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전 손재형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정치가나 교육자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 있겠지만 역시 그는 서예가이다. 근대기 서예계를 이끈 거두이자 새로운 한글 서체의 창안자인 소전 손재형은 여러 서체를 섭렵한 뒤 천재적 감각과 탁월한 균형미로 독창적 작품 세계를 일구어냈다. 붓글씨를 서도(書道)에서 서예(書藝)로 끌어올리고 이를 실천한 선구자인 그를 일컬어 노산 이은상은 “소전이 한국 서예의 금자탑을 이뤘네” 하고 읊었다.
글 / 이완우 |
 | |
|
1989년 늦가을 필자는 두 대학 후배와 함께 예산(禮山) 수덕사(修德寺)를 찾았다. 그 해 여름 학위 논문을 마친 필자를 위해 홀가분하게 가을바람이나 마시자는 뜻이었다. 고즈넉한 옛 사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었고, 특히 1308년 건립된 대웅전에서 ‘고려 시대 주심포ㆍ맞배 지붕의 뛰어난 건축미를 즐겨봐야지’하고 마음먹었다. 상큼한 공기를 들이키며 담소를 나누다 일주문에 다다랐을 때다. “덕숭산수덕사(德崇山修德寺)”ㆍ“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이라 쓴 편액을 유심히 바라보던 후배가 글씨에 대해 물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소전 손재형 선생이 썼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대학 때부터 그의 명성을 접하면서 독특한 짜임새와 원숙한 필법을 마냥 좋아했건만, 한국 서예사 학도답지 못한 내 대답에 스스로 무척 한심스러워졌다. 이후 수덕사의 그 편액은 필자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았고, 그것이 옮겨져 20세기 근대 서예에서 그가 차지했던 위치까지 살피게 되었다.
|
| |
 |
|
추사를 숭상한 한 서예가의 탄생
손재형은 1903년 음력 4월 28일 전라남도 진도군 교동리에서 밀양 손씨 옥전(玉田) 손병익의 손자이자 손녕환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때부터 천 석 이상을 추수하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아명은 판돌(判乭), 자는 명보(明甫)이다. 호는 소전(小田)으로 했으나 뒤에 다양한 한자(素?ㆍ素田ㆍ篠田ㆍ篠顚)로 썼으며 혹은 옥정도인(玉井道人)ㆍ전도인(?道人)ㆍ전옹(?翁)이라고도 했다. 당호(堂號)는 옥전장(玉田莊)ㆍ봉래제일선관(蓬萊第一仙館)ㆍ문서루(聞犀樓)ㆍ방한정(放?亭)ㆍ옥소정(玉素亭) 등이라 했고, 추사 김정희를 매우 존모(尊慕)하여 존추사실(尊秋史室: 추사를 존경하는 집)ㆍ추담재(秋潭齋)ㆍ숭완소전실(崇阮紹田室: 완당, 즉 추사를 숭상하는 소전의 집)ㆍ연단자추지실(燕檀紫秋之室)이라고도 했다. 소전의 조부는 다섯 살 손자에게 한문과 글씨를 익히게 했고 장차 대성하리라 믿으며 서울 효자동에 집을 마련하여 살게 하였다. 이런 조부의 뜻에 부응하여 소전은 진도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 서울 양정의숙에 들어갔고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鮮展] 서부(書部)에서 <안씨가훈(顔氏家訓)>으로 입선하였다. 그 뒤 계속 입선하다가 1930년 제9회 때 <화류운(和柳?)>으로 특선, 제10회 조선서화협회전[協展]에서 특선(수석상), 1932년 제1회 조선서도전에 특선하고 이듬해 제2회 심사위원, 1934년 조선서화협회 이사가 되어 제13회 협전 심사위원을 맡는 등 서예가로서 활동을 키워갔다. 그간 1923년 재형(在馨)이라 개명하고 1929년 홍영식의 셋째 따님 홍태희(洪台憙)와 혼인하며 외국어학원을 수료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말인 1943년 그는 경성공립 제2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러던 중 1944년 경성제대 교수였던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隣)가 추사의 걸작 <세한도(歲寒圖)>를 가지고 귀국하자 소전은 전화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소전은 도쿄에 있던 후지츠카를 찾아가 몇 날을 팔라고 졸랐는데, 결국 그의 열정에 감복한 후지츠카는 아무런 조건 없이 내주었다고 한다. 후지츠카는 청나라 고증학이 추사를 통해 조선에 전파된 양상을 연구하면서 관련된 서화 자료를 꽤 수집했는데, 도쿄가 연합국 공습을 받자 그의 연구실에 둔 자료들도 다 불타버렸다. <세한도>만이 그 참화를 피했으니 이 기적 적귀환은 추사의 예술 정신을 경모했던 ‘존추사실’ 주인다운 영웅적 행동이다. 그러나 뒤에 소전은 국회의원 후보에 출마하면서 선거 자금 마련을 위해 <세한도>를 저당 잡혔고 결국 낙선하여 갚을 방도가 없어지자 남에게 매도했다. “선비가 아낀 물건은 돈을 받고 팔 수 없다”고 하며 무상으로 건네 준 후지츠카가 이런 불운을 예상하기나 했을까?
