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13. 월요일
정우성
|
나는 아빠다
제2부
아이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
누가 우리 아이들을 쓰다듬어 줄 것인가? 나는 아빠다.
내 게는 사랑하는 두 아이가 있다. 이 아이들은 강아지들이 아니다. 예쁘게 움직이는 인형도 아니다. 평화롭게 잠자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아빠로서 표현하기 힘든 행복감을 경험한다. 떼 묻지 않은 아이들의 언행은 봄꽃보다 환하다. 아빠라면 누구나 이 정도의 감성은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부모를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이 어린 것들도 사람이며, 자기 인생이 있다. 인생의 팔할은 ‘관계’다. 아이에게도 인간관계가 있다. 아이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설움을 안다. 유아우울증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아이들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 아이들도 인간이니까. 아이들도 경쟁하고 비교하며 힘들어 한다.
첫 째를 유치원에 보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유치원에서 1등과 2등의 차이를 배우고 온 것이다. 물론 3등이나 꼴등도 안다. 유치원에서 이러할진대 초중고는 말할 것도 없다. 선생님들은 습관적으로, 은연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1등이 좋은 것이고 1등을 권장한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도 실은 쉬지 않고 일해야만 1등을 한다는 내용이다. 우리 사회가 이렇다. 어쨌든 아이들도 이 사회의 구성원이므로 인내를 배우며, 무엇이든지 잘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그래야만 이 ‘칭찬의 세계’에서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 누구는 칭찬을 받으며 누구는 혼나고 또 누구는 합당한 관심조차 못 받는다.
어린 아들은 꽤 잘 생겼다. 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이 누나에게 제법 스트레스가 된다. 지나가다가 만나는 초면(!)의 어른들은 무심코 동생한테만 예쁘다며 칭찬을 던진다.
“어머나 이 아이 정말 귀엽다. 아이고 저 눈빛 봐.”
아 빠는 잽싸게 딸의 눈치를 살핀다. 한두 번 정도, 그러니까 이런 일이 우연히 벌어졌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반복되고 쌓이면 정말로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갑자기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예뻐하고 칭찬하는 척 한다. 그때마다 이 어린 누나는 이목을 끌기 위해 그동안 갈고 닦은 여러 가지 표정과 애교로 존재감을 과시한다. ‘칭찬의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한 어린 누나의 싸움이다. 때로는 참지 못하고 폭발하며 크게 울기도 하지만.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것들
여기 일곱 가지 원흉들이 있다.
경쟁, 외로움, 소유욕, 규칙, 무서움, 공부, 그리고 욕망이 그것이다.
과 학적으로 인과관계를 따져 보지는 못했다. 그건 연구실에 있는 사람들이 할 일이고, 나는 단지 아빠일 뿐이다. 그저 우리 아이들을 힘겹게 하는 요인이라며 삿대질을 해대면서 그냥 적어둔 것들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용기가 없어서 못하지만, 혼자 있을 때에는 욕하기도 하고 허공에 대고 또 삿대질을 하기도 한다. 요컨대 순위싸움을 해야 한다거나 칭찬을 받기 위해서 이겨야 한다는 경쟁 원흉, 정말 사랑받고 있는 게 맞냐는 외로움 원흉, 갖고 싶고 독차지하고 싶다는 소유욕 원흉, 지킬 게 많아서 힘들다는 규칙 원흉, 오들오들 떨게 만드는 무서움 원흉, 너무 어려운 것들을 참고 배워야 한다는 공부 원흉,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욕망 원흉.
이 렇게 말을 해놓고 보니 어른들의 스트레스도 바로 이런 것들에서 비롯된 것 같다. 바로 그렇다. 우린 모두 인간이니까.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사람이란 점에서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것들은 모조리 없앨 수가 없다. 우리는 성인이 아니니까. 사회생활을 하고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한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그냥 이런 것들과 익숙해지고 어울려서 사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빠다. 좀 덜어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것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해진 아이들을 위로해 줄 수는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말한다.
“부모가 아이들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 스스로 이겨내야지.”
