것처럼 나의 삶 또한 지극히 평범하다. 그러므로 남의 눈에 크게 띄지 않으며, 그렇다고 남이 앞에 나서지도 않는다”고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 한다.
“거울 앞에 서면/다음에 있을 나의 演技가 생각히어/몸을 떤다./……/언제쯤 돌아가려는가,/窓을 열면/물 소리에 묻어 오는/나의 鄕愁.//속삭이듯 발돋음한 채/水銀柱를 오르내리던/가벼운 發病.//길을 재촉하던 어제보다/아직은 더운 피가 흐르는/꽃잎으로 돌아가/밤마다 흐느낌을 彈奏하고/한줌 흙으로 바람에 날리는 부끄럼 없는 가장 귀한 날을 가려/幕을 올린다”(‘表具 속의 얼굴’에서)
그의 첫시집 표제시이다. 이 시에서는 시인 자신의 성찰을 엿볼수 있다. 현시대의 집단과 개인, 조직과 그 개별 성원 사이의 갈등과 모순, 조화 내지 조절 등의 큰 고민이 따르게 마련이다. 집단과 개인의 관계는 현대의 큰 문제이지만 그는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돌려 자아를 성찰하고 형성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유달산이 그렇듯/목포사람들은 말 수가 적다./언제부턴가 주눅이 들어/전신의 응어리가 곪아 커져도/돌앉아 눈물을 훔칠망정/소리는 내지 않는다./입을 열어야 할말도 없지만/꿈벅꿈벅 두 눈으로/가릴 건 다 헤아리면서/이웃의 아픔도 귀로만 담는 사람들/숨쉬는 하늘이야/모두 우리 것,/바보스런 모습이/차라리 칼날보다 매서워/메아리의 화답은 잊고 산다./발걸음을 옮기면 거기도 내 땅,/예나 저나 변함없는/도시의 어는 구석에도/우리의 잔 정은 무데기로 샇여/덜컹거리는 세상 일쯤/모른척 해도 되는 것을./강이 막히고 산이 헐려/그리운 노래도 나그네처럼 비탈로만 흐르고/막힌 둑이 터지면/천혜의 땅에 햇빛도 여울질까,/열어야 할 말도 없는 입을/하구언 철문처럼 꽉 닫아두고 산다”(‘목포사람들’ 전문)
세 번째 시집 ‘가슴으로 쓰는 시’에 수록된 작품이다. 수천년 묵묵히 목포를 지키며 할 말 많아도 참고 있는 유달산. 그 유달산을 닮아서 말수가 적은 목포사람들은 전신의 응어리가 곪아 터져도 분명히 소리내지 않고 돌아앉아 눈물만 훔친 쑥매기 같은 사람들이다. 한 많은 설움과 울분이라도 간직하지 않는 사람 아무도 없는 듯 살아 숨쉬는 하늘이야 목포사람들의 사정 다 알아주리라고 믿고 있다. 메아리는 아예 잊어버리고 있으니 화답인들 기다려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 역시 말수가 적고, 서두르지 않는 유달산을 닮은 목포사람이다.
"세상을 오고 가는 일이/이미 신의 뜻이거늘/벼랑에 서서/새벽으로 잠이 없는 까닭을/헤아려 무엇하랴.//기다리지 않아도 나이는 들고/한식날 심어둔 미루나무/키를 넘기는데/그믐밤을 지키는 등불이/그래도 정겹구나//……//빛바랜 책갈피에/추억을 묻고/비껴가는 세월을 돌아보듯/뉘우침은 아무리 지워도/그대로 남는 것.//사는 일이 허술하더라도/모두를 사랑하리라/흙 속의 돌멩이 하나/짓밟힌 풀잎 하나라도/따스한 입김으로 속삭여 주리라"(‘겨울 이야기’에서)
이 작품은 시인의 삶의 의지와 인생관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작품이다. 그는 이 시에서 자신의 철학을 은은하게 들려주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회한과 아픔까지도 현재의 삶과 함께 명상을 통한 신앙정신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지금까지 그의 모든 삶의 총체적인 결집이 응축돼 있다. 세상을 오고 가는 일이 이미 신의 뜻임을 알고 그믐밤을 지키는 등불이 그래도 정겹게 여겨지는 나이에 그는 사는 일이 허술하더라도 모두를 사랑하고자 다짐하는, 더불어 흙 속의 돌멩이 하나 짓밟힌 풀잎 하나라도 따스한 입김으로 속삭여 주고자 하는 소망의식은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얼마나 큰 노래인가.