|
| |
 |
|
문화, 예술, 교육, 정치계를 넘나든 전성기 |
|
 |
1945년 광복 이후 소전의 문화 예술 활동은 전성기를 맞는다. 그 해 9월 소전은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를 조직, 초대회장을 맡았다. 이 단체의 활동은 지속되지 않았지만, 정부 수립 후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國展]이 개시되면서 소전은 제9회(1960년)까지 심사위원을 지냈고, 이후 고문ㆍ심사위원장ㆍ서예분과위원장ㆍ운영위원ㆍ자문위원을 역임하는가 하면 제19회부터 제24회까지(1970~1975년) 운영위원장을 맡으면서 서단(書團)의 중추로서 활약한다. 또 1954년 일찍이 초대 예술원 추천회원이 문화계 활동도 폭 넓어 1947년 서울특별시 예술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 국보 고적 천연기념물 보존위원, 1955년 국보해외전시추진위원 등을 두루 지냈다. 또 1965년 제4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 민족문화추진위원, 1968년 대한민국문예상 심사위원장 외에 5ㆍ16민족상 종합심사위원장, 동아국제미술전 심사위원장,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위원 등을 지냈다. 교육계 활동으로는 1947년 재단법인 진도중학교를 설립, 이사장에 취임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하였고, 서울대 미술대학 강사,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 1954년 문교부 교과과정 심의위원, 1967년 홍익대와 수도여사대 명예교수를 지냈다. 이밖에 소전은 간간이 정치 활동도 했다. 자유당 시절인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이듬해 문교분과위원장을 지냈고, 4ㆍ19와 5ㆍ16을 거쳐 1962년에는 국회위원 선거에 나갔으나 낙선했다. 그러다 1967년 대통령 선거대책위원회 특별 고문을 지낸 뒤 1971년 제8대 국회위원에 당선되어 문공분과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정치적 움직임도 적지 않았다. 특히 ‘문화보호법개정안’을 발의 통과시키는 데 앞서 서예가 정치인으로서 뜻 있는 자취도 남겼다. 이처럼 광복 후 각계에서의 눈부신 활동으로 소전은 1953년 제2회 서울특별시문화상, 1968년 한글서예 창작의 공적으로 대통령 표창인 국민훈장모란장, 1970년 국민훈장무궁화장을 받았다. 반면 광복 후 서단을 독점적으로 주도하면서 부정적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 가운데 1968년 제17회 국전 때 평보 서희환이 <이은상 애국시>로 국전 사상 처음으로 서예 부문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던 때의 일은 유명하다. 당시 심사위원이던 남관(南寬, 1911~1990년)이 심사장을 나가는 등 잡음이 많았고 이에 따라 미술계의 논쟁도 격렬했는데, 요점은 소전의 서풍을 모방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전풍 모방작에 대한 수상 예는 이후에도 있었는데, 당시 소전의 일처리가 공평무사했다면 그의 우뚝한 명성에 이 같은 흠집은 남지 않았을 것이다.