맞 는 말이다. 적어도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이를테면 아이에게 ‘자존감’이라는 것이 있어서 스스로 스트레스와 우울함을 치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아이의 자존감은 참 중요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자존감도 위로를 받아야 생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엄마 뱃속에서 자존감을 먹는다거나, 초유에 자존감이 있다거나 혹은 자존감 DNA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이 과학적으로 정말 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소할 것이다. 사는 데 필요한 자존감이 100평이라면 태생적으로 받는 자존감은 기껏해야 1평도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존감은 위로를 먹고 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프면 약을 줘야지 ‘운동장 한 바퀴 돌고 와!’라고 말해 놓고는 ‘자존감이 커졌니?’라고 말한다면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부모의 도리가 아니다. 물론 선생의 도리도 아니지만.
아 이에게도 사회가 있고, 사회생활이 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역시 사회생활을 한다. 보육원이나 유치원에 가지 않고 엄마랑 하루를 보내는 아이의 경우에도 엄마랑 사회생활을 하는 셈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자기 나름의 사회생활을 한다. 모름지기 대인관계는 언제나 어디서든 힘이 드는 법이다. 화려하고 풍부한 언어를 사용하는 어른들도 그러할 텐데, 아직 자기 표현조차 힘겨워하는 아이들은 오죽하겠나. 아이에게는 정말로 위로가 필요하다.
물 론 우리 아빠도 위로가 필요하다. 나도 위로를 받고 싶다. 모름지기 어리나 젊거나 늙거나 사는 건 쉽지 않다. 그냥 시간을 죽이면서 사는 거야 대수롭지 않은데 이게 정말 잘 사는 인생인지 생각하다 보면 괜히 우울한 기분에 젖기 마련이다. 경제활동이 쉽지 않고 가장인데 온전한 자리를 못 잡고 있고, 게다가 경기도 안 좋고 마땅한 거처를 마련하는 일도 힘에 부치며, 또 희망이 있기는 한 것인지 회의감에 물들 때도 있다. 이럴 때면 술이나 한 잔 들이키면서 허튼소리를 내뱉고 싶어진다.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누구에게나 인지상정이다. 때로는 서럽고 한탄하면서 남편이라는 짐을, 아빠라는 짐을 내려 놓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이 시대의 모든 아빠는 위로가 필요하다.
그 런데 신기한 사실은 아이들을 위로하다 보면 아이들에게 위로를 받는다는 점이다. 정말이다. 술을 좋아하는 아빠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소주 한 잔 보다 더 큰 위로를 받는다. 속는 셈 치고 믿기를 바란다. 내가 위로를 받기 위해서라도 아이들을 위로해 보자. 아빠의 지혜인지, 아이들의 지혜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아빠가 아이들을 위로해주다 보면 자기 스트레스도 상당히 치유가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크고 따뜻하게 안아 줄 때, 실은 아이들이 아빠를 따뜻하고 깊숙히 안아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어른들을 치유하며, 그런 까닭에 아이들은 유력한 노벨평화상 후보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위로가 필요하다.
위로는 텔레파시로 하는 게 아니다
아 이들은 훈육의 대상이기 이전에 위로의 대상이다. 그런데 위로는 텔레파시로 하는 게 아니다. 텔레파시로 위로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텔레파시로 아이들을 위로하고, 텔레파시로 사랑을 나누며, 심지어 투표도 텔레파시로 하고 비즈니스도 텔레파시로 하는 것이다. 비판도 논쟁도 섹스도 텔레파시로 하는 것은 어떨까? 텔레파시로 신과 대화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 그래 사실 텔레파시는 신과 대화할 때 쓰는 것이다. 그게 주 목적이다. 텔레파시로 신과 아이들의 환상적인 만남을 주선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꿈 속에서 하자. 위로는 현실 속에서 하자.