“詩人의 나이 知名이면/제 영혼의 그림자를/속일 수 있는 나이.//三冬을 덮치는 눈바람에도/흔들리지 아니하고/억센 장대비에도 굽히지 않는/이승의 날개를/안으로 안으로 추스르며/풀잎을 구르는 이슬방울에/제 모습을 숨기는 나이.//벗들은 하나 둘 곁을 떠나고/결국 텅 빈 들녘에/혼자임을 때달았을 때,/옷자락을 흔들며 재촉하는/밤바람의 성화를 거역치 못하는 나이.//지난 날을 아쉬워하고/오늘을 딛는 발걸음이 무거운 뜻은/내일을 여는 지혜가 무디기 때문이다./무겁게 심장을 울리는/동짓날 햇살만큼이나 아쉬운/마지막 눈빛이/밤을 건너며 훨훨 타고 있기 때문이다.”(‘斷崖에서’전문)
시인에게 있어 나이에 대한 인식과 규정은 순수하게 삶 그대로를 거짓없이 드러낸다. 지천명에 쓰여진 그의 5시집 ‘귀거래 이후’는 실존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건강한 시정신을 지탱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뿐만아니라 혼자라는 의식, 단독자적인 인식마저도 감상적으로 처리되지 않고 오히려 미래지향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원숙미를 더해주고 있다. 그가 말하는 지천명은 제 영혼의 그림자를 속일 수 있는 나이며, 풀잎을 구르는 이슬방울에 제 모습을 숨기는 나이이자 또한 옷자락을 흔들며 재촉하는 밤바람의 성하를 거역치 못하는 나이로 묘사된다.
“산다는 것은/맺힌 매듭을 푸는 일이다.//그것은 바램이다./태어나 죽는 날까지/아슴프레 떠오르는 지평을 향해/꾸준히 신발을 고쳐 신는/영원한 바램 그것이다.//……//설혹 풀렸달지라도/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굳게 맺히는/매듭들을/하루살이처럼 시간이나 축내며/자꾸자꾸 풀고 맺히는 세상살이./산다는 건/풀린 매듭을 다시 맺는 일이다.”(‘산다는 것 1’에서)
그는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든 한 가지만이라도 딱 부러지게 맺을 수만 있다면 그는 특별히 신에 의해 선택된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겪을 때마다 인생의 읨 자체가 부단히 짜여졌다가 풀리고 또 풀렸다가 짜여지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길흉, 화복, 요철, 음양이 마치 산의 능선이나 파도의 출렁거림처럼 반복되는 필연성을 지닌다. 시인으로 말하더라도 시는 천벌이다. 그러나 시인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그 괴로운 아니 행복한 창작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그게 인생의 매듭이 아닐까.
조용히 은거하며 란과 야생화를 키우며 수석과 벗하는 시백, 안빈낙도하는 최재환의 시는 결코 어렵지가 않다. 누구에게도 친근하게 받아들여지는 닦이고 밀린 돌처럼 순수하다. 시적 메타포어나 알레고리 등 비유적인 언어구조 보다도 그 속, 남들이 잘 보지 못하는 깊은 곳에 신선한 이미지의 물이 흐르고 있다. 순수한 시의 샘물이 오늘에 이르러도 막힘이 없이, 이승 기행을 다하는 날까지 계속 넘쳐나기를 기대한다.
그의 연령이나 문단경력에 비해서 과작임에 틀림 없지만 한국문단에서 서라벌예대의 문창과를 졸업했지만 떠들지 않고 꿈벅꿈벅 두 눈으로 세상을 보며 슬기롭게 살아가는 시인이다.
18년간 신춘문예 열병 앓으며 등단
목포에서는 이 시대 마지막 선비 시인으로 불려
최재환 시인은 지금은 육지가 되어버린 전남 신안군의 유일한 섬 아닌 섬 지도읍에서 1942년(실제 나이는 39년생) 3월5일 태어나 지도 중앙초등학교를 다니다 목포 유달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목포 제일중에 진학하면서 당시 학생잡지로 인기를 모으던 ‘학원’을 접하게 되었고, 여기에 이름이 실리기 시작하면서 시작활동에 몰두했다. 그때 국어과제로 써냈던 원고지 4~5매 분량의 산문을 칭찬해준 선생님의 한마디가 시인이 되게 만든 하나의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문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평소 내성적이어서 말이 없는 데다가 집안이 워낙 가난해서 남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는 편이었는데 이것은 그가 혼자 독서하고 사색하고 창작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고서점에서 책을 빌려 보는 등 닥치는대로 읽어 가면서 학교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시쓰는 학생이라 소문이 났고 그가 시인이 되겠다는 꿈를 가지게 된다. 학교 공부보다는 창작에 몰두하는 한편 좋은 책이라면 밤낮없이 읽으며 시인으로서의 바탕을 중학절부터 다진 셈이다.