|
 |
|
|
| |
 |
|
소전체의 형성과 시기별 작품
소전의 글씨 자질은 어려서 조부에게 글씨를 배우고 또 당시 진도에 귀양 온 무정 정만조(茂亭 鄭萬朝, 1858~1936년)가 사랑채 뒤에 서당을 열면서 촉발된 듯하다. 본격적인 글씨 학습은 18세 때 상경하여 양정의숙에 들어간 뒤 20세 무렵이었다고 여겨진다. 당시 그는 석정 안종원(石丁 安鍾元, 1874~1951년)의 주선으로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7년)의 상서회(尙書會)에서 글씨를 배웠는데, 김돈희는 조선서화협회 회장을 지냈고 선전 심사위원을 역임하면서 일제 강점기 서예계에서 막강한 권위를 누렸던 인물이다. 또 소전은 서예에 대한 탐구 정신이 강해 1932년에는 중국으로 나진옥(羅振玉)을 찾아가 사사했고 1938년에는 연구 차 북경을 시찰하기도 했다. 나진옥은 청이 멸망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만주국이 탄생하자 1919년 부의(傅儀) 밑으로 들어가 심양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금석고증에 밝았고 갑골학(甲骨學)을 개척하기도 한 당대의 석학이었다. 소전의 서예는 초기ㆍ중기ㆍ말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0~30대의 초기는 당시 선전을 풍미한 김돈희 서풍을 따른 습작기로서 그의 선전 출품작에 잘 나타난다. 중기는 40~50대로 흔히 ‘소전체’라 하는 특유의 서풍을 이루면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때이다. 특히 옛 청동기 명문인 금문(金文)을 응용하여 한자의 상형성(象形性)을 높이고 먹의 윤삽(潤澁)을 자유롭게 구사했는데, 대표작으로 전서ㆍ예서와 행초서를 혼융한 1954년의 <이충무공 오언시 대구>(“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에서 분방하면서도 변화무쌍한 필치가 돋보인다. 말기는 60대 이후 72세 때 병으로 눕기까지다. 이 시기는 공사에 매인 데다 또 연령으로 따른 노쇠로 작풍에 큰 변화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전에 비해 보다 안정된 자형으로 중후한 골격을 갖추고 좀 살찐 획으로 청윤(淸潤)함을 가미하여 노년의 원숙미를 한껏 드러냈다. 일례로 71세 때인 제22회 국전 출품작 <김정희 칠언시 대련>(“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에서 그러한 면모를 여실히 찾아볼 수 있다.
|
| |
 |
|
소전의 한글 서예와 문인화
‘소전체’의 성과를 말할 때 무엇보다도 광복 후 민족 의식의 고취와 역사적 자각에 따라 그가 이루어낸 한글 서체를 들어야 한다. 그 첫 성취를 보여 주는 필적이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의 울돌목해전(명랑대첩)을 기념하여 1956년 진도 벽파진 언덕에 세운 <충무공벽파진전첩비(忠武公碧波津戰捷碑)>다. 한자의 전서ㆍ예서 필법을 응용한 국한문 혼용체인데, 노년의 원융한 서풍에 비해 덜 익은 면모는 있지만 구국의 명장을 기리는 것이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 듯하고 또 이를 계기로 한글서체 창안에 더욱 박차를 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흔히 이 비문 글씨를 소전이 한글 서체를 완성한 대표작으로 손꼽는다. 그 스스로도 이 작품 이후 독자적 행보를 확고히 펼칠 수 있었다. 소전은 훈민정음처럼 자형이 네모나고 획법이 곧은 고체(古體)나 정갈하고 차분한 필사체인 궁체(宮體) 등 기존의 한글 서체만을 묵수하지 않고 문자성(文字性)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라면 다양한 짜임과 변화무쌍한 조형미를 더하여 한글 서예의 표현적 가능성을 넓혀갔다. 1964년 제13회 국전 출품작 <이인상의 시 푸른 민족>에서 그 완숙한 경지를 볼 수 있다. 이후 노년으로 가면서 더욱 고담(枯淡)해진 소전의 한글 서풍은 청경(淸勁)한 특유의 획을 바탕으로 전아하고 유려한 풍격을 이루어 냈는데, 이는 67세작 <이충무공 한산섬 시> 등에도 잘 나타난다. 이밖에 소전은 문인화에서도 상당한 기량을 보였는데, 특히 추사를 존사하였기에 사란법(寫蘭法)에 따라 묵란화를 즐겼다. 또 자주 그렸던 금강산도는 청초하고 담박한 문기를 드러낸다. 목포나 광주의 여관에서 희작(戱作)했다고 쓴 작품들도 전하는데, 모두 고향을 왕래하며 여기(餘技)로 그린 수작들이다.
