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상으로 본 나씨의 특성
나씨는 우리나라 249 여 성씨 가운데서 43번째가 되며, 그 중에서 우리 금성(錦城) 나씨의 시조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나총례(羅聰禮, 처음 이름은 宗禮)는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신라를 쳐서 후삼국을 통일하려 할 때 부패와 실정으로 망해가는 신라를 떠나 새 나라를 건국하려는 왕건을 도와 삼한일등공신(三韓一等功臣)이 됨으로 왕으로부터 처음으로 성(姓)을 하사받을 때, 신라에서 온 사람이란 뜻으로 ‘나’(羅)성을 받은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에게 이름만 있고 성이 없었는데,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왕이 성을 하사(下賜)하는 일이 있었으며, 성을 가지는 것이 일반화된 것은 고려 중기 이후가 아닌가 생각된다.
나총례는 당시 금성(지금의 나주)의 태수(太守: 한 고을의 으뜸 벼슬)로서 그 후 고려가 건국되어 벽상공신(壁上功臣:신하 중 최고의 벼슬과 명예로서 대전의 벽에 크게 영정을 걸어놓음)의 영예를 받았다. 금성나씨 대동보(大同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정종(定宗) 때에 공신의 호를 받고 삼중대광(三重大匡, 고려 때 으뜸인 정일품의 문관 품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조선 때 정일품의 문무관 품계)로 금성부원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직속막료(幕僚)로서 거북선, 쟁선(鎗船) 해소선(海鯂船) 등을 만들어 그 공으로 삼지창(三枝槍)과 청룡도(靑龍刀)를 하사받은 나대용(羅大用) 장군도 그 후손이다. 임진왜란 때 육전에서는 크게 패한 우리나라가 해전에서 거북선으로 대승을 거둔 것은, 전략의 명장(名將)인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요, 또한 조선(造船)의 명장(名匠)인 나대용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주시 문평면 대도리 소사 마을에는 나대용 장군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그의 생가도 보존되어 있다)
나씨의 한 종파인 한산파(韓山派)의 족보에 의하면, 나씨의 원시조(元始祖)는 정승 벼슬을 한 업(業)으로서, 나총례는 그의 4대손이며, 한편 경주 최씨 족보에 따르면, 나 업(羅 業)의 딸이 최치원(崔致遠)의 아내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원문: “慶州崔氏譜에 文昌候 崔致遠 配羅氏는 政丞 業 의 女라 하였다). 최치원(호: 孤雲)은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7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있었던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수재이다. 신라로 돌아왔으나 난세를 만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해인사 백운동(白雲洞) 계곡(溪谷)에 고운정(孤雲亭)을 지어 거기에서 풍월(風月)을 읊다가 여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 후 누구도 그의 주검이나 무덤을 본 사람이 없어, 그는 죽지 않고 신선(神仙)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의 유필(遺筆)로는 桂苑筆耕 20권 등의 작품이 있다.
우리 나씨는 우리나라 249 성씨 중에서 수적으로 김, 이, 박, 최, 정, 강, 조씨 등처럼 큰 성씨는 아니나, 기(奇), 호(扈), 경(慶), 모(牟), 독고(獨孤) 등 성씨처럼 아주 희성도 아니다.우리 조상이 조선왕조 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낸 모습은 여러 벼슬을 한 것 외에 애국자, 문학가와 충신 효자 열녀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족보에서 그것을 드러내어 자찬을 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본의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우리 조상들 중 우리나라 역사에서 누구나 아는 몇 어른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나라에 충성을 하신 어른들과 우리나라 문화예술에 특이한 공헌을 하신 저명인사들이었다는 것을 지적해 두고 싶을 뿐이다.
우리 나씨의 세보 가운데서 후손들에게 훌륭한 귀감을 남기신 어른들을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몇 분만을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애국자 독립운동가로서
나월환(羅月煥) ?-1942. 독립운동가. 1941년 중국 서안(西安)에서 한국 광복군 제5지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암살되었다.
나 철(羅 喆) 1863-1916.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매국(賣國) 대신들을 암살하려다가 발각되어 유배되었고, 1909년에 천도교를 창시, 동년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나용환(羅龍煥) 1863-1936. 독립운동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 2년 형을 받고 복역.
나인협(羅仁協) 1871-1851. 독립운동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 2년 형을 받고 복역. 민족대표 33인 중 2인이 나씨.
나 석주(羅錫疇) 1892-1926. 독립운동가. 1910년 한일 합방 후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구 선생의 의열단(義烈團)에 입단. 1925년 12월 국내에 잠입,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동양척식회사로 가서 일본인 몇 사람을 사살한 후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가 자결, 당시 나이가 34세.
둘째 문화예술인으로서
나혜석(羅惠錫) 1896-1949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우리나라 근대사의 첫 신여성. 일본 동경여자미술학교 유화과(油畵科)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유학. 1918년 ‘경희’ ‘정순’ 등 단편소설 발표. 제1-5회 조선미술전 입선 및 특선. 1931년 동경 제국 미술전 입선.
나도향(羅稻香) 1902-1926. 문학가. 본명은 慶孫. 1920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幻戱’를 연재하여 문단에 등단. 1923년 이상화 박종화 등과 백조(白潮) 동인으로 낭만주의운동 전개. 작품으로 단편소설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이’ ‘여이발사’ ‘17원 50전’ ‘행랑자식’ 등 30 여 편이 있다.
나운규(羅雲奎) 1902-1937) 영화인. 1923년 신극단 예림회의 배우로 북간도 순회공연. 1924년 영화 ‘운영전’에 출연, 영화계 데뷔. 1926년 영화 ‘아리랑’ 원작 감독 주연. 총 27편의 영화에서 주연, 감독, 제작을 맡음.
나운영(羅運榮) 1922-1993. 음악가. 1974년 미국 포틀랜드대학에서 명예인문학박사. 1955-62년 연세대 교수. 1973년 동 음악대학장. 1975-84년 찬송가위원회 음악위원장. 성가 독창곡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등 다수.