언어를 쓰는 것. 텔레파시보다 더 환상적인(-말놀이가 얼마나 환상적인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연이어 이야기할 작정이다), 언어를 쓰자. 위로할 때에는 언어를 쓰자. 위로는 곧 표현이 기 때문이다. 말을 사용하든 몸의 언어를 쓰든 표정을 사용하든 어떻든 표현을 해야 한다. 애들이 천재도 아니고 신도 아닌데 어찌 표현하지 않는 위로를 알 수 있겠나. 표현을 해야만 위로하는 마음이 전달된다는 상식을 존중한다. 표현을 하자. 아이들이 그렇게 귀여움을 떨며 어른들을 위로해 줬건만 어른들이 그 대가를 주지 않는다면, 이건 반칙이 아닌가.
물 론 우리 어른들은 아이가 삐치거나 울 때 달래준다. 우리 어른들도 눈치가 빠르다. 아이들이 신호를 주면 잽싸게 반응할 정도의 눈치는 있다. 아이들은 스위치를 누른다. “저 좀 안아주세요, ‘힘들다’라는 뜻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기분이 엉망이거든요.”라고 말하는 스위치다. 그러면 우리는 관심을 보인다. 그것이 적극적인 관심이든 소소한 관심이든 그렇다. 이 정도 프로세스는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면 스위치를 누를 수도 신호를 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 부모도 해방이다. 그렇기 때문에 낮이나 저녁 시간에, 그러니까 ‘환한 세상’에서 아이를 달래주게 된다. 맞는 말이다.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좀 모자란 생각이다. 위로는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지만, 모든 표현이 다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서운 위로들
물론 아이를 잘 달래줄 줄 아는 것만으로도 참 좋은 부모다.
두 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다. 어떤 부모는 무섭게 혼을 내기도 한다. 엄하게 키워야 한다는 나름의 이유를 내세우지만 사실 귀찮거나 짜증나서 그러기도 한다. 나도 가끔 어떤 일에 정신을 팔고 집중하고 있는 순간이 있다. 혹은 아내랑 싸워서 감정이 까칠까칠해 질 때도 있다. 그 때는 괜한 일로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정말로 용서해 주길 바란다. 아이들도 ‘아빠라는 현상’을 잘 이해해 주기 때문에 나는 여러 번 사면을 받았다. 아빠가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느 정도 귀엽게 봐 줄 수 있다. 뭐 그런 거지 하고 말이다.
하 지만 위로를 한답시고 아이를 더 보채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이것을 좀 무섭게 느낀다. 이를테면 아이들에게 논리적인 언어로 꼬치꼬치 훈육하는 모습이다. 이성적인 언어로 한참이나 공을 들이면서 납득시키고 설명해주는 것이다. 어찌보면 아이들과 공평한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부모들을 가까이서 보노라면 자기가 합리적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대화를 통한 양육을 하고 있다고 대단히 잘난 것처럼 ‘착각’을 한다. 자초지종과 논리근거와 기승전결에 입각한 부모의 이야기는 왠지 아이들(나이에 따라 다소 다르겠지만)을 코너에 모는 공격처럼 느껴진다. 이건 발가락 사이를 무는 모기보다 더 나쁘다.
사 실 어른들도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기 어렵지 않은가. 이를테면 미성숙한 어른이 아이들을 ‘이성적으로’ 가르치려는 모습을 보면 좀 가엽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미성숙한 나는 함부로 이성적인 접근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애들이 이성적으로 성장함에 따라서 아빠인 나도 성장할 것이고 또 그때 가서 더 깊고 높은 수준의 대화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인간은 본디 생각하는 이성도 있지만 느끼는 감성도 있고, 감성을 어루만져야 할 위로가 있는가 하면 지식을 요구하는 위로도 있는 법이다. 합리성에 기반한 대화식 양육이 성공하려면 부모가 그런 정도의 지적 능력이 있어야 하고, 열린 사고를 가져야 하며, 권위적이지 않아야 하고,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소통 능력이 있어야 하는 데다가, 편견도 없어야 하고 감정의 흐트럼도 없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다 가지고 있어도 아이들이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안 되면 허사다. 무엇보다 따분한 양육 방식이며 효과도 없다. 추천하지 않는다. 이런 부모들이 있다면 적극 말리고 싶다.