|
| |
 |
|
소전 서예의 성과와 의의
‘1974년 10월 하순 소전은 갑자기 누운 뒤 이전의 혈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1976년 정월 부인이 별세했으며, 자신도 1981년 6월 15일 오전 7시 반 서울 서대문구 홍지동의 옥전장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각 신문에서 「서예단(書藝壇)의 금자탑」「소전의 삶과 예술」「한국 현대 서예의 개척자」「독특한 한글 서법을 만든 서예계의 원로」등으로 특별 기사를 내면서 여러 날에 걸쳐 그의 타계를 애도했다. 생전인 1977년에 회고전(6월 4~15일, 동아일보ㆍ동양방송 주최)이 열렸고 ≪소전 손재형서화집≫이란 작품집도 출간되었다. 그가 타계한 해 12월에 유작집 ≪素? 孫在馨≫이 나왔는데, 여기에 실린 동갑나기 노산 이은상의 만사(輓詞) 12수 가운데 마지막 2수에는 소전 서예의 성과가 잘 나타나 있다. 전예(篆隸)와 해행초(楷行草)에 두루 능한 그 솜씨로 점과 획 새 법(法) 내어 한글 서체 창안하니 소전은 그것 하나로도 역사의 인물이 되었네 겨레의 해방과 함께 새로 출발한 우리 서법(書法) 고전의 법칙 위에 새 시대 예술성 살려 서예(書藝)란 새 이름 지은 이가 바로 소전(素篆)이었네 그가 남긴 비문으로 1952년 진해 <이충무공동상 명문>, 1954년 노량진 <사육신묘비문>, 1959년 <의암손병희선생 묘비문>, 1961년 광주공원 <안중근의사 숭모비문>, 1968년 서울 남산 <반공청년운동 기념비문> 등이 있다. 또 편액으로 1962년 수덕사 일주문을 비롯, 1967년 육군사관학교 사열대의 <화랑대>, 1970년 밀양 아랑사의 <정순문(貞純門)>, 1974년 불국사의 <관음전> 등이 있다. 그가 출생한 지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3년 5월 31일 소전미술관이 진도읍에 문을 열었다. 옛 문화예술회관을 개조한 이곳에는 유족이 기증한 소전의 서화 작품과 당대 서화가들이 소전에게 준 작품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소전 손재형은 20세기 서예에서 뚜렷한 성과를 이루었기에 누구보다도 한국 근대 서예사에 찬란한 빛으로 우뚝 설 것이다. 특히 한글의 아름다움을 서예로 발양하는 등 한글 서예에 현대적 감각의 풍부한 조형언어를 부여한 점이 그렇다. 끝으로 수덕사에서 후배에게 설명하지 못했던 <동방제일선원 편액>을 이제야 전하려 한다. 그의 60세 때 작품으로 금문의 고졸한 상형성과 전서의 정갈한 획을 혼융했다. 한자의 조자(造字) 원리인 육서(六書)로 형용하고 이를 시조가락에 얹었다. 이는 소전의 글씨에 대한 필자의 소견이기도 하다.
「소전 선생의 ‘동방제일선원’ 편액을 우러르며」 ‘東’ 자는 상형(象形)으로 자루 끝 동여맨 듯 ‘方’ 자도 상형이니 갈라진 쟁기 모양 ‘第’ 자는 형성(形聲)인데 견실한 결구미(結構美)요 ‘一’ 자는 지사(指事)인데 간결한 선조미(線條美)라 ‘禪’ 자는 형성이니 졸박과 탈속이며 ‘院’ 자도 형성이지만 좌부방이 기이하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