그러나 고교진학은 학교측의 권유와 가난 때문에 인문계가 아닌 목포상고를 선택하게 되었지만 목상 진학이 훗날 시인으로 또는 사회인으로 생활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고교시절에는 거의 창작에만 전념하다시피 했다. 서정주, 박목월, 조지훈 같은 대시인이 되는게 꿈이었다. 당시 ‘학원’지나 ‘학도주보’ 같은 지면을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여울’이라는 동인회를 결성했고, 목포시내 고등학생 통합동인지 ‘청도(靑濤)’를 조직해 주도해 나갔다. 이때 친구들중 이태웅(시), 미국에 있는 박영호(시, 평론)가 등단해 활동 중이다. 또한 이웃에는 윤종석 시인이 살고 있어서 함께 골방에 뒹굴면서 문학이야기를 하며 가슴앓이를 하곤 했다.
당시엔 얼마전 작고한 권일송씨, 그리고 전승목, 백두성씨가 교편을 잡고 있었고, 정규남, 정영래, 김재희, 이창렬씨 등이 오거리를 누비며 문학의 터전을 다지던 시기였다.
1957년 신춘문예에 권일송 시인등 목포시인이 대거 입상, 그는 큰 자극을 받았으며 이때부터 ‘현대문학’과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고난의 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그가 1976년 중앙일보 당선과 ‘시문학’ 추천을 받기까지 18년동안 신춘문예 열병을 앓기 시작 했고, 그 엄청난 험난함을 견뎌냈다.
투고하면 떨어지는게 연중행사가 되버렸으니 투고하는 걸로 만족하고 결과확인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76년 중앙일보 당선도 남이 알려주었으며, 그해 시문학에 추천된 것도 최일환 시인이 전화를 해주어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겨울여행처럼 긴 열병을 쉬지 않고 지금도 겨울이 다가오면 가슴의 두근거림이 계속된다면서 요즈음처럼 습작기도 없이 등단해 버리는 풍토를 꼬집기도 한다. 열병이 바탕이 되어 창작에 힘을 실어주는 그런 세태가 사라지면서 진정으로 가슴으로 쓰는 시를 만나기 어렵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그는 목포상고를 다녔지만 졸업무렵엔 서라벨예대 진학을 결심하게 된다. 서정주, 박목월, 김구용, 김동리, 안수길 등 이름만 들어도 설레던 분들이 출강을 하고 있었고, 이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이 문단진출의 지름길이라고 스스로 믿었던 것.
미아리 고개 너머 돈암동 산비탈, 살벌한 이층 강의실에서 그는 문학의 젊음을 불태웠고, 앞 학년의 천승세, 박경용, 이근배, 송상옥 등은 등단을 마친 뒤였고 같은 학년인 백익빈이 추천관문을 뚫고 있었다.
대학졸업후 군복무를 마치고 교단에 투신했으나 성격이 워낙 내성적인데다 고집이 센 그는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이것을 교단에서의 성장에도 큰 장애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는 등단하면 모두들 상을 받아 자신을 치장하고 위장하기에 바쁜데 그는 한정동아동문학상을 제외하면 그 흔한 문학상 한 번 받아보지 못했어도 후회가 없으며, 넘본일도 없다.
그는 지금은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이지만 이것도 타의로 이뤄졌고, 자리에 연연해 본 적이 없다. 서울에 문단친구들이 많아 나들이가 많아도 고향을 한 번도 등져본 적이 없다. 서울에선 남도의 선비, 목포에서는 이 시대 마지막 선비로 불린다.
그는 부인 이현숙(한국화가)씨와의 인연도 남다르다. 그가 목포상고 재학시절 봉주여고 재학중인 부인 이씨와 문학소년.소녀로 만났다. 이들은 훗날 전국에서 내노라 하는 문사들이 모인 서라벨예대 문창과에서 캠퍼스 커플로 다시 만나 오늘까지 친구로, 연인으로, 부부로 인연을 맺고 있다. 부인 이씨는 시인 남편의 내조를 위해 글쓰기를 포기하고 남농 허건의 문하로 들어가 화가의 길을 걷고 있으며, 다도를 보급하고 있다.
이들의 또다른 화제는 야생화 사랑이다. 얼마전 그들은 25년간 전국 산야의 가시덤불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채집한 희귀한 야생화 250여종 2천여점을 공개한 것. 이들 부부가 살고 있는 무안군 청계면 청계리 송악마을 언덕배기 2백여평 남짓한 정원엔 식물도감에서나 볼 수 있는 각종 희귀야생화가 온통 집안을 덮고 있다.
시집으로 ‘표구속의 얼굴’(77) ‘종이비행기’(80) ‘꿈속에서 들은 자장가’(81) ‘가슴으로 쓰는 시’(86) ‘귀거래 이후’(92) ‘이승기행’(2000) ‘세월 읽기’(2004. 4월발간 예정) 등이 있다.
현재 36년간이 교직생활을 마감하고 광주의 ‘원탁시’ 동인과, 서울을 중심으로 엄한정, 변세화, 이창년, 박종수 등과 ‘이 한 세상’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글 ; 이재창 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