어 려서부터 지나치게 이건 이러하므로 이러하고 저건 저러하므로 저러하다는 식의 가르침은, 첫째 애들이 머리가 크면 부모를 무시할 가능성이 농후다는 것, 둘째 그렇게 하다보면 아이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일일이 답하기가 버겁다는 점,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그런 것은 바깥 세상(학교)에서도 충분히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내 아이들을 안아주고 두 귀로 들어주고 또 엉터리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아빠는 엉터리다. 하지만 엉터리가 진지한 표정을 짓고 또 웃고 그러면 아이들은 위로를 받는다. 아이들은 우스꽝스러운 것을, 알고서도 넘어지는 어른들을 좋아한다.
한편 나는 “네가 최선을 다했으면 좋다”라는 식의 위로의 표현을 싫어한다. 그건 위로가 아니다. 뭐랄까, 발가락 사이 두 군데를 문 모기보다 더 나쁘다.
사 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른들한테도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최선을 다하는 게 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표현을 ‘아이들에게’ 습관적으로 쓴다. 마음씨 좋고 교양있는 부모가 (성적 때문이든 기예 때문이든) 낙담한 아이에게,
“최선을 다했니? 그렇지 않았으면 더 노력하고, 그랬다면 괜찮아.”
라 고 말하는 건 정말 예쁘지 않다. 그 문장 자체가 아이들 등에 태엽을 감는 의미다. 나는 아빠다. 도저히 그런 표현은 못 쓰겠다. 그냥 안아주고, 만족해 보고, 함께 욕도 해 보고, 화풀이도 하고 그러면 안 되나? 만사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성실히 하면 그만이고, 보람을 느끼면 좋고, 보람을 느끼지 못하면 함께 찾아보고, 학교에서 배운 인내의 미덕에 대해 한번 더 같이 생각해 보는 정도라면 좋겠다.
위로가 빛을 발하는 시간
낮 에는 우리 모두 바쁘다. 어른들의 머릿속은 정신이 없다. 돈을 버는 일이나 집안 챙기는 일, 혹은 계획을 짜내는 일 때문에 어른들 머릿속은 바쁘거나 혹은 멍하다. 그래서 불이 켜진 상황에서는 아이에게 위로를 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아빠는 없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아이들도 일이 있다. 낮은 아이들에게도 일터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모든 배움터는 고된 현장이니까. 요컨대 아이들은 끊임 없이 주위를 살피고 눈치를 보는데, 이게 바로 아이들의 노동이자 일이란다. 이것은 내가 아이들을 살피고 눈치를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아이들의 눈동자는 주위를 계속 관찰한다. 또 어떤 아이는 물건 때문에 울기도 한다. 소유를 해야 한단 말이다. 엉망진창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하 지만 불이 꺼져 있으면 괜찮다. 이것은 내가 앞선 인류에게 받은 지혜다. 그땐 전기가 없었다. 어둠이 찾아오면 저 강력했던 감각기관이 제 기능을 상실한다. 주위를 살피기 어렵고, 더 이상 잘 보이지 않게 되면 아이들도 노동의 수고로움을 내려놓을 수 있다. 휴식의 시간이며 위로가 필요하다. 불이 꺼져 있으면 우선 소유가 사라진다. 경쟁자도 없다.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되고 공부할 것도 없으며, 다급히 욕구를 채워야 할 것도 사라진다. 주위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 비로소 아이는 자기 일을 내려놓는다. 불이 꺼져 있고 잠자리에 들려고 한다. 이제 몰입의 시간이다. 바로 이 시간이야말로 위로가 꽃피는 가장 좋은 시간이며, 치유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낮이 인류가 노동을 하는 시간이었다면, 밤은 피곤에 지친 인류를 위로해 준다. 다시 말하지만, 수천 년전부터 인류는 다 그랬다. 현대인들은 밤의 가치를 잘 몰라준다. 불을 끄고 아이들을 위로하자. 어떻게 위로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다음 주에 이야기해야겠다.
정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